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알뜨르 비행장 - 오무라 공군부대 비행장(大本 비행장) : 결 7호작전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괌과 필리핀이 차례로 함락되고 강요된 옥쇄의 땅 오키나와마저 무너지자 패전이 눈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하고 어떻게든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결짓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한 최후의 저항기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1936년 11월 17일 일본 해군에 기밀훈령에 내려진다. 제주 대정면 모슬포에 항공기지를 건설하라는 것. 이에 따라 약 70만㎡의 비행장이 건설된다. 이후 제주도는 중국 폭격의 거점이 되고, 알뜨르에는 일본 큐슈에 있던 오무라 해군항공대가 이전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 주민들이 강제 동원되어 비행장 확장 공사가 시작된다. 동시에 지하에 대형 동굴 진지가 조성되는데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병력이 증가되고 해안과 산악지대를 막론, 전역이 요새화되었다. 현재까지도 그때 만든 군사시설을 모두 파악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요새로는 성산 일출봉, 대정 송악산, 서귀포 삼매봉, 한경면 가마오름, 제주시 사라봉과 별도봉, 어승생오름 등을 들 수 있다. 대략 80여 곳에서 700여 개의 동굴진지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왜 제주 모슬포에 비행장이 들어섰을까?
모슬포는 제주도 내에서도 가장 바람이 세고 땅이 척박하여 살기 힘든 고장이다. 모슬포는 모슬봉을 기준으로 웃뜨르, 알뜨르로 구분한다. 알뜨르는 제주도 말로 '아래 들판'을 뜻하는데, 일본 제국주의가 이곳에 비행장을 비롯한 거대한 규모의 각종 군사시설을 구축한 것은 남태평양을 바라보고 중국을 향하기도 하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알뜨르 비행장은 중국 난징· 상하이 폭격을 위한 기지로 활용되었는데, 난징공습은 36회, 연 600기, 투하폭탄 총계가 300톤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패전색이 짙어진 1944년 이후에는 일본토 사수를 위한 전진거점이 되었다.
제주도는 태평양 전쟁의 요충지였다.
◀ B-29
1944년 6월 98대의 미군 폭격기가 중국 청뚜(成都) 비행장을 이륙한다.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 폭격기가 사상 처음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하려는 것이었다. 목표는 일본 키타큐슈의 야 하타 제철소. 그러나 이 공습은 실패한다. 일본 육군이 모슬포에 세운 레이더 기지(모슬봉)가 사전에 B29를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은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 직접 공격에 나서는데...
결 7호 작전, 제주도를 사수하라.
미국의 상륙이 임박해지자 일본은 본토사수를 위해 ‘결호 작전’을 실시한다. 미군의 상륙 가능성과 중요도에 따라 일본(대한민국)전국을 7개 권역으로 나누어 1호부터 7호까지 각각 방위 계획을 부여한다. 제주도는 대한해협의 수송로를 확보하고 일본의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 최정예 육군이었던 관동군 2개 사단과 일본 본토의 부대까지 제주도에 집결시킨다. 병력은 7만 5천. 일본이 당시 한반도에 주둔시킨 전체 병력 22만 명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결 7호 작전’은 곧 제주도 사수 작전이었던 것이다.
제주도, 요새가 되다.
일본 본토를 지키려면 제주도를 지켜야 했다. 제주도 사수를 위해 섬 전체에 무수한 동굴 진지가 파였다. 1945년 6월까지 일본 육군에서 판 동굴진지만도 6,7개소에 3.2km에 이른다. 일제는 위장진지, 전진 기지, 주 저항 진지, 복곽 진지로 나누어, 해안선부터 한라산 중턱 어승생악까지 그물처럼 동굴진지를 구축한다. 1945년 8월 제주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였다. 제주도와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 때문에 제주도민에게 죽음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필리핀이 함락되자 패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했습니다. 그리하여 어찌되었든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끝내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리한 조건이란 최소한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해야만 했습니다.
1945년 2월 9일, 일본 방위총사령관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대비해 그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이를 시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결호’작전입니다. 일본군이 설정한 미군의 진격 가능 루트는 총 7개였습니다. 각 루트마다 그들은 결 1호, 결2호, 결3호...결 7호라는 작전 암호명을 부여한 뒤 각각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작전이였다.
