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필
다시 수필
박 신 배
찬란하게 붉게 타오르던 낙엽이 땅바닥을 뒹군다. 올해 유난히 낙엽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일교차가 크게 차이 나서 낙엽이 붉고 푸르고 노랗게 각양각색으로 마지막 잎 새의 형체를 가졌나 보다. 더욱이 태양이 강렬하게 빛을 비추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좀 체로 시제(詩題)를 잡지 못해 그동안 글을 쓰지 못하였다. 이는 화두(話頭)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야기를 풀어가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수필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저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좇아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자연히 문학적 작업은 멀어져 간 것이다. 다만 일상의 시를 일기 식으로 끄적거리다가 마음의 정화작업을 하고 하루의 일상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을 쓰고 싶은 욕구는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글제를 잡지 못한 것이다. 아니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문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글제가 떠오르지 않고 수필 작품을 쓸 수 없으니 자연 수필저작은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저녁 ‘다시 수필’이란 글제를 잡고 인생 이야기라도 해야 글이 써질까 하여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주여 글제를 주시고 다시 초연(超然)한 상태로 글을 풀어가고 인생을 풀어가고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수필 선생님은 어떻게 살아가실까, 수필 동료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작품을 쓰면서 가사와 더불어 작가의 삶을 살아갈까, 젊은 날에 글을 배운다고 옹기종기 몰려 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늙어가서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작가의 인생을 꽃피우며 작품을 빛내야 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피천득, 이희승 같은 선생의 작품들을 생산해야 내는 때가 된 것이다. 수필이 왜 문학의 정수(精髓)이며 이야기의 꽃인 이유를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인생을 말해야 한다. 누구라도 문학의 세계로 들어와서 수필 앞에서 자기를 비추고 정화의 붓을 들 수 있으면 그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수필을 쓸 수밖에 없는 연유는 이렇다. 인생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인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다. 그 또 하나의 존재이유는 선생을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아니 그 수필의 세계로 부르시는데 난 다른 기독교 문학의 세계로 갔던 것을 변명해야 하는 것이다. 수필 문학, 문예 창작이라는 작가의 세계에서 그 분의 제자로 서서 문학 세계를 이어가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한 이유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문학을 넘어선 문학세계로 좀 더 발전하면 될 것인가. 선생님의 수필은 시적인 수필로서 정갈하고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와 같은 수필을 추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수필 세계를 이루려면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아닌 수필의 세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시 수필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수필은 한글의 세계를 추구하며 정확한 한글 맞춤법에 따라 우리 말 정신을 구현하고 바른 글쓰기를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수필 수업이 한 시간은 맞춤법 시간이요, 한 시간은 문장론 시간으로 창작의 세계를 강의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인생은 배운 선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 세계를 이어가야 하는 세대 이어주기의 생물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인식해야 된다. 이 저녁 먼 곳, 포항에 갔다 왔다가 피곤한 잠을 한 숨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펜을 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시 수필을 쓰며 글제를 떠오르는 작업을 하기 위해 길을 가면서 산을 오르며 사람들의 언어를 주어 들으며 골똘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다. 친구들이 하나씩 정년이라는 때를 맞아 직업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는 때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고 새로운 일을 만들며 살아야 하는 노년의 시작점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때이다.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후대에게 뭔가 말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은행나무가 공손수(公孫樹)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그 씨를 뿌리고 손자 대에 가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문학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긴 세대로 이어지는 씨앗을 뿌려야 하며 그래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은행나무는 오랜 기간 뿌리 내리기와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통해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거두어지는 것처럼 수필의 세계도 그러한 과정이 필요한가 보다. 한 물리 치료사가 나이 드신 분들의 몸을 풀어드리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잡고 던지는 말들을 보게 된다. 아내는 남편의 세 배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 속에 삶의 지혜를 보게 된다. 더욱 가정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고 사회생활의 문제와 지혜를 얻고 그 문제의 핵을 보고 파악하며, 또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알아야 한다. 하루의 일상 속에 받는 말과, 사람들의 고뇌, 그리고 문학 세계로의 전개 과정을 만들어 가야 하는 지난한 수필 창작 작업은 삼 대가 되어야 제대로 된 수필 작품이 나오고 그 결실이 이룬다고 말하고 있는가. 공손수 수필 작업을 이루기 위해 오늘 저녁 다시 이 길을 가야 하리라. ‘다시 수필’ 세계여, 나를 허락해 다오. 밤은 별들로 수놓아 있을까.
□ 수필
낡은 포대에 포도주를 담을 수는 없다
이 응 주
지금까지 정통과 전통이라는 낡은 포대와 같은 종교생활에 많은 사람들이 습관화되어 왔다. 그래서 그동안 시간이라는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나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평범한 종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교지도자의 위치에서 활동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그릇에 담겨서 지도자로 활동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명예를 중심으로 자기 이름을 들어내기 위해서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이곳저곳으로 활동하는 특수한 인물들도 수없이 보아 왔다.
정치인을 비롯해서 경제인들과 과학자들과 종교인들 모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가 현실에 매달려서 그렇게 살아 왔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중에 종교지도자들의 활동 목적은 어디에 두고 사역에 집중하고 있었는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부름 받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금 시대(THIS TIME)에 얽매여서 그렇게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않았는가?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넘어지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 인가? 명예와 부귀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모두가 종교라는 등불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향한 준비 없이 오늘에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미래를 향한 등불에 담겨져야 할 기름이 없다. 껍데기는 등이지만 내용은 내일을 위한 준비가 없다는 것이다. 모방을 좋아하며 즐기는 지도자들과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자들, 그래서 각종 모임들을 열심히 구상하고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고 있다.
자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역현장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각가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홍보를 통해서 너와 나 사이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진리는 항상 외롭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는다.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도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들려진 어느 날 군중 속에 드디어 진리의 주인공이신 주님이 나타나셨다. 육안이 아닌 영안이 열린 세례요한과 같은 인물을 지금 시대는 기다리고 있다.
낡은 부대를 가지고 낡아빠진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와 같은 종교 태두리에 신령한 새 포도주를 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안이 열리지 않고 미래를 위한 준비된 일군을 찾는 시대인데 모두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등이라고 해서 불이 켜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름이다. 기름 없는 등에 불을 부쳐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 낭비만 된다. 그리고 포도주를 부을 부대가 낡아버렸다. 정통과 전통이라는 낡은 부대를 가지고 포도주를 담겠다고 야단들이다.
이제라도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불을 밝히는 성령의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Nest Time을 위해서 새로운 부대로 준비된 일군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일군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음 시대인 미래를 위해서 누가 대답할 것인가?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심] (이사야 6:1-13)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 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 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 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수필
연리지 -전남 덕적도를 다녀와서
전 홍 섭
서해상의 덕적도는 내가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은 섬이었다. 아산만의 작은 포구가 고향인 나는 어린 시절 ‘덕적도’란 섬 이름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덕적도에서 많은 해산물이 들어왔으며, 그곳의 주민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덕적도라는 섬 이름이 낯설지 않다. 원래는 ‘큰물섬’이라는 우리말 이름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덕물도’로 불리다가 광복 이후 이곳 사람들이 덕을 많이 쌓았다고 하여 ‘덕적도’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퇴직 후 만나는 몇 분 선생님들과 함께 1박 2일의 일정으로 덕적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이니 그리 먼 섬은 아니다. 아침 일찍 용산역에서 만나 동인천을 거쳐 연안부두의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날씨는 흐린 편이었다. 그래서 바다 안개로 선박의 출항이 원활하지 못했다. 대기 상태였다. 원래 해상교통은 날씨가 해결해 주어야지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도 출항한다는 소식이 나오지 않았다. 서해 오도로 가는 배들이 모두 묶여 있다.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우리 일행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대신 육로로 갈 수 있는 석모도를 가자고 계획을 수정했다. ‘꿩 대신 닭’을 잡자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래도 미련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여객선 터미널에 전화를 해보았다. 날씨가 호전되어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덕적도를 다녀 올 운세가 맞은 것이다.
