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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가 쉰 살(5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세상은 전성기에 도달한 한 뛰어난 작가의 목소릴
잃었다. 영국《타임즈》가 명명한 바에 따르면,
그는 "미국 중산계급의 체호프"였다. 그런데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소설가가 되었는지, 그의 개인적
삶의 행로는 어떠했는지 등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세밀화처럼 카버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는 이 책
에서는 저자(캐롤 스클레니카)가 미국 워싱턴 주,
야키마에서 가난한 제제소 노동자 아들로 자랐던,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자 뚱보인 그의 성장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다.
1988년 폐암으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카버는 친구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술에 취해 있던 복잡
하고 나약한, 그러나 끊임없이 작가로서 자신을
발명해나갔던 모순투성이의 한 인간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그려냈다.
카버는 과체중으로 인해 반 아이들로부터 뚱보라는
놀림을 받았다.
1988년 6월 17일, 카버는 '테스 갤러거'와 재혼
했고, 같은 해 8월 2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카버는 열아홉 살 때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온
두 살 아래, '메리앤 버크'와 결혼했고, 동네 의사가
사무실 청소를 조건으로 빌려준 지하 아파트에서
결혼 전에 임신했던 첫애를 기르면서(이때 둘째
밴스가 엄마인, '메리앤 버크'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작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그 무렵
그는 할리우드에 있는 '파머 작가학교'라는 곳에서
주관하는 통신과정에 등록해 소설 쓰기를 배웠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적확하면서도 온기 있는
서술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고 본다.
카버의 첫 작품집인《제발 조용히 해줄래, 제발 ?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 》의
교정지가 왔을 때, 카버와 학교 교사였던 그의
아내는 연방 파산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그동안
쌓여 있던 부채에서 이제 막 벗어난 참이었다.
카버는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에
거짓말을 한 죄로 기소된 상태였다.
레이먼드 카버 연보
1938년 05월 25일(0세) 미국 오리건 주 '클래츠
케이니'에서 아버지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와 어머니
엘라 카버의 장남으로 태어남.
1941년(3세) 카버의 아버지 C.R.은 가족을 이끌고
워싱턴 주 야키마로 거주지를 옮김.
1943년(5세) 동생 제임스 프랭클린 카버가 태어남.
1955년(17세) 할리우드에 있는 파머 작가학교
통신과정에 등록하여 소설 창작을 배움.
1956년(18세) 야키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 체스터의 제재소
에서 일함.
1957년(19세) 6월 7일 16세의 '메리앤 버크'와
결혼. 약국 배달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야키마
초급대학에 가서 강좌 수강. 같은 해 12월 2일
첫딸 '크리스틴 라레이'가 태어남.
1958년(20세) 야키마에서 캘리포니아 주
'파라다이스'로 이사. 치코 주립대학에 입학.
10월 19일 아들 밴스 린제이가 태어남.
1959년(21세) 치코 주립대학에서 '존 가드너'
에게 문예창작 수업을 들음.
1960년(22세) 캘리포니아 주 '유레카'로 이사.
낮에는 훔볼트 대학에 다니며 밤에는 제재소
에서 일함.
1961년(23세) 제재소를 그만두고 대학 도서관
에서 일함.
1963년(25세) 문학사 학위를 받고 훔볼트
대학을 졸업함.
1964년(26세)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에
거주하면서 백화점과 서점 등에서 일하면서
글을 씀.
1965년(27세) 새크라멘토 머시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함.
1967년(29세) 첫번째 파산신청.
6월 17일 아버지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C. R.)'
사망. 사이언스 리서치 어소시에이츠(SRA)에
교과서 편집자로 취직함.
1968년(30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떠남. 하지만 낯선 환경에 적응
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짐.
1971년(33세) 고든 리시가 편집자로 있는
《에스콰이어》에 자신의 단편 '이웃 사람 들'이
실려도 된다는 수락을 받음. 《하퍼스 바자》에
자신의 단편 '뚱보'가 게제됨.
1972년(34세) US 버클리에 강사로 초빙됨.
1974년(36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산타바
바라 캠퍼스(UCSB)의 강사가 되지만 알코올
중독과 가정불화로 강사직을 그만 둠, 아내와는
별거, 두 번째 파산신청.
1977년(39세) 《제발 조용히 해줄래, 제발 ?》
로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름. 캘리포니아 주
'맥킨리빌'로 이사,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인 AA
에도 나감. 6월 2일 금주를 결심하고 이날 이후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음. 카프라 프레스에서
소설집《분노의 계절》 출간.
1978년(40세)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음, 텍사스
대학 엘 파소 캠퍼스(UTEP)의 강사로 초빙됨.
1979년(41세) 엘 파소에서 '테스 갤러거'라는
여자와 함께 살기 시작. 시라큐스 대학에서
정규직 교수 자리를 제안받음.
1980년(42세) 시라큐스 대학 교수가 됨.
1981년(43세)《뉴요커》에 단편 '체프의 집'이
실리고 랜덤하우스 계열사인 '크노프'에서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출간.
1982년(44세) 9월 14일 스승인 '존 가드너'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 10월 18일 아내와 정식
으로 이혼함.