제주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이로부터 약 한달 뒤인 3월 12일에 열린 대본영회의에서부터 이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훗가이도와 제주도를 미국의 가장 유력한 상륙지점으로 판단했다. 결 1호작전(훗가이도)와 결 7호작전(제주도)이 보다 무게 있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중이 높았던 건 그 중에서도 제주도였다. 이 회의에서 미군이 규수 북부로 상륙해서 도쿄로 올라올 가능성에 주목했고 규슈 북부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일본군의 최후 저지선이 되었다. 이때부터 제주도로 군병력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1945년 1월 1천명을 넘지 않던 병력이 8월엔 7만명으로 늘어났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 36만의 1/5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 그리고 제주도 전체를 진지로 만들기 시작한다. 해안과 오름을 막론하고 모든 요충지를 진지로 만들고, 대표적으로는 성산일출봉, 대정 송악산, 서귀포 삼매봉, 한경면 청수리 가마오름, 제주시 사라봉과 별도봉, 어승생악 등이다. 대략 80여 곳에 700여개의 진지동굴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연합군은 1945년 9월에 제주도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전쟁이 한달만 지속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주도는 정말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알뜨르 비행장
알뜨르는 ‘아래쪽에 있는 드르(들판)’즉 모슬포 지대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한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비행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6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 확장되는데 80만평에 육박하였다.(지금도 이곳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이 비행장이 처음 활용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이다. 이곳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바다를 건너 상하이까지 날아가 작전을 수행했다.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알오름동, 저근개, 골못, 광대원 등의 자연마을들이 있었다. 비행장 확장공사로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주민들도 다 내쫓겼습니다. 현재 이 땅은 국방부 소유인데 주민들이 임대하여 경작하고 있다.
이곳의 압권은 20개의 전투기 격납고이다.(가미가제 전투기용 - 자살특공대)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밭 사이사이로 격납고들이 보인다. 일부 격납고는 철거하려고 중장비를 들이댔던 흔적이 있으나 그만큼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격납고는 이 일대 들판 곳곳에 20기가 분포해 있었는데 이 가운데 19기는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격납고 위쪽으로는 미군의 공습이나 폭격으로부터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흙을 쌓아 위장했었다고 한다. 공중폭격에 견디기 위해서이다. 격납고뿐만 아니라 관제시설, 탄약고, 방공호, 통신시설 흔적들도 남아있다.
알뜨르에는 거대한 해안 결전 기지가 있었다.
알뜨르 비행장 부근 셋알오름. 그 지하에 일제가 구축한 동굴 진지가 있다. 동굴은 너비 4m, 길이 3m 50cm로 차량 통행이 가능한 규모이다. 또 오름 정상엔 고각포도 있다. 이는 공습으로부터 비행장을 지키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모슬포 해안의 송악산에도 동굴진지가 있다. 능선을 따라 개미굴처럼 파인 갱도가 900m.
가이텐 자살특공대와 강제동원으로 죽을 고생한 제주도민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인근에는 지하진지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알뜨르비행장· 송악산 어뢰정기지와 함께 핵심을 이루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다. 이 지하진지의 규모는 일제가 일본천황과 정부기관을 피신시키기 위해 구축했던 본토의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시설보다 큰 규모라고 한다.
섯알오름에는 깊게 패인 웅덩이가 하나 있는데 일제 당시 도내 최대의 탄약고터였다. 당초에는 지하에 건설되었으나 일제가 패주하면서 폭파시켜 커다란 웅덩이가 된 곳인데, 4·3의 광풍과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법으로 인하여 무고한 양민이 수백 명 총살당해 이곳에 던져졌다.
이외에도 모슬포 일대에는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해안가에 파헤쳐진 인공 동굴은 아름다운 눈으로만 볼 수 없는 역사를 품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상징하는 이미지 가운데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많이 떠올리는데, 제주도에는 바다를 질주하는 '가이텐 자살 특공대'가 있었다. 이곳 송악산의 동굴뿐 아니라 제주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안가 인공동굴은 자살특공대의 흔적을 지닌 유적지이다.
동굴 속에는'인간어뢰'와 폭탄을 잔뜩 실은 소형 보트가 숨어 있다가 미군 함대가 나타나면 그대로 바다를 향해 질주, 미군함대에 부딪혀 자폭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제주에서 미군 상륙 저지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 해안가 전역에 동굴을 파느라고 강제로 동원하였던 당시 조선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규정된 동원 노무자의 나이는 본래 16세부터 50세까지였지만, 마을별로 인원이 할당되면 칠순 노인도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삽과 곡괭이만으로 동굴을 팠던 조선인에게는 굶주림과 매질 등 학대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미군의 몇 차례 공습을 받아 해공군이 괴멸 상태에 이르자 일본군은 중산간지역에서 장기유격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소년대, 소녀대, 부녀대, 청년대, 장년대로 나누어 제주도민까지 각종 군사훈련에 동원했다고 한다.
징용노동자의 고통은 이곳 해안동굴뿐 아니라 평화동에 자리한 평화박물관 및 가마오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 가마오름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군사시설의 구축 과정과 절체절명의 전운이 감돌았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인권과 평화의 교육 현장으로도 중요하다.
* 이 글은 제주역사기행(이영권)에서 참조하였습니다.
