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
우리는 남도답사의 목적으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9월22일 10시 30분 학교 통일 광장 41명 집결- 출발>
첫 행선지 선운사-
어느 해 봄날 이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어느 절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었고 나의 머릿속에 그 절의 모습은 그림처럼 그려졌었다. 그 노래는 송창식의 '선운사'라는 노래였고 그 절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은 약 2년 뒤인 94년 여름 안양에 선배의 작업실에서 였다. 백일홍 만발한 숲과 돌무더기 하늘로 오르는 신비감이 넘치는 몇 장의 사진들 이였다.
졸업여행 일정에 관한 회의가 몇 차례 있었고 매번 우리의 스케줄은 변경되었다. 이 땅의 남도를 방문하는 여행이지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지도상의 땅들은 모두가 낯선 곳이었고 답사형식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과에 있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준비되어야 할 일들은 구체적이지 못한 채 기대만으로 채워져 갔다. 첫 행선지를 선운사로 결정한 것은 물론 나의 의견 때문 이였다. 내 기억 속의 그림 같은 절 그곳의 신비감을 만나고 싶은 나의 욕심이 우리 모두를 고창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늦은 출발이었고 고창에 도착한 시간은 15시 30분이 넘어섰기에 다음 스케줄을 위해선 선운사에 머무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첫 유적지의 입구는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고 백색 페인트로 잘 단장된 모습이었고 주차장의 한 편에서는 모처럼 만의 나들이를 나오신 어르신들께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계셨다. 계곡 물이 흐르고 특이한 형태의 나무들이 심어진 산책로 같은 길을 따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운사 가람이 있는 곳으로 오른다. 선운사의 계곡은 물 쪽으로 기울어 서있는 갖가지 나무들로 그늘져 있다. 조금의 잎새 뜸으로 희미한 빛이 내려 앉을 수 있고 물위의 곳곳에서 반짝거린다. 이 절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성이 이 계곡에 있다. 돌다리가 놓였을 법한 계곡의 여기저기에 성황당 돌무지처럼 하늘을 향해 쌓인 돌탑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오르며 불심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긴 그 길을 지나 선운사 경내로 들어서면서 마음의 단정함을 느낄 수 있다. 먼저 보게 되는 관음전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모든 건물의 지붕들이 전해주는 그 단아함 때문이다. 뒤로 흐르는 산새를 사뿐히 등에 업은 듯하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6층 석탑을 가만히 안은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모두 건물들의 단정한 지붕들 때문이다.
경내를 나온 우리는 선운사가 거느린 유적들을 찾아 산으로 올라야 하는 지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우리에게는 다음 행선지인 소쇄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경내로 오르는 시간만도 30분 이상이 걸렸음으로 그때의 시간인 4시는 스케줄에 대한 조정이 필요한 시간 이였다. 그럼에도 등산을 결정한 것은 첫 행선지이고 아직 남겨져 만나지 못한 다른 유적들을 두고 떠나기란 아쉬움이 있었기에 우리는 소쇄원을 접어두고 마애불과 도솔암 등이 있는 선운산을 향해 익숙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신라 진흥왕과 그의 왕비 도숙, 공주인 증애가 함께 수도한 곳이라는 도솔암을 지나고 마애불과 돌산을 찾아 오르던 우리는 행렬이 분산되면서 서로 다른 길로 산을 올랐고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서로를 찾아 마애불을 찾아 헤매다 내려 앉는 저녁의 기운에 눌려 산을 내려 와야 했다.
'41명의 인원이 이동하면서 그 시작과 끝은 얼마간의 시간이 날 수 있을까?'에 대해 우리는 미리 고민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선운사에서의 하산은 1시간 이상 걸렸고 첫사람의 하산과 마지막 학우의 하산이 30분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의 스케줄은 더 많은 곳을 더 빠르게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족감 없이 선운사를 떠나 남도의 저녁 그늘져 가는 산새와 들판을 지나며 첫 숙소가 예약된 담양으로 향했다.