1983년(45세)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에서
선정하는 스트라우스 기금 수혜자가 되어 일년에
3만 5천 달러를 5년 동안 받음. 랜덤하우스
계열사인 '크노프'에 그의 소설집 《대성당》이
출간됨.
1984년(46세)《대성당》이 퓰리처상 후보에
오름.
1986년(48세) 랜덤하우스에서 그의 시집
《울트라마린》이 출간됨. 《미국 단편소설
걸작선》의 편집 업무를 제안받음.
1987년(49세) 단편 '상자들'이《1987년 전미
최우수 단편 선집》에 실림. 동거녀인 '테스
갤러거'와 유럽을 여행함. 9월에 폐암 초기 증상이
나타남. 10월 1일 폐 절제수술을 받음. 뉴욕 공립
도서관으로부터 '문학의 사자' 칭호를 받음.
1988년(50세) 어틀랜틱 먼슬리 프레스에서 소설집
《내가 전화를 거는 곳》출간. 그가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정식회원이 됨, 암이 뇌로 전이되어
뇌 방사선 치료를 받음.
6월 17일 그는 '테스 갤러거'와 네바다 주 '리노'에서
재혼. 8월 2일 '포트 엔젤레스' 의 자택에서 사망.
8월 4일 포트 엔젤레스의 '오션뷰' 공동묘지에 묻힘.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결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삶만 사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들과 비교할 수도 없고 다가올 삶들 속에서 완성시킬
수도 없기 때문 이다." ㅡ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인용한 문구로 레이먼드 카버의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 제사(題詞)
카버의 금주 상태는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담배에 중독되어 있었고 대마초에 의존해서 살아
가는 불안하고, 강박적인 소년같은 귀여운 면이
있는 사내인 채로 남은 삶을 살았다.
레이먼드 클레비 카버 (Raymond Clevie Carver)는
1938년 5월 25일, 미국 오리건 주의 '클래츠케이니'
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칸소 주 출신으로
일거리를 찾아 오리건으로 왔다. 그들의 선조인 국경
지역의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인들처럼 카버 집안사람
들도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 떠돌아 다녔다. 그의 아버지
C. R.이 제재소에서 버는 일당은 2달러에서 4달러
사이였다고 한다.
아칸소 주의 레올라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의 아버지,
C. R.은 줄곧 일용 잡역부로 일해왔다. 실제로 육체
노동을 싫어했던 그의 할아버지 프랭크 카버는 미국
경제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고스란히 두들겨 맞곤 했다.
집안에서 "군복을 바꿔 입은 사람"으로 알려진 아브람
카버(C. R. 의 증조할아버지)의 장남 호세아는 실용
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에는 남군으로 출전해서
부상을 당했지만, 남부가 패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북군으로 다시 입대했다. 그(=호세아)는 이웃한 농부
의 딸과 결혼하면서 토지를 늘렸지만, 그의 아홉번째
자식인 프랭크(C. R.의 아버지)가 아직 십대였을 때
닥친 1893년 공황으로 인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모두
잃게 된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미국 내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에는 대부분 소유자가 생겼기 때문에 정착지를
찾아 서부로 떠나는 것이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엘라 베아트리스 케이시'(=카버의 어머니)가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카버의 아버지)를 만났던 1953년은
그녀가 스물두 살(=22세)되던 해이며, 둘이 만난 곳은
아칸소 주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로부터 불과 몇 주
만에 결혼 한 뒤 카버의 가족들과 함께 그들은 북서부를
향해 떠났다.
카버(=레이)는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되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부모는 오리건 주 '와우나'의 컬럼비아 강
가에 자리 잡은 크로셋 - 웨스턴 제재소에 딸린 사택
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그의 가족
이 워싱턴 주 야키마의 동부지역으로 옮겨갔을 때,
그곳은 아직 개발이 덜 된 상태였다.
카버의 가족은 1958년에 캘리포니아 주 '파라다이
스'로 이사했고,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는 1958년에
그는 치코 주립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존 가드너'를 만난다. 둘째인 아들 '밴스 린제이'
가 같은 해에 태어난다.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있었던 그의 집은 그가
중증의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던 시기에 온갖 광란의
파티와 가정문제로 소란이 끊이지 않았던 현장이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책의 제사(題詞)로 한 번 뿐인
삶만 가지고는 그 삶을 완성시킬 수 없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한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했을 때, 그는 자기 삶의 돌이킬 수 없는 단일성
에 대해 이미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되었을 때 카버는, 그렇게 귀여움을 받았던
옛날의 그가 컬럼비아 강가에서 보냈던 그 기간을
"아버지의 월급 시절"이라고 불렀다.
C. R.의 음주벽 때문에 엘라는 더욱 일에 몰두했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일 잘한다는 얘길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직장을 옮겨다녔던 건, 자신이 인정받는
곳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과 행복한 것처럼 위장하
고 있는 가정생활의 실체가 드러날 정도로 다른 사
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거부하는 두 가지 심리가
절망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왜 사람들은 읽을까요?