□ 일제군사요새지
○ 위 치 : 상모리 송악산 및 비행장 일대
○ 주요시설
―비 행 기 격납고 : 20개소 ―비행기 정비고 : 2개소
―대 공 포 진 지 : 4개소 ―어뢰정접안시설 : 1개소
―해안어뢰정 동굴 : 15개소 ―내 륙 참 호 : 6개소
―방 공 호 : 1개소 ―탄 약 고 : 2개소
○조성년도 : 1926년 ∼ 1945년
□ 알뜨르비행장
일본군이 중일전쟁 중이던 1926년에 중국본토 공격을 하기 위해 일본 공군주둔이 시작되면서 알뜨르 비행장 건설계획을 세워 1930년대 중반까지 1차로 20만평을 조성하고 1937년 확장계획을 수립하여 1945년까지 80만평으로 확장하였으며 모슬봉에는 무전, 전파탐지시설을 설치하였다.
- 위 치 : 상모리 1670 번지 일대
- 면 적 : 2,046,485㎡ (619,058평)
- 현 이용실태 : 활주로 140,000평, 농지임대 480,000평
- 군사보호구역해제일 : '93. 1. 1
□ 비행기 격납고
비행장 부대시설로 건설된 격납고는 당초 20개소가 있었으나 1개는 훼손되어 현 재는 19개가 남아있으며 격납고는 "가미가제"라 불리는 자폭용 비행기 공습 대피용으로 설치되었다. 격납고 재원은 굴천정과 지면 사이 높이 3.6m, 길이 18.7m, 너 비 6.7m 이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지붕에는 흙 위에 잔디를 심어 위장하였다.
□ 비행기 정비고
정비고는 상모리 1601, 상모리 1566번지에 각각 있었으나 현재는 비행장 관제탑 인근에 기둥 일부만 남아있다.
기둥의 재원은 기둥둘레 4.8m, 기둥높이 3.35m, 기둥과 기둥사이 2.1m이며 현재 10개의 기둥이 남아있다
□ 대공포 진지
○ 섯알오름 정상에 콘크리트 담벽으로 조성된 진지가 남아 있다.
□ 어뢰정 접안시설
○ 어뢰정 접안시설은 산이수동 해안 모래사장에 있었으며 어뢰정을 동굴에 옮기기 위해 시설한 것으로 약 60m 정도가 되며 간조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타나므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 해안 어뢰정 동굴
송악산 동녘 산이수동 해안에는 어뢰정(자폭용 어뢰정)을 숨겨놓기 위한 동굴이 15개소 있다. 높이, 폭은 3∼4m 이고 길이는 20여m이며 상호 연결 된 동굴도 있다.
□ 내륙참호
해안에는 어뢰정 동굴을 내륙에는 섯알오름 동쪽에 5개의 지하땅굴 등 내륙 참호를 시설하여 군수물자 보관 및 방공호로 이용하였다.
□ 방공호
비행장 관제탑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돌담벽에 콘크리트 천장으로 만들어졌으며 외부는 흙으로 덮고
잔디를 씌워 위장하였다. 내부에는 2개의 탄약고와 2층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있으며 100명이 수용가능하고 폭은 3∼4m, 길이는 20여m정도 된다.
□ 탄약고
대정고등학교 정문앞 동쪽 (상모리 3415)에 있는 곳은 고구마 저장고로 사용되기 고 하였으면 높이는 7.7m, 길이는 33m이다. 상모리 3261-1번지에 소재한 탄약고는 당초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 해군항공대 및 서부지역 주둔 일본군들의 통신업 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20여미터 되는 전파송 수신용 콘크리트 기둥 6 개가 있었으나 현재 5개가 남아있으며 도로에 인접하여 입구가 2개소 있다. 광복 이후에는 국군의 탄약고로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 오오무라 병사
알뜨르에 일본 해군 항공대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상모리 3373번지 일대(속칭 절 왓)에 오오무라 병사를 대규모로 건설하였다. 항공대원 2,500원이 주둔하다가 1945년 2월 미군이 일본 본토 공격 가능 예상지역으로 제주도를 설정하자 일본군 12,000명이 파견되면서 규모가 확대 되었다. 해방 후 대정중학교 임시건물로 사용 되다가 1946년 국방경비대 9연대가 막사로 사용되었고 1931. 3. 21에는 육군 제1 훈련소본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면 당시 건물이 일부 남아있다.
□ 병참 도로(하찌마키 도로)
알뜨르 비행장에서 모슬포항까지 시멘트 포장도로를 3km 시설하여 탄약 및 군수 물품을 운반하였으며 80년대까지 시멘트 도로를 농로로 이용하다가 현재는 아스콘으로 포장 이용하고 있다.
□ 대한민국 해방기념비
8·15 광복이후 순수한 의미에서 민족해방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비는 대정초등학교 교정에 있는데 일제시대에 무명교사의 민족교육에 감명받은 대정공립국민학교(현재 대정초등학교) 34, 36, 38회 졸업생들이 5년간 헌금을 모아 1950년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수많은 열사가 나라를 위해 순국했으니 장하도다」한일합방 조약으로 36년 동안 일찍이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주권박탈이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항복하니 그 속박에서 벗어나 민족의 숙원이 성취도니 통쾌하도다. 우리들은 그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이 비를 세워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고자 한다」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