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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世 敎 會 史 스크랩 01 제정러시아 시대의 민중종교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15 14.07.17 16: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irt.kr 국제개혁신학목회연구원

 
 
 
제정러시아 시대의 민중종교
― 분파교 : 러시아인은 정교도인인가?
 
 
남 석 주 고려대 강사
 
I. 들어가는 말
 
슬라브애호주의자들은 역사의 원동력을 신앙으로 보았으며, 러시아 역사의 내적 동인이요 러시아의 정신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상정하였다. 또한 이에 대립적 개념으로 서구의 정신을 카톨릭과 신교로 설정했다. 카톨릭을 자유 없는 통일의 정신으로, 신교를 통일 없는 자유의 정신으로 보았다면, 러시아 정교회를 통일과 자유의 양면성을 소유한 소보르노스찌로 보았다
 
 소보르노스찌는 슬라브애호주의의 사상적 지주인 호먀코프에 의해서 만들어진 러시아 정교회사상이다.
세르게이 불가코프는 ‘러시아 정교회는 소보르노스찌’(Православие-соборность) 라고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соборность라는 개념은 러시아어의 ‘집회’, ‘모임’을 의미하는 собрание에서 유래한 것이다. собрание라는 단어는 кафолический라는 용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그리스어로 ‘kathol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всеобщий-전체의, 보편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즉 соборность란 ’모든 것의 통일‘을 뜻하는 것이다. 호먀코프의 소보르노스찌에 대한 연구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보르노스찌 정신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이 러시아 농민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즉, 러시아 농민들을 러시아 정교회의 정신적 중심체로 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러시아인은 정교도인이라는 도식이 유출되는 것이다. 러시아인은 정교도인이라는 도식은 니콜라이 1세때 우바로프가 제창한 관제국민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관제국민주의와 슬라브애호주의와는 현저한 사상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러시아인은 정교도인이라는 사고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관제국민주의와 슬라브애호주의와의 차이와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때문에 슬라브애호주의자들은 분파교(сектантство)와 분리파교(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о)들에게서 러시아의 정신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분리주의적 성격은 러시아의 공동체 정신과 대립되는 서구 유럽의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분리파와 분파교가 서구 유럽의 산물인가? 아니면 러시아 정신문화의 산물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진정한 러시아인이라면 결코 분리파교도나 분파교도가 될 수 없다는 비약된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 논리로 인해 분리파나 분파교는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인들에 의해 발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러시아 역사에서 소외되어왔으며 러시아 민중종교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러시아 분파교(Русское сектантство)에 대한 연구는 정교회 사제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져왔지만, 그 목적이 다분히 분파교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이들을 정교도인들로 개종시키려는 러시아화정책  (русификация) 속에서 행하여져왔기 때문에 수많은 양의 연구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보브리쉐프-푸쉬킨(А.М. Бобришев-Пушкин)은 그의 저서『법정과 분리파, 분파교: Суд и  раскольники-сектанты?에서 정교회 사제들에 의해 쓰여진 연구물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분파교에 관한 학문적 연구물들은 혼돈의 무질서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잡동사니들과 같은 역사적이며 동시대적인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1870-80년대 사이에 인민주의자들 가운데 인민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이들의 삶의 기저에 놓여 있는 종교에 대한 관심도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프루가빈, 야세비치-보로다예프스코이, 멜구노프 등을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인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종교를 억압하는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강한 반감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인민주의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연구물들은 기존의 러시아 사제들에 의해 쓰여진 연구물과는 다르게 분파교도들의 삶과 종교와 사회-경제적 측면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맑스주의 시각에 입각하여 분파교를 연구한 학자들로서는 플레하노프(Г.В. Плеханов)와 본치-브루예비치(В.Д. Бонч-Бруевич), 클리바노프(А.И. Клибанов)를 들 수 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러시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분파교를 포괄적으로 연구한 맑스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억압받았던 분파교도들을 정교회와 짜르 정권의 타도를 위한 혁명세력에 흡수하고자 본치-브루예비치에게 러시아에 존재하는 분파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지시하였다.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보로네쥐, 하리콥, 스타브로폴, 카프카즈 지역뿐 아니라 런던에까지 갔다. 그의 연구물들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로서는 Материалы к истории и изучению религиозного сектантства. Лондон. 1902. / Значение сектантства для современной России. Женева. 1902. / Из мира сектантства.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М., 1922 등이 있다.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분파교 내의 신도들간의 계급갈등과 계급투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결국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의 고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회, 종교적 측면에서의 이해와 접근이 부족하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각에 뒤이어 소비에트 시기에 분파교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클리바노프를 들 수 있다. 러시아의 분파교사(История религиозного сектантства в России (60-е годы XIX в-1917 г) М., 1965),  종교적 분파교: 동시대성(Религиозное сектантство: современность. М., 1969), 분파교의 세계에서(Из мира религиозного сектантства. М., 1974), 러시아에서의 인민의 사회적 유토피아(Народная социальная утопия в России. М., 1977)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연구물들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의 시각도 본치-브루예비치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본치-브루예비치가 자료수집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클리바노프는 분파교에 대한 좀더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이해와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계급사관에 기초한 분파교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존재했던 분파교에 대해 전통적으로 정교회 사제들은 이를 신비주의와 합리주의 분파로 양분하여왔다. 여기서 신비주의란 지나치게 영의 것을 강조하며, 인간과 신과의 교제에 있어서 어떤 매개체-사제-도 개입되지 않은 직접적인 신과의 교제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붙였으며, 합리주의란 성경에 대한 해석을 사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개인이 스스로 합리적 이성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해석하며 특히 서구 유럽의 영향력 하에 생겨난 것을 강조하는데서 유래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분법은 분파교에 대한 올바른 구분법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신비주의적 요소와 합리주의적 요소가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혼합적으로 때로는 서로 적대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밀류코프(П.Н. Милюков)는 이에 대해 영지주의 분파(Духовное сектантство) 과 복음주의 분파(Евангельское  сектантство)로 구분하고 러시아 자체 내에서 발생하여 이원론적 가치관에 기초한 종파들을 영지주의 분파로,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종파를 복음주의 분파로 구분하였다.
 