(......) 잘 쓰여진 이야기를 읽게 되면 사람들은 주인공
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그가 겪는 고난과 시련까지 함께
겪게 되고, 그의 생각까지 동참하 며, 그의 성공까지 함
께 즐기게 됩니다. 많은 소시민들 이 실제 자신들의 삶
에서는 감히 시도해 보지도 못할 모험으로 충만한 이야
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글쓰기는 큰돈을 벌 수 있는 분야입니다
매년 전 세계 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빠져들 기회"
를 얻기 위해 수 백만 달러를 씁니다. 편집자 들은 그들
의 이런 지속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 해 수천 편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작가들에게는 상당한 금액 ㅡ 그렇죠, 기꺼이
ㅡ 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못한다고요?
과연 내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조금
이라도 든다면...... 다 잊어버리세요. 새롭게 시작
하기 위해 당신한테 필요한 건 다음의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1. 이 일에 대한 진정한 관심
2. 공부하고 또 공부하겠다는 결심
3. 사적인 편지를 잘 쓸 수 있는 정도 의 영어 실력
별거 아니죠, 그렇죠? 하지만 이것들만 가지고도
많은 ㅡ 아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공에 관한 한 어떤 누구도 당신
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성공을 향한 의지를 갖고, 그 의지의 힘으로 끊임
없이 공부하고 주어진 과제를 수행 한다면, 당신이
꿈꿔왔던 성공은 바로 당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카버의 아내가 될 '메리앤'은 사립기숙학교에 다니면서
'찻잔을 제대로 잡는 법 같은 것'도 배웠고, 종교 교육과
체육 과목도 들었지만, 물리와 문학, 외국어까지 배웠다.
"메리앤이 라틴어를 안다는 걸 알고는 정말 깜짝 놀랐
어요. (그녀가) 라틴어를 하더라구요!" 카버를 만나던
무렵의 그녀는 이미 여러 번 학교를 옮겨다닌 후였고
부모의 이혼과 그 이혼의 여파로 인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카버가 나중에 쓴 바에 따르면 '캐스케이드' 제재소
는 어렸을 때, 내가 세상을 바리보는 틀이었다. 목재
로 지은 건물 몇 개가 다인 그 제재소는 물웅덩이
옆에 있었다. 기계설비 수리 기술자이면서 C.R.의
사촌인 '틸먼 카버'와 수석 톱 장인 '롤리 쉴리프,
그리고 수석 톱 정비기사인 '프레드 카버' 이렇게
세 사람이 그곳을 이끌고 가는 삼총사였다. '틸먼
카버'는 기계류를 전담했고, '롤리 쉴리프'는 목재
를 어떤 식으로 자를지 결정하는 사람이며, 수석 톱
정비기사인 '프레드 카버'는 톱날을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을 했다. 제재소 노동자들이 겪게 마련인
손가락 절단, 폐질환, 청력상실 같은 문제들 말고도
톱 정비기사들만이 겪는 특수한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납이 들어 있는 톱날 유도장치나 카바이드가
들어있는 연마기에서 나오는 금속가루들을 들어
마시는 일이었다. 프레드 카버도 작업 중에 손가락
을 여러 개 잃은 상태였고, 롤리 쉴리프는 자신이
닦고 있던 목재 운반기가 뒤로 미끄러지면서
그 자리에서 숨지는 불행을 겪게 된다.
카버가 청년기를 지나는 동안 술은 C. R.의 건강을
망치는 문젯거리가 되어 있었다. C. R.의 친구들은
그한테 술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지만, 누나인 '바이올렛 아처'는 자기 동생의
문제를 인정했다. "엄청 많이 마셨어요. 요즘 기준
으로 보자면 '알코올중독'이라고 해야죠." C. R.은
자신의 음주벽과 앞날에 대한 예측이나 관리가 부
족한 면까지 합쳐지면서 C. R.의 가족은 이번 월급
날에서 다음 월급날까지 줄타기를 하는 듯한 상황
이 계속되었다.
카버의 딸, '크리스틴 라레이 카버 Christine LaRae
Carver '는 1957년 12월 2일에 밸리 메모리얼 병원
에서 태어났다. 메리앤이 병원에 머물던 사흘 동안
C. R.은 같은 병원의 두 층 위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카버가 C. R.를 찾아가 당신께서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알려주자 마흔네 살(49세)이던 C. R.이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는구나" 라고 대답했다. 카버
집안 세대가 재편성되면서 카버의 세계 가장 자리에
죽음이 접근하기 시작한다. 우선 아버지가 이제는
걸어다니는 유령처럼 보일만큼 건강이 나빠진다.
밴드 리더이자 색소폰 연주자인 토미 돌시가 술에
취해 자신의 토사물에 질식해서 죽는다. 1957년
8월에는 아칸소에 사는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월터
카버'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때 그분은 철도기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한 직후였다. 그리고 카버도 알던,
그가 일했던 약국 사장의 형인 '켄 커비츠' 박사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목욕탕에서 쓰러져서 죽는다.
그 박사의 시신을 꺼내기 위해선 목욕탕 문까지
뜯어내야만 했다.
스무 살이 되는 해(1958년)의 여름 초입에 카버
(=레이)는 고향 마을에 있는 한 지하실에서 어린
딸과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아이들이나 하는'
배달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타자기를
가지고 있었고 아내가 자신의 시(詩) 들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해가 지나도록
작가가 되는 일에서는 거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카버) 처한 그때의 상황이 글 쓰기에는
어려웠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더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결심을 굳혀갔다. 그는 장편 대신 단편을 선택
하여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야기 소재로 활용했다.
