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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맬콤 (Malcolm Arnold 1921~)
작곡가이기도 하며, 영국의 노샘프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립음악원(RCM)에서 작곡과 트럼펫을 배웠다. 런던 필하모니의 트럼펫 주자가 되었고(1940∼1942), BBC 교향악단(1945)을 거쳐 다시 런던 필하모니에 되돌아와 수석 트럼펫 주자를 맡았다(1946∼1948). 1948년 멘델스존 장학금을 받아 1년간 이탈리아에 체재한 다음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지휘도 하지만 작곡이 본업이어서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7곡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각 장르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풍은 선율이 풍부하고 친근감을 준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전장에 거는 다리(콰이강의 다리)'(1957)의 영화 음악을 작곡해 오스카 상을 받았으며 그 주제곡인 [콰이강의 행진곡]은 대히트를 했다. 그가 지휘하고 있는 레코드는 자작인 [교향곡 제5번](EMI) 등이 있는 정도이다.
로장탈, 마누엘 (Manuel Rosenthal 1904~)
작곡가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다. 1928년에 부뤼망탈 상을 받았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라무뢰 관현악단을 거쳐 파리 교향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프랑스 방송관현악단의 음악 감독 겸 지휘자가 되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 시애틀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동안 그는 작곡가로서도 이름이 알려졌는데, 오페라에는 1막짜리 희극 [비단의 광택](1930)과 [검은 암탉](1937), 1927년의 피아노곡 [세레나데]와 그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1933년의 [레 프티 메체]를 라무뢰와 콜론에서 초연을 하였고, 또 [잔다르크]는 1938년 런던에서 초연하여 이 모두가 호평을 받았다. 또 발레에는 1936년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한 2막짜리 [헛된 입마춤]이 걸작으로 높은 평가를 얻었다. 전체적으로 샤브리에와 라벨의 전통에 입각한 작품으로서, 선율미가 넘쳐 흐르고 활기에 찬 명장적인 음악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펜바흐의 히트 멜로디를 편곡하여 발레곡으로 만든 [파리의 기쁨](1938)을 통해 겨우 알려지고 있을 뿐이며, 그의 음악의 특질도 자신이 연주한 음반(에인절)을 통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안드레에, 마르크 (Marc Andreae 1939~)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40여년간 하였고, LP 초기에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녹음하여 주목을 받은 폴크마르 안드레에는 그의 조부였는데, 그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그 후 파리와 로마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운 다음, 1967년부터 페터 마크 아래서 어시스턴트로 수학하였다. 1969년부터 스위스의 루가노 방송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는 한편, 뮌헨을 비롯한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각지에서 객원 활동도 하고 있다. 레코드로는 일반적인 라벨의 편곡판이 아닌 림스키코르사코프 편곡으로 된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비롯하여, 요아힘이 [4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를 편곡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g장조], 슈만의 [교향곡 G단조], 프레이저와 협연한 슈만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알레그로 아파시오나토](이상 모두 바스프) 등으로 다른 지휘자가 손대지 않은 상당히 독특한 레퍼토리만을 녹음했지만 현재는 거의 절판되어 있다.
쿠로, 마르셀 (Marcel Couraud 1912~)
프랑스의 서부 리모주에서 태어났다. 앙드레 마르셀을 사사하여 오르간을 배우고, 이어서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1939년까지 화성학, 대위법, 푸가의 클래스에 재적하여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샤를 뮌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45년 프랑스 국립방송에서 하였으며, 같은 해 마르셀 쿠로 성악 앙상블을 조직하고 합창 지휘자로서의 활동의 제일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이 앙상블을 지휘하여 많은 레코드 녹음을 하였지만 1954년에 해산되었다. 그후 쿠로는 합창, 오라토리오 등의 지휘에 전념하였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자주 객원 지휘자로서 영입되었다. 1967년 프랑스 국립방송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대합창, 실내합창, 솔리스트 앙상블 등 다채로운 편성에 의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12인의 솔리스트의 앙상블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전위적인 작품을 다루는 경우도 많았다. 크세나키스의 [밤]은 쿠로가 지휘하는 솔리스트의 앙상블을 위하여 작곡된 것이다. 쿠로는 레퍼토리의 풍부함, 테크닉과 음악성에 의해 오늘날 프랑스의 대표적 합창 지휘자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그가 편찬한 {합창 예술의 즐거움}은 프랑스의 합창 애호가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메시앙의 [다섯 개의 르샹], 크세나키스의 [밤], 펜데레츠키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모은 음반(프랑스 에라토)이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포르베르크, 마리누스 (Marinus Voorberg 1920~)
프크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지휘자이다. 헤이그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우고 1940년에 졸업하였다. 10세 때에 사적으로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고, 유럽, 이스라엘 등에도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이탈리아에서 합창 지휘를 배웠다. 1952년에 NCRV 보컬 앙상블의 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동시에 암스테르담 실내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되었는데, 이 두 앙상블을 이끌고(또는 객원 지휘자로서) 각지의 음악제에 등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포르베르크는 특히 NCRV 보컬 앙상블을 지휘한 각 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앙상블은 당초 르네상스 중심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후 현대의 성악 작품의 연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에 크르제녜크의 [예언자 예레미아의 애가]를 상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그 이래 많은 작품을 소개하였고, 또 많은 작곡가가 이 단체를 위해 신작을 작곡했다. 포르베르크는 1975년에 슈투트가르트 방송합창단의 지휘자도 되었다. 대표 음반으로는 1970년 에디슨 상을 받게 된 명연주인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걸, 레스폰소리움집](필립스)을 들 수 있다.