2시 3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여객선이 출발했다. 서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70분을 달려 덕적도 도우(진리) 선착장에 닿았다. 덕적도는 행정적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한다. 섬 전체가 40여 개의 유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흔히 덕적군도라고 부른다. 덕적도는 그 중에서 가장 큰 모섬으로 섬 전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얼마 전 바로 옆의 소야도와 연결하는 연륙교가 개통되어 섬의 새로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선착장을 걸어 나오니 부둣가에는 섬 내 주요 마을을 다니는 공영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천 원만 내면 이곳저곳을 두루 다닐 수 있다고 한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잠시 머무르는데 옆의 다른 일행 두 분이 같이 돌아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러자고 했다. 그 중의 한분은 덕적도가 고향인데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고 하며 자기도 교직에 있었다고 한다.
9인승 승합차를 타고 연륙교를 건너 먼저 소야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섬 특유의 분위기가 고적한 맛을 더하고 있다. 섬이 주는 건강한 원시성일 것이다. 고개마다 마을마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에도 여러 가지 사연이 붙어 있다. 뭍이고 섬이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를 인도하는 승합차 해설사의 입담이 현란하다. 원래는 부산이 고향인데 덕적도에서 40여 년을 살다 보니 구석구석을 다 꿰뚫고 있는 것이다.
덕적도는 국수봉과 비조봉의 두 산봉우리가 중심이 되어 해안으로 넓게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형상이다. 동서남북 섬의 이곳저곳을 2시간 가까이 둘러보았다. 도서 지방의 지리와 역사, 풍속이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하다. 바다와 싸워 온 아픈 역사도 있었다. 선착장이 있는 진리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아직은 휴가철이 아니고 평일인지라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 한 잔을 곁들였다.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맑다. 바다에서는 고기잡이 어선의 등불이 깜박거린다. 호안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정막을 깨뜨리고 있다.
다음날 아침 선착장 앞에서 서포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포리’는 덕적도에서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금빛 모래밭이 넓게 드러나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긴다. 동네와 바다를 가르는 경계에 병풍처럼 긴 띠를 이루고 있다, 길가에 ‘덕적도 성당’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높은 비석이 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덕적도 성당 “최분도 신부 공적비” 라고 적혀 있다.
최 분도(Benedict Zweber) 신부님은 1932년 1월 7일 미국 미네소타주 뉴우메케트에서 태어났다. 1959년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한 그는 태평양을 건너 낯선 한국 땅을 밟게 된다. 맨손으로 서해의 덕적도를 찾아 온 것이다. 문명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960년대 덕적도는 그야말로 암흑의 섬이었다. 그는 먼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덕적도 성당을 건립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이어 1966년 유베드로 병원을 개원하고 다음해에는 전기와 수도 사업을 추진하여 어두운 섬에 불을 밝히고 맑은 물을 공급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해태(김) 양식법을 개발하고, 서포리 갯벌 간척사업으로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 정말 사회사업가나 행정가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이것은 섬 주민들을 위한 신부님의 큰 사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헌신적인 공로는 그는 1971년 우리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게 된다. 덕적도 주민들은 공적비를 세우고 신부님의 업적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 그는 ‘덕적도의 슈바이처‘가 된 것이다.
서포리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한가운데로 하얀 단층 건물의 덕적도 성당이 보인다. 아직도 그 종탑에서는 최분도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결에 은은한 솔향기가 가슴을 파고든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구불국불 이웃 나무와 얽혀 있는 것들이 많다. 직선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다. 오랜 세월 풍우를 겪으면서 이웃나무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가지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이런 나무를 ‘연리목’ 그리고 그 가지를 ‘연리지’ 라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나무를 보면서 최분도 신부님을 생각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외로운 섬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민들과 한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신부님의 이 거룩한 사랑을 ‘연리지 사랑’ 이라고 부르고 싶다.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인과 하나가 된 최분도 신부님의 모습과 닮은 것이다. 그래서 신부님은 서포리 해변의 소나무와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시다. 멀리 서해의 황홀한 저녁놀이 덕적도에 가득 밀려오고 있다. *
□ 수필
길상사
이 상 일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간 천재 시인 백석이 예술의 천국이기도 한 프랑스 파리근교에 그 모습을 들어냈다.
지난해 파리에서 반년 정도를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우리나라의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 가길래 불자인 필자가 혹 이곳 파리에도 불교 사찰이 있으려나 싶어 지인을 통하여 알아보니 아니, ‘길상사’가 이곳 파리에도 있단다. 그것도 창건된 지가 수 십 년 된... 깜짝 놀라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 주지스님에게 한번 찾아가 뵙겠다고 하였더니, 아니 다가오는 일요일에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를 봉행하신다며 오히려 꼭 참석을 해달라고 부탁을 주신다. 한국과 달리 이곳에선 부처님 오신 날이 휴일이 아니라서 이틀 전인 일요일에 행사를 하신다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두 말 않고 당일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필자 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가람. 분명 한글로 송광사 파리분원 길상사라고 자그마하지만 분명 절 현판을 달고 있었다. 길상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자그마한 가정집 내부를 약간 손질하여 법당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아니 어쩌다? 아니, 어떤 곡절이 있었기에 이곳에 ‘길상사’라는 사찰이 있을까... 다들 아시겠지만 길상사는 서울에 있지 않는가. 유명한 요정 대원각을 구조변경하여 만든 사찰. ‘길상화’라는 보살이 법정스님께 시주하여 창건된 사찰. 해서 사찰 이름도 ‘길상사’로 시주 보살의 법명을 쓰지 않았던가. 필자는 ‘길상사’라는 현판을 보고 선입견에 서울 ‘길상사’의 말사 인줄 알았다. 창건에 법정 스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기에 더욱. 그런데, 미스터 한 것이 생겨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의문이 하나 풀리지 않고 있다. ‘파리 길상사’ 창건 년 도가 ‘서울 길상사’보다 4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록에 보면 ‘길상화’라는 문구가 처음 등장한 시점이 대원각을 시주받아 법정 스님이 창건 법회를 봉행하면서 대원각 주인인 김영한 보살에게 내린 법명이 길상화로 그시점이후에야 ‘길상화’ 라고 하는... 그때가 1997년. 그렇다면 파리 길상사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 되었단 말인가. 봉축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 때 창건과 사찰 이름에 대하여 주지이신 혜원스님께 여쭈어 봐도 창건 관계는 명확한 설명을 주시는데 사찰명 유래는 명쾌한 답이 궁한 모양이었다. 같이 동석한 보살님이시기도 한 방혜자 화백께서 말씀을 더해 주신다. 이 길상사를 창건하기 몇 년 전부터 방화백과 여러 현지불자님들이 중지를 모아 파리에도 불국토를 열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던 중 법정 스님을 수차례 파리로 모셔 법회를 열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가람을 하나 만들자고 졸라서 스님이 원을 내주시고 이곳 현지인 들도 동참을하여 이 길상사를 창건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주지스님 말씀이 방화백보살님께서 당시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도 했다. 그래서 필자가 길상사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법정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거처하실 때 송광사 스님 거주처가 ‘길상전’이라는 말씀을 으름픗이 들었다는 확실하지 않는 듯한 답변만을 내놓으셨다.
여기서 필자는 나름 추론을 해 보았다. 당시 이미 ‘김영한보살’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고 수년 전부터 법정 스님께 대원각을 시주 드릴테니 절을 하나 지어달라는 부탁을 했는 상태로 있던 중 법정스님이 파리에서 많은 교민들이 정신적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찰을 원했기에 ‘길상화 보살’에게 파리에 사찰을 짓는다고 얼마간 시주를 요청했고 ‘길상화보살’도 흔쾌히 동참을 했기에 파리에 가람이 들어서게 되고 그 고마움에 사찰명을 ‘길상사’로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몇 년 후 ‘길상화보살’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법정스님이 ‘대원각’을 인수 받아 사찰로 창건을 하고는 ‘길상사’로 이름한 것만 보더라도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 무소유.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정말 유명하여 많은 불자들의 유명한 화두가 되기도 했다. 무소유...
