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면
본래 목천군 지역으로 세성산 이들을 따서 세성면(細城面)이라 하고 운교(云 橋), 화원(花院), 성양(城陽), 통주(通注), 일각(一角), 강당(講堂),일신기(一新 基), 이신기(二新基), 일검사(一儉沙), 이검사(二儉沙), 화전(花田), 일대초(一 大招), 이대초(二大招), 용산(龍山), 봉명(鳳鳴)의 관할구역과, 목천군의 남쪽 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남면(南面)이라 부르던 중곡(中谷), 가덕(加德), 산양(山 陽), 신촌(新村), 송평(宋坪), 신흥(新興), 대양(大陽), 대티(大峙), 초정(초 井), 마산(馬山), 하대티(下大峙), 조양(朝陽), 봉학(鳳鶴), 봉유(鳳游), 대사 (大寺), 정곡(正谷), 석천(石川), 도모(道慕), 평리(坪里)와 수신면(修身面)의 현암(玄岩), 운곡(雲谷), 송정(松亭), 신평(新坪), 봉서(鳳栖)리와 서면(西面) 의 일운전리(一云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세성면 성자와 남면의 남자를 따서 성남 면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되어 대정리, 대화리, 대흥리, 봉양리, 석곡리,신덕 리, 신사리, 화성리 8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7년에 목천면의 용원리를 편입 하여 9개리가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서쪽은 목천면, 북 쪽은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쪽은 수신면과 접하고 있다. 1963년 1월 1일 천안 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여 천 원군 성남면이 되었다.
신덕리
목천군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중곡리, 가덕리, 산양리, 신 촌리를 병합하여 신촌의 신자와 가덕리의 덕자를 따서 신덕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중실앞 : 장승재 길 한쪽에 장승이 나란히 서 있는데 정월 열나흘 오후 4시경 부 락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 셋을 선정하여 제관 주당 축관 보조인이 지내는데 삼색실과와 소간류, 술등을 제물로 놓고 지낸다. 선택된 사람은 목욕재계하고 탈없이 있다가 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며 부 락 평온의 소지를 올린다.
효자정문 : 효자 이유의 정문인데 순조때 사람이다.
전설 : 부모의 병관을 잘 하였으며 하루는 잉어를 잡숫고 싶다고 하여 해드리고 싶었으나 잡을 길이 없으므로 얼음 위에서 무릎을 끓고 하늘에 빌었더니 하늘에서 잉어가 떨어졌으며 약 시중을 잘 하였는데 약을 지으러 다닐 때 범이 항상 보호를 하며 따라 다녔다 한다.
가다리 : 제월촌(薺月村) 가덕리라고도 하며 신덕리에서 가장 큰마을이다.
옻샘 : 서당골에 있는 샘. 계룡산(溪龍山) 밑이 되는데 물이 아주 차서 옻 오른 데에 좋다고 한다.
훗고개 : 중실 서쪽에 있는 고개.
탑고개 : 탑현이라고도 하며 가다리 남서쪽에 있는골. 산제당골이다.
수청거리 : 공펀덕이라고도 하며 중실에서 연기군 전의면 거리실로 넘어가는 고 개 돌탑이 있었다.
중실 : 중곡이라고도 하며 쉴터이고 옛날 산에 나무하러 다닐때 이곳에서 쉬며 공을 치고 놀았다고 한다.
인중고개 : 사람의 콧등 같이 생겨 인중고개라고 부른다.
어리밋재 : 빙항령이라고도 하는데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이 높고 험하 여 도적이 많으므로 혼자는 못넘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넘어 다녔다고 한 다.
송벌 : 송평. 산양리라고도 하는데 신덕리와 대흥리에 걸쳐 있는 마을. 큰들의 안쪽이 되는데 산이 낮고 양지바른 곳이다.
안무풍골 : 무풍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무풍골 : 가다리 동남쪽에 있는 골. 물이 많은데 이 골의 물을 토정 이지함이 보 를 막아 봉양리로 끌어 내렸는데 이 보의 명칭을 토정보(土亭洑)라고 불 리어 온다.
노적봉 : 중실 동남쪽에 있는 산. 노적가리처럼 생겼다.
그뭇골 : 한샘골 : 한샘골 옆에 있는 골. 영월 신씨 묘가 있다.
고렵리 : 중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집이 있었다.
강당골 : 서당골 탑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중실 남서쪽 위에 있는 골짜기. 탑과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회고개 : 이 고개에서 석회가 나온다.
