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낙찰제 영향으로 대표회의가 제시한 하한액에 입찰가격 맞춰져…결국엔 추첨
“주민재산 관리자를 ‘뺑뺑이’로 결정”…“피땀흘려 키운 본사 역량 물거품” 비판도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는 지난 12일 관리업체 선정을 위해 제출받은 입찰서류를 개찰했다.
개찰한 결과 관리업체 10개사가 써낸 입찰가격은 모두 동일했다. 이에 따라 이 아파트는 탁구공 뽑기를 통해 관리업체를 선정했다.
개찰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들은 안대와 장갑을 착용한 뒤 탁구공을 하나씩 들어 올렸고, ‘1번’ 탁구공을 들어 올린 업체가 낙찰됐다.
입찰가격은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에 따라 월간 위탁관리수수료에 계약기간 개월 수를 곱한 뒤 부가가치세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산출된다. 그런데 10개사가 써낸 입찰가격이 모두 동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아파트 대표회의는 지난달 말 관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지명경쟁입찰)를 내면서 10개사를 지명했고, 이들 업체에 위탁관리수수료를 ㎡당 5원 이상(위탁관리수수료는 모두 5개 항목, 각 항목별 1원 미만은 무효)으로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한 바 있다. 따라서 10개사 모두 이 아파트 대표회의가 제한한 ㎡당 5원을 입찰가격으로 써낸 것이다.
이 아파트 입찰에 참여했던 관리업체 관계자들은 이날 개찰이 끝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A사 관계자는 “최저낙찰제 하에서 입찰가격을 현실적으로 적어낼 업체는 없기 때문에 10개사 모두 입찰가격이 동일한 것”이라며 “탁구공 추첨으로 이달 들어서만 벌써 두 번째 떨어졌다.”고 하소연했다.
B사 관계자는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탁구공 하나로 입주민 재산을 관리할 자를 결정한 형태”라며 “사업자 선정지침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 아파트의 한 동대표는 “0원 낙찰을 피하면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낙찰방법을 정했지만 씁쓸한 기분은 든다.”며 “10개사의 입찰가격이 1원 단위까지 동일한 것으로 공개되자 동대표들 대부분 놀라워했고 일부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고 전했다.
이 아파트 입찰과정에 대해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적법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국토부 관계자는 “대표회의가 입찰유의서, 현장설명회 등 어떤 형식을 통해서라도 위탁관리수수료 하한선을 둔다면 이는 ‘제한적 최저가’이기 때문에 부적법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리업체 선정은 관행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경기, 대구, 부산지역의 여러 아파트 단지에서 복수의 관리업체가 써낸 입찰가격이 동일하자 탁구공 뽑기로 관리업체를 선정했으며, 최근 서울지역과 강원지역의 일부 아파트도 입찰가격이 동일해 추첨방식으로 관리업체를 선정했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 아파트는 대표회의가 위탁관리수수료를 3~5원 이상으로 제한했음에도 응찰한 관리업체들은 대표회의가 제한시킨 수수료에 입찰가격을 그대로 맞춰 응찰했다.
사업자 선정지침 제12조 제2항에 따르면 주택관리업자 선정을 위한 경쟁입찰에서 동일가격으로 2인 이상 입찰한 경우 추첨으로 낙찰자를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대표회의는 입찰가격이 동일한 경우 추첨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일선 관리업체 관계자들은 소위 ‘복불복’(福不福), ‘뺑뺑이’와 같은 추첨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한 관리업체 관계자는 “0원, 1원 낙찰 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표회의에서 3~5원 이상으로 위탁관리수수료를 제한하더라도 최저낙찰제 규정 때문에 관리업체 대부분은 대표회의가 제한한 그 가격에 입찰가격을 맞출 수밖에 없어 결국에는 무조건 추첨”이라며 “아파트 관리업무가 오락방송에나 나오는 ‘복불복’, ‘뺑뺑이’에 맡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최근 진행된 관리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의 약 40%가 탁구공 추첨 등 제비뽑기였다.”며 “탁구공 하나만 잘 뽑으면 수주할 수 있으므로 본사의 기술력이나 관리노하우, 전문성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또다른 관리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피땀을 흘려가며 본사의 역량과 전문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사업자 선정지침 시행 이후 모두 물거품이 돼버렸다.”며 “최저낙찰제 하에서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일이 거듭될 수밖에 없고, 혼란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이러한 제도는 하루 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 “과거에는 입찰참여 전 해당 아파트 입주민 숙원사업 등 단지 특성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을 거친 후 정성스럽게 입찰서류를 준비했지만, 현재 이러한 작업은 필요가 없다.”며 “그저 탁구공 뽑기를 잘 할 수 있도록 기도만 하면 된다.”고 비판했다.
한편 국토부 관계자는 “그동안 지적돼 왔던 사업자 선정지침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고, 다양한 항목의 평가표를 핵심으로 하는 ‘적격심사제’의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며 “이 경우 추첨을 통해 관리업체를 선정하는 사례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