 필자는 이 구분법에 따라 러시아 분파교의 전반적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분류법에 의하면 전자의 경우는 흘르이스트이, 스코프쯔이, 두호보르쯔이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몰라칸네, 슈툰디스트이, 파쉬코프쯔이 등을 들 수 있다. 톨스토이파는 이 분류법에 적용되지 않지만 러시아 분파교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위의 종파들은 러시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파들 가운데 제정 러시아 시대에 러시아 민중들의 종교적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각 종파들에 대한 좀더 심도 있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위 종파들은 종파간의 상호 연속성과 공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함께 살펴봄으로써 러시아 민중들의 종교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때문에 필자는 이 글에서  그 동안 러시아 역사 속에 존재해왔으면서도 바로 그 러시아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온 분파교를 통해 러시아 민중 종교의 전반적 성격을 알아보고자 한다.
 
II. 영지주의 분파교
 
1. 흘르이스트이(Хлысты)
흘르이스트이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물은 사제 로쥐제스트벤스키(А.Рождедственский)가 쓴 “러시아에서의 흘르이스트와 스코프체스트보”(Хлыстовщина и скопчество в России. М., 1882)가 있다. 로쥐제스트벤스키는 이 책에서 흘르이스트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나아가 신학적 교리와 예배의식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나아가 정교회와 분파교와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정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최근에 나온 분파교에 대한 연구물로서는 에트키드(А. Эткинд)가 쓴 “흘르이스트”(Хлыст М., 1998)가 있다. 그는 이 글에서 흘르이스트뿐만 아니라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러시아에 존재했던 신비주의종파와 더불어 흘르이스트를 설명하였다. 특히 흘르이스트에 대한 역사학적, 사회학적, 신학적, 민속학적, 심리학적, 문학적,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함으로써 흘르이스트에 대한 종합적이며 객관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나아가 동시대인들 가운데 블록과 벨르이와 같은 문학가들과 솔로비요프, 베르쟈에프, 로자노프, 메리쥐코프스키등과 같은 사상가들과 흘르이스트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19세기말과 20세기초 분파교와 러시아 사상, 문학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분파에 대한 명칭은 ‘흘레스타찌(хлестать)’―채찍이나 몽둥이로 치다―라는 노어의 동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고,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라는 ‘흐리스톱쉬나(христовщина)’라는 단어가 왜곡되어 생겼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분파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이 분파의 생성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니콘에 의한 러시아 정교회 대분열시기인 17세기 중?후반 볼가 강 중류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견해에 의하면, 이 분파의 창시자는 블라디미르 주나 혹은 카스트롬 주의 농민 출신인 다니엘 필립으로 보고 있다. 그는 1645년 자신을 가리켜 이 땅에 구현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12계명을 만들어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리를 카스트롬 주, 블라디미르 주, 니졔고로드 주 등에 다니면서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주의 농민이었던 이반 수스로프가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1649년 다니엘 필립은 수스로프를 가리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명명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수스로프는 그의 스승의 교리를 블라디미르, 니제고로드 주에서 시작하여 모스크바까지 전파하였다. 그의 교리는 일반 백성, 농민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수도원의 정교회 사제들과 여사제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수스로프는 1716년에 체포되어 1732년 죽지만 이때까지 이미 8개의 모스크바 수도원에서 흘르이스트들의 의식이 거행될 정도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1733년 이 분파에 대한 법적 조사가 단행됨으로써 78명의 추종자들이 체포되고 그 중 3명의 지도자들은 참수 당하고, 나머지들은 체형을 받은 후에 시베리아와 타지역의 수도원 등으로 유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파의 교리는 계속 확산되어 모스크바, 니제고로드, 카스트롬, 블라디미르, 야로슬랍 이외에도, 리쟌, 티베르, 심비르, 펜젠, 바로고도, 심지어 페테르부르크에도 전파되었다. 계속적으로 확산되는 이 분파의 세력을 막기 위해 1745년에서 1752년 사이에 2차에 걸친 법적 조사가 단행되었다. 이때 416명의 추종자가 체포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정교회 사제들, 남녀 수도승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감옥이나, 수도원 등에 감금되었고 혹은 유형보내졌다.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알렉산드르 1세의 등극과 함께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종교에 대한 자유의 물결이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강하게 일기 시작하였다. 짜르 정권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이 없는 한 구교도, 카톨릭, 신교, 이슬람, 불교, 나아가 프리메이슨, 여타 분파 등에 대한 폭넓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흘르이스트 분파도 가장 활발한 교세 확장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등극과 더불어 펼쳐진 반동주의적 정치체제 속에서 타종교에 대한 새로운 탄압과 흘르이스트파 내에서의 분열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에 흘르이스트파 가운데 ‘새이스라엘(Новый Израиль)’이라는 분파가 루브코프(В. Лубков)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철저히 육체의 활동을 금하는 흘르이스트의 금욕주의를 거부하고 막연한 신의 나라의 도래보다는 이 땅에 신의 나라를 건설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설파하였다. 1905년 그는 정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외적으로 흘르이스트파는 1905년까지 정교회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교회를 다니며 세례식, 성찬식, 교회축일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그의 추종자 2,000명을 데리고 새 예루살렘 건설이라는 명목하에 우루과이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직전에 이 분파의 추종자로는 ‘새이스라엘’이 20,000명, ‘옛 이스라엘’이 15,00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통계숫자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제장 부트케비치(Т.И. Буткевич)는 1910년에 약간의 과장을 섞어 “현재 흘르이스트파가  전러시아 땅에 확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프루가빈은 “러시아의 거의 모든 주와 군에 4~5천 명 이상씩 존재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본치 브루예비치는 ‘옛이스라엘’이 50만 가까이 된다고 추정하였다.
 