로시, 마리오 (Mario Rossi 1902~)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작곡을 레스피기에게, 지휘법을 세타치올리에게 배웠다. 1923년 노동자에 의한 아마추어 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고, 1926년 로마 아우구스테오 관현악단에서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를 대신해서 데뷔하였는데, 그 이래 1936년까지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지냈다. 그동안 모교의 지휘과 교수로도 재직했으며, 1936년부터 1944년까지 피렌체 5월 음악제의 지휘자로 활약했다. 1945년부터 1969년까지 토리노의 이탈리아 방송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이 오케스트라를 제1급 앙상블로 육성했다. 현재 로시는 프리랜서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 게스트로서 자주 초빙되고있다. 그는 또 1953년 현대 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공로로 쇤베르크 상을 받았다. 로시는 LP 초기부터 바로크 음악에서 파퓰러 명곡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레퍼토리를 밴거드에서 취입했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차데] 등은 색채가 풍부한 호연이다.
얀손스, 마리스 (Maris Jansons 1943~)
소련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에서 명지휘자 아르비드 얀손스를 부친으로 하여 태어났다.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1956년 일가가 레닌그라드로 옮겼기 때문에 그곳의 음악원 부속 음악학교에 들어가 V.시프린의 합창 지휘반에서 배웠다. 그 후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진학하여 N.라비노비치의 지휘과의 교실에서 공부하였다. 1969년에 졸업하였는데 계속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빈 음악 아카데미에도 유학하여 스바로프스키와 에스테르라이허를 사사하였다.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가르침도 받았다. 1971년의 제2회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나가 2위로 입상하였다. 같은 해 레닌그라드 필하모니를 지휘함으로써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하였고, 므라빈스키로 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얀손스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도 역임했고, 1988년 현재는 오슬로 필하모니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마리스 얀손스에 대한 평가는 아직 확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 본인은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타네예프, 스트라빈스키 등의 이른바 러시아 음악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 현대 소련의 작품을 많이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레코드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크레메르, 멜로디아) 한 장 밖에 없어 무어라 평가 할 수 없다. 사회주의 권에서 이름 높은 부친의 명성에 대항하여 어떻게 커갈 것인가가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콩스탕, 마리우스 (Marius Constant 1925~)
작곡가이기도 하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부쿠레슈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고, 1944년 에네스쿠 상을 수상하고 졸업했다. 그 후 파리 음악원에서 메시앙, 오반, 불랑제를 사사하였고 악곡 분석과 작곡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는데, 동시에 에콜 노르말에서 지휘도 공부했다. 1952년 콩스탕은 발레곡 [플루트 주자]로 로마 상을 수상하여 인정받았다. 프랑스 국립방송국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의 멤버가 되고, 또 VHF 네트워크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동시에 작곡가로서도 베자르와 프티의 발레단을 위해 의욕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작곡가로서의 콩스탕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것은 1958년 번스타인에 의해 초연된 [오케스트라를 위한 24개의 프렐류드]였다. 그 후 차례로 작품을 발표하여 불레즈와 크세나키스와 함께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활약하고 있고, 그 작품은 이제까지 에라토 등에 상당히 녹음되었다. 콩스탕은 지휘자로서도 1963년에 현대 음악의 연주를 목적으로 한 아르스 노바 앙상블을 결성하여 감독을 하였는데, 이 단체는 아르스 노바 금관 5중주단과 타악기 주자인 실비오 괄다가 있는 현대 음악의 대표적인 단체의 하나이다. 또 그는 자주 각지의 음악제와 오케스트라도 객원 지휘하였으며, 드뷔시 이후의 프랑스 음악의 뛰어난 지휘자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파리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도 하였고, 1978년부터는 파리 음악원의 관현악법과 악기법의 교수로 있다.
슈테파니, 마르틴 (Martin Stphani 1915~)
아이스레벤(지금 동독의 할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인 헤르만 슈테파니(1877∼1960).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배웠으며,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1948년 마르부르크 칸토라이를 창설하여 지휘자가 되었다.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부퍼탈 연주 협회의 지휘자(1959년부터 음악 총감독)를 역임한 이외에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체칠리에 음악인 동우회의 지휘자를 겸하기도 했다. 작곡가이기도 한 슈테파니는 일찍이 교육자로서 활약했는데,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베르기슈 주립 음악원의 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는 도르트문트에 있는 북서독일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도 했다(1958년부터 교수, 1959년부터 원장). 또한 1959년부터 빌레펠트 음악인 협회의 지휘자를 지냈고, 지금은 베스트팔렌 국립 리페 음악대학의 학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력에 비추어 본다면 지휘자로서의 슈테파니는 종교 음악과 합창을 바탕으로 빌레펠트 음악인 협회 합창단 이외에 브루크너와 베르디의 [테 테움](텔레푼켄)에서 견실한 지휘를 잘 살리고 있다. 또한 힌데미트에 관한 저서도 있다.
투르노프스키, 마르틴 (Martin Turnovsk 1928~)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1948년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하여 안체를과 로베르트 브로크를 사사했다. 1952년 졸업과 동시에 프라하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데뷔하였다. 병역에 복무한 다음 1958년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60년에 브르노 국립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으며, 1963년부터 1967년까지 프르제니(피르젠)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는 1시즌만 동독의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의 자리를 맡았다. 1968년 오스트리아에 이주하여 서방측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 활동을 개시하였다. 런던 교향악단과 로열 필하모니와 함께 연주 여행에 떠나기도 했는데, 1975년부터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다. 투르노프스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음악, 특히 마르티누의 곡 해석에 대해서는 정평이 있는데 독일의 고전파에서 낭만파, 더욱이 프랑스 근대 음악 등도 자주 연주하고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 [놀람] [시계](수프라폰)에 있어서는 정형화된 단정한 마무리를 하여 바람직한 레코드라 할 만하다.
프레차, 마시모 (Massimo Freccia 1906~)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피렌체 음악원에서 작곡과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 후 빈에 나가 명지휘자 프란츠 샬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파리, 빈, 부다페스트, 바르샤바 등 동서유럽 각지에서 지휘자로서의 캐리어를 쌓은 뒤, 193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헝가리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1938년에는 뉴욕 스타디움 콘서트 관현악단에서 데뷔했다. 대전 후는 1960년대에 로마의 이탈리아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를 지낸 것 외에 유럽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레코드는 수년 전까지 [서곡·간주곡집](RCA)과, 막상스 라리외와 협연한 C.P.E.바흐의 [플루트 협주곡] 등(벨라폰)이 있었지만 폐반되었다. 현재는 로마필을 지휘한 [천사의 꿈] [도나우 강의 잔물결]외에 [파퓰러 명곡집](RCA) 1매뿐이고 음악성이 약간 부족한 단조로운 연주를 했다.
