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디스가 위치한 프랑스 남부의 빌두베르(Villedubert)는 인구가 340명 남짓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알고 약간 어이가 없었다. 인구만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면 단위(도회지의 경우 아파트 한 동 주민 숫자에 불과하다) 정도의 이 작은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세계 최고급 진공관앰프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실제로 가보지 않은 채, ‘구름 위의 산책’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돌로 쌓아 담을 친 ‘도멘’ 풍의 모습만을 상상하면서 얘기를 하자니 답답하긴 하지만, 이런 곳에 오디오 회사를 차린 인물이라면, 그리고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특유의 사운드 컨셉을 만들어낸 감성이라면 참으로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디스란 말 자체에서 표방하듯 원천적으로 과거지향적인 브랜드철학을 엿볼 수 있다. 1983년 파워앰프 JA-80으로 하이엔드 시장에 진출한 이래 자디스는 빠른 속도로 종합 오디오 메이커로 성장했다.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된 스테디셀러 인티앰프 ‘오케스트라’를 필두로, JA-80에서 시작된 각 10여 종을 헤아리는 프리 및 파워앰프, 견고한 바다의 요새와도 같던 초중량 트랜스포트 JD1, 파격적인 네오클래식 디자인의 스피커 ‘유리스미(Eurythmie)’ 등으로 전세계 오디오파일들을 열광시켜왔다. 여기에 더해서, 컴퓨터 제어방식의 디지털 권선기로 자체 제조되는 트랜스와 결벽증에 가까운 선별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진공관 등을 기반으로 초기 토키 시절을 거쳐온 관록의 거대 진공관 업체들 속에서도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본 제품은 자디스의 25주년 기념 모델이다. 본 제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동사의 실질적 플래그쉽이었던 JP-80MC와 더불어 스테레오파일에 나란히 A등급에 올라있던 시절부터였다. 물론, 라인 전용이긴 하지만 JP-80의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같은 그룹에 랭크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JP-80의 라인단 개념으로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90년대에 마주친 JPL으로부터 변경된 부분을 거의 파악하기 어려운 바, 오리지널 모델을 25주년 기념으로 재출시한 것으로 파악된다. 커버 그릴 상단을 가득 채워 25주년 그래픽 정도가 바뀌어 있을 뿐이다.
고유의 ‘쿤스틀러 스크립트’체로 흘려 쓴 ‘Jadis’ 로고와 제품명 ‘JPL’은 어딘가 어색함을 떠올리기에 앞서 이미 눈에 익숙하게 제품디자인화 되어 있다. 프리앰프, 파워앰프와 무관하게 자디스의 앰프들은 섀시 개념이 없이 하드와이어링 베이스 위에 기판과 트랜스, 커패시터, 진공관 등의 콤포넌트들이 자리를 잡는다. 프리앰프의 경우 전면에 반듯하고 높다란 패널을 세워서 제품을 완성한다. 물론 그릴이 베이스 전체를 덮는다. 이런 명쾌한 방식은 섀시 내부에 수납을 하는 방식에 비해 제조공정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방열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효과적이라서 다수의 진공관 앰프 제조사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뒷 패널엔 6개의 입력과 1개 출력, 모두 RCA 단자만을 지원한다.
특이하게도 aux 입력을 3개씩이나 두어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입력단에는 ECC83(12AX7 호환) 3개를 사용해서 증폭을 하고 있는데, CD입력단에는 ECC82(12AU7 호환) 1개를 추가해서 구성하고 있다. 다른 제품들과 마찬가지로 기판의 하단은 모두 전통의 하드와이어링으로 제작되어 있다. 자디스에게 일반적인 트렌드나 대세, 이런 말들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이 회사는 트랜지스터 앰프가 주류로 자리잡은 80년대 중반 진공관 전문업체로 출발한, 소신 넘치는 브랜드이다. 외관에서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이미지가 감돌지 몰라도, 세심하고 치밀한 설계로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가 공존한다.
오랜만에 자디스의 제품, 그것도 프리앰프를 시청해볼 기회를 갖게 되어 감회가 새로운데, 본 제품을 시청이 진행될수록 역시 자디스만의 사운드컨셉이 강하게 전달된다. 자디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꼭 오늘 다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서두르지 말자구…” 무엇에 쫓기거나 긴장이 도는 분위기는 자디스의 세계가 아니며, 대신 빈틈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자디스의 음악적 담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티앰프, 파워앰프에 비해 단독 시청의 기회가 적었고, 주변에서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던 제품이 아니라서 오히려 집중해서 시청을 하게 되는 효과가 있어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자디스의 음색에는 전형성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동일한 음원을 놓고서도 여운과 울림이 풍성해졌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거의 다른 연주를 듣는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이다.