흘르이스트파의 중심적 내용은 신의 반복구현설(перевоплощение)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 이 땅에 온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통해 끝없이 구현됨으로서 수백 명, 수천 명의 예수가 탄생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예수는 이 땅에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 수많은 구원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흘르이스트파의 설립자인 다니엘 필립은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그의 후계자 이반 수스롭을 ‘예수 그리스도’로,  그 외에 추종자들을 ‘성령’으로 지칭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교리는 영혼윤회설로 발전하여 인간의 육체가 죽으면 영은 천사가 되든지 혹은 악령이 되든지 아니면 이 땅에서 배회하든지 혹은 아기나 짐승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의인의 죽음, 즉 흘르이스트들은 죽은 후에 영은 여호와께로 가고, 덜 의로운 자는 아기에게로, 정교회 신자는 짐승에게로 간다는 것이다.흘르이스트파의 이러한 영혼윤회설에 대해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민속학자인 바르소프(Е.В. Барсов)는 인도나 페르시아의 이교도적 세계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이러한 사상이 러시아에 유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종파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둥이나 채찍으로 자신을 치면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삶을 본받아 이 땅에서 철저히 금욕 생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물질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존재해왔으며 인간의 타락 이후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육체란 사단이 준 것으로 모든 악과 죄의 시작이며  인간의 역사란 바로 선과 악, 영과 육의 싸움이므로 철저히 육체의 욕망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적 영지주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삶의 쾌락을 금지시켰다. 결혼생활을 금하고 결혼한 자들은 자녀를 낳지 말며 부부와 같이 살지 말고 남매와 같이 살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음식도 차, 커피, 고기, 생선, 감자, 양파, 마늘, 담배  등 많은 것들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이원론적 금욕주의 세계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어갔고, 19세기초에는 그들 공동체 내에서 결혼을 인정하였으며, 금지된 음식들에 대해서도 보다 완화된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새이스라엘 분파였다. 그러나 역으로 흘르이스트들의 금욕주의보다 더욱 철저하게 육체의 모든 욕망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소수의 추종자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스코프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 스코프쯔이 (Скопцы)
이 분파를 가리켜 거세파라고 부르는데, 이는 노어의 ‘거세’ 라는 뜻을 가진 오스코플레니에(Оскопление)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명칭에서도 보여주듯이 철저히 육체의 욕망을 죽인다는 뜻에서 남성은 성기를 여성은 가슴을 수술을 통해 제거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분파교 연구가인 사제 로쥐제스트벤스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스코프체스트보의 생성과 발전은 흘르이스트에 기인한 것이다. 스코프체스트보의 교주는 원래 흘르이스트였으며, 그는 흘르이스트의 공동체에서 스코프체스트보에 관한 교리를 처음으로 전파하였다. 때문에 종교의식은 흘르이스트와 스코프체스트보와 거의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흘르이스트파의 종교의식은 거의 도덕적 무질서로 끝을 맺지만 스코프체스트보는 이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스코프쯔이들은 흘르이스트이와는 다르게 여호와신이 이 땅에 구현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구현된 것이며 그것도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흘르이스트들에 있어서 예수는 수백, 수천 명도 될 수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적 권위가 조직 내에 부족했다는 특징을 가지고있다면, 스코프체스트보에 있어서 예수는 교주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권위는 절대적이며 이로 인해 각 지역은 중앙에 철저히 복종하는 중앙집권적 조직체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영혼윤회설도 스코프체스트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분파의 교주인 콘디라티 세리바노프(Кондратий Селиванов)는 흘르이스트 공동체의 한 회원으로 있다가 1760년경 흘르이스트들의 성적 무질서를 비판하고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으로서 거세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툴 주에서 그의 열렬한 추종자인 알렉산드르 쉴로프(Александр Шилов)를 만나고 그와 함께 에미리얀 레티보라는 한 공장의 서기에게 첫 거세를 행하였다. 그의 교리는 흘르이스트들 가운데 영향을 미쳐 1775년 이미 거세한 자들이 60명 가량에 이르게 되었다.
 1772년 쉴로프는 체포되어 1800년 죽기까지 쉬리셀부르크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고 1775년 세리바노프는 체포되어 심하게 체형을 받고 네르첸스키로 유형 보내어졌다. 그는 자신을 자칭 예수라고 할 뿐 아니라 죽지 않고 생존한 표드르 3세라고 주장하였다. 파벨 1세는 그를 불러 정말 자신의 친아버지냐고 물어보았다. 이때 그는 친아버지가 아니지만 파벨 1세의 구원을 위해서는 거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파벨 1세는 그를 잡아 아부호프의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버렸다.
 알렉산드르 1세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석방되고 그의 교리는 점차 부자들, 소지주들, 상인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심지어 알렉산드르 1세는 1805년 프랑스와의 아우스테르리쥐 전투의 출전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세리바노프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교리는 특히 친위대에 있는 군인들 가운데 큰 세력을 얻었으며, 심지어 한 공후 부인은 성모 마리아의 자격으로 이 분파의 신도가 되기도 하였다. 1820년 세리바노프는 체포되어 1832년 죽기까지 수스달에 있는 스파소-에브피모프의 수도원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의 죽음 후에 추종자들은 곧 천년왕국이 도래하고 세리바노프는 재림주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니콜라이 1세의 등극과 더불어 정교회 이외의 분파에 대한 탄압과 함께 스코프체스보에 대한 탄압도 행해졌다. 거세한 자들에 대해서는 8~12년간의 감옥생활을, 이 분파의 추종자들에게는 15~20년간을 구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파의 세력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포베다노스쩨프(К.П. Победоносцев)가 신성종무원장으로 있던 시기인 1886년에 136명이 체포되어 유형 보내짐으로써 스코프체스보의 세력은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전야에 이 종파의 신도수가 대략 100,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1929년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과 더불어 그 수는 2,000명 정도로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코프체스트보의 교리의 기초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9:10­12에 근거하고 있다. 마태 복음 19장 전반부에서 예수께서 음행의 연고 이외에 아내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가정은 어떤 형태로서든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의 질서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때 제자들은 그렇다면 아예 장가들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반문하였고, 예수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Ибо есть скопцы, которые из чрева матернего родились так: и есть скопцы, которые оскоплены от людей: и есть скопцы, которые сделали сами себя скопцами для Царства Небесного. Кто может вместиь, да вместит.) 하였다.
 