많은 분들이 ‘길상화보살’이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너무나 감명을 받아 당시1000억원이나 되는 대원각을 시주했다고 한다. 무소유....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물론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길상화보살’이 감명을 안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 1000억원이 백석의 시 한 구절 보다 못하다’고 한 말에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던 나타샤의 평생 사랑 천재 시인 백석이 어떻게 그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천을 맴도는 백석의 혼을 구원해주는 방법이 사찰을 지어 그 원혼을 달래주는 것이 ‘길상화보살’의 평생 원이 아니었겠나 하고... 그렇다면 필자가 법정 스님의 입장에 섰더라면 사찰 이름을 백석사(百石-백만가지 번뇌를 다 내려놓을 있는 반석의 뜻)또는 백석(百釋.-만인이 부처의 귀의처에 든다는 뜻)으로 하여 ‘백석사’로 이름하는 것이 진정한 ‘길상화 보살’ 을 위함이요 무상 보시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최선인가. 보시를 하게끔 이끌어 준 사람이 최선인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지금이라도 서울 길상사에 걸려있는 길상화보살 영정을 대신 백석의 영정으로 교체를 하거나 아니면 두분의 영정을 같이 걸어 놓는다면 극락에서 내려다보는 길상화보살이 더욱 기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녕 나타샤가 아니 올리는 없기에....
□ 수필
노년기
박 월 지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노인들. 대부분 노후 대비가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피부에 와 닿는 생활 모습을 일부나마 글로 옮겨 볼까 한다.
가까이 지내는 한 지인은 남편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60대쯤 큰아들 집에 들어가 손주 뒷바라지하며 제 몸은 뒷전으로 한 채 아이들을 다 키워 주었으나, 이제 칠순이 훌쩍 넘어 병까지 얻어 거동조차 할 수 없는 몸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아이들 다 컸으니 볼 장 다 봤다는 식으로 아들, 며느리도 노골적으로 부모를 싫어하며 짐처럼 여기고 금지옥엽 길러 준 손자, 손녀들까지도 할머니를 외면한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인륜을 저버리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자녀들은 가정에서 보고 자라는 것이 큰 교육이라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 자식들은 은연중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우게 됨에 모범을 보여 줘야 하지 않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이치다.
그런가 하면 이웃에 사는 한 어른은 맞벌이하는 아들 집에 들어가 손자들 키워 주는 조건으로 월 얼마씩 꼬박꼬박 받아 재형저축을 하여 15년 넘게 불입하여 모은 돈이 제법 큰 목돈이 되어, 노후 대책의 큰 몫을 하고 있다. 자식 입장에서 본다면 남손에 키우는 것보다 사랑으로 키우니 믿을 수 있어 좋은,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도 있듯.
처음에는 손자를 봐 주면서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본인 의사를 분명히 밝혀 자신의 권리를 찾은 좋은 예이다. 이 어른은 노후에 즐겁게 마음 편히 여행 다니며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넉넉히 누리며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요즘은 재혼하는 예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두 가지 정도만 주변의 예를 들어 본다면, 먼저 60대 초반에 황혼 재혼한 지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지인은 재혼 당시 자식들이 아버지 재혼을 절대 허락지 않아 그냥 사실혼으로 10년 가까이 살았으나, 막상 영감님이 세상을 떠나자 빈손으로 쫓겨났다고 해 참으로 안타깝고 슬펐다.
또 한 사람은 혼인신고가 안 되면 절대로 함께 살지 않겠다고 하여 혼인신고 후 가족으로 받아들여져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로 남편과 사별하면서 절반을 상속 받아 걱정 없는 노후를 지내는 그 분의 처사는 참으로 현명했다고 생각된다.
인생사 천차만별, 주어진 운명대로 각자 살 수밖에 없으니 누구를 탓하랴.
□ 수필
하얀 거짓말
구 청 광
수년전 대통령에 출마한 어떤 분이 유세장에서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저분이야 말로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 분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하는 말중에 장사꾼이 물건을 팔면서 이가 남지 않는다는 말과 처녀가 시집가지 않는 다는 말은 드러난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할 수 있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은 '뻔히 드러날 만큼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관용구인데 ‘그렇다면 하얀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도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얼굴이 못생겨서 늘 고민하는 여자에게 아름다우십니다. 많이 예뻐지셨네요. 라고 하거나 병으로 심약해 보이는 환자에게 ‘건강해 보이십니다.라고 하는 것, 나이 든 노인에게 십년은 더 젊어 보이 시네요 등의 말은 하얀 거짓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 십계명 중 제9계명에 네 이웃에게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다.
기독교 뿐 만 아니라 일반 세상 법에도 거짓말은 죄가 되는 것이다.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기들의 밭을 판 돈 전부를 구제비로 바친다고 하면서 얼마의 돈을 감추고 전부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부부 모두 죽음을 당하는 사건을 볼 수 있다.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여호수아 2장에 이스라엘의 정탐군 12명을 가나안 땅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이 숨겨주면서 그들을 찾는 성지기들에게 이미 성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하여 살려준 사실이 있다.
이를 인하여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나중에 이스라엘 군대가 성을 점령했을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의 족보에 들어가는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아브라함도 외국 땅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애굽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하였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노환으로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가 에서라고 거짓말을 하여 축복을 가로채는 일을 행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저들에게도 복을 주신 것을 보면 선의의 거짓말은 묵인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건을 산 사람이 잘 못 살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참 좋은 데요 라고 하며 칭찬해 주는 것도 선의의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다보면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거짓말이 없는 사회는 인정이 없고 인간성이 메마른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의의 거짓말도 조심해야 한다.
원만한 대인관계나 남을 위로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최선을 다해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병원의 의사들이 큰 병에 걸린 환자에게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려주었다가 기력이 떨어지고 살 희망을 잃지 않게 하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치료제가 없는 병에 결린 사람에게 약효가 없는 약을 치료제 라고 하여 환자에게 복용하였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잎새라는 책에서도 존시라는 화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베어만 할아버지가 마지막 잎새를 그려놓아 존시가 살아난 것처럼 선의의 거짓말은 사람의 생명까지도 구할 수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은 미리엘 신부가 한 선의의 거짓말을 통해 착한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기 때문에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뚱뚱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뚱뚱하지 않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을 때, 이는 일시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장기 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만을 방치한다면 심각한 질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너는 쫌 뚱뚱하지만 살을 뺀다면 예쁠거야'와 같이 진실 된 말로써, 위로를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도인 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하얀 거짓말도 조심해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 까지도 조심하여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 수필
무심천
김 진 봉
나는 지금 아무 소리 없이 흐르는 물과 같이 걷고 있다. 무심(無心)에서 보는 겨울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고 맑다. 흰 조각구름이 깃털처럼 떠 있다. 바다처럼 작은 조각배를 싣고 가고 있다. 무심(無心)의 물을 들여다보니 그 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이제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온 느낌이다. 겨울속의 봄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은 봄이라 하기에는 이르다 할 수 있으나 영락없는 봄이다. 봄 냄새가 나고 봄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그리 보일수도 있겠으나 봄이 머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멈춘 듯 흐르는 물은 맑고 넓은 하늘을 드리우고 있다. 한 조각 흰 구름이 비취 보다 더 푸른 하늘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걷던 길을 멈추고 그 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창공은 본래 푸른 것이다. 물의 본향은 어쩌면 그 바다의 푸른 창공 인지도 모른다. 수천 수백 그 억겁의 세월 무심의 물은 바다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아니했으리라. 본향을 그리는 그의 마음은 그리로 그리로 향하고 있다.
할 일 없는 사람마냥
물가에 서서
한 생각
억겁의 세월에 무심(無心)히
소리 없이 멈춘 듯
무심지수(無心止水)
본향을 그리는 그의 기도는
언제나 고요하다.
한 줄기 바람에 겨울 갈대가 소리 낸다. 갈대는 마을을 이루어 살아간다. 갈대숲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갈대 마을에 살았다. 새들은 갈대의 슬픈 소리를 듣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에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철이 되어 마을의 새들이 떠나도 갈대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듯 야윈 몸을 세워 멀리 보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기다리기에 흰 머리 들고 저리도 서 있다. 버들강아지가 솜털을 입고 겨울을 나고 있다. 그 속에도 기다림이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제일 먼저 봄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파릇한 잎사귀에 봄 편지를 달고 올 때면 떠났던 새들도 다시 올 것이다.