하지만, 오리지널리티를 떨어뜨리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발견이 되는 쪽이라는 사실에 자디스의 의미가 크게 자리잡는다. 이 효과만으로도 음악의 풍취가 더해지고 감동이 배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음의 정확성이라는 집착으로 그 동안 너무 기계적인 소리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자디스가 일깨우고 있다. 폴리니의 2003년 버전 ‘열정’은 입자에 윤기가 가득히 감돌고 있는 연주이다. 건반의 하모닉스가 실로 풍윤하다. 이 배음은 모호하지 않고 마치 그림자가 보일 정도로 존재감이 뚜렷하다. 이미 풀사이즈이겠지만, 줄과 바디가 약간 더 늘어난 피아노로 연주를 하고 있는 듯한 연주이다. 이로 인해 음의 입자, 스테이징이 모두 확장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고역~중역에 이르는 찰지고 탄력 있는 질감의 느낌이다. 피아노가 밀도 높은 고탄력 플라스틱으로 만든 듯한 소리가 울려 나온다. 실제 음이고 아니고를 분간하기 이전에 누구에게나 설득력 있어 보이는 매우 듣기 좋은 소리이다.
이보다 더 기대가 되는 부문은 고유의 통울림을 가진 현악기이다. 레핀과 아르헤리치 커플의 ‘크로이처’는 음색은 진하고 약간 성긴 듯한 연주이다. 밀도감은 약간 떨어진 듯 하지만, 좀더 밀착된 구체적인 마찰의 느낌이 진하게 전해진다. 단호함은 다소 덜한 듯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드라마틱해져 있다. 보첼리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의 떨림은 상당히 정감 있게 다가와서 마치 훈풍이 부는 듯한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곡을 듣다 보니 현악기보다는 보컬에서 본 기의 장점이 더 발휘되고 있는 듯 하다. 강한 컨트라스트를 그리며, 약간 느리게 말하고 있지만 좀더 분명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밝고 선명한 무대를 입이 떨어질 때마다 가득 채우는 듯한 보컬이다. 음상도 약간 확대되어 있다. 나올 소리는 낱낱이 모두 들려주면서 듣는 사람을 릴랙스시키는 취하는 소리이다. 이 매력은 실로 강렬하다.
이 느긋한 도취적인 사운드컨셉은 모호함이 거의 없다는 게 본 제품의 매력을 배가시켜준다. 규모를 조금 키워서 시청해보면 막연히 서로 뒤섞이지 않을까 싶은 빠른 패시지에서도 핵이 흔들리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출렁인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미사탱고’는 무대 가득한 포만감으로 크게 어필한다. 커다란 스트록으로 휘몰아치는 코러스와 감정의 굴곡을 크게 넘는 드라마틱한 혼성보컬의 규모감이 위력을 발휘한다. 음영의 대조가 선명하고 구석구석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난 번 시청한 최근의 신세대 진공관앰프가 벌새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자디스는 가창오리 떼의 군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면 가득하고 변화무쌍하다. 이 느낌은 헤레베헤 지휘 B단조 미사에 이르면 더욱 극명해진다. 특정 대역구간을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그라데이션의 묘사력이 뛰어나서 낮은 대역은 낮은 대역대로, 높은 대역은 높은 대역대로 구간별 음의 스펙트럼이 훌륭히 떠오른다. 질감도 질감이지만, 자디스의 프리를 여타의 프리앰프와 비교할 때 가장 돋보이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마이크로적으로도 대단히 섬세하다. 빈 공간에 뿌려지는 미세한 입자들이 공간의 사이즈를 그려낸다. 이런 재생은 매우 이상적인 재생으로 여겨지는 부분으로서, 시청자로 하여금 현장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재생기기의 역량이 달린 덕목이다.
최근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추억이란 추상적이고 막연한 기억 속 흔적이지만 그 매개체는 추억을 구체화시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디스를 듣다 보니, 비로소 이 제품이 활약하던 20년 전의 상황이 총체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이다. 자디스 고유의 흡인력으로 인해 그 때의 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막 봉인을 뜯은 빈티지 와인처럼 그 향은 매우 진하고 선명하다. 당초 예상은 했지만, 자디스 JPL은 실로 매력적인 기기이다. 실제음에 얼마나 가까운 지를 갑론을박하는 일이 한심할 정도로 품격 높은 음을 들려준다. 다른 모든 기기를 정격의 모니터로 세팅을 하고 나서, 이 프리앰프를 심어놓기만 해도 공간 가득 향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 : 오승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