아브라바넬, 모리스 (Maurice Abravanel )
그리스의 사로니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의 지휘자이다. 스위스의 로잔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독일에서는 쿠르트 바일에게 배웠다. 1932년 파리에서 데뷔하였고, 이어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파리 오페라 극장, 로마 오페라 극장 등의 지휘자를 거친 다음,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주로 발레와 프랑스 오페라를 지휘한 바 있다. 그 밖에 객원으로는 시카고 시빅 오페라, 멕시코 국립 오페라를 비롯하여 각지의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를 지휘하였다. 발란신의 발레단이나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에서 지휘를 한 적도 있다. 1947년부터 솔트레이크시티의 유타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의 지휘는 평이하고 명석하지만 통속에 흐르는 일이 없고, 특히 개성적인 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색채감으로 청중의 흥미를 끈다. 아마도 그러한 중용(중도)을 얻은 건강한 음악성이 미국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아브라바넬은 레코드가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으나 유타 교향악단과 함께 한 녹음은 매우 그 수가 많다. 그는 국제 말러 협회의 명예 회원이며, 말러의 [교향곡]전곡(밴거드)이 나와 있는 외에, 그로페의 모음곡 [그랜드 캐년]과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파리의 미국인](웨스트민스트)가 있다. 또한 그는 현대 작품의 적극적인 소개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장드롱, 모리스 (Maurice Gendron 1920~)
첼로주자도 겸한 장드롱은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태어나 그 곳 음악 학교에서 장 망고를 사사했다. 다시 파리 음악원에서 셰라크 에킹을 사사하였고 1940년에 1등으로 졸업했다. 전쟁 때문에 연주 활동이 방해를 받았으나 전쟁 후에는 재빨리 국제적인 활동을 벌였다. 1947년에는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협주곡]으로 유럽 초연을 런던 필하모니와 가졌는데 그 성과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프랑스의 작곡가 장 프랑세와 한 팀이 되어 많은 연주를 가졌다. 그들 콤비는 오랫동안 불변의 명성을 얻었다. 프라드의 카살스 음악제도 참가, 카살스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했다. 뒤에 카살스의 지휘로 하이든과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을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과 레코드 취입도 했다. 메뉴인 남매(유디와 헤퍼치버)와의 트리오의 연주도 유명하다. 장드롱은 데조르미에르, 셰르헨, 멩겔베르크 등에게서 본격적인 지휘법을 공부한 다음 런던 필하모니, 라무뢰 관현악단, 본머스 교향악단 등과 그 밖의 지휘자를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오랫동안 서독의 자르브뤼켄 음악대학에서 후진들의 지도를 했고, 1970년 토르틀리에의 후임으로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는 등 교육가로서도 활약을 했다. 레코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카살스가 지휘한 LP가 있고, 1965년의 ACC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전곡(모두 필립스)을 비롯, 많은 레코드가 판매되고 있는데 프랑세와 메뉴인 남매와의 공연(필립스, 에인절)과 일본에서 녹음(RCA 빅터)한 것도 있다.
르 루, 모리스 (Maurice Le Roux 1923~)
작곡가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로제 뒤카스와 메시앙에게 작곡을, 루이 푸레스티에에게 지휘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레이보비츠에게 12음 기법을 배웠다. 1947년 『현대 음악 입문』을 저술했고 비평가로서도 데뷔하였다. 또 프랑스 국립방송국의 위지크 콩크레트의 스튜디오에서도 근무하였다. 1952년부터 파리 음악원관현악단,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콜론 관현악단, 벨기에 국립관현악단, 몬트리올 관현악단을 지휘하였다.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현재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의 지휘자를 맡았고, 이 사이에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과 크세나키스의 작품의 첫 디스크를 만들었다(프랑스 IPG). 1969년 이후는 파리 오페라 극장과 관계하고 있다. 그의 지휘는 섬세하면서도 박력있는 매력으로 청중들을 즐겁게 한다. 작곡가로서는 12음 기법의 작곡가로서 알려지는 한편, 영화 '백마' '빨간 풍선'의 음악을 맡는 등 전반적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루돌프, 막스 (Max Rudolf 1902~)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 고등음악원에서 첼로, 피아노, 작곡을 공부했다. 1922년부터 프라이부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의 코치가 되었고, 1927년부터는 다름슈타트의 지휘자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프라하의 도이치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스웨덴에서 스톡홀름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였는데, 시벨리우스와 닐센 등 북유럽 작곡가의 소개에 노력하였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45년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58년부터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이 되어 1969년까지 활동했는데, 우리 나라에는 1966년 내한하여 서울 시민회관에서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루돌프는 1970년 커티스 음악원의 오페라과의 교수가 되었다. 레코드로는 신시내티 교향악단과의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8번] [포스트호른 세레나데], 리치와 협연한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이상 데카) 등이 나와 있다.