여기서 ‘고자’는 노어로 ‘스코프쯔이’인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종교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극단적인 금욕주의 행위가 어떻게 러시아인들 가운데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 대해서 에고로프는 ?종교와 사제?라는 논문에서 러시아인의 종교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러시아인에게 있어서 수도원은 이 세상에 대한 완전한 결별이요 분리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프쯔이들에게는 수도원이 완전한 결별도 끝도 아닌 것이다. 그들의 견해로서는 성적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수도원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세속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性)을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죄는 바로 성의 필수적인 결과물이다.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성, 육체의 욕망을 가져오는 성을 제거함으로써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세속에 대한 철저한 부정, 극단주의적 사고는 이 땅에 곧 임하게 될 영원한 나라, 거룩한 나라, 신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뿌리는 정교회에서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고는 이 땅에 대한 허무주의를 낳게 하였고 이러한 허무주의는 전형적인 러시아적 현상으로 정교의 정신적 토양에서 자란 것이라고 베르쟈에프는 말하고 있다.
 
3. 두호보르쯔이(Духоборцы)
이 분파의 발생시기는 대체로 1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호보르체스트보라는 명칭은 암브로시 대주교가 예카제리나슬라브 주에 있는 이 분파의 추종자들에게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성령의 존재를 거부한다는 뜻에서 붙인 명칭이지만 두호보르쯔이들은 성령(Святой Дух)이 아니라 성상(икон)숭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두호보르체스트보의 설립자는 예카제리나슬랍 주의 니콜 마을 출신의 박식한 실루안 코레스니코프(Силуан Колесников)였다. 그러나 두호보르체스트보의 확산은 18세기 말 탐보프 주의 거부상인인 이라린 포비로힌(Иларин Побирохин)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명하고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위임하기 위해 12사도를 택하였다. 그의 열렬한 추종자로서는 퇴역장교 출신인 사벨리 카푸스틴으로서, 탐보프 주에서 이 분파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그는 큰 키와 화려한 언변과 성경에 대한 깊은 조예로 하리콥, 예카제리나슬라브, 탐보프, 보로네쥐, 사라톱, 아스트라한, 페젠 주들과 돈 강의 카프카즈인들과 시베리아 등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 1세 때 집단이주가 허용됨으로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브리 주의 몰로치 강 유역의 스텝 지역으로 4천 명 가량이 이주하였다. 정부의 이교도에 대한 관대한 종교정책과 두호보르쯔이들의 근면과 내면적인 조화로운 삶의 결과로 이주지역에서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등극과 더불어 이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두호보르쯔이들은 비정교회분파 가운데 가장 악한 분파로 규정되었다. 이는 그들이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에 기초하여 군복무를 거부함으로써 정부에서는 국가의 권세에 불복종하는 분파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838년에는 정교회 사제들, 군수, 국가재산위원회 의장, 친위대 장교들로 구성된 비밀위원회가 만들어져 이곳에서 구교도들과 분파교도들에  대한 공식적인 감시가 시작되었다.
 1841년에는 두호보르쯔이들에게 타브리 주에 위치한 ‘몰로치느이  강’가로 이주를 금하고 이곳에 거주했던 두호보르쯔이들 가운데 4천 명 가량을 카프카즈 지역으로 강제 집단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때 이지역으로도 두하보르쯔이들이 이주하였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두하보르쯔이들은 대략 2300명 정도 되었다.
  