불변한 도시-담양
7시가 넘어서 담양에 도착해 '성림장'이라는 여관을 찾아 투숙하기 위해 들어섰지만 첫날의 피곤함을 풀기도 전에 짜증스런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미리 이야기되었던 숙박비보다 비싼 금액을 주인장은 요구했고 6개의 방에 들어서는 41명의 학우들 중 일부가 비좁음에 불만을 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히 준비 되지 않은 긴 여행의 첫 시련처럼 여겨졌고 담양이라는 상업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건이 되었다. 힘들게 학우들은 좁은 방에 짐을 풀었고 허기진 배를 불고기 백반으로 채우고 나서야 모두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어려운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95학번 여학생들이 주를 이룬 조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익일 스케줄부터 철저한 조별행동과 시간 엄수, 조별 식사, 개인행동 금지, 조장 낙오자 체크, 숙박시설 확보등 그리고 소쇄원의 답사에 대해 반대의결을 했다가 고생을 감수한 방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날 기상시간은 6시 였다.
9월 23일
이땅의 가장 큰 미술의 축제 광주비에날레
두 해전 광주에서 제1회 광주 비엔날레가 열리며 이 나라에도 미술이 설 땅이 생겼다는 기쁨을 느낀 이들이 많았을 게다. 우리는 두 번째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6시기상, 짐을 싸고 식사를 맞힌 뒤 광주를 행해 88고속도로를 타고 갔다. 광주는 근대 역사의 땅으로서의 깊은 뿌리를 지닌 곳이다. (그 도시에 들어서자 비엔날레의 깃발들이 가득 채워져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우리에게 그 이미지와 기대감은 특별한 것이었다.) 8시에 출발한 우리는 9시가 되기 전에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에 들어갔고 첫 번째로 특별전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를 관람하기 위해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일상-기억-역사전의 내용은 해방후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도하던 60년대 이후의 영화간판, 포스터, 만화, 삽화, 삐라, 몇 점의 유화작품이 전시 되었다. 그것을 일상이라 했듯이 우리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근대역사의 과제를 풀어가며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의 역사였고 일상의 이미지들 이였다. 포스터와 만화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침울할 수록 선동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념과 사상을 내포하고 움직여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지닌다. 그러나 시대가 부유해 지고 무감각해질 수록 이들은 키치적이고 선정적인 매체로 전락해 버린다. 우리의 현대는 그런 역사의 변화 속에서 성장했고 이 전시회의 나열된 유품들은 우리가 현재의 모습으로 성형될 수밖에 없었던 우울한 조건과 환경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쁘게 달려서 선진화된 부와 행복을 소유했다는 포만감에 젖어 다시는 역사와 기억에 대해 고개 돌리지 않는 냉정한 인간상으로 고착화되고 황폐해진 우리의 모습에 대해 경고를 가한다. 경제적 힘을 지니 매체의 이미지를 다시 보여주면서 말이다.
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님과의 약속시간이 10시에서 12시로 변경된 것은 시립미술관에서 본전시장으로 옮겨온 10시 30분 경이였다. 본 전시관람의 시간을 연기 해야했고 각 그룹의 사람들은 희망에 따라 방향을 정해 흩어졌다. 행사장에 모여든 인파들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노인 분들과 어린 학생들임은 2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행사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생각이지만 모든 작품을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생각하는 노인 분들과 농담의 대상으로 여기는 어린 학생들에게 이 광주비엔날레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지역 시민에게 예술적 경험, 감상의 기회를 넓히게 하는 목적의 비엔날레인 것을 알고 있지만 미술을 전공하는 우리에게도 이질적인 이미지이고 해석이 어려운 작품들이 많은 그 곳에서 과연 많은 일반인들은 어떤 미적 공통감과 감흥과 메시지의 전달을 받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들과 우리의 모습은 실로 그렇지만 이 비엔날레는 포기될 수 없다. 그들의 기념촬영의 배경인 것처럼 농담의 대상인 것처럼 미술작품들은 현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전달하며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미술이 아니기에 느껴지는 이질감이 없지도 않지만 광주의 그리고 이 나라의 사람들은 언제가 광주비엔날레가 지니는 역할에 대해 이해할 때가 올 것이다.