쇤헤르, 막스 (Max Sch nherr 1903~)
마르부르크(유고슬라비아 마리보아)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다. 조부와 부친은 군악 대장, 형 빌헬름은 오페라 지휘자인 음악 일가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서 헤르만 프리슈에게 배운 다음, 그라츠 음악원에서 모이신비치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4년부터 그라츠 시립극장의 콘트라바스 주자, 연습 지휘자를 역임하고, 1928년부터 1929년에 걸쳐 그 극장의 연주 여행에서 지휘자로서 성공하였고, 1929년에서 1933년까지 빈의 안 데어 빈 극장과 시립극장, 1933년부터 1938년까지 폴크스오퍼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또 1931년부터 1968년에 은퇴할 때까지 빈 방송국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고, 이 사이의 1930년대에는 빈 교향악단을 수없이 지휘한 외에 1945년에는 빈 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상임을 맡은 한편, 외국에도 자주 초청되어 나가서 활약했다. 작곡가, 학자로서도 알려져 있고 특히 빈의 고전 무곡이나 왈츠의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편곡이나 오케스트레이션, 악부의 교정 등을 지휘자 은퇴 후에도 계속하고 있다. 다방면에 걸친 쇤헤르의 활동에 대하여 1952년에는 교수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1954년에는 [디베르티멘토]의 작곡으로 요세프 마르크스 작곡상을 받았고, 1968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다. 지휘자로서는 빈 왈츠나 무곡집, 오페레타에 정평이 있고, 상당한 수의 녹음을 남기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막심 (Maxsim Shostakovich 1938~)
소련의 대작곡가의 한 사람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지휘자가 되기를 원했던 그는, 중앙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포벤에게 배운 뒤에 지휘과로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과에 입학, 프리엘을 사사했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지휘과로 전향하기로 결심하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N. 라비노비치에게 지휘를 공부하고, 다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우크를 사사했다. 가우크가 사망하자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배웠고 그 뒤에는 마르케비치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1963년에는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부지휘자가 되어 모스크바와 다른 여러 도시에서 활동을 벌였다. 1966년에 전소련 지휘자 콩쿠르에 입상하여 주목을 끌었으며, 그 해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1972년에 아버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5번] [교향곡 제5번]을 초연, 국제적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후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98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부친의 [교향곡 제5번]을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다소 개성이 부족한 편이며 레퍼토리는 쇼스타코비치를 중심으로 한 작품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레코드도 아버지 작품만이 있을 뿐이고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15번]과 발레 음악인 [황금 시대]와 [볼트](멜로디아) 등이 있을 뿐이다.
데이비스, 메레디스 (Meredith Davies 1922~)
영국의 머지사이드 주 바켄헤드에서 태어났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오르간을 배웠다. 헬리퍼드 대성당의 지휘자로 활약했으며, 1954년과 1956년에 로마의 성 체칠리아음악원의 프레비탈리의 지휘 강습회에 참가하였다. 1957년 버밍엄 시립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 준지휘자를 겸하여 1960년까지 재임하였다. 브리튼의 [봄의 교향곡]을 지휘하여 작곡자의 인정을 받아 올드버러 음악제에 초빙되어 [루크리시아의 능욕]과 [한여름 밤의 꿈]을 지휘하였다. 코벤트리 대성당에서 한 [전쟁 레퀴엠]의 세계 초연(1962)에서는 브리튼의 보조 지휘자로서도 협력하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는 잉글리시 오페라 그룹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코벤트가든에서 [피터 그라임즈],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에서 딜리어스의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에트]를 공연하였다. 후자는 후에 데이비스의 지휘에 의하여 세계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에인절)을 하였고, 그 시적인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 그 밖에 딜리어스의 [레퀴엠], 본-월리엄스의 오페라 [바다로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 등의 녹음에 의해 데이비스의 명성은 확립되었다. 밴쿠버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1964년∼1971년), 브리스틀의 BBC 트레이닝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1969년∼1972년)를 역임한 다음, 1972년에 로열 코랄 소사이어티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데이비스는 영국 합창 음악의 전통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1979년 트리니티 칼리지 오브 뮤직(런던)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길렌, 마하엘 (Michael Gielen 1927~)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페라 연출가였으며, 1942년부터 1949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엘빈 로이히터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949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쇤베르크의 피아노 전작품을 연주했으며, 또 이 시의 테아트로콜론의 연습 지휘자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1950년 빈에서 포르나우어를 사사하였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연습 지휘자 및 지휘자(1954년부터)를 맡았다. 1954년 오네게르의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를 통해 데뷔하였는데, 1952년 이후 방송과 연주회에서 자작품을 포함하여 특히 현대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하게 되었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는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 극장의 제1지휘자가 되었으며, 그 후 쾰른의 오페라 극장으로 옮겼다. 1969년에는 벨기에의 국립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 1973년부터는 네덜란드 오페라 극장의 제1지휘자 등을 역임하였고, 1977년 프랑크푸르트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동시에 남서독일방송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여 1988년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는 BBC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도 취임하였다. 길렌은 수많은 현대 작품을 초연 또는 소개를 하고 있는데, 고전파 작품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스탠다드 넘버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그의 지휘는 정확하고, 토스카니니적이라는 평도 받고 있다. 레코드는 그 수가 적지만 브렌델과 협연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복스)이 있다.
틸슨 - 토머스,마이클 (Michael Tilson - thomas 1944~)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과학자가 되려고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광물학과 생화학을 공부했다. 10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귀로 들은 곡은 피아노로 옮겨 칠 정도의 재능을 보였지만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려고 결심한 것은 18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도중에서 좌절하는 많은 음악가를 보아 온 그는, 만일 20세 때까지 음악가로서의 전망이 서지 않는다면 다시 과학의 길로 돌아서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파아티고르스키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실내악을 배우고, 그 밖에 불레즈와 함께 여러 일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1966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의 [파르지팔]은 코치로서 참가하였으며, 그 밖에 본 공연에서는 글로켄슈필을 담당했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이 소식을 들은 것이 20세의 생일날이었기 때문에 음악가가 되려는 틸슨 - 토머스의 결심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실현되게 되었다. 1968년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을 받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9년에 보스턴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더욱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버팔로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뉴욕 필하모닉의 '영 피플즈콘서트'도 지휘하였다. 1980년 가을에는 2개월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10월에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데뷔하였다. 최초의 레코드는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간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RCA)에서 피아노를 담당한 것인데, 그 후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그라모폰), 영국 실내관현악단과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CBS) 등이 있다. 틸슨 - 토머스는 1988년 현재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코르보, 미셀 (Michel Corboz 1934~)
스위스의 마르센스에서 태어났다. 프리부르의 에콜 노르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53년에 로잔의 노트르담 드 발랑탕 교회의 음악 감독이 되고, 여기서 그는 작은 코러스를 조직하여 무반주 합창의 교회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후 이 합창단에는 기악이 더해져서 후에 로잔 앙상블 폴리포닉으로 발전하였다. 1961년 로잔 성악앙상블을 조직하고 활발한 연주 활동과 함께 레코딩도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리스본의 굴벤키안 협회의 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코르보는 특히 바로크 시대의 합창 작품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몬테베르디의 연주자로서 그 최량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몬테베르디의 대작[윤리적 종교적인 숲]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 오페라 [오르페오], 그리고 팽배한 분량의 [마드리갈레집] 2권과 같은 레코드는 현대적인 날카로운 감각에 가득 차 있다. 몬테베르디는 코르보에 의해 새로운 빛을 얻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명연이었다. 절묘한 밸런스를 가지고 음악에 간직된 갖가지 표정을 현대의 청중에게 조금의 난해성도 없이 가장 알기 쉽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그는 포레의 [레퀴엠]에서 들을 수 있는 바와 같이 투명한 서정에도 극히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는데, 바흐 등의 작품에 따라서는 반면에 구성력의 약함을 보이는 일도 있다. 이 밖에 샤르팡티에의 [테 데움], 가브리엘리의 [사쿠라 심포니아집] 등이 대표적인 음반이다.