19세기말 톨스토이파의 영향력이 두호보르체스트보에 미치게 되었다. 전쟁금지, 모든 계층의 평등, 개인의 토지소유 반대 등의 이론이 첨가된 교리를 두호보르체스트보에게 전수해줌으로써 이들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톨스토이파가 전해준 신앙교리는 당시 존재하던 사회와 국가질서에 위배됨으로 1898-1900년 사이에  두호보르쯔이들은 다시 한번 카프카즈에서 카나다로의 강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주민은 대략 7,400명 정도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러시아 공식 통계에 의하면 이때까지 이주한 두호보르쯔이들은 대략 15,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이들 가운데 13,000명 정도가 카프카즈 출신들이었다.
 1905년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선언문이 발표된 이후에 카프카즈 지역에서의 두호보르체스트보에 대한 종교적 상황은 호전되어 혁명 전야에 거의 20,000명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밀류코프는 두호보르체스트보가 흘르이스트이의 영향력을 받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호보르체스트보는 흘르이스트이와는 현저히 다른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두호보르체스트보의 신앙고백서’를 보면 이 분파의 생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동의 없이 모든 외적인 종교의식을 치러왔고, 또한 우리의 자녀에게도 이를 행하여 왔다.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하며, 어떤 이들은 이미 노쇠하였다. 일생을 교회에 다녔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이해할 수 없는 성경 본문과 알아듣기 어려운 예배에 대해 우리는 단지 지루함 그 자체만을 느꼈을 뿐이다.... 우리는 악에 속한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러한 소경의 상태에서 살아왔으며 현재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분파의 발생원인이 형식화, 의식화된 정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에서 출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호보르체스트보의 교리문답서와 생명의 책에 의하면 성상 숭배, 성찬, 세례식, 교회 내의 계급적 구조, 성자전, 십자성호, 금식, 나아가 교회 출석 등의 정교회의 모든 외적인 의식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나, 금욕주의적인 생활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내면의 거룩함, 즉 이웃에 대한 사랑과 내적인 순결함과 도덕적 절제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흘르이스트들의 주장처럼 육체가 사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회개를 통하여 교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두호보르쯔이들은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그들이 처한 사회에서 빨리 부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두호보르체스트보의 교리 가운데 하나님은 유일신이며 창조주요, 구원주, 심판자로서 인식되었다. 그를 능력과 지혜와 의지의 신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였지만 이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세상과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시켰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하나님은 빛으로, 예수는 생명으로, 성령은 평화로 나타나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각으로, 성자는 이성으로, 성령은 의지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이해한 삼위일체와 하나님이라는 개념 속에 범신론적 사고가 가미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교리는 몰라칸스트보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III. 복음주의 분파교
 
