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촌 초등학교
조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촌리는 해변마을인 까닭에 중산간처럼 소개령이 내려지거나 마을이 불타지는 않았지만,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李德九)와 간부였던 김대진(金大珍)의 고향이었다. 따라서 몇몇 젊은이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아 산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신촌리는 토벌대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48년 11․12월 두 달 간 신촌리 주민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토벌대에 의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무장대에 의한 피해도 발생했다. 1948년 4월 17일 숙직 중이던 신촌교 교사 진창섭을 포함한 주민 5명이 살해당하고 김영아 교장이 죽창에 찔려 부상당했다. 4월 19일에는 신촌 투표소가 습격을 받아 투표인 명부를 빼앗기고 투표소 건물이 방화되었다.1) 이러한 연유로 신촌리에서는 5․10 선거가 치러 질 수 없었다.
「제주교육사」(1999)에는 신촌교가 1949년 1월에 4․3으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2) 그런데 신촌교에서 펴낸 「신촌향토지」(1987)에는 “1949년 1월 19일 무장대의 기습으로 신촌교가 전소되었다. 이때 채종철 선생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실에 보관 중이던 졸업 대장 등 각종 문서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3) 라고 방화의 주체와 그 시기를 명확히 기록했다.
무장대에 의해 1949년 1월 19일에 신촌교가 전소되었다는 것은 당시 신촌교 교사였던 채종철4) 과 신촌교 2회 졸업생 문병오5) 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날의 상황에 대하여, 채종철 은 “1월 19일 19:00경 무장대는 운동장 동쪽으로부터 침입하여 서쪽 교사부터 불을 질러 학교를 전소시켰다. 대피 도중 부상자를 발견하여 민보단원에 인계한 후 칼빈 소총을 인수하여 대수동 서편 선창에 피신하였다. 약 40분 후 현 새마을금고 사무실 앞길을 통해 후문으로 들어오면서 혹시 무장대로 오해받을까봐 하늘을 향해 발사하고, 포위한 군경들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하고 소총을 반환하였다. 즉시 해산 명령을 받아, 해산하는 도중 후문 앞밭(셋부든밭)에 신촌 주민 다수가 집결해 있고, 경기관총구가 주민을 향한 것을 보게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증언 자료집에 구체적인 날짜를 밝히지 않고, “산에서 국민학교를 불지르고 간 얼마 후에 군인들이 왈칵 몰려오더니 ‘신촌은 빨갱이가 있어서 내통해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며 신촌 사람 전부를 그 밤중에 ‘음팡밭(움품 들어간 밭)’에 모아서 다 죽이려고 하는 것을 김순철 순경이 살렸다.“6) 라는 대목이 있다. 채종철 교사의 증언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짜와 대략적인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무장대가 신촌교를 방화하면서 보초를 서던 주민들도 희생되었다.7) 전소 당시 신촌교는 현 위치인 신촌리 1828번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학교 규모는 <그림1>의 평면도처럼 목조기와의 본관 7개 교실(교무실 포함, 교무실 가운데 위치), 본관 뒤쪽(북)에 있는 목조기와의 별관 3개 교실(강당 겸용), 숙직실, 화장실, 그리고 학교 울타리 밖에 석조기와의 관사(2개의 방, 마루, 부엌 등)가 있었고, 교실 하나의 면적은 25평 정도였으며, 정문과 후문이 현 위치에 그 당시에도 있었다.8)
4․3 당시의 학교 모습은 전경 사진 <그림 2>와 본관 현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1회 졸업생들의 기념 사진인 <그림 3>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학교 부지는 1942년에 주민들이 희사한 1,991평의 운동장과 147평의 관사를 포함한 4,044 평이었다.9) 신촌향토지(1987)와 「제주교육사」(1999)에는 4․3에서 신촌교의 피해 규모를 10개 교실 및 학교비품 일체가 전소된 것으로 파악 하고 있는데 10), 이는 위 증언자들의 회상과 일치하고 있었다.11)
문병오(신촌교 2회 졸업)는 당시 학생 수는 학급당 60명 이상이었고, 6학년까지 약 6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재학했으며, 6학년 시절에는 약 63명이 같이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필자가 신촌초등학교총동창회에서 펴낸 자료를 확인한 결과 2회 졸업 학생 수는 81명 이었다12) . 따라서 문병오가 동급생이 63명이라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문병오는 6학년 동급생 중 정봉추 등 4~6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문병오와 이기진은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1997)에 신고된 양상돈(당시 15세, 1949년 8월에 희생)과 김기배(당시 15세, 1948년 10월 16일에 희생) 13) 가 당시 신촌교 재학 중 희생14) 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채종철 교사가 간직하고 있는 1947년 8월경 신촌교 교사들이 합동으로 찍은 사진 <그림 4>, <그림 5>를 통해 교장 김보현(1945.11.15.~1947.11.10,), 교사 고달민․김종수․신규범․이용승․김창능․김주삼․채종철․김은순(여)․신중근 등이 근무했던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4․3 발발에서 학교가 전소될 무렵에 교장 김영아(1947.10.11.~1948.9.14.)․김종희(1948.9.15~1950.6.22), 교사 진창섭․강용흥․김창능․홍동표․김주삼․채종철․채종하․김순선(일명 김지영)․김정열․이용승(강사) 등이 근무하였다.15)