플라송, 미셸 (Michel Plasson 1933~)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배우고, 피아노를 라자르 레비에게서, 지휘법을 외젠 비고에게서 배웠다. 1962년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였다. 그 후 샤를 뮌슈의 권유로 미국으로 옮기고 스토코프스키, 번스타인, 라인스도르프 밑에서 연찬을 쌓았다. 1965년 이후 메스(동부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고 프랑스에서의 지위를 굳혔다. 3년 후인 1963년에 툴루즈 시립 오페라 극장(통칭 카피톨 극장)과의 연주 활동도 오페라와 병행하여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1973년 이후 툴루즈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에 취임하였다. 이동안 프랑스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하였고, 또 1974년에는 뉴욕 시티 오페라에 1977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도 등장하고 있다. 또 파리 오페라 극장을 비롯하여 프랑스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의 지휘도 늘어났으며, 수병인 시립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스태프를 인솔하여 엑상 프로방스 음악제에의 등장은 절찬을 받았다. 툴루즈의 오페라와 콘서트 양쪽의 기둥으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88년 현재 툴루즈 카피톨(시립)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있으며 레코드 녹음도 활발하다. 쇼송의 [교향곡], 앙리 소게의 작품집(이상 에인절), 오펜바흐의 [제롤스타인 대공비 전하](CBS)는 앞으로 기대되는 지휘자 플라송의 대표 음반이다.
브레디치아누, 미하이 (Mihai Brediceanu 1920~)
루마니아 브라쇼프 태생이다. 1943년 부쿠레슈티 음악원에 입학하여 M.요라를 사사하여 작곡을 배웠다. 재학중에 에네스쿠 상을 수상하고 처음에는 작곡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3년 부쿠레슈티 국제청년우호축제의 지휘자 콩쿠르에 입상하고 전문 지휘자로 전향했다고 한다. 1959년 부쿠레슈티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리고 1966년까지 지휘 활동을 계속했으며, 그 후에는 다시 작곡 활동과 이론집필 등에 힘을 기울였다. 작품으로는 실내악과 교향 3장 등이 있다. 브레디치아누는 에네스쿠의 오페라 [외디푸스] 전곡을 레코드에 취입했는데(빅터), 현재는 폐반되었다. 오랫동안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휘를 했던 만큼 작품의 매력을 충분히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녹음은 1964년에 했다고 하니 브레디치아누가 지휘 활동을 그만두기 2년전의 기록이 된다.
에르데이, 미클로슈 (Mikl s Erd lyi 1928~)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리스트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페렌치크에게, 작곡을 코카이에게 배웠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재학중인 1947년에 부다페스트의 코미크 오페라에서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을 통해서 였다. 1951년부터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그 이후 이곳을 본거지로 하여 활약하고 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에르데이는 전통적인 레퍼토리 외에 몬테베르디의 [포페아 대관], 새로운 것으로는 오르프의 [현명한 여자] 등을 헝가리에 소개하여 레퍼토리로 정착시켰다. 또 단신 유럽이나 미국에도 자주 객원 지휘하였으며, 1974년에는 베를린필하모니에 초청받아 가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4번]의 베를린 초연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에 리스트 상, 1975년에 코슈트 상 등을 수상하고 있다. 레코드는 바르토크 초기의 작품을 모은 것 한 장밖에 없지만 헝가리에서는 하이든에서 슈베르트에 이르는 빈 고전파의 해석가로서 알려져 있고, 슈베르트에 관한 저서(1963)도 있다.
호르바트, 밀란 (Milan Horvat 1919~)
크로아티아 공화국 유고슬라비아의 파크라츠에서 태어났다. 자그레브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배우고, 자그레브 대학에서 법률 학위도 취득하였다. 1945년 자그레브 방송합창단의 지휘자, 1946년부터 자그레브 필하모니의 지휘자를 맡았고, 1948년 이후 자그레브 음악원의 지휘과의 교수도 겸하였다. 195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더블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고, 1958년 자그레브 필에 복귀하여 그 수석 지휘자 겸 자그레브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196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빈에 옮겨 살고, 그 후에 유럽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계속하고 있다. 레코드는 자그레브 필하모니를 지휘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9번] [피아노협주곡 제1번](필립스), 오짐을 독주자로 하는 베토벤의[바이올린 협주곡](폰타나)과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외르크 데무스와 협연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피아노 협주곡 제26번](웨스트민스트) 등이 있다.