갈대
마을에
봄이 오면
파릇한
버들
봄 편지 들고
새들이 지저귀며
그 소식 전하겠지
연이어 꽃들이
피고
한바탕 잔치가 있겠지
무심(無心)아래로
기다림이
기다림이
흐른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기다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갈대는 누구를 기다리듯 먼 먼 하늘을 내다보듯이 기다림이 있다. 무심(無心)은 오늘도 그 기다림의 하늘 바다로 향하고 있다.
□ 수필
수수부꾸미
권 희 일
따뜻한 봄날 문우들과 외암리 민속 마을을 찾았다.
설화산 아래에 자리 잡은 예안 이씨의 집성촌이다. 오백여년 전 형성된 이곳은 문화재 마을로 소문이 나 사방팔방에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다. 초가집 돌담과 양반가의 고택 그리고 소나무가 서로 잘 어울려 사극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지체 높은 이들이 살았음직한 기와집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송화댁, 이간 종부댁, 이참판댁 이런 순서대로 둘러보았다. 고래 등 같은 사대부 집 대문 앞에 서니 ‘여봐라’ 하고 호기 있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행랑채 하인들이 재빨리 나타나 ‘예, 마님’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상상도 해보았다. 집집마다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대문 사이로 엿보듯이 안을 들여다보거나 돌담 너머로 기웃거리며 집안을 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집의 널찍한 안뜰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았음직한 적송이 마치 절대자가 분재로 키운 것처럼 멋스러웠다.
어떤 집에는 은행나무가 수호신인 양 위풍당당 서 있었고, 산수유와 매화는 꽃망울이 조롱조롱 맺혀서 금방이라도 ‘팡!’ 소리 내며 터질 듯 했다. 머지않아 폭죽처럼 터질 꽃들의 축제를 상상해보니 내가 아주 귀한 자리에 초대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조선 숙종 때 ‘영암집’으로 불렸다는 이 참판 댁은 큰집과 작은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의좋게 지내고 있었다. 지금도 후손인 이건재씨가 양반가의 법도를 몸소 지키며 조상 대대로 이어온 연엽주를 담가 전통의 명맥을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초가집도 여러 채가 있었다. 초가지붕을 보자 우리 시골집 지붕을 헌 것을 새것으로 얹을 때 부옇게 피는 먼지가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듯하여 잠시 입을 막았다. 초가집이라고는 해도 빈부의 차이는 분명했다. 그 차이는 지붕 단말이 두껴우냐 얇으냐로 구분지어 졌다. 얕은 돌담 사이를 걷는 동안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향마을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사대부 양반가는 아니지만, 초가집 어느 사랑채에 서는 아버님이 흰옷 정갈히 입으시고 몸을 느릿느릿 흔들며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마을 한가운데 에선 맑은 물이 수로를 통해 흐르고 있었다.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다. 물이 그냥 조르르 흐르는 게 아니라 도랑에 찰랑거릴 정도로 풍성했다. 생명의 원천인 물이 이 마을에 끊임없이 흐르기를 염원해 본다. 나이가 들다 보니 요만한 구경을 하는데도 다리가 아프다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정자에 앉아 바람에 잠시 땀을 식히다가 그네를 타보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동심에 젖어 있었다. 한 친구의 그네 타는 솜씨는 그야말로 프로급이었다. 춘향이와 향단이가 이몽룡을 유혹하며 그네를 타는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향단아 그네줄을 밀어라/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서정주의 「추천사」중에서
농기구와 농경사회에서 쓰던 생활용품들이 일목요연하게 진열된 전시실, 멍석, 삼태기, 광주리, 멱꾸리 등 모두 시골에서 사용했던 것이라 그런지 친밀감이 들었다. 특히 광주리를 본 순간 노란 참외가 보인다. 장날이면 광주리에 한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이십 리 길을 마다않고 걷던 생각이 난다. 한낮의 더위로 이글거리는 철길을 따라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낙네들이 보인다. 철다리를 건널 때는 얼마나 두렵고 떨리던지, 손은 머리 위에 광주리를 붙잡고 철다리 아래는 깊디깊은 개울물, 기차라도 오면 어떡하나 간이 콩알만 하던 기억에 오싹 한기가 스쳤다.
친구와 마주앉아 다듬이질 체험을 할 때는 언니와 같이 다듬이질 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어머님이 안 계신 사이 언니와 같이 다듬이질 한답시고 옷감은 생각 안하고 방망이 장단만 맞추다 배춧잎 벌레 먹은 것처럼 옷감을 숭숭 뚫어 놓았던 실수담을 이야기하며 친구와 한껏 웃어 보았다.
외암마을을 떠날 시간이다. 다리도 좀 쉴 겸 적당한 나무 그늘에 앉았다. 해질 무렵 마을 밖에서 바라본 외암마을은 더욱 정겹고 아름다웠다. 시집가서 처음으로 가는 친정집처럼 포근하고 다정스러웠다. 뻐근한 다리도 다리이지만 시장기가 돌았다. 몸이 잰 친구가 수수부꾸미를 사왔다. 수수가루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빚은 반달모양도 예뻤지만, 여러 가지 견과류와 팥을 넉넉히 넣어서 그런지 맛이 꿀맛이었다. 수수의 떫은맛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수수가루를 여러 번 헹군 게 분명하다. 그리고 붉은 빛을 은은하게 낸 것을 보니 마음을 집중해서 번철에 지져 낸 것 같았다.
시간처럼 빠르고 냉정하게 흐르는 게 또 있을까. 외암마을을 다녀 온 일도 추억의 편린처럼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외암마을 하면 으리으리한 대갓집과 나지막한 초가집이 먼저 떠오를 법도 한데, 나한테는 수수부꾸미가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누군가 있어 나에게 ‘외암마을이란?’ 하고 묻는다면 나는 금방 ‘수수부꾸미’라고 대답할 것 같다.
□ 동화
탈장수술 유감
박 승 일
<1>
구약성서 역대하 21:11~15
<여호람은 또 유다의 여러 산에 산당을 세우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우상을 섬기게 하여 여호와께 범죄 하게 하였다. 이때 예언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버지 여호사밧이나 유다의 아사 왕을 본받지 않고 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행실을 본받아 아합의 집안사람들처럼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게 하였으며 또 너보다 선한 너의 동생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제 네 백성과 네 처자들과 네가 소유한 모든 것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겠다. 그리고 너는 창자에 고질병이 생겨 고생할 것이며 그 병은 악화되어 결국 네 창자가 빠져 나오고 말 것이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18~20
<이 사람은 죄악의 값으로 밭을 사고 거기서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서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알고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시편에는 (시 109:8) 그의 집이 폐허가 되며 그 곳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갖게 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동네 병원 의사는 힘줄이 부은 것 같으니 푹 쉬고 될수록 누워 있으라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환부를 찜질해 주면 나을 것이라 하였다. 약도 먹을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암만해도 이상하다.
(탈장 아닐까?)
강원대학교병원 외과에 가서 진찰 결과
“탈장입니다. 12월 6일 오후 4시에 수술하지요.”
하며 간호사 시켜 나에게
1. 원무과(외래 수납)
2. 채혈실
3. 심전도실
4. 호흡기 검사실
5. 영상학과(일반)
을 받고 귀가했다가 수술 당일 오후 3시경 입원수속 밟고 담당의사 이 상지 교수에게 와서 수술 받고 5인 병실에 입원하라 한다. 전신마취는 나이가 많아 위험해서 국소마취(척추에 주사)하고 수술한다고 했다.
<3>
내 평생에 탈장은 첫 경험이다.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걸려?)
약 1개월 가까이 변비로 배변에 고통 받은 게 주 원인이 아닌가 싶다. 진작에 <메이퀸>이나 <아락실> 같은 변비약으로 다스리지 못한 불찰이 내게 있다.
(아니 그렇다 해도 탈장이라니-.)
약 3개월전 전북 무주에 사는 동생이 대전에 가서 탈장 수술 받은 적이 있다. 수술후 4일만에 퇴원했다고,
그런데 이번엔 내가.
<4>
남왕국 유다의 여호람왕이 그의 죄(산당들 짓고, 우상숭배하고 아우들 다 죽인)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벌 받아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되었다.
나는?
산에 산당을 지은 일이 없다.
우상숭배? 글쎄?
아우들 죽인 일, 없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모든 것이 우상숭배라 한다.