박신의 선생님을 만난 시간은 꼭 12시였고 우리는 성완경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천지'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교수님의 영향력으로 식대를 깎으면서. 식사를 하는 동안 문화일보의 한 중년의 여기자와 간단한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졸업여행 스케줄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 과가 매스컴을 타는 기회라 여기며 반가움을 느꼈다. 1시가 되어 우리는 본행사장에 들어섰다. 박신의 선생님의 해설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는 첫 장소인 속도전의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속도전-
본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속도전을 맞이했다. 소쇄원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물결 등의 그림으로 시작된 전시의 시작은 시공을 초월한 속도성의 인식에 대한 유사성을 제시하는 의도였지만 그 표현양식과 정서적 이질감의 대비적 이미지는 유사성으로 묶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속도는 시간과의 연관성 상에 있다. 작품들은 각각 과거와 현재에 존재했거나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역사성과 연속성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시각적인 포착을 통해 속도의 일부를 제시함으로써 감상자가 다시 그것을 확대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시간적 공간속 놓인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지적한다.
생성전-
윤회의 사상이 단순한 순환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생성의 과정일 것이고 그 현상은 현대의 이미지의 생성을 통해 보여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의 생성에 대해 인간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롭고 충격적인 상품들이 생성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현대는 끝없는 이미지의 생성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것을 받아들임으로 현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전시는 여성이 잉태하는 육체의 생성에서부터 육체의 변형으로 발생하는 인간 이미지의 새로운 생성, 그리고 인간의 삶을 소비함으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도구적 이미지적 생성물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혼성전-
무엇과 무엇의 혼합, 무엇에 대한 무엇의 영향, 침입, 파괴 등이 혼성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변증법적인 논리의 발전과는 거리가 있는 다면적이고 혼돈스러운 이미지가 강하다. 이 전시는 대상이 본래의 환경에서 벗어나면서 발생하는 혼성적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인종의 충돌(성적, 종교적, 전쟁등)에 의해 생성되는 혼성된 상태를 제시한다. 이 혼성은 자연적인 혼성이 아닌 인위적이거나 강압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영화, 비디오, 광고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패러디의 예술 속에도 존재하며 이는 인간의 개별성과 개념, 정체성을 소멸시키고 가상적 익명적인 뒤섞임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는다.
권력전-
권력은 지배라는 개념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전통이나 관습에도 존재하고 인간상호간의 개별적 사건에도 존재하며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이콘이나 상징에도 존재한다. 권력은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며 파괴시키는 힘을 지닌다. 반면 인간의 역사를 때론 발전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체가 권력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구조적인 권력 앞에서 유린당한 뒤에 인간상의 변화에 대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항했던 예술형식(만화등)과 그 대항의 역사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공간전-
공간의 해석에 대해 건축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예술현실이 건축을 수용하지 못하는 바 때문에 공간에 대한 해석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간이란 것의 전부가 건축으로 대변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고 건축이 건축이라는 환경의 역할에서만 머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던 전시의 전반적 이미지는 건물의 제시와 단편적 사건들의 제시였다는 실망감을 지우기 어렵다. 마치 전시의 주제가 건축인 것 같이.
광주 비엔날레를 통해 현대의 전세계의 지도자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제3세계의 작품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방법과 방향의 문제 앞에 서성이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보면 이 작품들은 이 전시의 주체들처럼 권력과 혼성이 주체들일 수 있다. 국경을 놓고 무엇을 평가하는 것이 국지적인 발상일 수도 있지만 이미 많은 작품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해석해 내기에는 어려운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현실에 놓인 것에 대해 무한한 아픔을 느낀다.
소쇄원을 찾아서
학우들은 피곤함에 젖어들었다. 이틀동안의 행군이 이제 힘겨운 운동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우리는 늦기 전에 소쇄원에 도착하기 위해 오후 4시 광주를 떠나 담양으로 향했다.
소쇄원에 올랐다. 좁은 산길을 왼편에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신선함은 대나무의 길이에 있었다. 어둑해진 저녁의 그늘에 하늘 끝으로 향하는 그 높이의 스삭이는 소리는 현재의 시대성을 잊게 했다. 바위 언덕 위에 지어진 대봉대를 맞이하고 돌다리를 건너 제월당을 지나 뒷산으로 계속 올라갔다. 이 작은 정원의 뒷편에 더 커다란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같고 말이다. 그러나 소쇄원의 전체는 목조 건물 4체와 바위언덕,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물줄기와 가볍게 그 공간을 감싸는 담으로 이루어진 작은 곳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문화를 보는 눈이고 자세였다는 부끄러움을 뒤늦게 느꼈다.