용원리
목천군 세성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산직리, 노원리, 용산리, 봉명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의 용자와 노원리의 원자를 따서 용원리라고 하여 목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목천면에서 분리되어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용산 : 장승제 정월 열나흘 리장이 대표가 되어 탈없는 자를 생기복덕을 보아 선 정하여 제주로 하고 떡 삼색실과와 술을 제물로 놓으며 정오에 지내고 황 토를 펴고 왼새끼로 줄을 매어 행인을 통제한다.
장승백이 : 용산입구 장승이 있는 곳. 장승제를 지낸다. 핑잇골에 장승백이가 또 있는데 장소가 다르다.
통미 : 핑잇골 뒤에 있는 산. 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외따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용산 : 용산리라고도 하며 늘우리라고도 한다. 산직말 동쪽골에 있고 백은산 밑 이 되는데 용의 형국이라고 한다.
조기진(趙基晋)참판의 묘 : 목천에 살던 정승 조병호(趙秉鎬)의 부친 묘가 이곳 용산에 있다.
전설 : 조병호의 부 조기진 묘를 홍승목(洪承穆)이 승지로 있을 적에 묏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이 자리가 대지인데 자손중 정승이 나오면 묘를 다른 곳으 로 이전하라고 부탁하면서 자리를 알려 주었다. 그후 정승이 둘이나 나 왔는데도 옮기지 않고 욕심을 더 부리다가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이곳의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조기진은 대원군과 사돈간이 며 아들손자들이 목천에 살았다.
오릿골 : 줄바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정상골 : 살티 남쪽에 있는 골.
돌고개 : 석현이라고도 하며, 돌고개 밑의 마을고개도 돌 고개라 하는데 살티 서 쪽에 있으며 목천면 도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 부근에 돌이 많이 있다.
살티 : 봉명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거대리(居垈里)라 하였다. 고려때 이 곳이 목주(목천)시절 읍치(邑治)지라고 한다. 기와조각이 주춧 돌이 밭에서 출토되고 있다.
산직말 : 살티 동쪽에 있는 마을. 산직집이 있었다고 한다.
안사당골 : 고려 때 이 곳이 읍터이었을 당시 사직단이 있었다고 하며, 살티 남 쪽골 도장리 경계 지점에 있다.
삼티 : 도리티, 석티, 한티, 이 세곳이 피난처라고 예전부터 이곳에 전해오는 말 이다.
괭이골 : 쟁이골이라고도 하는데 공인(工人)쟁이들이 살던 곳.
고정승골 : 노판서 골이라고도 하는데 고정승이 살았다고도 하고 노판서가 살았 다고도 한다.
선녀골 : 선녀가 내려와 놀다 올라갔다 한다.
장박골 : 목천읍이 이곳에 있었을 당시 장이 섰던 골이라 하는데 언덕이 평평하 다.
봉명 : 봉학이 춤추는 형이라 하며 살티라 부르고 마을 북쪽이 목천 읍터자리이 다.
대화리
목천군 세성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전리, 대초리 일부와 수신면의 현암리, 운곡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대초리의 대자와 화전리의 화자를 따서 대화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차돌백이 : (전설) 차돌이 희게 비치면 재실 사람이 죽으므로 재실 사람들이 와 서 파묻어 흰빛이 안보이게 하여 놓았다.
거문들 : (전설) 거문들이 나무가 무성하여 대사동에서 안보이면 거문들이 홍해 거문들에 부자가 생기고 나무가 없어 대사동에서 거문들에 보이면 대사동 이 홍해 대사동이 길하다고 한다.
위대초리 : 일대초리였으며 대초리 위쪽에 있는 마을.
아래대초리 : 대초리였으며 대초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재실 : 송정이라고도 하며 화전 옆에 있는 마을. 박씨의 재실이 있었다. 소나무 정자가 있어 행인이 쉬어 갔다고 한다.
거문들 : 현암이라고도 하며 대초리 남쪽에 있는 마을. 거문들이 있다. 본래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 (1895)에 목천군에 편 입되고 1914년 성남면 대화리에 편입되었다.
거문들 : 거문들 청룡부리 냇가에 있는 바위 빛이 검어서 현암(玄岩)이라고 하였 다.
운곡 : 내대, 안터, 운곡리라고도 부른다.
꽃밭재 : 화전뒤에 있는 산. 모양이 매화처럼 생겼다고 한다.
꽃밭 : 화전 아래 대초리라 하며 대초리 아래에 있는 마을. 꽃밭재 밑이 된다.