빚지고 사느라 돈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 많이 했다. 이게 우상숭배일까?
왜 내가 탈장이냐고.
(이건 죄가 문제 아니고, 변비를 제때 잡지 못해서 생긴 생리적 문제일 뿐이야.)
(하지만 원인이 죄라면?)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 제사장들에게서 받고 팔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시는 광경 보고 뉘우쳐 그 돈 제사장들에게 도로 주고 가서 목매어 자살하였는데 툭 떨어져 창자가 밖으로 나와 죽었다.
내가 예수님을 팔았나?
강사로 불려가 설교하고 사례비 받은 것이 예수님을 판 행위인가?
세상에 거의 모든 목사들이 교회에서 설교하고 사례비 받아 생활하고 있는게 통례 아닌가?
담임목사일 땐 괜찮고, 은퇴한 후에 강사로 나가 설교하고 사례비 받는 건 예수님을 판 행위란 말인가?
이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이건 죄 문제가 아니다. 변비 때문이다.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게 되었을 뿐.)
<5>
2018.12.6. PM 4:00
드디어 수술이다.
죄의식 갖지 말고 수술 받자.
(변비로 생긴 탈장, 생리적 변고니 의사의 수술 편하게 받고 거뜬히 나으면 그만이다.)
수술이나 잘 되게 기도하자.
의사, 간호사 실수 없게 나는 덜 아프게-.
□ 단편소설 연재
하룻강아지가 범을 잡다2
진 용 호
어! 어! 위험 해! 위험 해 !..............
우렁차고 괴상한 기합 소리를 지를 때 마다 말이 말(語)을 알아듣는 지 질풍처럼 달리는 말과 함께 말위에 탄 장정의 몸이 말 배에 붙었다가 오른 쪽 배에 붙는가하면 금새 왼쪽 배에 붙었다. 물구나무를 서는가 하면 바로 앉았다가 금 새 뒤를 보고 앉고 외 발 서기 . . 등 온갖 재주를 부리는데 말과 인간이 이렇게 일심동체가 될 수 있을까하고 혀를 내 둘렀다.
말이 나르듯 달리다 급정지. 하늘을 향하여 두발 서기, 원을 그리듯 한 자리에서 맴돌기. . . . 마상에는 사람이 재주를 부리고, 땅 위에선 말이 재주를 부리고 완전히 말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오십 천 강변의 두어 마장 정도의 거리를 종횡무진으로 거침없이 왔다갔다 내 달으며 마술(?)을 부렸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말(馬)이 아니라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 관우가 탔던 천하 명마 ‘적토마’도 이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화전 하던 양반들과 선비들, 기생들, 구경꾼들이 손벽을 치고 징, 장고를 울리고 함성을 지르고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 사는 곳은 매일반 이라 그 중에도 시기와 질투가 있기 마련이라 심술보를 터트리는 양반이 있었다.
재주를 부리며 질풍 같이 달려오는 말을 향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상에 차려놓은 시루떡을 통 채로 들어서 집어 던졌다.
말과 사람이 놀라서 꼬꾸라지라고 심술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못다 한 한 가지 재주를 더 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위에서 자기에게로 향하여 떨어지는 시루떡을 본 순간 피하기는커녕 인근 산이 찌렁찌렁 울릴 정도의 알아들을 수 없는 기합소리를 내 지르자 말이 죽서루 난간을 향하여 하늘로 솟는가 싶더니 양 도령의 오른 손에 쥐어졌던 방망이가 햇빛을 받아 번갯불을 일으키며 춤을 췄다.
떨어지던 시루떡이 콩 타작마당의 콩알 같이 공중분해 되어 산산이 부서지면서 싸락눈같이 밑으로 쏟아지는데 명경 같이 맑은 오십 천 물속에서 노닐 던 고기떼들이 먹이 인 줄 알고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며 대미를 장식하였다.
군중들이 와아!! 와아 !! 하는 함성이 오십 천 계곡을 흔들었다.
양 도령은 죽서루에 있는 양반들을 향하여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땅에 내려서 ‘길득’이의 머리를 토닥거리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말을 몰고 자리를 떴다.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마부가 달려와서 등을 두드리고 껴안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내가 돌보는 이 말이 명마 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말을 만난 저는 행운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자식 같이 돌보겠습니다.”
지체가 높으신 주인 영감님이 손수 나오셨다.
“자네 수고 했네. 내가 타고 다니는 이 말이 명마 인줄 몰랐네. 우리 집 가보로 삼을 참이야 . . 여러 영감들이 천금을 줄 터이니 팔라 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지 . . . 자네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 안 될까? 이 명마도 돌보며 . .
딸린 식솔은 있는가?“
“아직 총각입니다.”
“그러면 잘 되었네 우리 집에서 결혼도 시켜주고 집도 장만하여 줄 터이니 함께 살자 꾸나.”
“고향 제주도에 늙으신 부모님도 계시고 부끄럽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색시도 있으며 팔도 유람을 마치고 돌아가면 결혼 할 참입니다.”
“허허 아 쉽군 자네가 나의 애마의 진면목을 보여 줘서 여간 기쁘지 않아 여행 시 필요 할 터이니 내 자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사례금을 주겠네.”
“박 서방 삼척 김 영감님 댁에 빨리 가서 내가 그런다고 이 편지를 전하면 돈을 줄 터이니 가져와서 이 분에게 드려라.”
“예 대감님 ”
“대감님 저 에게도 여비는 충분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길득“이를 만난 것 만 이라도 저의 작은 소원 하나는 이루었습니다. ”
한참 만에 박 서방 이라는 분이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 엽전이 든 자루를 안겼다. 제주도에 가면 큰 부자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길득”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끊어진 연(緣)이라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길득”이도 헤어지기 싫은지 눈물을 주루륵 흘렸다. 얼마나 안타까울까 . . . .
만약 “길득”이를 다시 팔겠다면 도로 사서 함께 살았으면 하고 맘먹기도 하였다.
소원을 하나를 이뤘으니 한결 걸음걸이가 가벼워졌다.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속초에 갔을 때는 이제 유람을 접고 이곳에 안주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어떤 주막에선 중매를 들 터이니 장가를 들라고 권고(勸告)하는 곳도 있어 혼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제주도에서 떠나면서 먹은 마음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 땅 함경도를 돌아보고 팔도 유람을 마친다는 각오(覺悟) 였기 에 변할 수가 없었고 또 마음속으로 보아 둔 짝사랑한 색시 감도 제주도 조천에 두고 온 터라 더욱 그랬다.
거진, 고성, 금강산 입구 해금강에 접어드니 주민들의 언어가 확 달랐다.
여기가 나의 고향 함경도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모님 생각이 났다.
함경도 사투리에 억양이 좀 거칠어서 쉽게 접근(接近) 하기 가 어려웠으며 남도사람을 경계하는 눈치도 보였다. 좀 반항적인 기질이었다.
청진에 갔을 때는 정어리가 풍어라서 집집의 마당과 담장에 정어리를 널고 걸어 놓아서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에게 조선의 끝이 어디쯤이냐고 물었더니 얼마가지 않으면 두만강이며 그 너머는 만주 땅이라 하였다.
마음으로 상상하던 고향 함경도지만 아는 사람 일가친척도 없으니 역시 타관 이었다.
이제는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서 백두산을 먼발치서 구경하고 올 요량으로 나진을 거쳐 회령의 어느 외딴 동리에 가서 주막을 찾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동리로 오십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주막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았다.
“주인 계십니까?”
“어디 메서 왔음 메?”
“제주도에서 왔습니다.”
“그리 먼데서 뭔 일로 이렇게 다님 메 ?”
꼬치꼬치 묻는 게 꼭 도둑놈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해도 떨어져 가고 배도 출출하여서 성깔을 누르며 사정을 했다.
“방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오늘 저녁에 동리 청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예약을 해 놓았슴메.”
“날도 곧 저물어 갈 것 같으니 아랫목 발치에서 밤이나 새고 가게 해 주십시오. 밥값과 방값은 후(厚)하게 드리겠습니다.”
돈을 후하게 준다니까 군침이 도는 가 허락을 하였다.
저녁밥은 강냉이가 많이 들어간 잡곡밥과 반찬으로는 감자 졸임, 도라지, 더덕 무침 등 산채 나물이어서 향기가 그저 그만이었다.