1. 몰로칸네 (Молокане)
이 분파의 명칭은 금식기간에 정교회에서 금지된 우유제품들을 자유롭게 먹는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고, 혹은 이 분파의 많은 신도들이 ‘몰로치 강’ 유역에 살기 때문에 이를 따서 붙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몰로칸네들은 영적 몰로코(노어로 이것은 우유라는 뜻)를 사모하는, 즉 말씀을 사모하는 ‘영적인 사람들’ 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몰로칸스트보는 18세기 후반에 두호보르체스트보에서 유래하였다. 두호보르체스트보를 발전시킨 파비로힌의 사위인 세멘 우클레인은 장인의 교리를 비판하고 그에게서 분리되어 탐보프 주에 새분파를 만들게 되었다. 우크레인은 자신의 주위에 70인 사도를 택하고 모든 진리의 기준은 성경에 기초할 것을 주장하며 특히 신약성경을 진리의 모퉁이돌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회의식서(Обрядник)’를 만들어 몰로칸네들이 지켜야 할 신앙교리의 내용을 전수하였다. 이들의 교리는 정교회의 교리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인간창조나, 타락, 재림 등은 동일하지만 두호보르체스트보처럼 죽은 자의 부활 가운데 영의 부활만을 인정하고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이들은 두호보르체스트보와 같이 교회의 외적의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두호보르체스트보보다는 공동체 내부가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예를 들면 성경 봉독자, 성가대원들, 성경 선생, 목회자들이 따로 구분되어 봉사하도록 하였다. 술과 담배는 금하였으며 금식에 대해서는 인정하되 공식적으로는 1년에 한 번 고난주간에 하도록 되어있고 나머지는 개인의 필요성에 따라서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하였다. 두호보르체스트보와는 다르게 국가권력과 짜르의 권위에 복종하며 이들을 위한 공식적인 기도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으므로 군복무를 거부하거나 군대에서 탈영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함으로써 두호보르체스트보와 동일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 분파교의 사회계층은 대체로 낮은 신분들로서 관노들, 농노들, 수공업자들, 축산업자들,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이할 점은 몰라칸네들 가운데 문맹자가 매우 적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을 알기 위해서 신도들로 하여금 글을 깨우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19세기에 다른 분파교들보다 더욱 신속하며 폭넓게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르 1세 때에 두호보르체스트보와 동일하게 정교회와 분리되어 타지역으로의 집단이주 허락을 받게 되었다. 1811-1814년 사이에 볼가 강 유역의 아스트라한 주와 사라톱 주와 베사라비 쪽으로 많은 몰로칸네들이 이주하였고 1823년에는 3천 명 가량이 멜리토폴 주의 몰로치 강 유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 때에 1842년 몰로칸스트보는 해로운 분파 중의 하나로 규정됨으로써 국가로부터의 공식적인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파는 끊임없이 성장하여 1885년에는 35천 명 가량이 되었다.
 1905년에는 전 러시아 몰라칸스트보 연합집회가 결성됨으로서 각 공동체간의 종교, 문화, 출판, 학문 등에  공동 협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1912년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당시 몰라칸네가 133,935명으로 되어 있다.
몰로칸스트보는 19세기 중반부터 분열하기 시작하여 20세기초에는 4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수보트니키(Суботники)라고 불려지는 안식교가 몰로칸스트보에서 분리되어 19세기 중반에 세멘 달마토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구약에 모세5경에서 금한 음식 가운데 돼지고기와 일부 생선을 금하고 주일 대신에 토요일에 예배를 드림으로써 안식교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1830년대경에는 몰로칸스트보에서 신비주의 성향의 ‘프르이구노프’(Прыгуны) 분파가 형성되었다. 1832년부터 몰로칸네들 가운데는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1836년 테렌티 베로브조롭은 자신이 선지자 엘리야이며 아라랏산에 천년왕국이 도래하며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루키얀 표드롭, 사콜로브 등에 의해 거짓 메시야의 출현은 계속되었으며 천년왕국의 도래를 소망하며 살아왔다. 1908년 통계에 의하면 이들의 신도수는 9,000명 가량 되었다.  현재는 이들의 소수만이 아제르바이쟌과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다.
 
1820대 말에는 돈 강 유역에 많은 몰로칸네들이 이주하면서 몰로칸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돈 강 유역의 몰로칸네(Молокане донского  толка)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복음주의 기독교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후에 복음주의 러시아 침례교도의 모판이 되었다. 1905년에는 몰로칸 출신인 프라하노프(И.С. Проханов)에 의해 티플리스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잡지가 발간되고 그는 전 러시아 복음주의 침례교의 의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그 이외에도 바로닌, 이반, 파블로프 등, 초대 러시아 침례교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바로 티프리스의 몰로칸 출신이었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 침례교의 한 뿌리가 몰로칸스트보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 슈툰디스트이(Штундисты)
이 분파의 명칭은 독일어의 ‘시간’이라는 뜻의 ‘슈툰데Stunde’에서 유래한 것이다.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야곱 스페너가 ‘교회 안에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는 취지로 교회 내에서 소원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더불어 시간을 정해 성경 공부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경건주의 흐름이 예카제리나 2세 때 남부러시아 지역 남부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를 의미한다. 제정러시아시대에 남부러시아는 ‘소러시아’(Мало-Россия)라고도 불렀다. 이는 러시아를 ‘대러시아’(Велико-Россия)라고 부름으로서 그 대비개념으로서 ‘소러시아’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들은 식민지정책과 더불어 러시아로 들어오게 되었다. 에카제리나 2세는 1762년 12월, 1773년 7월 2차에 걸쳐 남부러시아 지역의 광활한 스텝 지역을 식민지화하고자 외국인 이민화정책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0항으로 되어 있는 이 선언문에는 외국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30년간의 세금, 부역, 군복무 면제 등의 특권을 제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특히 많은 유럽인들이 남부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독일인들이었다. 1783년까지 이곳에 이주한 독일인들은 무려 예카제리나슬랍 주에 5만 2천 명, 헤르손 주에 26만 3천 명, 타브리 주에 21만 4천 명이었다. Бондарь О. Д. Секта Меннонистов в России. Пг., 1916. СС. 1-6
 이 가운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프로테스탄트의 각 종파들―재세례파, 모라비안교도들, 루터교드들, 케이커교도들 등―이 이주하였다. 1890년대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일인들이 차지한 면적은 거의 2백만 데스티나 1 데스티나(десятина)는 1.092 헥타아르에 해당된다.  30만 이상의 이주민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 알 수 있다.
 
러시아 슈툰디즘의 발생 슈툰디즘을 비롯한 복음주의 분파교의 발생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고: 남 석주, “농노 해방 시기의 러시아 정교회와 신교” 『슬라브학보.』 1999년 제 14권 2호.
 