광주비엔날레 속도전의 첫작품의 그 곳에서 우리는 30분 정도 머물며 제월당의 마루에 앉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조선 초의 양산보가 지냈을 그 곳에 앉아 그의 기운을 느끼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제월당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날 때 소쇄원의 주인과 한 화가,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대해 협의하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시 남도의 붉고 드넓은 평야를 달려 광주시내로 들어왔다. 예약된 스트플모델을 천지식당의 주인장의 소개로 찾아간 곳이고 예약된 객실은 총 11개였다. 전날의 불만스런 숙소에 비해 스트풀은 넓은 공간과 친절함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맞이해 주었다. 소쇄원에서 내려오던 때의 피곤함을 잊은 듯 학우들의 얼굴에 미소가 비치기 시작했고 조별 저녁식사를 광주의 명동거리에서 마치고 돌아온 학우들은 서로의 식사자랑으로 한참 웃으며 얘기했다. 학우들은 쉽게 잠들지 않았고 다음날은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여행의 세번째 날이었다.
9월 24일 여행의 3일째
잠을 자지 못한 학우들을 이끌고 모델의 앞에 모인 시간이 7시를 넘어섰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히려면 식사시간을 줄여야 했기에 식대 3,000원씩을 지급하고 30분의 시간만을 할당한 뒤 급히 해산했다. 결국 반정도의 인원은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버스에 올랐다. 복잡한 광주의 출근시간을 벗어나 조용한 들판과 낮은 산들이 어울러진 길을 따라 화순을 향했다. 첫 행선지는 천불천탑의 사찰이라는 운주사였다.
평호로운 품-운주사
운주사에 입구에 들어서자 각각의 색을 깔끔하게 들어낸 키큰 코스모스가 우리를 맞이했다. 숙녀들은 그 화사함과 자신을 비교하듯 몇 번씩 사진을 찍었고 만족한 미소를 띄고서야 절을 향해 움직였다. 길을 따라 우측으로 약 40도정도 돌아들어 가자 넓은 뜰에 차례로 늘어선 높고 커다란 탑이 보였다. 5기의 탑들이 100미터정도의 거리에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했고 그 평화로운 들을 모습도 편안함을 자아냈다.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많은 절을 지었다는 전설들이 모두 사실일리 없고 그 탑들을 모두 도선국사가 하루 밤에 새웠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나 각 탑들의 특이한 형태와 이미지들은 신비감과 경이로움을 깊이 느끼게 했다.
경내로 행하는 길에 원형다층석탑 주위에서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다. 단국대 사학도 들인 그들은 노트를 들고 교수에 말에 귀기울였고 우리는 목에 매단 카메라들을 휘저으며 걸어가다 원형다층석탑 앞에서 그것이 원폭의 상징 이였느니 유에프오의 모양이니 외계인의 유품이라는 둥의 우스운 발상들을 늘어 놓았다.
운주사는 꼭 어머니의 자궁속 같은 지형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넓다가 좁아지는 전면을 향해 이형 탑들과 누운 듯 서있는 마애불들이 늘어선다. 안쪽의 넓은 터에 가람이 위치하고 둘러싼 산의 우측 봉우리에 국내 유일 이라는 거대한 와불이 누워있고 가람을 지나 올라온 뒷산에는 작고 숨겨진 듯한 작은 불상들이 산재해있으며 그 중턱의 바위에 앉으면 운주사 경내와 산을 벗어나 펼쳐진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바위에 앉아 숨을 쉬며 고요함에 꽤 오랫동안 쉬었다가 내려왔다.
우리는 1시간 30분 동안의 운주사 답사를 맞히고 승보사찰이고 거대한 절이라는 승주 송광사를 행해 떠났고 학우들은 버스 안에서 남도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송광사
1시간정도 달려온 승주땅. 호남에서 영남으로 조금씩 갈수록 산은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송광사로 오르는 길의 오른편은 아마도 전남의 최대 호수일 듯한 주암호가 그 넓은 호수를 자랑하며 어울림의 산새와 함께 하고 있었다. 잘 정돈된 좁은 길에 자유롭게 휘어진 가로수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계산를 올랐다.
