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야국을 되돌리자
두 사람은 가락국의 수도인 김해에 눈 깜짝할 새에 도착했다. 김해의 큰 왕릉 앞에 다다르자 황금빛 금관을 쓴 구척장신의 늙은 왕이 그들 앞에 나타나 말했다.
“어서 오너라. 내가 가야국의 김수로 왕이다. 저 분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 황후이니라.”
수로왕은 옆에 선 황후를 소개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황후는 두 사람에게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했다. 찬란한 은빛 구슬로 만들어져서 목에 건 순간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김수로 왕은 북방에서 내려온 흉노의 후손으로 신라 김알지와 비슷한 시기에 남하하여 구지봉에서 가야를 세운 왕이다. 가야의 유물인 철기문명과 마구(馬具), 동복(銅鍑. 청동솥)이 이들이 북방에서 내려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인도에서 남태평양을 건너 가야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온 허 황후는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그 중 둘이 어머니의 허 씨 성을 받아 김해 허씨가 되었다. 하여 김해김씨와 김해 허씨는 한 집안이다.
‘고대에 어찌 그 먼 길을 왔을까.’
성우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블랙버드가 말했다.
“가야는 대단한 나라였다. 낙동강 유역에서 시작된 가락국은 대가락국 532년, 고령가야 30년 도합 562년간 존속한 문명국이다. 아마 학생들은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가야가 들어섰다고 배웠을 테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았어? 삼국은 확연히 기술하면서 가야역사는 흐지부지했거든. 이것은 모든 역사책이 다 그렇다. 도대체 가야국은 생기다 만 나라인지, 왜 강력한 국가로 통합하지 못하고 6개 가야로 병립했고, 삼국에 시달리다가 사라졌는지, 의문투성일 것이야. 저기 허 왕후님은 인도의 공주인데 16세에 이곳에 와 수로왕과 혼인을 하였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동방은 해양문화가 발달하여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인도 내부의 권력변동으로 이쪽으로 오신 것이다. 가락국의 왕후가 인도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쌍어문양(双魚紋樣)이지. 신어상(神魚像)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상징이지. 또 파사석탑(婆娑石塔)도 있는데, 이탑은 서기 48년(수로왕7년)에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두 학생이 여전히 의아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어느새 달려온 모후가 추가 설명을 했다.
“여기 계시는 수로왕께서는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시고, 김해김씨의 시조이시다. 나라를 세우고 157년간 이끈 지도자이시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현재 김해지역은 삼한시대에 구야국(仇耶國)이라 불리었는데, 나라다운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어.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누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이 지역의 어른들인 9간(九干)과 부족원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금빛 보자기에 여섯 개의 알이 싸여 내려왔는데, 12일이 지난 뒤에 알에서 차례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가장 먼저 알에서 깨어나 태어난 아이를 수로(首露)라고 했지. 수로란 가장 먼저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뜻이지. 수로는 장자이기 때문에 가락국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단다.”
모후와 블랙버드는 가락국의 건국 이야기를 흥미 있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성우가 입을 열었다.
“가락국의 시조이신 수로왕께서도 북방에서 오셨고, 알에서 태어나셨구요. 주몽님이나 박혁거세님도 난생설화를 지니셨는데요. 또 왕후까지도 외래인이시니 북방과 남방인이 황실을 이루었군요. 그렇다면 이 땅의 원주민들이 미개했다는 증거인가요?”
그러자 샛별이 의견을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대개 고대왕조의 시조들을 보면 천손족이거나 문명된 외지에서 온 것으로 치장을 하더라구. 아마 현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이끌기 위한 상징조작이 아니었을까? 일본도 보면 도래인이 시조로 돼 있잖아.”
그 말에 성우가 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수로왕님, 저는 창피하지만 가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한국사시험에도 가야에 대한 문제는 거의 없어요. 모후님 말씀대로 562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유물유적이 있고, 나라가 있었는데, 왜 무시당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말에 수로왕이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들의 말이 다 옳다. 우리 가락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다른 문화를 지녔다. 낙동강과 가야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부족함이 없던 평화로운 국가였지. 또한 삼국은 군사력으로 영토와 물자 쟁탈전쟁을 했지만 우리 가락국은 해양을 통해 무역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여섯 개 가야로 나뉘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았거든. 또 농산물이 풍부하고 철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식량과 철을 뺏기 위한 전쟁이 필요 없고, 바다와 내륙을 이용한 무역으로 국부를 증강시켰지. 절묘하게도 우리 가야 땅은 중국과 백제, 왜와 무역하는 국제교류의 중심지였단다.”
수로왕의 음성은 중량감이 있고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성우는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저, 대왕님, 포상8국이 난을 일으키고 침략했을 때 자력으로 방위하지 못하신 것은 어찌 생각하세요?”
성우의 당돌한 질문에 수로왕은 흐뭇한 미소로 응대했다.