저녁은 먹었겠다 이제 방에 들어가서 푹 쉬고 싶어서 방에 들어가니 방이 꽤 커 보이고 군불을 지펴서 인지 구들장이 뜨끈뜨끈하였다.
손에는 작대기를 쥐고 괴나리봇짐을 베개 삼아 옆으로 약간 구부리고 아랫목에 누웠다. 잠이 쏟아져 눈이 저절로 감기는데 그때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더니 장정들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앉아서 수군 거렸다.
자는척하면서 실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훔쳐보니 턱으로 나를 지목하면서 누구냐고 소근 댄다.
그 중 연장자가 하는 말이 “육모 방망이는 아니지만 손에 잡은 윤기 나는 방망이며 품세를 봐서는 아마도 무술 고수로써 암행어사를 호위하면서 관아의 폭정을 정탐하고 수집하고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포졸 같다.”고 하였다.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을 안으로 삼키고 그들의 회의하는 것을 엿들었다.
옆에 타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은 듯 큰 소리로 회의는 계속되었다.
내일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모레 점심을 먹고 미시(13~15시)에 행동에 들어가는데 누구는 아래 동리와 연락책, 누구는 강냉이 대 묶음, 누구는 징, 누구는 괭가리, 등등 일일이 책임자를 지정하고 최대한 주민을 많이 동원하여 호랑이(범 또는 산신령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음)를 고개 너머 20리 밖에 있는 두만강 건너편 만주로 쫒아 내는 작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랑이 라는 동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아래 전 동민이 나서서 잡는 것도 아니고 멀리 쫒아 낸 다는 게 가소로웠다.
옛날 어릴 적 동리 어른들로부터 얘긴즉 “호랑이 담배 피든 시절”“호랑이가 두레박 줄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 중간에서 떨어진 게 수수밭인데 피가 많이 흘러 수숫대에 묻어서 수숫대가 붉다”는 것 외는 들어 본 적도 눈으로 본적도 없었다.
듣다 듣다 궁금하여 견딜 수 가 없어 부시시 일어나 앉으며 말을 걸었다.
“실례 하겠습니다. 누워서 들으니 호랑이 라는 동물이 무서운 것인지는 짐작이 가는데 도대체 얼마나 덩치가 큰가요?”
“아 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호랑이는 중 송아지 보다는 작지만 산 중의 왕이라 당할 사람, 당할 동물이 없습니다.”
“중송아지 만 하다고 요? 얼마 크지는 않은가 봐요 예상 밖입니다.”
“덩치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 호랑이가 해마다 우리 동네나 인근 동네의 송아지, 돼지, 염소를 물어가고 작년에는 우리 동네의 처녀를 잡아먹은 적도 있습니다.”
“몇 마리나 있습니까?”
“이 부근에 출몰하는 그 놈. 꼭 한 마리뿐 인데 그 놈이 그런 행패를 부립니다.”
“그래요? 내가 그 호랑이를 생포해서 끌어다 드릴 터이니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시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드리지요.”
“뭐라 구요?” 당신 정신이 온전 한기요? 호랑이가 어떤 영물인지 몰라서 그러지 알면 입도 뻥긋하지 못 할 거요.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물어가서 관아에서 현상금을 걸고 포수들에게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포수가 나타나면 100리 밖에서도 화약 냄새를 맡고 숨는 바람에 코빼기도 안 뵈고 산이 흔들거릴 정도의 포효 소리에 놀라 포수가 꽁무니를 뺀답니다.“
“긴 말 하기 싫은 사람이 외다. 생포 한다면 하는 거지 왜 그리 의심이 많소? 내가 요구 하는 것 만 주면 꼭 잡아 드리리다.”
요구라니 무슨 큰돈이나 요구 할 것인가 싶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지난 후
“대체 그 요구가 뭐요? 알아나 봅시다.”
“요구라니까 무슨 큰 어려운 것인가 하고 상상하는 모양인데 별것 아니외다.”
“그래 그게 뭔 가요?”
“내일 중으로 금년에 채취한 삼으로 손가락 세 개를 합한 굵기의 새끼를 튼튼하게 꼬아서 주십시오. 길이는 다섯 발 정도면 됩니다. 호랑이를 묶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더니 . . . 좌중이 어안이 벙벙하여 키득키득 웃기만 하였다.
“자신이 있습니까? 정말로 호랭 일 잡을 수 있어요?”
“내일 모레 ”저놈이 호랑이다“하고 알려만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팔도를 다니면서 허튼 말(言) 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고단하여 좀 자야겠습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우리끼리 의논을 좀 해야겠습니다. 결과는 좀 있다 알려 드리겠으니 잠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참이나 있다가 연장자인 사람과 주막집 주인이 함께 방에 들어 왔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의 원수(怨讐)인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 주막집 주인에게 말씀 드려 놓았으니 오늘과 내일 모레까지 식대와 숙박비를 동네 회비로 지불하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쉬십시오. 그리고 ”주인어른 이분에게 최고로 맛있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 해 주세요. 돈은 동네회비로 지불 할 것입니다. ”
다들 돌아가고 난 후 양 도령은 가축을 물어 가고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 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큰소리 친 것이 후회도 되며 잘못 하다가는 호랑이 에게 잡혀 먹힐 수 도 있겠다 싶으니 지나온 세월과 8도 유람에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님께서 그렇게 장가들라고 성화 실 때 장가라도 들어서 아이라도 낳아 후손을 남겼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짝 사랑한 옥분이 와 . . . .
옥분이는 여섯 살이나 아래인데 아버지는 배타고 나가서 어장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가셔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해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억측인 처녀 였다.
옥분이 어머니는 옥분이가 육지에 가까운 섬인 거제도 지세포 선창 부락에 해녀 일로 1~2년 나가있는 동안은 우리 집 에 와서 일을 거들며 품삯으로 감자. 수수, 좁쌀, 등을 받아 가셨다.
어머님은 옥분이 엄마의 손끝이 야물고 성실하여 그 엄마에 그 딸이라며 옥분이 에게 양 도령을 장가보내고 싶다는 말을 슬쩍 슬쩍 내 비치곤 하였으며 양도령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같은 처지인고로 옥분이가 좋아서 짝사랑까지 하였다. 가만 볼라치면 옥분이도 양 도령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번 8도 유람 만 끝내고 돌아가면 꼭 결혼을 할 것이라고 맘먹고 있었다.
삼척에서 “길득”이를 다시 만난 게 생각나고, . . . . .
속초에서 일어난 일이다.
몇 개의 마을에서 함께 모여 내일 추계 운동회(?)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씨름, 줄다리기. 단거리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 . 등이라고 하였으며 참가 자격은 별도로 정한 게 없어서 아무나 자신 있으면 참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막집 주인에게 장거리 달리기를 한번 해 보겠다고 귀 뜸을 하였더니 쌍수를 들고 환영 한다면서 만약 우승하면 우리 주막집 이름도 나고 좋은 일이라며 권하였다.
다음날 아침을 적당히 먹고 옷과 신발을 야무지게 챙겨 입고, 신고 출발선에 섰다.
팔뚝에 큼직한 도장을 찍어 주었다. 부정 선수를 방지 할 목적이라고 하였다.
자갈 길 왕복 사십 리(里) 였다. 앞에서 말을 탄 사람이 길을 안내 하였다.
뛰고 달리는 데는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기에 초반부터 속도를 내었다.
처음에는 우루루 함께 달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저앉고 몇 사람 남지도 않았는데 그들도 까마득히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반환점에서 또 등에다 도장을 찍어 주었다.
돌아오면서 보니 담배 서너 대 피울 정도의 거리에서 헉헉대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믿을 수 없다며 머리를 내 두를 정도로 빨리 결승점에 도착하였다.
빨리 올수록 상품이 많을 것 같아 힘껏 달렸기 때문이다. 단연 1등이었다.
주막집 주인은 흥이 나서 떠들고 야단이었다.
중매를 들 터이니 속초에서 함께 살자고 꼬시기도 하였다.