그가 말했다. "당시 우리는 가난했지만, 끊임없이 일했고,
제대로 해나가기만 하면, 제대로 된 결과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자기 삶의
여러 측면들을 완전히 분리시켰다.(=학교, 부모 그리고
가족을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내, 메리앤
만은 그의 비밀, 걱정, 희망 등을 모두 고백한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녀의 어깨는 가냘펐지만 그녀의 의지력은 놀라웠다.
1961년 5월의 어느 날 아침, 다니던 회사로부터
휴가를 받고 잠시 쉬고 있던 그의 아내, '메리앤'의
내부에 "무언가가 툭 부러졌다"는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자 그녀는 몸이 아프다고 둘러대고는 회사에서
나와 훔볼트 주립대학으로 차를 몰고 가서는 그곳
교무처 담당자에게 자신의 SAT 점수를 확인해
보도록 설득한 후 대학에 등록한다. 그러고는 '유레카'
로 돌아와 회사를 그만둔다. 그때 그녀는 더 이상
임금노동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게 바로 빚을 더 얻어야 한다는 걸 의미
한다고 하더라도. 이 급격한 방향전환을 실행하기
전에 크게 수정 해야 할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카버가 한 해 동안 글만 쓰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 모두가 워싱턴 주에
있는 '발렌틴 버크' 농장에서 여름을 보내러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오래있지 않고 훔볼트 대학의
안전지대로 들어가게 된다.
1961년 가을에 '메리앤'은 커피숍에서 웨이트리스
로 일했는데, 이 커피숍의 기다랗고 휘어진 카운터
에서 그녀의 남편, '카버'는 자신의 소설작품 《그
사람들은 당신 남편이 아냐 They're Not Your
Husband》의 배경을 얻는다. 그리고 그때의
레이는 훔볼트 대학생의 신분으로 학생 융자를
좀더 얻은 상태에서 제재소 일은 그만 두고 대신에
대학 도서관에서 보수는 비록 적지만 편한 일자리
를 얻었고 거기에서 나온 수입에 의존해 살았다.
레이와 메리앤은 바닷가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고
학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I가 1590번지의 꽤 큰
이층짜리 모퉁이집에 살았다. 그때 메리앤은 훔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복수전공하면서 다시
한번 변호사가 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예술가가 작품에 임할 때 지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당신의 요구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가지를,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문제를 정확 하게 서술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오직 두번째 사항
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습니다. ㅡ 1888년 10월 27일
체호프가 알렉세이 수보린 에게 보낸 편지, 카버의 노트
* 카버가 단편소설을 완성시키는 전형적인 과정은
일단 쓰고 싶은 말을 모두 쓰고 난 후에, 탈고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줄이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어요."
ㅡ 제임스 볼드윈,《아무도 내 이름을 모른다
: 자연의 아들에 대한 첨부기록》, 커버의 노트
1964년 6월, 카버 일가는 서부로 돌아오게 되어
기분이 매우 들떠 있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가족이
C. R.과 엘라가 있는 새크라멘토에 도착했을 때
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C. R.과 엘라 부부는
수년간 '콜린스 파인'으로부터 장애연금을 받기
위해 기다려오고 있었는데, 아들 부부와 손자들이
자신들의 전 재산 이라고 여겼던 장애연금의 한
부분이라도 축낼까봐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C. R.은 1967년 6월 17일 사망하신다.)
레이(=레이먼드 카버)가 버텨낼 만한 일거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최악의 시간들이
지나고 오래지 않아서 그는 두 개의 일자리를
잡는다. 한 곳은 웨인스탁 ㅡ 루빈 백화점에서
풀타임 배송 및 수령 담당자로, 그 자신이
"훌륭한 책방"이라고 불렀던 그곳에서 야간
판매원으로 일한다. 그리고나서 그의 가족은
새크라멘토 시내에 있는 단돈주택으로 이사
하게 된다.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메리앤은 '세크라
멘토 주립대학'을 그만둔다. 레이도 "창고 담당"
일자리마저 잃는다. 그는 새크라멘토 부모님
집에 머물면서 잠은 제임스의 침실 바닥에서 잔다.
그래도 이때쯤 해서 C. R. 에게 숨구멍이 좀 트였다.
프레드 카버가 캘리포니아 '클래머스'라는 타운에
있는 제재소의 톱날 가는 일을 C. R. 에게 잡아주었
다. C. R. 이 다시 일하게 된 건 칠 년 만이었고, 혼자
서 제재소 근처 오두막에서 살았다.
" 이거 실제 주행거린가요? "
1966년 9월 ~ 1967년 6월, 캘리포니아 주, 세크라멘토
폭우가 평소의 날씨를 대신한다......ㅡ 바바라 게스트,
《정글》, 카버의 노트
메리앤은 "레이가 내 일과, 내가 직장에서 주목 받으면서
힘 있는 자리에 있는 걸 시기한다"고 믿었다. 커트 존슨
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이는 자신이 "끊임없이 쓰고 있다"
고 썼지만, 한편으로는 미시간에 가서 도서관학으로 석
사를 받겠다는 계획을 다시 검토하고 있었고, 자신은 학
교에 가서 가르칠 생각은 없고,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면
좋겠노라고 말했다.