“오, 네 어찌 포상8국을 아는고? 기특하도다. 그래, 3세기 초반 그러니까 서기 209년 7월이었다. 경상도 남해 연안에는 8개의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古史浦)·갈화성(울주)·보라(保羅.고성)·사물(史勿. 사주) 등인데, 이 여덟 개 해양 소국 왕들이 연합하여 아안야국(安耶國.아라가야)과 신라 변경을 공격해 왔단다. 아마 자기네들의 이익이 훼손당하고 있다고 판단했었나 보다. 그런데 당시 가야국들은 외침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안하고 살았기에 군대가 거의 없었단다. 하여 아라가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내해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시켜 출병하여 8국의 장병을 격살하고 포로 6천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 뒤 연이어 두 차례나 침략했지만 역시 신라 군사가 패퇴시켰지. 사실 돌이켜보면 가야지역에서 일어난 난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신라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었어. 그들도 동족이었는데 도와주었어야 했어. 또한 국가 안위를 미리 염려하여 방비를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정책상 큰 오류였다고 본다.”
하지만 성우는 가야 역사가 미스터리 투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수로대왕님, 철기와 농업 그리고 무역 등으로 국부가 크게 신장된 가야가 어째서 허망하게 사라졌는지요?”
“허허, 참으로 집요하구나, 하지만 배우려는 욕구가 강해서 참 좋다. 패망한 나라의 시조가 뭐 그리 할 말이 있겠느냐만, 돌이켜보면 건국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지 못한 나의 불찰도 크지. 아까 말했지만 경제적인 발전을 국가안보와 직결시키지 못했다는 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움직임과 각국의 국익추구 활동에 둔감했다는 점, 왜의 준동과 고구려군의 내침이라는 절체절명의 정세 파악에 둔감했다는 점이 제일 큰 문제였다고 본다. 또 한 가지는 우리 가락국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의 불교를 받아드려 백성들의 정신세계가 부지불식간에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야인의 정체성에 큰 위협을 받은 것이었지. 그로 인해 신라 법흥왕 때에 그만 신라에게 복속되고 말았단다.”
“아, 국민의 국가정체성과 사상적 토대가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암, 정신적인 합일은 강력한 왕권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야.”“그런데 저는 가락국 562년 역사를 이끈 왕을 잘 모릅니다. 수로대왕님 말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신라는 56대 왕, 백제는 31대 왕, 고구려는 28대 왕이 계신데 가락국은 몇 분의 왕이 계신지요?”
이 말에 수로왕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가락국왕들이 그리도 존재가 미미했더냐? 허허, 잘 몰랐노라.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열 명의 왕이 나라를 이끌었느니라. 나의 뒤를 이은 아들이 거등왕 도왕(60년 재위)이요, 그 뒤를 이어 마품왕 성왕(32년)-거질미왕 덕왕(55년)-이시품왕(61년)-좌지왕 신왕(14년)-취희왕 혜왕(30년)-질지왕 장왕(42년)-감지왕 숙왕(29년)-구형왕 양왕(11년)이 나라와 역사를 이어갔느니라. 그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을 만나보기로 하자.”
김수로왕의 옆에는 어느새 왔는지 구형왕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왜 우실까?’
이렇게 생각하는 찰라 갑자기 수 만 명의 철기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가야국으로 쳐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고구려 개마기병이 가야의 서울과 지방고을을 휩쓸면서 철제무기와 농기구, 마구 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모습이 흡사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구형왕이 신음하듯 말했다.
“아바마바, 고구려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담덕이 광개토대왕이 되어 남진을 합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고구려 철기병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고구려군사들에 짓밟히자 서라벌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허어, 이게 무슨 일인고, 우리 가야가 고구려를 넘보지 않았는데, 어찌 담덕이 우리를 친단 말인가…!”이에 성우가 나서서 물었다.
“수로대왕님, 고구려군이 물밀 듯 쳐들어온 것은 신라가 요청한 것 아닌가요? 한성백제가 남하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던 왜씨족이 남하하는 백제에 밀려 가야국으로 들어오니까 신라가 불안해서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샛별이도 거들었다.
“맞아요. 왜인들이 가야국으로 밀려오니까 가야백성들이 난을 피해 서라벌로 이동하고, 여기에 놀란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한 것, 맞지요? 가야인들이 살려고 이동한 것인데….”
수로왕은 두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비장하게 말했다.
“원통하도다. 짐은 신라를 형제국으로 알고 있었는데, 침략군을 부르다니. 하는 수 없다. 이제 가야 왕실은 북으로 이동하여 대가야를 세우라.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은 대마도와 규수로 넘어가 섬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 가야는 이제부터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 일본가국 세 나라로 새롭게 출발하리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가야인들이 줄을 지어 북으로 이동하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한편 금관가야황실은 고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가락국으로서는 참으로 상상조차 못한 처절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