문출링거, 밀란 (Milan Munclinger 1923~)
플루트 주자이기도 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프라하 음악원에서 배우고, 이어 1950년까지 음악 예술 아카데미에서 도레질, 탈리히와 그 밖의 스승에게서 지휘를, K.야나체크와 크레이치에게는 작곡을 배웠다. 그 후 프라하 대학에서 음악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및 브레스라우(현재 브로출라프)의 오페라 극장의 플루트 주자로 활동했으며, 1951년 아르스 레디비바 합주단을 결성하여 그 리더로서 활약하였다. 이 앙상블은 바로크에서 고전파에 이르는 악기 합주단을 레퍼토리로 하고 있으며, 그 시대의 음악의 연구에도 뛰어났다. 많은 악보를 교정·출판하였고, 더욱이 앙상블을 중심으로 하여 녹음도 하였다. 그는 더욱 플루트 주자 및 오케스트라지휘자로서도 유명하며 유럽 각지에 객원 연주를 하고 있다. 레코드는 아르스 레디비바 합주단의 멤버, 또는 지휘자로서의 것이 대부분이며 레퍼토리도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레코드는 헨델의 [수상의 음악]과 바흐의[푸가의 기법](이상 수프라폰]이 있다. 연주는 학구적인 면이 강하지만 대중성을 잃지 않고, 텔레만과 모국의 고전 음악에서는 유창하고 자발성이 풍부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뵐디케, 모겐스 (Mogens W ldike 1897~)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 대학에서 라우브에게 음악학을, 닐센에게 작곡을 배웠다. 1919년부터 주로 오르간 주자로서 활약하였는데, 이 일은 지휘 활동중에도 계속되었다. 1931년 크리스티안스보루이 궁정교회, 1959년에는 코펜하겐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에 취임하였다. 지휘자로서는 1924년엔 코펜하겐 소년합창단을 조직하고 주로 교회 음악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37년에 덴마크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전임하였는데 1959년에 다시 덴마크 방송교향악단에 복귀하여 1972년까지 수석 지휘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또 양자 페터 라르센과 공동으로 덴마크 교회의 찬송가도 출판하고 있다. 그러나 후사를 젊은 블롬슈테트에게 물려주고 현재는 은퇴하고 있는 것 같다. 뵐디케의 정평있는 레퍼토리는 교회 음악인데, 덴마크 오데온에 북스테후데의[칸타타 전집]이라는 대작을 녹음했다. 전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라든가 하이든의 [천지 창조] 등의 레퍼토리도 나와 있었는데(미국 바흐 길드), 현재는 하이든의 [교향곡 제100번, 제101번, - 104번](밴거드)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연주는 더없이 기품있는 것으로 고전적인 격조의 높음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
아츠몬, 모셰 (Moshe Atzmon 1931~)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이스라엘에 이주하여 텔아비브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작곡과 지휘법을 배운 다음, 런던에서 안탈 도라티에게 배웠다. 1063년 미트로풀로스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한 후 1964년 리버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도 우승의 영예를 안아 주목을 받았다. 데뷔는 1967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했으며, 그 후 베를린 오페라 극장의[체네렌톨라(신데렐라)] 공연의 지휘에서 성공한 이래, 빈 필하모니 외에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의 객원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967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1972년에는 함부르크의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욱이 1977년부터는 스위스의 바젤 교향악단의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있으면서, 유럽·미국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의 객원 활동을 했다. 한편 1978년 이후는 도쿄도(東京都) 교향악단의 뮤직 어드바이저와 수석 지휘자도 겸임했다. 아츠몬의 음악은 전통성보다는 인터내셔널한 것이지만, 청중에게 꼭 느끼게 해야 할 곳을 잘 알고 있는 다이내믹한 연주를 전개한다. 도쿄도 교향악단과 녹음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2번](덴온)은 싱싱한 젊음의 감각을 살린 극적인 연주라는 평을 듣고 있으며, 이 밖에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3번](그라모폰), [멘델스존 서곡집](세라핌)이 있다.
로스트로포비치, 므스티슬라프 (Mstislav Rostropovich 1927~)
첼로 주자이기도 하며, 소련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부친 레오폴드는 공로예술가 칭호를 가진 첼리스트이며 당시 바쿠 음악원 교수를 지내고 있었다. 모친 페도토바는 피아니스트이면서 역시 동 음악원의 교수였다. 이와 같은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로스트로포비치는 4세 때 이미 피아노를 위한 폴카를 작곡했다고 한다. 이 해에 부친 레오폴드가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로 전근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이주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첼로의 기초 교육을 받은 것은 7세 때였는데, 1937년 10세 때 생상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주목을 받았다. 1941년 14세로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가 코스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4월 '소련 작곡가의 밤'에 참가하여 작곡가, 첼리스트, 피아니스트로서의 폭 넓은 재능을 인정받았다. 또한 같은 해 레닌그라드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가 첼로는 코조루포프를 사사하고, 작곡은 셰발린과 쇼스타코비치를 사사했다. 1947년 음악원 재학중에 프라하의 세계 청년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1948년에는 음악원 연구 과정을 모두 수료, 졸업과 동시에 모교교수로 발탁되어 승승 장구하는 그의 장래를 보여주었다. 1949년 부다페스트의 평화 우호제 콩쿠르, 1950년 '프라하의 봄' 첼로 콩쿠르에 출장하여 양 콩쿠르에서 모두 일등으로 우승했다. 그리고 1951년 소련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 1956년 로스트로포비치는 처음으로 서방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 영국, 미국, 프랑스를 방문하고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구미 30개국을 역방하고 글자 그대로 세계 최고 첼리스트로서의 명성을 한껏 누렸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활동하는 것 외에 코간, 길렐스와의 트리오, 리히터와의 소나타 연주 등 실내악 주자로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로에 대해 1963년 레닌 상을 주었다. 첼리스트로서의 그는 굉장히 정력적이어서 당시 국외의 연주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면 시베리아 오지까지 국내 연주 여행에 힘썼다. 그런가 하면 1963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첼로 협주곡 연속 연주회를 기획하여 11회에 걸쳐 비발디에서 쇼스타코비치, 졸리베까지에 이르는 41곡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위업을 이룩했다. 1968년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에서 처음으로 지휘자로 데뷔하여 그 이후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계속 늘어났다. 특히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비시네프스카야와의 콤비는 볼쇼이 극장 프로덕션의 간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68년 이래 소련의 반체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솔제니친을 자기 별장에 숨겨 두고, 1970년 당국에 대해 공개 질문장까지 발표했다. 