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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학습노트] 1870년 독일의 통일
1) [프랑크푸르트 회의] 1848.5
o 독일의 자유주의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국민회의로서 구성원은 대학교수, 문필가 등 자유주의적인 시민계급의 대표자들. o 소독일주의 채택,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제국의 자유주의적인 헌법 제정 o 프로이센 왕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 프로이센 왕의 거부로 수포
2) 비스마르크
o 1815;1898/ 동부 프로이센의 지주 귀족(융커) 출신.
o 프로이센 중심의 '위로부터의 통일'주장 보수주의자 마키아벨리스트, 탁월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이며 융통성있는 위대한 정치가.
o 건장한 체격과 뛰어난 실천력. 대학 시절 20여 차례의 결투에서 이겨<난폭한 비스마르크>별명.
o 1851년에 프랑크푸르트의회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59)로 임명되어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뛰어난 외교 솜씨를 발휘하였다.
o 鐵血재상 : 1862년에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빌헬름 1세에게 등용되어 프로이센 총리[수상]에 임명되었는데,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오늘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 →군비확충 실행 9년 후 독일 통일 달성
o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71년에 프로이센·프랑스전쟁[보·불전쟁(普佛戰爭)]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결국 1871년 프로이센의 왕을 황제로 하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제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독일의 첫 수상이 되었으며, 19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o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o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o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러시아·투르크전쟁[러·터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 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o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카메룬(1884), 독일령 동(東)아프리카(1885) 등을 경영하였다.
o 1888년 빌헬름 2세가 새로 왕위에 즉위하자 비스마르크는 곧 그와 충돌하였는데, 결국 1890년에 사직하였다.
3) [普.墺전쟁]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 1866년
o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양 공국은 민족적으로는 독일에 속하나 덴마크 주권에 예속되어 오던 중 덴마크가 자국령으로 합병(合倂)하려하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은 출병하여 양국 공동관리하에 둠.
o 독일은 이탈리아와 공수 동맹, 프랑스와는 비아리츠 밀약(중립 약속)을 맺고, 오스트리아령 홀스타인에 침략하여 개전함, 7週로 단기전, 프로이센 승리
o 프라하 조약; ①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이탈할 것 ②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은 프로이센이 合倂 ③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양도 등이 약정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됨
4) [普.佛전쟁]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1870년 7월 19일
o 보.오전쟁으로 세력균형이 깨어짐. 오스트리아는 위축되고 프로이센은 북독일연방의 맹주가 됨.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발전을 시기하여 라인강 좌안지방의 병합을 노려, 서남독일 제국의 지배를 둘러싸고 프로이센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 비아리츠 밀약; 라인란트를 할양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비스마르크가 지키지 않았다. ;을 근거로 라인 팔츠의 일부와 룩셈부르크의 할양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o Ems 전보사건 : 호엔쫄레른가의 왕자 레오폴트가 에스파니아 왕위에 추대 움직임이 있게 되자 나폴레옹3세가 강력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함. 프랑스 대사가 엠스 휴양지의 윌리암1세와 화담(프랑스 대사는 레오폴트 추대 포기를 문서 보장 요구) 왕이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를 쳤는데 비스마르크는 교묘히 이용하여 프랑스가 프로이센왕을 협박한 것처럼 꾸며 보도함. 이것이 개전 동기가 됨
o 나폴레옹 3세의 제 2제정 붕괴,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알사스. 로렌 일부 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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