송광사 입구는 커다란 주차장과 길 양쪽으로 늘어선 식당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지를 찾아 떠나온 우리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리 반가울 수는 없었으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 식당들 중 한곳씩을 조별로 선택해야 했다. 조금의 불쾌감은 식당 주인장들의 친절함과 밥값을 깍아주겠다는 제의에 씻기어졌다. 그곳의 별미이자 특산 식사라는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배불리 먹고 나온 뒤에는 조금 보기에 안 좋은 것 빼고는 다 좋은 것 같이 느껴지기 까지도 했다. 그때의 식사는 여행증 가장 맛나고 신선한 식사 시간 이였다고 모두들 기억한다.
송광사의 규모는 들어서는 관광객을 놀라게 만든다. 대웅전의 모습만도 카메라의 한 컷으로 잡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고 각 건물과 약 1천의 수업중인 스님들의 숙소의 규모도 과히 이 곳이 승보사찰임을 실감케 했다. 그 규모만큼 국사전, 약사전등과 담벼락과 정원수등 볼거리가 많은 절 이였다. 그러나 그 절의 이미지는 그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힘차고 억세게 자란 나무들의 산새가 위압감을 주고 새로 지운 대웅전은 어마어마한 금전으로 신축되었으며 여기저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돈 냄새가 물신 풍기는 곳이었다. 또 한가지 신라와 고려시대를 지낸 오래된 이 절이 종파와의 관련성 때문인지 하나의 탑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고인돌 공원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곧바로 이동하는 코스였지만 고인돌 공원이 송광사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곳을 들르기로 했다. 주암호를 따라 15분 정도 더 오르면 잘 정돈된 작은 박물관 같은 곳이 있다. 버스에 내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잔디밭에 널려있는 돌더미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우들은 들어서자 마자 기념촬영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부담 없이 보여지는 청동기 무덤의 형태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그 공원은 참 잘 만들어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강요 없이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지닌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지석묘의 형태와 역사, 유럽의 스톤헨즈등의 거석문화를 직접 공부하는 기회를 얻었다.
선암사
쌍둥이가 수도를 위해 송광산에 올라 한 사람은 송광사로 한 사람은 선암사로 입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선암사로 오르는 조금 비탈진 언덕은 산 건너의 송광사와는 다르게 조용했고 곧 만나게 되는 승선교의 자태는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멀리 흐르는 아래의 물줄기 위에 넓은 곡선으로 사뿐히 떠있는 승선교를 만나자 학우들은 또다시 카메라의 머리를 디밀고 사진을 찍어 댔다.
선암사는 송광사의 규모와도 비교된다. 작은 경내에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앞으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와 단정한 호수를 지니고 있다. 신라말기의 특징이라는 대웅전 앞의 쌍탑을 지니고 있다. 송광사의 모습에 빗대면 여성적이고 안으로 숙인 이미지의 절이라 하겠다. 아마도 송광사로 오른 사람은 큰 뜻을 품고 포교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다니는 큰 승이 되었을 것이고 선암사로 오른 사람은 평생을 기도와 수양으로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입구를 지나기 전에 우측에 위치한 부도 밭의 모습은 두절 모두 큰 편이었므로 수도했던 훌륭한 스님들이 많았는가 보다.