그 중 김영아 교장은 우익 진영이었고, 채종철 교사는 중립적 경향이며, 김종수와 김창릉은 좌익 경향이라는 증언16) 과 김종수는 4․3이 터지자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했고, 김창능은 수업 중 경찰이 출현하면 개다 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었다는 증언17) 도 있었다. 채종철은 학교 내에서 교사들끼리의 사상적 마찰은 없었으나, 좌익계 교사였던 김종수와 김창능 외에도 신규범, 이용승 등이 토벌대에 희생되었고, 무장대의 습격으로 김영아 교장이 죽창에 찔려 부상당할 때 숙직 중이던 진창섭 교사(충청도 출신)가 속칭 말동산에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증언하면서도 그 시기가 언제인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촌교 교사들이 피해를 입은 시기에 대해 문창송이 무장대 측 기록을 찾아내 밝힌 자료에 “1948년 4월 17일 조천면 신촌리 반동 진장섭(晉張燮)을 숙청하고, 교장 김영아를 부상입혔다.”18) 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채종철 교사는 진장섭이 아니고 진창섭(陳昌燮)19) 으로 그 이름이 정정되어야 한다고 증언했다.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1997)에 김창능은 1948년 10월 26일에, 김종수는 1948년 11월 28일에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20) 이밖에 신촌리 출신 교사로 모학교에 근무하였던 신희범(여, 20세, 여맹원, A급)과 김명애(여, 19세, 여맹원, A급)가 6․25 이후 예비검속된 바 있었다.21)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에는 “하루는 서북청년들이 신촌에 와서 주민들을 모두 신촌교로 모이라고 집에서 내 몰았다. 운동장에 모이니까 눈을 감고 앉으라고 하더니, 색안경에 마스크 낀 사람이 사람들은 지목하기 시작했는데, 나 같은 중학생이나 학생들만 주목했던 것 같았다. 지목되어 교실로 따로따로 데려가더니 무조건 때렸다. 난 운 좋게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초주검이 되고 난 후에 대기했던 차에 태우고 경찰서로 갔는데…거의 다 돌아오지 못했다. 조천중학원생도 5명은 되었다.”22) 라는 기록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채종철은 “모월 모일 학교에 출근하자, 학교 운동장에 신촌리민들이 집결해 있고, 색안경을 끼고 입에는 마스크를 한 사람이 지적하면, 당국 직원이 체포했다. 집결한 사람 중 신촌교학생이 있었고, 당국에 국교생임을 확인시켜 구출하여 모친에게 인계하였다.”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밖에 채종철은 4․3 당시 제주시에 출장가서 귀교할 때 제주동교 앞 검문소에서 검문관들이 신분 확인하면서 “빨갱이 학교로군 빨리가!”했던 적이 있었고, 조천지서에서 차를 몰고 와 신촌교 교원들을 전부 조천지서로 데려가서는, 지서장이 선생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직장에도 최선을 다하라고 훈시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신촌교는 교사가 전소된 후 동동의 고중진씨의 붉은 기와 집, 대수동 향사, 서동 향사에서 분산 수업을 하였고, 직원실은 중계 이용상씨의 집을 이용했으며, 현 조천중학교에서도 수업하여 신촌교 3~5회의 졸업기념 사진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23)
∙위치 : 신촌리 1828 번지
∙대지 : 4,044 평
∙건축재료 : 목조 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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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 전 학교 전경

소실 전 본관 현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1회 졸업생 기념 사진

1947년 8월경의 신촌교 교사들 1947년 가을운동회 때의 신촌교 교사들
1)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②」, 도서출판 전예원, 1994, p.73.
2) 제주도교육청, 「제주교육사」, 1999, p.528.
3) 신촌국민학교, 「신촌향토지」, 제주:삼화상사, 1987, p.36.
4) 1927년생, 동회천 출신, 제주시 일도2동, 초등학교장 정년퇴임.
5) 1933년생, 신촌리, 신촌교 2회(1948년 7월 20일 졸업).
6) 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Ⅰ」, 한울, 1989, p.70.
7)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 「제주도 4․3 피해 조사 보고서-수정․보완판」, 1997, p.669.
8) 채종철(1927년생) / 문병오(1933년생) / 이기진(1931년생, 신촌리).
9) 1959년에 272평을 주민으로부터 희사받아 현재의 부지가 확정되었다(신촌초등학교총동창회, 「큰 물」제5호, 제주:성심인쇄사, 2000, p.74.).
10) 신촌초등학교총동창회(2000), 앞의 책, p.36 ; 제주도교육청(1999), 앞의 책, p.528.
11) 채종철(1927년생) / 문병오(1933년생) / 이기진(1931년생).
12) 신촌초등학교총동창회(2000), 앞의 책, pp.98~99.
13)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99.
14)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96.
15) 채종철(1927년생).
16) 문병오(1933년생).
17) 채종철(1927년생).
18) 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 제주:대림인쇄사, 1995, p.64.
19) 진창섭 교사는 충청도 출신으로 무장대에 살해된 후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일가 친척이 없는 관계로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도 4․3특별위원회에 피해 신고가 되어 있지를 않고 있다. 숙직 중 순직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20)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98.
21) 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서울:월간 말, 2000, p.238.
22) 제주4․3연구소(1989), 앞의 책(Ⅰ), p.69.
23) 채종철(1927년생).
사진과 글 : 신촌국민학교, 제주큰동산, 2013.02.05, 제주 서귀포시 보목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