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물론 도일에게는 더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가끔 의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고, 또 눕혀졌다가 세워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가끔은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긴장을 한 데다가 가끔 귓불 등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도중에 안대가 벗겨졌지만, 이영미가 그 순간에 얼른 그에게 눈을 뜨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참을성있게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었다. 간간이 그녀가 참견하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던 것이다."자, 이제 거의 됐어요. 아주 멋져요! 내가 만든 작품 중에서 최고야!"간드러진 목소리로 호들갑을 떠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목소리는 자신보다 더 곱고 여성스럽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였다."오, 정말 근사한데... 자, 그럼 이제 도경이를 한번 만나보겠니?"이영미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떠들었다. 세 여자(한 명은 남자이지만)도 비명에 가까운 환성을 질렀다.?도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그러나 곧 모든 사물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거울이 보였고, 거기에 드러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며 도일의 턱이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쩍 벌어졌다. 이영미가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머리카락은 짧았지만 손질이 되어 여성스러운 숏컷이 되었고, 색깔은 밝은 금발이었다. 귀에는 각각 세 개의 피어싱을 했고, 그중 두 개는 조그만 큐빅이 반짝였지만, 나머지 하나씩에는 엄지손가락만한 수정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화장 또한 그가 하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신부화장에 가까울 정도로 진하고도 세밀하게 신경을 쓴 것이 눈에 띄었다. 긴 인조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선정적으로 나풀거렸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스럽게 보이는 것이 눈썹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썹은 원래보다 3분의 1쯤만 남은 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듯 다듬어져 있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얼른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열 개의 진홍빛 손톱이 그의 얼굴에 꽃잎처럼 피어올랐다. 펄이 들어가서 반짝거리는 것이 신비스러울 정도였다.?그가 입을 막을 듯한 모습으로 이영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어때? 멋있지? 너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지, 도경아? 자, 이제 얼른 옷을 입고 나가야지."이영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나는 도일은 다리에 힘이 없어 휘청거렸다.?"괜찮아?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벌써 지치면 안되지."이영미의 부축을 받으며 둘은 함께 탈의실로 갔다. 그리고 언제 준비한 것인지 이영미가 내미는 옷봉투가 거기에 있었다.?"저 언니가 너랑 사이즈가 비슷해서 내가 임의로 오늘 점심 때 사놓은 옷이야. 마음에 들 거야. 너의 화장에 맞게 좀 튀는 옷을 고른 거니까. 후후후... 아직은 좀 어색할 테니까 밖에서 기다릴게."도일은 처음에 탈의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옷을 벗었을 때즈음에 사방이 거울인 탈의실에 비치는 "도경"이의 모습이 점차 눈에 익었다. 그러나 막상 불룩하게 올라선 아랫도리에 눈이 닿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외모 중에서 지금은 그 부분만 남자였기 때문이었다.?도일이 탈의실을 나오자, 다시 한번 세(?) 여자의 함성이 터졌다. 도일은 목을 폴라티처럼 덮도록 되어 있는 오렌지색 배꼽티에 청색 핫팬티에 무릎 위까지 오는 타이트 부츠를 입고 있었다. 이영미가 엷은 하늘색 셔츠를 입히고서는 앞을 동여매 주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몇 가지의 악세사리를 꺼냈다. 반지 두 개와 금팔지, 그리고 상아 팬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여기 뭐라고 써 있는지 한번 읽어봐."도일은 시키는 대로 팬던트를 뒤집어 보았다.?"도일이가 죽던 날=도경이가 태어난 날"떨리는 손으로 멍청하게 서 있자, 이영미가 직접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잊지마. 이 팬던트에 적힌 의미를... 