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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손상기 작가 작고 20주기,『시들지 않는 꽃-손상기』 |
전시일자 : 2008. 10. 17 - 11. 30 |
전시작가 : 손상기 |
이권호(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시들지않는 꽃
1. 시작하며 손상기(1949~1988)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기에 전라남도 여천군에서 태어났다. 유아기에 부족한 영양상태에서 엄습한 구루병으로 인해 척추가 휘어버린(脊椎彎曲) 손상기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시들지 않는 꽃에 비유했다. 이미 시들어버려 더 이상 시들 수 없는, 그래서 더 영원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는 손상기의 작고 20주기를 맞아 회고전의 형태로 기획되었다. 손상기가 남긴 약1,500여점의 작품 가운데 고등학교 시절의 작품으로부터 임종 직전 병상에서 그렸던 작품에 이르기까지 100여점의 작품을 정리해 그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망해보고자 했다. 국화
전시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제1부는 그가 고등학교를 입학했던 1969년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해 첫 개인전을 열기 직전인 1981년까지의 시기의 작품으로 구성했으며, 제2부는 아현동에 화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던 1979년부터 서교동으로 화실을 옮기기 직전인 1986년까지의 작품 가운데 〈취녀〉연작, 〈시들지 않는 꽃〉연작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제3부에서는 역시 아현동에 화실을 마련한 1979년부터 작고하기 직전까지인 1988년까지의 작품 가운데 〈공작도시〉연작을 중심으로 구성했고, 제4부에서는 손상기 자기 자신과 가족, 고향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자라지 않는 나무 2. 자라지 않는 나무 장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3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현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한 손상기는 입학 직후 고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주로 향토색 짙은 서정적 작품을 제작했다. 〈장날〉, 〈양지〉는 고향 여수항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힘든 항구생활을 따뜻하고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당시 구상회화의 흐름을 비교적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지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손상기는 1975년 학생들을 지도해 학업을 이어갈 요량으로 학교가 있던 익산이 아닌 조금 더 큰 도시인 전주에 화실을 열어 학생을 가르치고자 했었다. 장애를 가진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적자 이에 항의라도 하듯 각종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여러 차례 수상했다. 주로 지방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했으며, 1976년에는 전국규모인 구상전에 〈자라지 않는 나무〉를 출품해 입상하게 되자 큰 자신감을 얻는다. 이 작품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후 발표되는 〈고뇌하는 나무〉등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향토성 짙은 대상을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기만 했던 작품세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장애인이라는 자신의 열등감을 현실적으로 직시해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후 그의 대표작 〈공작도시〉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취년
1978년 대학을 졸업한 후, 이듬해 전주의 화실을 접고 1981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이 열리기 전까지 수원, 영등포 등지를 거쳐 북아현동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저곳 거처를 옮기면서 계속된 작품제작은 대학재학 시기와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 주로 향토색 짙은 서정적 작품과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작품이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여수항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소박하게 표현한 〈항구도시-일상〉과 어릴적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던 경험과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서울의 느낌이 오버랩되어 어린 아이가 풍경을 그린 듯이 평면적으로 표현한 〈서울 1〉, 〈표지판〉 등을 들 수 있다.
공사중의 장애인
난지도
첫 개인전 이후 손상기의 작품은 한 단계 도약한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현실세계에 대한 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임하게 된 것이다. 이는 손상기의 대학시절 은사인 원동석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후 원동석의 권유로 1985년 민족미술인협의회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민중미술을 하고 있던 대다수의 작가가 미술을 통한 현실비판과 정치참여를 의도하고 있었으나 손상기의 경우 그것과는 차별된 개인적 경험을 통해 파악된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대다수였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취녀〉연작을 들 수 있다. 이 연작은 당시 아현동 일대에 퍼져있던 홍등가의 작부를 모델로 해 그려진 작품으로, 술에 취해 있는 혹은 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모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으며, 과감한 포즈 혹은 왜곡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취녀〉, 〈불타는 그대〉, 〈열〉 등에서 보이는 왜곡된 포즈는 당시 손상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쟝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의 영향으로 보여 진다. 이밖에 당시 아현동 홍등가의 모습을 그린 〈사랑가〉를 비롯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올랭피아Olympia〉를 떠오르게 하는 〈취녀와 고양이〉등이 출품된다. 비어있는 항구
신체적 장애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작품으로 표현한 〈자라지 않는 나무〉, 〈고뇌하는 나무〉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시들지 않는 꽃〉연작을 들 수 있다. 전작과 같이 자신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에 이입한 것은 동일하지만 이번에는 나무가 아닌 꽃으로 표현해 자신의 삶이 길지 않음을 예견하고 있다. 그렇지만 앞의 두 연작에 비해 〈시들지 않는 꽃〉연작을 통해 비로소 손상기 자신이 장애를 현실화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1986년 이후에 그려진 꽃그림은 밝고 화사하게 그려지고 있어 이를 증명해준다. 자전거 타는 여인 손상기는 거주지였던 아현동을 중심으로 화랑이 몰려있던 인사동을 비롯한 종로, 명동, 마포 등 도시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남기고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눈에 보여지는 도시풍경은 일반사람들이 보는 그것과는 다르게 보인다. 〈따스한 빛〉에 실제보다 높게 표현된 담벼락은 아현동 달동네의 적막함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아현동 달동네에서 본 풍경을 그린〈붉은 지붕〉, 인사동 일대를 그린 〈관훈동에서〉, 〈H일보 앞에서〉 등이 출품된다.
종소리 달빛은 어디에
〈공작도시-이른봄〉에서는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나간 사이 달동네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공작도시-귀가행렬〉에서는 힘든 일을 마치고 높디높은 달동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는 소시민의 생활을 회청색의 스산한 느낌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소시민적 생활과는 반대로 여성의 상품화, 관음증적 욕망, 화려함 소비생활 뒤의 허전함을 주제로 한 〈공작도시-쇼윈도우〉를 제작하기도 했다.
서울
서울
언제나 글을 쓰고 난 후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말대로 작고한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의 작품은 무언가 속삭이듯 메시지를 전달하며, 메아리치듯 감동을 주고 있다. 이렇게 작품을 통해 작가와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작가 손상기는 시들지 않고 영원히 꽃으로 기억될 것이다. |
첫댓글 현대 미술관에서 즐겁게 감상 했습니다. 손상기화백님의 그때 시대를 화폭에 담아낸 그림에 감명이었습니다.^^ (약간 어두운듯한....시대적인....)
시들어서 더 이상 시들것이 없다는 표현은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