선암사로 오르는 길목에는 다른 벅수와는 다르게 길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벅수 한 쌍이 있다. 둥근 눈에 붉은 몸색을 지닌 그 벅수는 아마도 절로 오르는 잡귀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경계나 기원을 비는 다른 벅수의 역할과는 다른 역할일 것이다. 그 벅수를 지난 지친 학우들은 어두워지는 조용한 산을 내려왔다. 하루동안 네군데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강행군을 맞히고 덤덤하게 산을 내려오는 학우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들이 채워져 가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와 몇 명의 학우는 지나는 트럭에 몸을 싣고 다른 학우들에게 안녕하며 내달렸다. 그리고 그 트럭의 운전사가 스님인 것을 안 것은 트럭에서 내려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 때였고 순간 스님의 자비심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3일째의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경남으로 좀더 가까워지는 하동으로 숙박을 위해 출발했다. 여지없이 학우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버스는 어두운 밤을 맏이하며 하동을 향해 달렸다. 늦은 저녁 8시 30분쯤 하동에 도착한 우리는 늦은 저녁 식사를 해야했고 나와 만용이형은 숙소를 섭외하기 위해 낯선 곳의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이라는 여관을 찾아 든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방 11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방은 모자란 듯해 보였다. 이리저리 계산을 하던 주인장은 빈방 열 개와 빌 방1개를 정해주었다. 숙박비는 전날과 같은 30만원 이었다. 숙박지를 정하고 학우들을 투숙시킨 뒤 조장회의 갖고 식사를 위해 만용이형과 거리로 나섰을 때 거리는 까맣고 조용했다. 어디에도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열려진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발면을 사들고 돌아온 우리는 주인집 할머니의 김치 동양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9월 25일 거제도를 향하여
밤새 고스돕에 열중한 학우들은 자신들을 한 방으로 몰아넣었다는 악의 없는 투정을 부렸다. 7시 짐을 챙겨 여관을 나섰고 하동의 특산물이라는 제처국을 먹기 위해 전날 예약한 식당을 찾았다. 희멀건 국물에 가라앉아 있는 제처라는 조갯살들이 시원스런 맛을 연상시켰지만 여학우들의 절반은 국을 먹지 않았다. 도시의 입맛에 익숙한 학우들에게 다른 지방의 특이한 맛깔은 삼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남도에서 유학 온 한 여학우는 미소를 띠며 혼자 맛나게 먹었다.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경남으로 들어서 남쪽에 위치한 통영으로 달렸다. 매일 산을 오르던 우리는 이제 바다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이였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빗방울이 버스 창문에 맺혔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만으로 통영에 들어섰다.
통영이란 도시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도시이다. 바다를 맞다는 울퉁불퉁한 언덕 위에 서로 제각기의 모양으로 새로 지은 건물들이 그냥 내팽겨지듯이 지어져 있고 좁은 길과 밀집된 건물들의 덩어리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사람들은 이 도시의 모양새가 김영삼씨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제도로 이어지는 대통령의 고향. 조용하고 단정할 수 있었을 이 도시는 억지스런 발전으로 생겨난 변이적인 도시가 된 것이다.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죽음이 함께한 명랑대첩의 앞바다를 바라보며 있는 충렬사. 후세에 새워진 사당으로 1606년 세워졌고 과거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물이기도 한 이곳을 답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좁은 도시 통영의 유적지는 주차장도 갖추지 못했기에 버스는 길가에 어렵게 섰다. 계단을 따라 사당에 오르면 제단과 이순신의 초상이 한장 걸려 있다. 그 초상은 괜찮기는 하지만 그리 썩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추억-거제도
통영을 벗어났다. 그리고 거제도에 들어섰다. 지세포를 지나 학동으로 가는 길은 대관령을 넘는 듯했지만 좌측의 펼쳐진 남해의 잔잔한 대해는 가슴의 한편이 끝없이 열려지는 느낌을 주었다. 여러 고개 숨차게 넘던 버스가 마지막으로 큰 고개를 넘고 해변을 향해 급한 내리막을 달려가 멈춰 섰다. 검은 몽돌이 가득한 큰 해변과 촉촉한 하늘과 맞다은 드넓은 바다를 만났다. 시끄러웠을 여름의 휴양지는 이제 자신의 휴식에 잠든 듯 했다.
거제도는 졸업여행을 떠난 우리의 휴양과 침목을 위해 준비된 코스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많아졌고 우리는 휴양지의 상업성에 젖어 있는 메마른 식당주인들을 만나며 맛없는 점심식사를 대부분 5,000씩에 먹고 15만원 짜리 민박집 한방에 짐을 풀었다. 둥글게 모인 원이 약 5개쯤 되었을까. 학우들은 서로 섞여 고스톱을 치거나 신나게 서로를 때리는 게임으로 금새 시끄러운 한 때를 보냈다. 창밖에는 잔잔한 파도에 쪽배 몇 척이 잔잔한 파도에 흔들 거렸고 비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 앉았다. 삼일동안 답사여행에서의 피로를 거제도의 파도와 함께 씻어 가는 편안함을 맛보았다.