이것이 정부를 격노케하여 장기간 국외 여행을 금지당하게 되었지만, 1974년 5월 2년간의 국외 여행을 허가받고 로스트로포비치는 런던으로 갔으며, 후에 부인과 두 딸도 출국을 인정받아 1975년 미국 워싱턴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이것이 또 소련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1978년 3월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아』는 "로스트로포비치 부처는 반애국적 행동을 하여 소련의 위신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소련 시민권을 박탈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소련 문화예술원은 로스트로포비치의 시민권을 복권시켰다. 그로 인해 16년만에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로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을 연주했다. 그는 1990년 현재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첼리스트로서도 정력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그는 부인 비시네프스카야의 가곡 리사이틀에 피아노 반주자로서도 출연, 글자 그대로 다재 다능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1980년, 1981년, 1983년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과 내한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첼리스트로서의 로스트로포비치 연주는 장대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정열과 지성이 유례 없는 테크닉과 결부되고, 그 속에는 흘러넘치는 인간미가 내재되어 있다. 치밀함과 분방함, 시적인 흐름과 동시에 비르투오소풍으로 토해 내는 그 표현의 넓이와 스케일의 크기는 엄청나다. 이전에 카살스가 그의 연주를 듣고 "종래의 첼로 연주의 개념을 뒤엎어버린 최고의 지도자"라고 칭찬한 것도 로스트로포비치 속에서 그의 후계자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양의 녹음을 하고 있는데, 드보르자크의 협주곡만 하더라도 무려 6회나 녹음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특히 카라얀과 협연한 그라모픈 음반과 줄리니와 협연한 에인절 음반이 걸출하다. 리히터와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필립스)도 명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밖의 레코드는 어느 것이나 로스트로포비치의 강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어서 각각 매력적인 연주를 맛볼 수 있다. 지휘자로서는 먼저 런던 필을 지휘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집]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러시아인으로서의 향수를 토로한 연주로 커다란 음악의 놀 속에서 그의 진실이 절실하게 전해 온다. 특히 초기에 작곡된 3곡의 연주가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데뷔 곡인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은 볼쇼이 극장의 최고 캐스트에 의한 금자탑적인 명반이다. 또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시리즈도 있는데, 그중에는 대담한 표현으로 빛나는 [제8번]이 압도적이다(이상 에인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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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르비, 네메 (Neheme Yarviy )
소련 에스토니아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타린의 음악원에서 배우고, 10대 때부터 에스토니아 방송교향악단의 지휘대에 섰다고 한다. 후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므라빈스키와 라비노비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63년에 타린의 에스토니아 오페라 극장과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에 취임하였다. 야르비의 중앙에서의 활약도 눈부신 바가 있었다. 볼쇼이 극장에서의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과 모스크바 음악원 대홀에서의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고 한다. 또 제3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결승 대회에서의 지휘를 담당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야르비는 에스토니아 국립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지내기도 했으며 1988년 현재는 예테보리 교향악단,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를 겸임하고 있다. 레코드는 현재 트레차코프와 협연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샤프란과 협연한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모두 멜로디아) 등이 있다. 최근에는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전집을 영국의 샨도스 레이블로 발매했다.
레시뇨, 니콜라 (Nicola Rescigno )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난 이탈리아계 오페라 지휘자이다. 부친이 메트로폴리탄오페라 극장의 트럼펫 주자로서 30년간이나 근무한 관계로 레시뇨도 어려서부터 오페라와 친숙하였고, 왕년의 명가수들의 무대를 수없이 많이 보면서 자랐다. 이탈리아에서 법률을 배우고 학위를 딴 다음, 1943년 브루클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오페라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지휘자, 1957년부터 1975년까지 댈러스 시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 겸 지휘자를 맡았다. 댈러스를 중심으로 하여 메트로폴리탄,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신시내티, 몬트리올, 멕시코시티 등 북아메리카각지의 오페라 극장 및 유럽에서 활약하였다. 1954년 시카고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주연한 [노르마] [라 트라비아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지휘한 이래 이 대가수와는 각지에서 자주 협연했고, 그 외에 수많은 아리아집을 녹음했다. 또 칼라스 외에 모나코, 파바로티 등 당대의 유명한 테너와의 아리아집에서도 오페라의 베테랑다운 지휘를 보여주었다. 오페라 전곡 음반은 테너 가수인 파바로티와 소프라노 프레니 그 밖의 가수들이 출연한 [토스카](런던)밖에 없다. 특히 개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대 경험의 풍부함에서 오는 실수가 없는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루치, 니콜라 (Nicola Rucci 1910~)
이탈리아의 바리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작곡을 레스피기, 지휘를 몰리나리에게 배웠다. 또한 바티칸의 폰티피초 성가 연구소에서 그레고리안 음악 및 오르간을 연구하였고, 오르간의 박사가 되었다. 그 후 1935년부터 1954년에 걸쳐서 로마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겸하여 이탈리아 방송교향악단의 지휘도 하였다. 1954년 봄, 일본의 문무성(우리 나라의 문교부에 해당)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미야자키 대학의 교수도 지냈다. 1955년 약 1년간 도쿄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이 오케스트라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1960년에 다시 일본에 가서 오사카 학예대학에서 후진을 지도하면서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1963년부터는 도쿄 예술대학 오페라 연구실의 객원 교수가 되어 일본 오페라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후지와라 오페라단과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을 고별 공연으로 마친 다음 이탈리아에 되돌아갔다. 그러나 1981년 3월에 다시 일본에 가서 후지와라 오페라단을 지휘하여 [카프레티와 몬테키]를 공연하였다. 레코드에는 하야시 야스코(林康子)와 협연한 [하야시 야스코/오페라 아리아집] (빅터 )이 있다.