이제 도일이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속삭이듯 귀의 닿는 그녀의 입김이 감미로왔지만,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 내실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환성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팬던트에 쓴 글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미 도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이미 받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녀가 현관을 들어서며 싸늘한 표정을 짓던 그 토요일 오후부터...전에 살던 집은 도일이 회사를 그만두고 불과 두 주도 되지 않아 팔아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도일을 아는 사람도 있던 그 곳에서는 아무래도 그의 생각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이영미가 내린 조처였다.1년이 지나, 이영미가 계획한 대로 두 사람은 이혼을 했다. 그러나 역시 조건을 제시한 대로 그녀는 도일이 만족할 만큼 변했다며 계약연장에 들어갔다. 즉, 둘은 이제 두 여자로서 한 집에 사는 것이었다.?그동안 그는 얼굴만 여섯 번의 수술을 거쳤다. 쌍꺼풀이 약하게 있던 것을 고쳐 굵고 깊은 쌍꺼풀을 만들었고, 광대뼈를 깎고, 이마도 볼록하게 올렸다. 턱선까지 마무리를 지은 후에는 남자였던 도일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라도 불가능할 정도였다.?1년 동안 호르몬은 꾸준히 맞고 있으면서도, 몇 개월 전에는 식염수 유방수술까지 해서 C컵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목젓을 깎는 수술을 받음으로써 외모상으로는 완벽한 여성이 된 셈이었다. 이영미가 말한 대로 1년이란 세월 동안 그를 자신이 만족할 만한 여자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볼품없을지라도 도일이 남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남성만큼은 그대로 두었다. 그녀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그것을 놀리며 화풀이를 하는 놀이개용이었다.그녀가 떠나보낸 사람이 다름아닌 여자였고, 그녀가 레즈비언이었고 다이크(dyke)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또다시 1년이 흐른 다음이었다. 바로 이영미가 사랑했던 그 여자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그녀를 초대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초대하기 전날밤에 이영미가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고, 그녀 앞에 다소곳이 앉아 고분하게 말을 들은 도일은 그녀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영미가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펐던 것이다. 그를 달래주는 이영미에게 안겨 도일은 한참을 울었고,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다짐을 수십 차례 듣고서야 진정을 할 정도로 도일은 심약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그랬다. 도일은 이제 이영미가 내건 조건 그대로 그녀를 남자처럼 섬기고, 기쁘게 하고, 애교를 떨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이영미의 귀가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고, 샤워를 하면 등을 밀어주고, 발을 맛사지해 주고, 옷선물이라도 사다주면 호들갑을 떨며 이영미의 앞에서 패션쇼를 할 만큼 애교쟁이가 되어 있었다.?막상 그녀의 전애인이 집으로 오던 날도, 도일은 정성을 들여 화장을 하고 이영미가 가장 좋아하는 드레스 중에서 옷을 골라 입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은근한 자신의 질투를 억누르지 못해, 이영미의 옆에 붙어 앉아 슬며시 키스를 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애인이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때에는 승리의 쾌감을 속으로 느끼기까지 했다.?2년이 조금 지난 뒤에 이영미의 성적취향에 대해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슬피 울었지만, 또한 빨리 잊었다. 집안에서 그녀의 일에 딴지를 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혼을 했을 때보다 더욱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분위기였다.?3년이 넘으면서 이영미는 점점 귀가시간이 늦거나 외박하는 날이 잦아졌다. 회사에서의 위치도 부장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회식이니 귀빈대접이니 하는 모임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외박이 잦아진다는 것만큼은 도일도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가지만큼은 긁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여성이면서도 자신의 지난 잘못을 생각하면 바가지만큼은 긁을 수가 없었다.?그는 그런 만큼 예쁘게 꾸미고 이영미를 기다렸다.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잡지책을 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얼른 돌아와서 예쁘게 화장을 하고 곱게 차려입은 그를 부둥켜안고 사랑을 해주길 기다렸다.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되어 턱시도를 입은 신랑 이영미와 찍은 새 결혼사진을 바라보며 자신은 결코 버림받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되뇌이고 되뇌이며 잠이 드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