석곡리
목천군의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정곡리,석천리, 도모리, 평 리, 대양리, 세성면의 용산리, 봉명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석천리의 석자와 정곡 의 곡자를 따서 석곡리라고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정곡(正谷)의 노제 : 정월 보름날 저녁 일곱시경에 지냈는데 생기복덕을 보아 닫 는 사람을 제주로 정하고 그 집에서 모든 음식과 제를 주관하고 축관과 같이 지내는데 떡 삼색실과와 술 등으로 제물을 하고 길을 청소하고 황토 를 뿌리며 왼새끼를 꼬아 줄을 매고 각호의 소지를 올리고 제를 지낸 음 식을 나누어 먹는다.
도장골 : 질그릇 책임자인 한도장이 살았다.
정골 : 정곡. 방죽안이라고도 하는데 목골 남쪽에 있는 마을. 방죽 안쪽에 되는데 세조때 정낭 조명이 살았다. 정랑봉 밑이다.
목골 : 못골, 지곡이라고도 하는데 목골 위쪽에 있는 마을. 돌이 많다. 위 목골이라기도 한다.
도봉산(道峯山) : 목골 뒤에 있는산
석천(石川) : 돌내라고도 하는데 목골 위쪽에 있는 마을. 돌이 많다. 위 몰골이기도 한다.
도모(道慕) : 아래목골이라 하기도 하는데 목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벌말 : 평리라고도 하며 목골 동쪽 벌판에 있는 마을.
시향골 : 정씨네가 시향을 지내는 골.
왜정초 : 목골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봉양리
목천군 남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조양리, 봉학리,봉유리, 대사 동, 율리, 수신면의 봉서리 1부를 병합하여 봉자가 드는 마을이 셋이므로 봉자와 조양리의 양자를 따서 봉양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사동(大寺洞) : 한 절루라고도 하며 도랑미 남서쪽에 있는 마을. 큰 절이 있었고 입구에 석탑이 있는데 옛날에는 중이 만여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고 사층석탑이 있었는데 사람이 비올 때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도랑미 : 조양리라고도 하는데 봉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남쪽 도랑옆에 통미 가 있으며 옆에 조양정이 있었다.
김응남묘(金應南) : 호종공신 원성부원군 충정공 김응남묘가 이곳 도랑미에 있 다.
조양정터(朝陽亭) : 한저루 어귀 동쪽 봉황산 밑에 있는 조양 정 터. 선조때 토정 이지함이 봉황산 밑에 정자를 짓고 봉은 아침 햇볕에 운다는 뜻으로 조양정이라 하였다.
산신제 : 밤실 부락에서 지내는데 시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제 주를 선정하고 제주가 주관이 되어 지낸다.
토정보들 : 봉양리 앞 들에 물을 대는 보. 토정 이지함이 이 곳에 살 때 한저루 서쪽에 있는 절벽을 막아 봇 들을 내어 신덕리 무풍골의 물을 끌어다가 봉양리 앞들의 물을 댔다.
장승제 : 한저루에서 지내는데 정월 십사일 저녁 7시경 유사가 제주가 되며 유사 는 돌려가며 한다.
장승백이 : 한저루 어구에 있는 장승이 서 있으며 부락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음담말 : 음달 비조재라고도 하는데 비조재의 음달쪽에 있는 마을. 양달 비조재는 수신면 해정리에 있다.
밤실 : 율리라고도 하는데 우산이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
오동산 : 우산이 뒤에 있는 산. 앞에 봉황산이 있다.
우산이 : 봉유리라고도 하며 모산 골 나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봉황이 노는형이 라 한다.
시교암터(始敎庵) : 강당터. 강당골에 있는 시교암의 터, 숙종 때 학자 절골(節 谷) 김시관(金時觀)이 시교암을 세우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삼층석탑 : 강당골 끝에 있는 삼층의 석탑
비조재 : 비조티 : 비조티(飛鳥峙)라고도 하며 수신면과의 경계이다.
봉황산 : 매봉산 응봉이라고도 하며 한저루 앞에 있는 산.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고 봉황같다고 한다.
밤실고개 : 밤실에서 연기군 전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꾀꼬리봉 : 모산골 앞에 있는 산. 앵소유지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화성리
목천군 세성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으로 통폐합에 따라 운교리, 화원리, 성양리, 통주동, 일각리, 수신면 신평리, 서면, 일운전리 각 일부가 병합하여 화 원리의 화자와 성양리의 성 자를 따서 화성리라고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방아다리 : 일각이라고도 하며 방죽안 동남쪽에 있는 마을 방아로 다리를 놓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방죽안 : 화원이라고도 하는데 공다라니 동쪽에 있는 마을 앞에 방죽이 있다. 조선조때 길손이 쉬어가던 황신원이 이곳에 있었다.