저녁을 대가리 매운탕과 된장국으로 채우고 MT를 온 것처럼 한방에 둘러 앉아 레크레이션의 시간을 가졌다. 먼 땅, 인천에서 남도로 내려와 이제 4일 간을 함께 보낸 학우들의 친근감이 첫날의 짜증스러움과는 다르게 가까운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날 저녁은 매운탕과 회, 소주와 맥주로 회식을 했고 잠들기 아숴하던 학우들은 어두운 바닷가에 나가 이러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밤을 지샜다.
해금강-외도
여행 오일 째의 아침이 됐다. 여행증 처음으로 늦잠이 허용된 이 날의 기상시간은 8시경 이였고 우리는 날씨가 좋아졌음으로 배를 타기로 했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해금강-외도를 보는 코스 배를 타고 학동의 몽돌해수욕장을 떠났다. 배에 동승한 아주머니들 중 우리를 반가워할 만한 분이 계셨으니 바로 체교과 학부형이시라는 어머니였고 반가움과 함께 그분은 우리의 뱃삯을 깎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셨다.
학동 앞바다의 우측으로 배가 이동하자 곧 바위섬들의 장관이 펼쳐졌고 그 기암괴벽의 높고 웅장한 모습 앞에 우리는 뱃머리로 몰려가 감탄의 셔터를 눌러댔다. 조각조각 나있으면서도 강한 움직임으로 하늘로 오르는 바위섬들과 그 밑 동굴로 흘러드는 비취빛 짙은 바다물의 조화는 자연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각각의 바위에 이름이 붙여져 있고 그 이름처럼 바위며 소나무며 동굴들은 생명력을 지니고 힘찬 몸짓을 휘젓고 있는 듯했다. 우리의 기대를 초월한 해금강의 숭고하고 웅장함을 30분 정도 체험한 뒤 조용한 바다를 건너 낯선 섬 외도를 향했다. 학동의 작은 부두는 사라지고 바다 위에는 멀리 지나가는 여객선과 쪽배 몇 척이 있었다. 10분 정도의 항해에 다다른 섬 외도. 한 개인의 소유이며 1천종 식물들의 천국이라고 소개하시는 안내원 아저씨의 말이 섬에 오르며 실감되는 순간은 해금강의 감동에 또 한번의 파장을 만드는 신선함 이였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남도의 이국적인 식물들은 우리가 졸업여행을 동남아의 어는 섬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발자국이 옮겨질 때마다 이름 모를 식물을 처음 만나게 되는 기쁨과 경이로움은 기대하지 못했던 우리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남도의 외딴 섬. 자생하는 식물이 아닌 옮겨 심은 이국적 자태의 섬이고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조경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을 수 있었으나 이런 비난을 받기에 그의 아이디어와 조경감각은 무척 뛰어났다. 해금강 외도의 코스를 지나며 학우들은 평균 2통 이상의 필름을 소비하는 열의에 찼었고 그 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지금도 소중하고 추억 어리게 바라본다.
감동의 자연미를 느끼고 돌아오자 곧 비가 쏟아졌다. 어제부터의 비는 우리의 스케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잠깐씩 지나쳐 갔다. 이제 다시 대관령 같은 언덕을 몇 개 넘어 김해를 향해 떠났다.
김수로왕능-김해패총
김해로 들어서면서 김해 패총의 위치를 길에서 물었을 때 도로에서 작업중이시던 아저씨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잘 정돈된 이 도시에서는 곧 전국체전이 열릴 예정이었고 손님을 맞이하는 현수막과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패총을 가기 전에 우리는 신라의 시조 왕인 김수로왕능에 들르기로 했다. 공원으로 조성된 김수로 왕릉은 무덤이기보다는 오랜 역사속에 하나의 기념비일 뿐이었다. 김수로 왕릉에서 도보로 10분쯤 남쪽으로 내려가 김해 패총을 찾았을 때, 우리 모두는 조개 껍질의 흔적을 찾아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평범한 공터, 잔디밭과 다름없는 그 곳에서 패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녹색 울타리와 외로이 서 있는 표지판이 그 땅떼기가 패총의 자리였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곳에서 자유스러운 포즈로 널따랗게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해를 떠나 마지막 기착지인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제 2대 도시 부산. 인터체인지를 지나 보이는 부산은 서울과는 다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약간 옆으로선 여러 높이의 아파트와 사선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머리위로 지나가는 고가도로의 모습은 서울의 입구보다는 미래적이고 율동감있어 보였다. 10차선을 가득 메운 차들과 함께 부산 시내로 들어가는 약 1킬로에서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시내에 들어와 보게 된 녹색선이 그어진 버스와 그 속의 사람들은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로를 따라 영도로 향하는 버스에서 바라본 부산의 거리는 서울의 을지로 보다 더 거대한 것이 아닌가의 탄성을 지르게 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던 중앙로를 벗어나는 데 걸린 시간이 1시간 이상 걸렸고 7시가 넘은 시간에 우리는 태종대가 있는 영도구에 들어섰다.