1861년 농노해방 이후에 남부러시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공장이나 가내수공업에서 러시아 농민들이 노동자로 혹은 이들 가정의 보모나 집사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초기 슈툰디즘의 대표자들인 미하일 라투쉬느이, 발라반, 이반 랴보샤프카들은 독일인들의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근무하면서 독일 슈툰디스트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들을 정교회 신자에서 신교도로 개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당시 라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주교 알렉세이는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신교 부흥활동에 큰 역할을 담당한 선교사로서는 개혁주의 목사인 보네켐페르였다. 우쉰스키 사제는 정교도들이 신교도로 개종하게 된 배경과 원인을 연구하기 위해 남부러시아 지역의 우크라이나로 1875, 1881년 두 차례에 걸쳐 탐방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도들이 신교도로 개종한 원인 중의 하나를 정교회 사제와 개혁주의 목사와의 영적, 도덕적 수준의 차이에 있음을 언급하면서 보네켐페르 목사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슈툰디즘이 러시아에서의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초에 독일 침례교 선교사들이 러시아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슈툰디즘이 독일 침례교와 연합하면서 슈툰디스트들은 정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헤르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슈툰디즘은 예카제리나슬라브 주와 키예프 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슈툰디스트들과 파쉬콥쯔이, 돈 강 유역의 몰라칸네들이 연합하여 전러시아침례교연합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러시아내의 신교연합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 신성종무원장이었던 포베다노스쩨프 포베다노스체프에 대한 최근 러시아에서의 가장 활발한 연구는 Полунов А.Ю에 이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저작물 가운데 포베다노스체프시기의 국가와 교회, 정교회와 타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에 의해서 연합운동은 해산되었지만, 이때를 기준으로 러시아 슈툰디즘은 거의 러시아침례교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슈툰디즘은 더욱 확산되어갔고 이에 대해 위협을 느낀 포베다노스쩨프는 1894년 내무부에서 공인한 법령을 만들어 “슈툰디즘을 가장 위험한 분파”로 규정하였다. 이 법령을 토대로 침례교, 루터교, 카톨릭 등 타종교에 대한 탄압을 구체화하였다. 예를 들어 슈툰다-침례교, 슈툰다-루터교, 슈툰다-카톨릭(Штундо-баптизм, Штундо-лютеран, Штундо-католицизм) 등으로 명명하여 이 분파교의 지도자들을 시베리아나 그루지야 근처의 기류스 지역으로 유형을 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툰디즘은 러시아 침례교와의 연합으로 인해 계속 성장하였으며 1905년 종교와 양심의 자유선언문이 발표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13~14년 러시아침례교도들의 숫자가 대략 10만에서 20만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교리는 여타 프로테스탄트와 다를 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 재세례파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분구성은 타 분파교와 유사하게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클리바노프는 슈툰디스트들이 대체로 무토지소유자들(Десятинщики - 1 헥타아르 이하의 소지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1870년대에 헤르손 주의 20%가 무토지소유자들이었으며, 80~90년대에는 25%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경작할 토지가 없거나 너무 적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장소를 이동해가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거주자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들의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러시아 슈툰디스트들이 된 것이다.
슈툰디스트이들의 구성성분이 대체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러시아 침례교의 일부로 흡수된 파쉬꼽쯔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파라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3. 파쉬콥쯔이 (Пашковцы)
이 분파의 명칭은 퇴역 장성 파쉬코프가 영국에서 온 백작 출신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레드스토크(Л. Редсток)를 통해 정교회에서 신교로 개종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분파를 가리켜 명명한 것이다. 레드스토크는 1874년 러시아에 들어온 후 페테르부르크의 귀족사회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명성이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귀족사회에 얼마나 컸는가는 톨스토이가 쓴 부활에 잘 나타나 있다. 톨스토이는 레드스토크를 가리켜 “사랑스러우며 선한 이단자”로 묘사하고는 곧이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무지한 자”로 표현하였다.
 레드스토크의 활동에 대해서 연구한 레스코프는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남자들보다는 대체로 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몇몇의 장교들과 두 명의 장군도 있었다...그는 인간의 구원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당시 법무부장관인 백작 팔렌의 딸 리벤, 교통부 장관이었던 바브린스키, 1812년 조국전쟁의 장군이었던 체르네이셥 크루그리코프의 딸 체르트코바, 국가위원회 법무부 위원장의 아들이 코르프 등이 개종하여 파쉬코프운동의 주요인물로 활동하였다. 특히 1876년 레드스토크가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 파쉬코프는 그의 후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우랄 지역에 구리제련공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도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거부였다. 그는 이 부로 무료급식소를 만들어 학생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도시 곳곳에 뜨개질강습소, 세탁업 등을 열어 가난한 여인들에게 이를 가르쳐 주었다. 1876년에는 “영성, 도덕성 회복을 위한 독서모임Общество поощрения духовно-нравственного чтения”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기독교 서적과 잡지 출판사업을 벌였다. 파쉬코프는 1812년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러시아 성서공회의 정신을 본받아 이곳에서 출판한 서적과 잡지들을 모든 대중들이 구입할 수 있도록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였다. 이곳에서 출판한 잡지만 200여 종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러시아 전역에 공급되었다.
 
 파쉬코프에 의한 이러한 활발한 사회활동은 정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고 시몬 디혼은 ?1880~1914 사이에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정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말하고 있다.
 