동진청자 : 동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화성리 목관 토광묘에서 출토 되었는데 백제 중앙 세력과 연관을 맺고 있는 지방의 수장층으로 추정된 다고 한다.
공다라니 : 공촌 성양이라고도 하며 화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 세성산 남쪽 마을 이며 곰다라니 검다라니라고도 하다.
고린장터 : 이곳에서 청자들이 출토되었다.
대흥리
목천군 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평리, 신흥리, 대양리, 세 성면 화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양리의 대자와 신흥리의 흥자를 따서 대흥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내외정문 : 정골 위에 있는 정문, 효자 이규호와 그의 아내 경주김씨 열녀 정문.
사당골 : 거칠미 서남쪽에 있는 골. 서당이 있었으며 선인 독서형의 명당이 있다 고 한다.
댕골 : 대양이라고도 하며 삼한때 다인현이 었었던 터라 하며 세조때 정랑 조명 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명라동(明羅洞) : 송벌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삼밭재 : 거칠미 동쪽의 낮은 고개 삼밭이 있었다.
삼박골 : 터골이라 하며 예전에 사람이 살았다.
능골 : 산양리라고도 하며 댕골 남쪽에 있는데 이조 중엽에 왕과 약혼한 신처녀 의 묘가 산 능선에 있다고 한다.
능고개 : 능골에서 전의면 관정리로 가는 고개.
거칠미 : 황산 신흥리 황산리라 하며 대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
가마골 : 도로봉 남쪽에 있는 골.
도로봉 : 댕골 남서쪽에 있는 산 모퉁이가 된다.
마룻들 : 거칠미 동쪽에 있는 큰 들.
점골 : 정골이라고도 하며 댕골 위에 있는 골인데 예전에 그릇점이 있었다.
탑골 : 도로봉 위에 있는 골. 탑이 있었다.
용수봉 : 허씨 촌인데 허장군묘와 말무덤이 있다.
전설 : 거칠미 말바위 이 바위가 거북이 비슷한데 머리쪽의 부락은 먹어 치우므 로 불길하고 궁둥이 쪽의 부락은 걸직한 똥을 눔으로 거름이 되어 좋다고 하여 이웃동네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돌려 놓으면 머리쪽 되는 부락민 이 또 몰래와 돌려놓고 하므로 이웃 부락간의 불화가 잦았다. 부녀회에서 이 바위가 골치 덩어리라고 하여 땅을 파고 묻었다. 말무덤 : 말무덤이 두 개 있었는데 1개는 조산이라 부르고 1개는 밭으로 변했다. 산신제 : 공달안 사람들이 몇해전까지 산신제를 지냈는데 생기복덕을 보아 탈없 는 자로 제주를 삼았었다. 성밖외 : 운교라고도 하는데 방죽안 북동쪽에 있는 마을. 세성산 앞 바깥쪽이 되며 냇가이다. 통절 : 통주동이라고도 하는데 방죽안 동쪽 마을. 세성산폭포 : 세성산 서쪽에 있는 폭포. 유두날 머리를 감으면 두풍(頭風)이 없 어진다고 한다. 군량골 : 신풍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골. 강당골 : 회덕 황씨의 강당터. 부근에 가마터가 있다. 시들 : 성남, 북면, 병천의 경계이므로 세들인데 시들이라고 부른다.
대정리
목천군 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티리, 초정리, 마산리, 하대티리를 병합하여 대티리의 대자와 초정리의 정자를 따서 대정리라 하고 성남 면에 편입되었다.
중샘 : 위초정 이라고도 하며 우물인데 약물이다.
전설 : 초정마을에 살던 한 처녀가 산밭에서 목화를 따다가 목이 말라 이 우물에 와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그때 마침 길을 지나가던 젊은 중이 고개를 넘 다보니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 하다가 처녀를 본 중이 갑자기 여자의 미 색에 반해 중의 신분도 잊은 채 겁탈하려고 처녀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처녀는 어떻게 피할길이 없어 우물에 뛰어든 것이 우물에 빠져 죽 고 말았다. 중은 처녀가 죽은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기도 그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후 부락민들이 이 샘에 가서 "색시가 불쌍하게 죽었다. 고약한 중놈이다." 하면 물에서 거품이 많이 올라온다 고 한다.
위점터 : 절골 입구에 절터 둘이 있는데 안쪽절터 바깥절터가 있다.
서창골 : 중샘 서쪽에 있는 골짜기. 세종 27년 1444년에 초정 거동을 하기 위하 여 창고를 지었다가 민폐를 염려하여 거동을 중지하였다. 세종대왕이 거동하려 하였다.