골로바노프, 니콜라이 (Nicolai Golovanov 1891~1953)
작곡가이기도 하며,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교회 합창단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바실렌코와 이폴리토프-이바노프를 사사하였고, 칸타타 「유라타 공주」로 작곡상을 탔다. 1915년부터 볼쇼이 극장의 합창 지휘자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정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웠 9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술탄 황제의 이야기」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25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클래스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7년부터는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48년부터는 볼쇼이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는데, 1953년 모스크바에서 별세하였다. 이 사이에 그는 볼쇼이 극장에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1946년 이래 4회에 걸쳐 스탈린 상을 받았다. 작품으로서는 2곡의 교향시를 비롯하여 교회 음악, 합창곡, 오페라 등 상당한 수가 남아 있다. 골로바노프는 호방하고 스케일이 큰 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러시아 국민악파와 독일 낭만파, 소련 현대 작품 등을 중심으로 한 레퍼토리의 폭이 넓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와 「이고르공」 등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레코딩도 남아 있지만,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과의 방송 녹음을 통해 만들어진 「바그너명연집」(멜로디아) 외에는 거의가 폐반이 되었다.
아노소프, 니콜라이 (Nikolai An sov 1900~1962)
소비에트의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모스코) 음악원에서 배우고, 작곡과를 졸업한 다음 1931년에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 후 주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활약하였다. 소비에트 국립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소비에트의 주요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한편, 모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했다. 그의 부인은 성악가로서 알려진 나타리에 로제 스트벤스카야이고, 현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그의 아들인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제자이기도 하다. 아노소프는 일찍부터 명지휘자라는 평을 받았고, 특히 현대 음악의 좋은 이해자임과 동시에 낭만적인 작품의 뛰어난 해석자로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레코딩도 비교적 적어, 소비에트 국립교향악단과 연주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멜로디아)과 모스크바 필하모니를 지휘한 시체드린의 [교향곡 제1번]이 있어서 그 연주의 특질을 엿볼 수 있다.
아농쿠르, 니콜라우스 (Nikolaus Harnoncourt 1929~)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겸 첼리스트로서 고음악의 스페셜리스트이다. 그라츠에서 배운 다음, 1948년부터 빈 음악원에서 파울 그륀머와 에마뉘엘 브라베츠를 사사하여 첼로를 배우면서, 독학으로 비올라 다 감바를 공부했다. 1952년부터 1969년까지 빈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를 하였고, 1952년에는 비올라 다 감바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 밖에 많은 연주회에서 감바의 독주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예전의 음악과 고악기의 연구를 하였다. 1953년 세프트라인(오보에), 슈타스토니(플루트), 타헤치(오르간), 그리고 부인인 아리스 아농쿠르(바이올린) 등과 고악기 앙상블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를 결성하였다. 4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다음, 1957년에 비로소 최초의 콘서트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1960년 최초의 해외 연주 여행을 떠났고, 1962년에는 오리지널 악기에 의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연주를 하고, 1967년에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울리세의 귀환]을 소련에서 부활 연주를 하는 등 매우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고 있다. 더욱이 밀라노의 피콜라 스칼라와 취리히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를 하였고, 근년에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지휘를 하였다. 1972년부터 잘츠부르크 대학, 다음해부터는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편 각 지방의 세미나에 강사로서도 초빙되고 있다. 1960년대초부터 지휘와 솔로를 통해 많은 양의 녹음을 하고 있으며, 몬테베르디에서 헨델, 바흐에 이르는 바로크 시대의 각국의 음악을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데, 특히 성악을 포함하는 대작은 소련에의 연주와 레코딩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는 바흐의 [칸타타] 전곡 녹음에 착수하고 있다. 아농쿠르는 현대에 있어서의 고악기 연주의 제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시대의 음악의 연주이든 그 시대의 악기를 통해서만이 최상이며, 생생하게 재현할 수가 있다"고 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오리지널 악기의 사용에 한정되지 않고 연주법이나 가창법, 특히 음악 해석에까지 철저하다. 그리고 거기에 나 타나는 참신하기까지 한 음색이나 표현은 그야말로 그의 연구의 소산인 것인 동시에 그의 음악적 창조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녹음은 내용적으로는 충실하지만 아직도 아카데믹한 딱딱함이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김살 없는 자유자재한 표현으로 바뀌어져 있고, 세련된 원숙미도 가미되어 있다. 단적인 예는 비발디의 [사계](텔레푼켄)인데, 극히 개성적이고 충격적인 연주였다. 그 밖의 레코드는 많지만, 특히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오르페오] [울리세의 귀환] [포페아의 대관]이 매우 중요하며, 그의 바로크 연주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 밖에 헨델의 [예프타 서곡], 텔레만의 [최후의 심판] 등의 대작에 뛰어난 녹음이 많고, 바흐의 [칸타타] 전집도 주목된다. 또 최근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도 손을 대고 있으며, 그 성과가 주목된다(이상 텔레푼켄). 한편 솔로 레코드로서는 바흐의 [무반주 헬로 모음곡] 전곡(하르모니아 문디)이 명반이다.
델마, 노먼 (Norman Del Mar 1919~)
작곡가 및 비평가이기도 하며,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호른과 작곡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은 영국 공군의 중앙 밴드에 복무하였으며, 그 후 런던의 여러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되었고, 로열 필하모니에서는 호른의 명수인 데니스 브레인의 제2호른을 담당하였다. 그와 동시에 델마는 작곡과 편곡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통해 경험을 쌓은 다음, 첼시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현대 작품을 많이 초연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의 공식적인 지휘 데뷔는 1947년 작곡자를 환영하는 R.슈트라우스 음악제에서 하였다. 1940년대에는 새들러즈웰즈 발레와 잉글리시 오페라 그룹을 지휘하였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요크셔교향악단에서 니콜라이 말코의 어시스턴트를 역임하였다. 1960년 BBC 스코티시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어 5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1968년에는 스웨덴의 예테보리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는 특히 말러의 지휘자로서 널리 인정받았고, 또 R.슈트라우스의 연주와 연구로도 유명하다. 또 델마는 작곡가로서도 유명한데 대표작에는 두 곡의 교향곡, 현악 4중주곡, 플루트 협주곡 등이 있다. 레코드는 별로 소개된 것이 없으나 대표적인 음반에는 제럴드의 [관현악을 위한협주곡]과 로손의 [교향곡 제3번](영국 아르고), 쇤베르크의 [모음곡](런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