1967년 봄, 레이는 어떤 술집에서 파산 전문 변호사를
만났고, 그 변호사는 그에게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에
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1967년 5월 31
일, 레이는 그가 2년 넘게 일해온,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 유지한 직장인 '머시 병원' 을 퇴직한다.
1967년 6월 7일, 레이는 '아이오와'로 가기 위한 짐을
꾸렸다. 3년 만에 새크라멘토에서 '아이오와 시티'로
돌아온 레이는 시내 하숙집에 거처를 구했다.
1967년 6월 13일, 세크라멘토 법원은 카버 가족에게
파산선고를 내렸고, 그들이 가진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줬다.
1967년 6월 17일 아침, '크레센트 시티'에서
엘라 카버는 남편이 잠자던 중에 세상을 떠난 걸
발견했다.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C. R.)의 나이
쉰세 살(=53세)이었다. 검시관의 해부 결과로는
관상동맥 폐색(심장마비), 심혈관 질환, 만성화된
동맥경화증 등이 사인이었다.
1968년 1월, 메리앤은 산호세 주립대학으로 편입
했다. 그곳은 그녀가 대학에 처음 입학하고 칠 년
동안 바꿘 네번째 학교였다. 학기 시작 무렵,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국제교류 프로그램에서 주관
하는 1년간 해외 체류 홍보 포스터를 봤다. 이에
그녀는 그 관련 사무실을 찾아가서 담당 운영자와
만나 자신과 작가인 남편이 여기에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 프로그램
운영에도 자산이 될거라고 설득했다. 레이는
이탈리아를 원했지만 프로그램 운영자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를 권했다. 또한 프로그램 운영자가 카버
부부에게 500달러의 추가 장학금과 지중해가 보이는
빌라를 제공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카버 일가의
이스라엘행 비행기표는 1968년 7월 1일자였다.
진짜 삶은, 누군가 말하기를,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 벌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선택된 허구에 기초해
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의 우리 위치에 의해 조건지어 진다. 그러므로 현실
에 대한 모든 해석은 하나하나 고유한 위치에 기반하
고 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두 걸음만 움직이면 그림 전체가
다 바뀌게 된다. ㅡ 로렌스 더렐,《발타자》, 카버의
노트
레이가 대체로 솔직하게 대했던 '커트 존슨' 조차도 레이가 이스라엘에서 뭔가 공식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었고,
나중에는 카버 부부 둘 다, 아니면 그 중 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그러나 둘 다 유대인은 아니다.)
레이는 1984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로의 괴이한
여행 때문에 자신의 전 인생이 박살났 으며,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노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평생 동안 지중해 해변에 있다는 그 빌라를 원했 는데, 막상 가보니까 그게 절대 가능하지 않으리라 는 걸 알겠더군요.
글 쓰는 일은 나한테 슬픔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다 준 게
없었어요. 아내하고 나는 갈라서게 됐어요......(카버는
브루스 웨버와의 인터 뷰에서 지중해 해변에 있는 빌라가
자신이 14세 때 부터 꿈꿔온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리앤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15년 동안
두 사람을 몰고 왔던 두려움과 욕망이 이제 곧, 여태 그들이 마주쳐봤던 것보다 더 끔찍한 위험과 기회로 대치될 것이
었다.
메리앤은 서른 살(=30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지만, 카버 가족의 경제 상황은 늘 아슬
아슬하기만 했다. 레이와 메리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선 더 모르는 채 한 사람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갔고, 다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장애 상태에 들어들고 있었다.
레이는 성공에 대비한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는데,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불운과 실패와 우울함에 더 익숙 했다.
1972년 6월 말에 카버네 식구는 '스테이션 웨건'
(자동차의 일종)에 올라타고 북서부를 향해 떠났다.
쿠퍼티노의 새 집 소유권을 넘겨받을 때까지 여행을
다닐 계획이었다.
1972년 레이와 메리앤의 결혼생활을 잇는 끈이
점점 약해져갔다. 그리고 이 시기 몇 달 동안 레이
는 메리앤에 대해 폭력적으로 집착했다. 그날 밤은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는 걸로 마무리 되었고
(그런 상황에 끼어들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눈가에 시커멓게 멍이 든 메리앤은 그 때문에
새 학기의 첫 사흘 동안을 결근 했다.
(음주로 인해) 메리앤은 수시로 학교를 결근했고,
칼이나 불이 붙은 담배로 남편 '레이'를 위협했다.
어느 날 아침엔가 레이는 메리앤의 머리를 침실
모서리에 들이박았다. 크리스가 자기 엄마를
태우고 병원 응급실까지 달려갔지만, 너무 창피
해서 안[內]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1972년 당시의
레이는 술이 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라도 매일,
때로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시는 알코올중독 증세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 해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 (1967년)한 지
오 년, 이스라엘에 걸었던 희망이 좌절된 지 사 년째
되는 해였다. 메리앤도 술을 마 셨다. 표면적으로는
레이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그리고 레이가 세실리와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고통을 둔화
시키기 위해서였다.