여근바위 : (전설) 위말미 안산 기슭에 있었는데 모양이 여자의 음부 같이 생겼 고 그 구멍에 막대기나 회초리 등을 꽂으면 말미동네 처녀들이 바람이난 다 하여 음부를 깨어 냈으나 도로 확장할 때 없어졌다.
굴머리고개 : 대정리에서 목천면 소사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정저수지 : 대정리에 있는 성남 저수지.
마산 : 말미라고도 하는데 대정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며, 세종대왕이 이 물을 가 져다 자실 때 이곳에 말을 매어 두었던 곳이라 하며 뒷산이 말같이 생겼 다고 한다.
길안골 : 중샘 남쪽 길 위에 있는 골짜기.
말티고개 : 타우고개 구리옹현이라고도 하는데 전의 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한티 : 대티. 한티고개 밑에 있는 마을.
대티고개 : 한티고개라고도 하는데 한티에서 목천면 도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초정(椒井) : 위말미 추정마을 동남쪽 말티고개 넘어가는 길 가 논 가운데 있는 데 길가의 것은 돌로 쌓았고 논 가운데의 것은 굴참나무 널판으로 짰는 데 세종대왕이 한글을 연구하시다가 과로로 안질이 생겨 그 병치료를 하 기 위하여 각 지방의 약수를 물색하는 데 이 초정과 전의 초정 청주 초정 이 물색에 올라 세종 26년 1444년 3월 청주 초정에 거동하여 치료했고, 이 초정을 수축하여 다음해 거동하기로 했다. 그해 날 이 가물어 모를 못 심고 인심이 흉흉한 때라 민폐를 걱정하여 신하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물을 병에 넣어가지고 말을 이용하여 실어다 자셨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전설 : 대록지에 의하면 어떤 신통한 중이 약물을 구해 깊은 산중에 들어가 마시 려고 병어 넣어 가자고 이 고개를 넘다가 잠깐 쉬어 가는데 놓았던 병이 쓰러져 흘린 것이 약물이 나오게 된 기원이라고 한다.
장산이 : 위초정 위쪽에 있는 골. 세종 26년 초정을 수축할 당시 시장이 섰었다 하며 댕골에 다인현이 었었을 당시에도 시장이 섰다 한다.
신사리
목천군 세성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일신기리, 이신기리, 일금사 리, 이금사리, 강당리, 일각리, 남면의 평리의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기리의 신자 와 금사리의 사자를 따서 산사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줄바위 : 신사리와 용원리 경계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가 줄지어져 있다.
전설 : 운파산 장수와 줄바위 장수가 싸움이 붙었는데 운파산 장수가 운파산에 있는 돌로 서로 맞추어 죽이려고 하는데 싸움이 한참 계속되다가 운파산 의 장수가 던진 돌에 줄바위 장사가 맞아 죽었다. 운파산 장수는 죽은줄 도 모르고 자꾸 줄바위에 돌이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위새터 : 이신기라고도 하며 새터 위쪽 마을.
검새울 : 검사리 일검사리라고도 하며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운파산 밑이 되는데 산제당이 있었다.
강당골 : 새터 서북쪽 골에 있는데 청류강사가 있었다. 숙종 때 학자 류진(柳軫), 류운서(柳雲瑞)가 수석이 좋고 수려한 이 곳에 청류강사를 짓고 후진들을 교육하였다.
덕암산 : 강당골 옆에 있는 산. 큰 바위가 많고 수석이 아름다우며 참판 안중필 (安重弼)이 바위에 曲水流 이라고 새겼으며 아래는 청류강사터가 있다.
농금대 : 청류강사터 옆에 있는 바위. 유운서가 시를 새겼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능안 : 선녀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인데 큰 무덤이 있었다. 야산개발로 없어졌다.
선녀골 : 이검리라고도 하는데 검새울 아래에 있는 마을. 옛날에 선녀가 살았다고 한다.
노루목골 : 범사냥골 위쪽에 있는 골인데 이곳에서 노루를 잘잡았다고 한다.
범사냥골 : 부수골옆에 있는 골. 이곳에서 범을 산채로 잡았었다고 한다.
말무덤고개 : 옛날 세성산 싸움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이라고 한다.
소철구덩이 : 검사부락 뒤 운파산 중턱 쇠 철광이 있었다.
미륵댕이 : 선돌로써 매년 정월 보름에 올린다고 한다. 제관은 일주일전 생기복 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정하고 제를 지내며 부락민 전체가 참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여우고개 : 검새울에서 목천면 운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는 여우가 많아 서 이 고개 넘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