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송어가 들어온지 올해로 40년이 되었다. 1965년 1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들어온 무지개송어 종란 1만개를 화천댐 아래 임시 양식장에서 부화시켜 국내 최초의 송어양식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부산수산대학 증식과를 졸업한 함준식(65·현 평창 원복송어양식장 대표)씨가 현장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65년 종란 1만개로 양식 시작… 참담한 실패
10여년 천착 뒤 80년 미탄면 원복양식장 개장
연중 부화 ·중성 개체 성공… 불임어 연구 중
25세의 5급공무원(현 9급)함씨는 양식장에서 1km 떨어진 민가에 하숙을 정하고 송어 키우는 일에 매달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 난방시설 하나 없는 양식장에서 영하 28도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대학에서 내가 전공한 것은 온수성 어류인데 송어는 냉수성 어류라 이론도 경험도 전혀 없이 시작했으니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참고문헌마저 구할 수 없어 매일 어린 생명체로부터 한 가지씩 새로운 지식을 터득해나가는 식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고생을 견디지 못해 사표를 내고 떠나자 혼자 감당해야 할 양식장 일이 더 막막해졌다. 그해 7월 장마로 화천댐 저층수에 연결해 물을 끌어 쓰던 100mm 파이프가 파손되자 그는 100m 떨어진 계곡의 물을 양동이로 퍼날랐다. 그렇게 해서 살린 송어가 겨우 15마리, 기진맥진한 함씨는 7cm 안팎의 송어새끼 15마리를 춘천댐 상류에 방류하고 손을 털었다. 한국 최초의 송어양식사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관리자인 제가 무지했던 점도 실패의 원인이지만 사전준비가 전무한 상태에서 양식장의 입지마저 잘못 선정된 것이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료를 구하지 못해 소와 돼지의 간을 구입해다 갈아서 먹이거나 제사공장에서 번데기를 사다 먹이는 형편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무리한 사업이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참담한 실패를 딛고 함씨가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송어양식사업은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65년 10월 용천수가 풍부한 평창군 평창읍 상리에 간이송어양식장을 설치하고 도립양어장으로 운영하면서 함씨는 송어양식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를 도정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당시 박경원지사의 남다른 관심과 지원이 바탕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65달러였던 시대, 도민 소득증대와 식량자원 확충을 위해 강원도 내수면의 잠재력에 눈길을 돌린 당시 박지사님의 식견은 지금 생각해도 탁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창 청정 계곡의 맑은 물과 적정한 수온 등이 냉수성 어류 양식의 이상적인 여건을 갖추고는 있지만 문제는 역시 허술한 시설과 부족한 사료였다. 게다가 송어양식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도 없었고 문헌자료도 구하기 어려웠다. 당시 모교(부산수산대학)의 정태영 학장이 일본 송어양식의 원로인 가마다(謙田淡紅郞, 전 慈賀縣수산시험장장)씨와 다니사끼(谷埼正生, 전 長野縣수산시험장장)씨를 소개해준 것은 함씨의 송어양식에 일대 전기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서신을 통한 조언과 문헌자료 제공은 맨바닥에서 시작한 함씨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그들이 보내준 5kg의 송어인공건조사료는 국내 사료 개발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69년 함씨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춘천 의암호에서 송어양식장을 차려 10여년 동안 송어 연구에 몰두했다. 80년 평창군 미탄면 창리에 원복송어양식장을 열었다. 아버지(함원갑씨, 작고) 함자에서 원자를, 어머니(송윤복씨, 작고) 함자에서 복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함씨의 송어양식 연구는 이때부터 본격 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송어양식 12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일본인 학자와 전문가들로부터 끊임없이 지도를 받았다. 모교인 부산수산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며 냉수어종 양식의 학문적 기틀도 새롭게 다져나갔다. 송어에 대한 애착과 송어 양식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마디로 광적이다.
"1965년 미국에서 종란을 담아보낸 스티로폼 상자를 30년 넘게 보관했어요. 우리나라 송어 양식의 첫걸음이 담긴 소중한 유물이란 생각에 신주모시듯 간직했지요."
그 상자를 최근 춘천에 있는 내수면 연구소에 기증해 영구보관토록 했다.
"우리나라 송어양식의 기술은 이제 일반화된 상태입니다. 채란 부화 과정에서 성어 생산 출하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시스템이 정착된 셈이죠.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냉수어종인 송어는 원래 11월부터 3월 사이에 산란한다. 1년에 한 차례 산란 부화 함으로써 송어의 공급량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씨는 연중 채란 부화 방법을 연구하는데 수년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연중부화에 성공했다. 그의 도전 정신과 탐구력 인내력의 소산이었다. 함씨는 그 공로로 1984년 정부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함씨의 송어양식 연구와 실험은 연중 채란 부화에 그치지 않았다. 85년 동해안에서 송어의 해수면 양식을 시도해 몇번의 실패 끝에 결실을 보았고 2003년엔 강릉대와 산학협동으로 송어 중성 개체를 개발해냈다. 중성송어는 성장하면서 생식소가 소멸해 성장 속도가 빠르고 육질이 치밀해져서 맛이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강하다. 중성 송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구 개발중인 불임어가 내년 쯤 선을 보이면 우리나라 송어 양식 사업은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평생을 송어에 미쳐 살았으면서도 그는 송어 양식의 새 장을 열기 위해 올 봄부터 부산수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할 예정이다.
평창군 미탄면에서 송어 양식사업을 시작한지 25년, 그는 송어를 연구하고 품질을 개선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지역사회 교육 문화 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 있다. 지난 84년부터 미탄중학교에 원복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는 한편 원복나눔과어울림잔치를 마련해 시골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대학교수 등 각계 저명 인사를 초청해 미탄중학생을 위한 특강 지속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40년 전 그가 처음으로 송어양식을 시작했던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화천댐 아래에 오는 3월 한국송어40주년기념공원이 조성된다. 그리고 오는 10월 한국송어양식 4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 행사가 서울에서 열린다. 함씨는 요즘 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꼼꼼하게 자료를 챙기고 있다. 이 기회에 한국 송어 양식의 역사를 정리하고 문헌 자료를 집성해 책자로 발간할 계획이다. 이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벅찬 작업이지만 우리나라 송어 양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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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어 양식의 산역사인 함준식 선배님이 2010년 2월 18일 부경대학에서 송어 관련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됩니다.
노학생의 박사학위를 추카추카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