항구도시 부산의 면모를 보게 된 것이 이 때이다. 어두운 해변을 따라 밝혀진 수없이 많은 조명들이 밝혀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은 바다를 메워 세울 신도시 건설현장이였다. 좁은 길을 따라 숙소로 정할 여관을 찾으며 태종대쪽으로 올랐다. 그러나 마지막 숙박지로 결정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의 버스는 어둠 속에 태종대를 지나쳐 다시 영도를 나오는 부산대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8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 아직 쉴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지친 학우들과 힘들게 운전을 계속하고 계시는 운전기사님은 마지막 날에 맞이한 난감한 상황에 조금씩 불안감을 느껴 갔다. 영도를 한번 돈 셈이 된 때의 시간이 8시 30분이 넘어섰고 우리는 이 영도를 떠나 광안리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9시쯤 도착한 광안리 해수욕장의 모습은 순간 우리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그곳은 불빛이 어둠을 밀어붙이고 춤을 추는 곳이었다. 대부분 이곳을 처음 오는 사람들 이였고 그 현란한 불빛과 놀이기구를 목격한 학우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내다 보았다.
비싼 물가의 유원지일 것이라는 예상으로 식대를 5,000씩 지급하고도 불안했다. 곧 숙박지를 결정했다. 롯데장이라는 여관의 주인아주머니는 미간의 주름으로 해서 강하고 무서운 인상을 지닌분이었다. 유흥지의 여관 주인이라는 선입견이 그 이미지와 합쳐져 절대 숙박비를 깎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방 11개를 32만원에 내어주시고 별 불만 없으신 표정으로 우리를 맏아주셨다. 식사를 마치고 만나 학우들은 서로 자신들이 한 식사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1인당 3,000원 꼴에 매운탕과 회 디저트까지 먹고 고구마니 땅콩이니 파전이니 하는 것들이 서비스로 나왔다고 서로 자랑들을 했고 학우들 속에 한 조는 별 맛없는 회덮밥을 먹은 것이 억울하다고도 했다. 예상외의 저렴하고 배부른 식사로 학우들의 피곤함은 또 밤이 되자 씻겨지고 졸업여행의 마지막 밤, 그리고 그 화려한 곳에서의 밤을 꿈꿨다.
마지막 밤을 화려한 도시의 모퉁이에서 웃음과 함께 함으로 보내고 6일째인 27일 인천을 향해 오전 8시에 출발을 했다. 우리의 일상의 관심에서 버려진 땅, 그럼에도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 남도. 그 아름답고 신비한 곳곳을 5박 6일이라는 시간동안 다니며 걷고 보며 체험했다. 우리에게 주워진 현실은 대학 3학년으로 이제 사회로 진출한 계획과 준비로 바쁘고 그 사회라는 세상의 우리의 이상과 꿈의 체제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긴 시간과 190,000원이라는 돈을 준비해 6일의 시간동안 과 학우들과 즐겁고 여유롭게 보냈지만 다음에 이런 기회가 다시 주워지지 않는 다는 조건은 메마른 현실의 제약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땅에 묻혀져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정신적 터전임을 느낄 수 있었고 이 경험이 우리에게 조용한 휴식과 더불어 비워진 가슴의 한 부분을 채워주는 의미 있는 외출 이였다고 기억될 것이다.
이 여행이 있기까지 기대와 성원, 적극적인 동참을 보내준 학우들(살찌고 잘 노느라 수고한, 사고 없이 돌아온)과 우리를 인솔하느라 수고 한 만용이형,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교수님들, 그리고 스케줄에 대해 큰 도움을 주신 김상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정신적 성원을 보내준 박조교님과 최조교님의 기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