상품으로는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과 싸리 소쿠리 그리고 멧돼지 가죽으로 만든 겨울용 가죽신발 남녀 한 컬레 씩 이였다.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과 싸리 소쿠리는 주막집에 드리고 가죽신은 기념으로 여자용은 옥분이 에게 선물하려고 괴나리봇짐에 간직하였다. 그러나 항상 갖고 다니던 삼 줄 장배 줄과 벗어 논 모자를 잃어 버렸다. 어느 분이 슬쩍 가져갔는가 싶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인가 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던가 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고 온 제주도 꿈을 꾸면서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밖의 기온이 쌀쌀하였지만 수정같이 맑은 계곡 물로 세수를 하고 아침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주막 주인이 식사하러 오시라고 데릴 러 왔다.
어제의 주막 주인이 아니었다. 완전이 상전 대우를 하였다.
아침 밥상을 받고 보니 임금님의 수라상이다. 멧돼지 삼겹살구이며, 명란젓, 가자미식해 등 각종 산채나물 들이 열댓 가지가 넘었다.
“별로 차린 것은 없으나 맛있게 잡수시라”고 손을 비비며 굽신거렸다.
아침을 맛있게 먹은 후 주인을 불렀다.
“예”라고 대답 하며 주인과 아주머니가 손을 비비고. 또 앞치마에 손을 감싸며 달려 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진지도 남기시고 얼마 자시지도 않았군요 죄송합니다.”하면서 머리를 연신 굽실거렸다. 남자 주인은 말씨가 순 함경도는 아닌 것 같고 경상도 억양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아닙니다. 산해진미라서 양껏 먹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대단하셔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음식을 많이 먹질 않습니다.
이 음식이면 사흘도 더 먹을 수 있으니 반찬은 더 만들지 마시고 이것으로 될 수 있고, 점심은 오후 중참 때 막걸리 한 사발이면 됩니다. 저녁에는 밥 만 더운밥으로 내 오시면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루 두 끼를 먹는 게 습관이니 그리 아십시오.”
“아닙니다. 그러시면 이장님에게 꾸중 듣습니다. 잘 해 드리라고 심심 당부를 받았습니다.”
“먹는 내가 됐다면 된 것입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무거워서 도리어 불편 해 집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 . . . . . .”하면서 방을 나갔다.
임 도령은 내일 일을 생각하면서 가지고 온 의복 중 쑥색 누비옷을 꺼내서 손질을 하였다.
호랑이를 잡을 때 순순히 끌려오지는 않을게고 실랑이를 하면 나무에 걸려서 옷이 찢어 질 염려도 있으니 튼튼한 옷으로 입기로 마음먹었다.
정오쯤에 이장께서 손에 삼 새끼줄을 가지고 마당에 들어서니 주인이 먼저 보고 조르르 달려가서 귀속 말로 무슨 보고라도 하는가 싶었다.
“식사를 많이 하시지 않았다 구요? 내일 일이 걱정돼서 그랬습니까? 아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입니까?”
“아! 이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양껏 먹었습니다. 벌써 새끼줄을 만드셨습니까? 수고 하셨습니다. 이리 줘 보십시오.”
“여깃 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만들었는데 맘에 들 런지 모르겠습니다.
양 도령은 새끼줄을 받아 들고 유심히 살펴 보드니 주인어른을 불렀다.
“헝겊이 있으면 좀 많이 내다 주십시오.”
주인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낡은 헌 옷 몇 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양 도령은 새끼줄을 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기둥에 양쪽 끝을 묶고 헝겊으로 줄 전체를 빡빡 문질러서 보푸라기를 없애고 매끈매끈하게 만들었다.
이장과 주막 주인은 신기한 듯 보고만 있었다.
양 도령이 묶었던 줄을 풀어서 양쪽 끝에 8자 매듭을 하나씩 만들고 한 쪽 끝으로는 올가미를 만들었다. 손으로 힘껏 당겨 보고서는 이장님을 힐껏 보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멈추었다. 이장님이 예사 솜씨가 아니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나는 이 동네 이장 직을 맡고 있는 홍 삼식입니다.”
“저는 양 도령입니다. 팔도를 유람하고 다닙니다. 이장님께서 연세도 저 보다 훨씬 연배이시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양 도령은 그 동안에 유람하며 익힌 넉살로 붙임성 있게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이장님은 양 도령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미천한 나를 형님이라고 하시니 영광입니다. 이름이 도령 이라고 하였는데 별명 입니까? 이름입니까? 도령 이라니 그러면 아직까지 총각입니까?”
이장님은 궁금한 게 많은지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별명이 아니고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혼이고 이태나 지나고 설흔이 되면 결혼을 할 예정입니다.”
“동생 ! 미혼이라니 좋은 색시에게 중매 들어야 겠네.”
이제 터놓고 동생이라고 부른다. 20년이나 아래이기에 그럴 만 도 하다.
이장님이 주인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시켰는지 급히 주인이 집 밖으로 나가드니 한참 만에 장년 세 명을 데리고 왔다.
“동생들 오늘 좋은 날이네 뜻 밖에 내 동생이 한사람 생겼다. 인사하게 내 동생 양 도령이야 잘 생겼지?.”
장년 세 명이 함께 인사를 꾸뻑 하였으나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자!자! 우리 내일 내 동생이 호랑이를 잡는다 하니 현장 설명도 하고 산세도 돌아 볼 겸 범 바위에 가 보세.”
이장님이 앞장서고 넷이서 따라 가는데 이장님이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웃으시며 지형 설명을 하였다.
설명에 의하면 범 바위 또는 호암(虎岩)은 동리에서 비스듬한 능선인데 동리 뒷산 위 5리 나 떨어져 있는 동서남북 십자 사거리로써 호랑이가 제일 빈번히 나타나는 곳이라고 하였다.
현장에 도착 해 보니 설명대로 서마지기 넓이의 평평한 곳으로 옛날에는 화전으로 농사를 지은 것 같은데 지금은 잔디와 잡풀로 덮혀 있고 십자로에 사람들이 일부러 옮겨 놓은 것 같이 두 평 남짓한 반반한 돌이 놓여있었다. 높이는 1 척 정도 인데 이곳에 호랑이가 앉아서 사방을 살피며 산천을 호령하며 잘 논다고 하였다.
이장님의 내일의 호랑이 생포 작전 설명이 계속 되었다.
“동생! 동생은 내일 미시(未時)경에 이 범 바위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여기 서서 오른 쪽 산꼭대기에서, 아랫마을 사람들은 왼쪽 산꼭대기에서 징과 꽹가리, 양철통 등을 두드리고 강냉이 대 묶음에 불을 붙여서 연기를 내면서 호랑이를 이곳으로 몰아 올 터이니 만반의 준비를 하게. 아마도 호랑이가 산세가 험한 오른 쪽 산등성이에 있을 것 같으니 만약 거기 있다면 이 길로 올 거야 괜찮겠나?.”
“형님 걱정 놓으십시오. 호랑이가 내 눈에 들어오면 확인하고 오른 손 방망이를 높이 쳐 들 터이니 그것을 신호로 그 때부터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소리를 죽이고 보고 만 계십시오. 시끄럽게 하면 정신이 혼란 해 집니다. 명심 하십시오.“
이장님은 설명을 마치고 이리 저리 산세를 살펴보고 하산하면서 주막집 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주막집 주인은 나와 동갑내기로 올해 마흔일곱이고 고향은 저 밑의 남쪽이었다고 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청진에 정어리 배를 타러 왔다가 술집에서 일 하던 아주머니를 만나서 눈이 맞아 그것들을 청산하고 이곳에 10년 전에 와서 집을 사고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있고 하니 우선 주막을 차렸으며 자식들은 없고 간간이 오가는 길손님이 요구하면 음식과 술을 팔고 밤에는 방에서 노름꾼들의 뒷돈을 받아서 생활 한다고 하였다.
주막에 도착 하여서 막걸리를 청하여 일행들과 나눠 마시고 헤어졌고 장비(?)를 점검하였다.
호랑이 이 놈! 내일 본때를 보여 줘야지 . . . . . .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저녁도 진수성찬이었다. 손님도 없고 노름꾼들도 없어서 혼자 넓은 방 웃목에서 편안이 잠을 푹 잤다.
아침밥을 가볍게 먹고 옷을 챙겨 입었다.