 파쉬코프는 1884년 러시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교도들을 러시아침례교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연합하는 복음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파쉬코프는 그해 런던으로 추방당하고 출판사는 폐쇄 당했지만 흩어진 신교가 하나로 연합됨으로써 러시아의 복음주의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추방 이후에는 파쉬콥쯔이 운동은 리벤, 체르트코바, 바브린 등을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1905년 이후 프라하노프에 의해 새롭게 연합되어 러시아 복음주의 침례교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확산되어갔다. 특히 형제 구제Братская помощь, 러시아 노동자  Русский рабочий, 기독교인Христиан, 형제 신문Братский листок, 믿음  Вера 등의 잡지를 계속 출간함으로써 러시아 전역으로 침례교들이 확산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IV. 톨스톱쯔이(Толстовцы)
이 분파에 대해서는 종교적 색채로 규정하기보다는 사회?정치적 색채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분파교에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톨스토이의 윤리적?도덕적 교훈들이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신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한 인간으로 봄으로써 신약에 나타난 모든 신비적인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새로운 계명을 만들어 전파하였다. “악에 대해 힘으로 대항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 분노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전쟁하지 말라.” 이 6가지 계명이 그가 주장하는 윤리적, 도덕적 계명이었다. 이 각각의 계명들은 독립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속에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중심사상은 사회나 국가 혹은 역사 속에서 이미 형성된 틀에 의한 강제나 강요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그가 사유재산의 소유, 특히 토지소유에 대한 회의와 모든 형태의 국가나 권위의 악과 부정에 대한 회의, 전쟁이나 폭력에 대한 회의를 가진 것은 바로 조직화된 세계 속에서 한 계층이나, 한 민족이 다른 계층이나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가 정교회를 심하게 비판한 이유 중의 하나도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은 상실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타종교에 대한 심한 억압과 핍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톨스톨이의 사상의 뿌리를 프로롭스키(Г. Флоровский)는 존재해온 역사와 문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즉 허무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허무주의는 존재해온 역사와 문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 온 인류가 계층과 계급간의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하는 내면의 깊은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당시 인텔리겐챠들에게 깊은 공감을 가져다주었다. 하리코프 주의 대부호이며 백작인 힐코프는 톨스토이의 교훈대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도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совместная жизнь”을 주장하였다. 1880년대에는 크냐제브카라는 영지에 톨스토이 회관을 만들어 그의 교리를 전파하였는데, 이곳에 등록된 회원만도 거의 2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Смолич И.К. 앞 책, С. 189
 군복무 거부와 국가법에 대한 부정이라는 그의 교리는 결국 정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 파는 하리콥 주에서만이 아니라 키에프, 예카제리나슬랍, 폴탑, 탐보프, 트베르 주로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톨스토이 파의 계속적인 확장과 그의 끊임없는 정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1901년 2월 20일 정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톨스토이에 대한 출교 명령을 내렸다.“톨스토이 백작이 회개하지 않거나,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지 않는 한 교회는 그를 정교회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교회 앞에 증거하는 바이다...”  
 
톨스토이의 정교회로부터의 출교는 당시 인텔리겐챠들에게 정교회에 대한 심한 회의와 반발을 가져다주었다. 톨스토이와 가까운 사이였던 아르롭 주의 귀족인 스타호비치는 1901년 9월 아르롭 주에 있었던 정교회 선교사회의에서 당시 정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였다.
   
“영적 지도자들의 이름으로서도, 사제의 이름으로서도 아닌 교회의 이름으로서 양심에 대해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양심적인 것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진실도 없고, 참된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란 양심과 믿음이 살아 있는 곳, 그것이 바로 교회의 영역인 것이다. 바로 그런 곳에 교회의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멜구노프, 프르가빈, 스투르베, 메리쥐꼽스끼 등 수많은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은 사랑을 상실한 정교회, 진리의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교회를 호되게 비판하였다. 비록 톨스토이파는 톨스토이의 객사(1910년 11월 7일)와 열렬한 추종자 쥐코프의 정교회로의 개종(1914년)과 혁명정부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졌지만, 인텔리겐챠들의 내면 가운데 농민에 대한 죄의식과 억압받은 양심과 종교에 대한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내적 열망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되었다.   
 
V. 맺는말
 
이상으로 제정러시아 시대의 민중 종교 가운데 분파교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러시아 분파교들의 교리와 발생원인, 발전양상, 신분구성과 문화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과 나아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과 공통점은 제정러시아 시대에 정교회 사제들이 러시아인은 정교회인이라는 도식화된 틀로서는 러시아에서 러시아인들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된 러시아 분파교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며 발전돼온 러시아 분파교가 관제화된 정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낙인을 받은 후에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온 것은 정교회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획일화된 가치관 때문이다. 문화란 한 가지의 카테고리에서 결코 이해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분파교의 교리의 진위에 대한 평가는 신학자들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러시아 민중들의 삶 가운데 한 모퉁이를 차지한 그들의 종교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유고슬라비아로(1919), 그 후에 프랑스로(1926) 망명한 정교회 사제인 젠콥스키(В.В. Зеньковский)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정교회 안에 러시아의 모든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진실되고 용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유라는 대기 밖에서는 도저히 해결되어질 수 없는 셀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분파교는 바로 자유라는 대기 속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출현과 성장은 정교회의 형식화, 의식화에 대한 거부 속에서 내면의 자유를 찾아 그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해보고자 한 종교적 열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분파교는 존재해왔지만 러시아 분파교들은 정교회의 틀 밖에 존재하는 러시아 민중들의 내면적 모습을 보여주는 러시아 종교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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