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재경동문회 회보 [구봉6호](1999년 상반기호)에 실렸던 "뽐뽀고야"라는 글의 일부이다.
필자는 김필명(7회) 동문이며 당시 부산석포여중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뽐뽀고야
- 여름이 되면 유명한 송도 해수욕장이나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부모 몰래 무리를 지어 다녔다. 왕복차비와 간식 준비도 없이 걸어다녔던 재미를 잊을 수가 없다. 점심도 굶어가며, 배고픔도 잊고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던지 지금 돌이켜보면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거리가 멀어 지치고, 배고파 지치고 하던 중에 어떤 아이가 가까운 장소가 있다며 제안하였던 곳이 초량 4부두 쯤 앞에 있는 '뽐뽀고야'라는 곳이다.
바다물을 유입하여 만들었던 곳이라 기억되는 조그마한 개울 같은 장소이다. 세월이 흘러 희미한 기억으로는 지금의 조그마한 풀장 모양이라 생각된다. 여름에는 거의 매일 '뽐뽀고야'를 찾았는데 초등학교 시절의 또래 개구쟁이들에게는 유일한 쉼터요, 놀이터요, 체력 단련 수련장이었다.
얼굴과 몸은 완전히 검게 타서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추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뽐뽀고야라는 이름이 어떻게해서 정하여 졌는지 지금도 젼혀 알지 못한다.
한 녀석이 "뽐뽀고야 가자!"하고 속삭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유혹을 하면 잰 걸음으로 내달았다.
우리동네 가까이에는 또 하나의 풀장(?)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감히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곤 하였으니 개구쟁이는 과연 겁도 없나보았다. 지금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는 초량 수원지이다.
잘 꾸며진 수원지는 식수 보호구역이라 출입금지인데도 이따금 씩 몰래 멱을 감았다. 더위를 견디다 못한 동네 개구쟁이들이 야음을 틈타 철망을 뚫고 침입하여 교대로 보초를 세우고 수원지에서 용서받지 못할 도둑 고양이 잠수를 하며 놀았으니, 실소를 머금고 죄지은 심정으로 아득한 세월을 되돌아본다. 인간은 누구나 회귀성 본능이 있고, 추억 속에 살아가는 동물이라고도 한다.
꿀꿀이 죽이나 붕어빵이 유일한 간식이었고(이나마 먹기도 어려웠지만), 새 운동화와 양말 한 켤레를 손꼽으며 명절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꿈과 해학이 구름처럼 송송한 추억이다. 초량 뒷산 자연의 향기속에서 맑은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뒷산 개울에서는 가재를 뒤적였다. -
2) 해방 전 우리 학교 근처 모습
박현태(1회) 동문의 <하이에나 저널리즘>이란 책을 [구봉창간호](1996년 하반기호)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속에 이 부분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한 부분이다. 해방 전 부산과 수정동 모습이 아련한 그림처럼 그려져있다.
해방 후 일본인 제3소학교였던 제3국민학교(곧이어 중앙국민학교로 개칭)가 개교하자 새 학구(學區) 규정에 따라 수정, 초량, 봉래에 재학했던 일부 학생들이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전학한 학생들로 이루어진 전교 24학급의 조촐한 새 학교였다.
이때 졸업 후 제1회가 된 학생들은 편입한지 9개월여(?)만에 졸업하였다.
- 이 때 부산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의 광복동 거리에나 사람들이 북적거릴 뿐 외가닥 전차길이라 군용차나 가끔 지나다니고 이따금 전차나 다니는 정도였다.
우리는 아스팔트 길이 좋아 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전차 차장을 하는 열이 아버지를 만나면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가면서 태워달라고 조르면 아무데서나 세워주어 공짜로 얻어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열이'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해방 전 조선에서 전차가 다니던 도시는 부산과 경성과 평양 뿐이었다. 바다도 매립이 되어 있었지만 관부연락선이 닿는 제1부두와 중앙부두를 제외하고는 건물은 거의 없고 그저 잡초만 우거진 풀밭이 부두까지 펼쳐져 있었고 가끔 모형 비행기 대회라도 하면 그 곳이 이용되고, 평시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부두 바로 앞에서는 어부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 밑 뻘에서 쇠갈쿠리로 홍합을 건져올리고 있었고, 아이들이 낚시바늘을 드리우면 제일 많이 걸리는 것은 복어였다.
지금과는 달리 공해가 전혀 없던 시절, 비가 오면 바다 고기들이 허옇게 떼를 지어 개천을 거슬러 올라와 동네를 지나고 산 밑이 가까운 수정국민학교 앞 개천, 항고녀(港高女: 지금의 경남여고) 앞 개천까지 이르렀다.
아이들은 고무신을 벗어들고 고기잡이에 나섰으니, 꿈만 같은 옛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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