1973년 8월 ~ 1974년 7월, '아이오와 시티'
나는 술잔을 들어올리는 일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느껴왔습니다. 내가 알코올중독자
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죠 나는 술을 마실 때는
절대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날들이 점점 더 적어졌습니다.
ㅡ1980년 존 치버가 크리스티나 롭에게 보낸 편지
1974년 9월 ~ 1975년 12월,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와 쿠퍼티노' "진실을 알고 싶으시다면," 카버는 여섯 권의
책을 출판한 유명 작가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술을 끊었다는 사실이 내가 살면서 해낸 어떤 일 보다
더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일은 하룻밤 새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레이먼드 카버가 술을 끊는 데에는 거의 삼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974년 메리앤은 로드 알토스 고등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쿠퍼티노 로드'에 있는 집도 세를 내놓았다.
크리스(카버 부부의 딸)와 밴스(카버 부부의 아들)는
부모를 따라가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4년 한 해 동안 '레이' 와 '메리앤' 두 사람의 수입이 그들로서는 사상 최대인 2만 3천 달러에 이르렀지만,
부채는 오히려 다시 쌓이고 있었다.
' 유명해지고 집을 잃고'
1976년 1월 ~ 1977년 6월 2일, 北캘리포니아 주
" 오늘 바다는 다시 거칠다, 힘차게 불어닥치는
바람과 더불어. " ㅡ 로렌스 더렐,《저스틴》,
카버가 좋아하는 문장
레이가 술을 마시고 괴팍한 짓을 하는 것은 건강이
악화되어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코올중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대개 간, 심장,
뇌, 그리고 다른 조직들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이
수반된다. 이때 레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77년 6월 ~ 1977년 12월, 캘리포니아 주 '맥킨리빌'
"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역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예술은
아니다. " ㅡ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카버의 노트
금주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지혜와 자각이 금주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레이는 글 쓰는 일에
대해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레이는 술을 포기하면서 과거에 술에 대한 상당한
집착을 다른 대상들에게로 돌렸다. 처음에는 금주
자체가 그 대상이었고, 그 후에는 낚시와 글쓰기였다.
'헤어짐'
1978년 1월 ~ 1978년 8월, 버몬트와 아이오와 시티
그때쯤 메리앤은 캘리포니아에서 임시교사로 일
하고 있었고, 크리스(카버 부부의 딸)는 임신 중이
었다. 메리앤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크리스의 소망
을 뒷받침해주었다. 하지만 레이는 결사반대였다.
메리앤은 자기가 '엘 파소'에 갔을 때 크리스의
임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이 두려
워서, 자신과 함께 결혼 문제 상담을 레이가 받겠다
면 자신이 12월에 '엘 파소'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제안에 대한 답신을 받지 못한다. 레이와
메리앤 두 사람은 여전히 "상호간에 강력한 수준의
사랑과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만 지금은
같이 살 수 없다."는 게 레이의 말이었다. 그들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함께 살지 않았고, 이 두 사람은
이후로도 사 년 동안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한 해를 같이 지내겠다던 결혼기념일의 서약도 지켜
지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떠난 것 일까? 결혼생활의 파경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 일의 일차 목격
자는 오직 아내(메리앤)와 남편(레이)뿐이다. 남아 있
는 편지들과 레이의 작품들, 그리고 메리앤의 회고록과
이런저런 발표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이
해체되는 과정의 정확한 경로를 그려내는 게 가능하지
는 않다.
1979년 1월 1일, '테스 갤러거'가 레이와 함께 살기
위해 '엘 파소'로 왔다. 1943년 7월 21일에 '테레사
자네트 본드 Theresa Jeanette Bond ' 라는 이름
으로 태어난 갤러거는 이미 알코올중독자를 심연에서
끌어올리려 애써본 경험이 있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1980년 1월 ~ 1981년 8월, 뉴욕 주, '시라큐스'
레이가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딸 '크리스'
였다. 한동안 크리스가 너무 극단적인 어려 움을 겪고
있어서, '에이미 웅거'는 레이에게 크리스를 시라큐스로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까지 했다. 레이는 답신
에서 크리스가 처한 상황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고 하면
서, 크리스의 문제는 그녀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고 썼다. 레이는 크리스가 자신이 알코올중독자
라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됐든 레이는
크리스를 뉴욕(시라큐스) 으로 데리고 올 생각은 없었다.
"우린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해.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해. 내 마음은
몇 년 전에 갈가리 다 찢어졌어." 레이는 크리스를 뉴욕(시라큐스)으로 데리고 올 경우 글도 못 쓰고
다시 술을 마시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마흔세 살(=43세)의 카버는 직감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카버는 자기 자신에게 판돈을 걸고 있었다.
카버는 가난이나 알코올중독 같은 문제들보다 더
심각하게 자기의 일을 방해했던 요소로 아이들을
지목하고 비난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그토록 가난하거나 알코올중독
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센티미터의 키에 이제 스물 세 살이 된 밴스는 자기 아버지(=레이먼드 카버)보다 더 크게 자랐지만, 다른
면에선 아버지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도 아버지처럼
단순해 보이는 표정에 커다란 덩치를 약간 구부리고
다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조적인 면도 있었다.
밴스는 운동을 잘하고, 몸이 유연해서 자기의 큰 덩치
를 편안하게 잘 움직이고, 건강을 고려하는 생활습관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선택의 여지만 있다면 2킬로미터
정도는 차 타는 것보다는 걷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문학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독자이자 여러
언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호기심은
문학보다는 사회학 쪽에 더 가까이 가 있었다.
1982년 10월 18일, 미국 뉴욕 주 대법원 오논다가
카운티의 판사 도널드 밀러는 원고 '레이먼드 카버' 가
피고 '메리앤 E. 카버'를 상대로 제출한 이혼 요청을
승인했다.
《 대성당 》
1982년 10월 ~ 1983년 12월
대상을 바라보는 모종의 특별한 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바라보는 방식에 예술적인 표현을 부여할 수
있는 작가. 그런 작가는 사람들 곁에 한동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ㅡ 레이먼드 카버,《글쓰기에 관해》
1984년에 '포트 엔젤레스'로 찾아온 또 다른 방문객은
카버의 작품들을 일본어로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
였다. 카버는 무라카미와 그의 아내 요코에게 훈제
연어와 블랙티를 대접했다. 무라키미는 레이(=레이먼드
카버)가 차를 마시는 모습이 "마치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무라카미는 그날의 만남을 녹음해두었는데, 레이
(=레이먼드 카버)의 말투가 너무 멈칫거리는데다
너무 낮게 말해서 마치 "서투른 솜씨로 녹음한 도청
녹음"처럼 들렸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더
놀라웠던 것은 그의 목소리보다도 그의 "거대한 몸집"
이었다. 무라카미 부부는 단 두 시간 동안 머물렀데,
떠나면서 카버와 갤러거를 자신들이 사는 일본으로
초대했다.
메리앤은 레이와 헤어진 후로 줄곧 남자들을 만나왔고,
1984년 8월에 '로렌트 지라드' 라는 이와 결혼 한 뒤
지난 한 해 동안 그와 함께 살아왔다. 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캐나다 출신인 그가 미국 내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민국의 압박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결혼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재혼을 하고 나서도 그녀의 재정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
웠다. 그녀는 상속받은 버크 집안의 토지에 대한 재산
세를 내지 못했고, 그 토지에 집을 짓기 위해 빌린
돈도 있었다.
1986년 9월 7일, 레이는 '카알라일'에게 자기가
어떤 글도 쓰지 않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로 인한
권태 때문에 레이는 아주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새 차나 새 집을 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흘쯤 지난 후 레이가 이번에는
낚시가 끔찍하게 안되며, 어머니와의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피곤하다. 걱정된다. 혼자다. 복잡하다. 바쁘다.
1987년 초의 몇 달 동안 카버가 쓴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1987년 5월에 '포트 엔젤레스'로 돌아오면서 잠깐
중단되었던 걸 제외하면 레이와 테스는 그해 (1987년)
봄의 대부분을 유럽 여행으로 보냈다. 1987년 여름,
카버와 함께 연어 낚시를 하기 위해 (미국)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해 7월에는 방문객 들이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의 집, 두 채 모두를 내어주고, 자신들
(카버와 그의 동거녀 '테스 갤러거' )은 '테스 갤러거'
어머니 집에 가서 잤다. 《피플》에 실린 레이와
테스에 관한 기사는 B 스트리트에 있는 레이 집의
경사 가파른 지붕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그 사진은 그랜트 우드가 그린
'아메리카 고딕 American Gothic (화가 그랜트 우드
의 1930년 작. 뾰족 지붕을 사이에 두고 쇠스랑을 든
남자와 쌍을 이루는 여자가 서 있는 그림으로, 미국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문화적인 아이콘으로 여겨
지는 작품이다.)을 연상 시키는 모습이었다.
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
1987년 9월 ~ 1988년 8월, '시라큐스'와 '포트 엔젤레스'
레이는 (1987년) 8월 초부터 그치지 않은 기침 ㅡ 기관지
염일 거라고 본인은 추측했다 ㅡ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
다. 같은 해 9월 둘째 주에 레이의 타액에서 붉은색이 보이
면서 자신의 모든 계획들이 취소되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레이는 담배를 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오십 년 인생 중 사십 년 동안 담배를 피워왔고, 대마초는
이십여 년을 피워왔다. 이것들이 그에게는 중독이었고, 위안이었고, 버팀 목이어서 ㅡ 어떤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이다 ㅡ 테스 갤러거를 비롯해서 레이를 사랑하고,
레이의 건강을 염려해온 모든 이들이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려 하지 않았다.
레이로서는 대중들 앞에 나서서 자신이 나아진 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레이가 쉰번째 생일을 맞기 바로 전날 밤, 혹시 자기가
계속하지 못할 경우에 이어서 읽어줄 수 있도록 테스를
대동한 채 시애틀에 있는 '엘리엇 베이' 서점에 모인
수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낭독회를 가졌다.
레이가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
차렸다.
1988년 6월 17일, 레이는 네바다 주 '리노'에서
동생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방금 테스와
결혼했음을 알렸다.
1988년 6월 27일, 레이는 시애틀에 가서 흉부
엑스 레이를 찍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30일, 레이와 테스는
'리처드슨' 변호사를 만나 최근 두 사람의 결혼에 따른
유언장 내용의 변경에 대해 논의했는데, 레이가
1982년에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 그대로 레이는
'크리스틴'과 '밴스' 그리고 '메리앤'에게 각각
5천 달러씩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유산증여
목록에 어머니에게 갈 1천5백 달러를 새로 추가
했다. 레이는 자신의 부동산과 문학적 자산의
완전한 소유권, 그리고 이것들을 관리할 모든
책임을 아내 '테레사 J. 갤러거'에게 남겼다.
갤러거는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닻을 내렸다" 고 썼다.
이제 모든 일은 레이의 마지막 책을 마무리하는
일에 맞추어졌다.
1988년 여름, '크리스틴 카버'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이 아이의 아빠는 그녀가 웨스턴
워싱턴 대학의 논리학 수업에서 만난 학생
이었다. 레이는 (그녀에게) 등록금으로 300
달러를 보내면서 부디 여름학기를 끝마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레이는 "여름 옷"을
사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200달러를 또
보냈다. 1988년 7월 15일, 레이는 크리스틴이
집으로 이사해 들어간 걸 축하 하는 아무
그림도 없는 우편엽서를 보내면서 새 전화번호
를 물었다. 레이는 크리스틴과 전화통화를 하면
서 그녀의여름학기가 끝나는 1988년 8월 2일
에(그녀가 있는) '벨링햄'으로 가겠노라고 말했
다.
1988년 7월 14일에 아들, 밴스 카버가 아버지를
만나러 포트 엔젤레스로 왔고, 단 둘이서 외출했다.
밴스가 보기에 레이는 5월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환자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점심식사를 한 후
부두에서 노 젓는 배를 탔다. 그때 마침 복통을 느낀
레이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공항으로 배웅을 나온 레이는 밴스의 손이
아플 정도로 꼭 쥐면서 눈물 어린 눈으로 밴스의 딸이
커가는 걸 보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버지니아 메이슨 병원에 7월
23일에 입원했다가 7월 30일에 퇴원했다. 레이와
테스는 하얀색 캐딜락을 구해서 타고 '포트 엔젤레스'
의 집으로 돌아왔다. 8월 1일 아침, 테스는 리처드슨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레이가 건강이 좋지
않아 유언장에 서명하러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알렸다.
리처드슨은 자신이 증인을 대동하고 레이가 있는
'릿지 하우스' 까지 와서 레이가 서명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오후가 절반쯤 지나갔을 때, 리처드슨이
자신의 아내 노마와 레이와 테스의 비서로 자주 일했던
'도로시 캐틀릿'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레이는 떨리긴
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필체로 자신의 마지막 유언장에
서명했다.
8월 1일 밤, 레이와 테스는 체호프(=체홉)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The Lady with the Pet Dog '을
각색한 이탈리아 영화 '어두운 눈 Dark Eyes '을 비디오
로 봤다. 지난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던 테스는
'올림픽 페닌슐라' 대학의 강사인, '잭 에스티스'에게
몇 시간 동안 레이를 지키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테스가 방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레이에게 입맞춤을
세 번 했고, 서로는 서로에게 사랑한다 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잭 에스티스'는 레이가 산소
호흡기를 끌고 병실용 침대와 소파 사이에서 자리를
옮기는 걸 몇 차례에 걸쳐 도와줬다. 비록 레이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어떤 자세에서도 편안하게
있지는 못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두 사람(레이와 테스)은 체호프(=체홉)와 영화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이는 잠이 들었지만,
'잭 에스티스' 는 레이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깨어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레이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에스티스는 테스를 깨웠다. 테스는 레이를 붙들고 조용
히 말을 건넸지만, 레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눈도 뜨지
않았다. 1988년 8월 2일 해가 뜬 직후, 레이먼드 카버
는 사망했다.
당신이 '레이먼드 카버' 에게서 느꼈던 그 모든 특질인 점잖고, 올바르고, 남에게 관대한 사람일 것 같다는 그것 ㅡ 레이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 테스 갤러거,《영혼의 코집게》
카버가 세상을 떠난 날, 친구들과 가족들은 전화를 통해 그의
임종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버의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
지 직접 보았던 이들도 실제로 닥친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
다.
카버의 어머니, '엘라 카버'는 1993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카버는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
았고, (카버) 본인도 그렇게 죽어가는 과정을 겪었으며, 그
런 자기를 비웃던 딸 역시 같은 과정을 겪는 모습을 고통스
럽게 지켜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걸 지금 원한다." 카버는 자신의 작은 노트에 이렇게 써놓았다. 아마도 작가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버는 자신의 초조함과 갈망을 따라 그것이 이끄는
대로 아주 어두운 곳과 그 너머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잠시 보았던 쉽사리 잡히지 않는 목적지 - 작가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갔다. 카버 사후에 '테스 갤러거'가 발견한 또 다른 노트
에는 카버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린 겸손한 평가처럼
보이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 ㅡ 여행."
그는 오래 남을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