쑥색 바지저고리에 허리에는 수건을 찼다 얼굴에 땀이 나면 닦을 요량이었다. 짚신도 새것으로 갈아 신 고, 바지는 대님을 꽉 조여 묶고 오른 손에는 물푸레나무 방망이 왼 손에는 삼 줄 장배를 말아서 쥐었다. 가뿐하여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마당에 서서 어깨도 펴 보고 심호흡도 크게 해 보았다.
이장님이 오셨다.
홍 이장이 집에 들어서면서 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는 양 도령을 보니 참으로 믿음 직 하였다. 키는 6척이 될랑 말랑하고 체중은 120근(72Kg) 정도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럽기 까지 했다.
저 아까운 사람이 혹시 잘못 되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니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동생 ! 준비가 다 됐는가?”
“예 ! 형님 준비랄 게 있습니까? 이게 답니다.”
“그럼 출발 하세 우리는 앞산으로 갈 터이니 동생은 어제 갔던 범 바위에서 기다리게.”
“예 형님 염려 마십시오. 먼저 가 있겠습니다.”
혼자서 어제 갔던 길로 올라갔다. 길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 하여서 인지 꾸불꾸불 하지만 황토 흙으로 나 있고 산에 나무는 키가 나지막한 잡목이 태반 이었다.
범 바위에 가서 바위 위에 서 보니 매끈 거려서 발놀림이 불편 할 것 같아서 바위를 조금 비켜서서 호랑이가 옴직한 곳을 응시 하고 섰다.
조금 있으니 오른 쪽, 왼쪽 산에서 동시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징과 꽹가리 양철통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와! 와! 하는 함성이 산을 울려서 메아리가 들린다.
한참이나 지나서 “호랑이가 여깄 다” 하는 소리와 함께 더 큰 함성이 울려 퍼진다.
예상 했던 대로 오른쪽 산꼭대기 부근 이었다.
점점 가까이 소리가 들렸다.
“내려간다. 그리로 내려간다.”는 이장님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그 쪽으로 눈을 고정 시키고 응시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갓 태어난 송아지 보다 조금 커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야단을 쳐도 개의치 않는 모양 이었다.
가까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신호를 보냈다. 요란 하던 산천이 갑자기 침묵으로 변하였다. 고요하다.
호랑이도 양 도령을 보았는지 어흥!! 한번 괴성을 발하고 점점 빨리 다가 온다. 가까이서 보니 고양이는 아니고 털이 얼룩무늬로 덮혀 있고 이빨을 드러 내는 데 보통 놈은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속도를 내서 뛰더니 20보쯤 앞에서 양 도령을 향하여 어흥 !! 어흥 !! 소리를 벼락 치듯 하면서 공중으로 뛰어서 덥쳐 왔다.
동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니 호랑이가 어흥! 어흥! 경고성 울부짖음을 발하면서 양 도령을 향하여 덮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죽었구나 ! 다들 한숨을 쉬었다.
한편 양 도령은 공중으로부터 공격 해 오는 호랑이를 서너 걸음 옆으로 날렵하게 피하면서 올가미를 던졌다 백발백중이다. 피하여 달아나는 말, 고란이나 노루등도 따라가면서 올가미로 잡는 실력이니 제 발로 가까이 다가오는 호랑이 쯤 이야 식은 죽 먹기다.
줄을 당기면서 전광석화 같이 호랑이 잔등에 올라탔다. 비단요 위에 엎드린 것 같이 포근하고 너무너무 부드러워서 얼굴을 비벼 보기도 하였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호랑이 배를 양 발목으로 깍지를 껴서 단단이 조르고 두 팔로는 목을 껴안고 등허리에 납작 엎드렸다. 완전히 호랑이와 일체가 되었다. 순식간에 이뤄 진 행동이었다.
호랑이가 발광을 하기 시작 했다. 몸을 한번 거세게 털고 어흥! 하고 괴성을 지르며 뛰기 시작 했다. 다리와 팔을 더 조이며 찰싹 붙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 했다.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이제는 뛰는 것이 아니고 나무위로 날라 다녔다.
나무위로 나르다 보니 머리가 나무에 부딪칠 염려가 없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흥! 어흥! 어흥! 하면서 앞산 뒷산 옆 산을 종횡으로 날라 가듯 하니 멧돼지, 노루, 고란이, 너구리, 여우, 오소리가 굴에서 나와 뛰어 달아나고 심지어 꿩, 까지도 푸드득 날아오르고 온 산천이 짐승들이 놀라서 지르는 괴성으로 가득 찼다.
아랫동네 사람들과 윗동네 사람들이 광(廣)바우 라는 큰 바위 밑에 모여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호랑이 포효 소리가 동서남북에서 메아리가 쳐 오니 대체 호랑이가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간간이 볼라치면 나무위로 흭 흭 날라 다니는 것이 보이는데 호랑이 잔등에 뭣이 꼭 붙어 있는 것 만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양 도령의 쑥색 옷만 보였다. 너무나 빠르게 다니니 그것도 눈 시력 좋은 사람에게나 잠간 보일 정도 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주위에 있는 산중에 이렇게 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온 지천에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갈팡질팡하는 모양이 가관(可觀) 이었다.
저러다가 양 도령이 떨어지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텐데. . . . 걱정이 태산 같고 그리 될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양 도령을 구하는 묘책을 내 놓는 사람도 없었다.
양 도령은 호랑이 등위에서 오래 엎드려 있으니 현기증이 나고 호랑이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왔으나 속도가 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포악해 지고 빠르게 날았다.
양 도령이 호랑이 등허리에 찰싹 밀착 할수록 호랑이는 뛰지 않으면 안될 동기가 부여되었고 양 도령은 얼굴에 흭 휙 하며 스치는 바람에 가슴 벅찬 쾌감을 느꼈다.
말(馬)에 의하여 길들여진 비범한 재주를 동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확인 받고 싶은 충동(衝動)을 느꼈다. 부끄러운 일종의 교만(驕慢)이었다.
옛말에 “떡 본 김에 굿 한다”고 호랑이 탄 김에 백두산에 올라 천지(天池)를 한 바퀴 돌아 봤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懇切)하였다.
두어 시간 정도 이랬으면 말 같으면 숨을 헐떡이며 속도가 느려질 만도 한데 영 아니었다. 들은 대로 “산중왕” , “동물의왕” 답다.
마음이 초조해 졌다. 얼마 안 있으면 산그늘도 내리고 어두워 질 텐데 끝을 봐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이놈의 기질로 봐서는 생포는 불가능 할 것 같으니 죽이기로 작심하였다.
이왕 죽일 바에야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광바우 가까운 곳에서 결행하여 운반하기도 쉽고 만일에 선살을 마치면 동네 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다.
고삐를 당겨서 서서히 맘속으로 정한 광바우 부근으로 접근 시켰다.
호랑이가 땅에 내렸다가 다시 뛰어 오르는 순간 그 반동으로 양 도령은 허리를 고추세우고 오른 손에 쥔 방망이로 호랑이 머리 정수리 급소를 정확하게 얍!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내려 쳤다.
호랑이의 뛰어 오르는 속도와 방망이가 내려오는 속도가 합쳐져서 굉장한 충격 이였나 보다.
퍽! 하는 둔탁 음과 함께 호랑이가 풀썩 꼬꾸라졌다. 함께 나뒹굴었다.
땅에 쓰러진 호랑이 입에서 선혈이 철철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코에서는 하얀 김이 굴뚝에 연기 나듯 품어져 나왔다.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그것도 멈 쳤다 .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하고 삼 줄로 네 다리를 칭칭 동여매고 일어섰다.
호랑이 등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옷이 땀에 젖어 쑥색이 검정색으로 변해 있었다.
호랑이 땀인지 아님 양 도령이 긴장하여 흘린 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가까이서 호랑이가 뛰어 오르는 것을 봤으나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적막이 흐르니 불안이 덮쳐 왔다.
사람들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진 양 도령을 호랑이가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고 기척이 없는 줄 알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이장님은 무모한 행동을 자제 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글썽 거리기도 하였다.
가까이 가 볼 엄두도 내는 사람도 없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말이 없는 그때 양 도령이 방망이 쥔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왼손으로는 수건으로 목과 얼굴의 땀을 닦으며 수풀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유령인가 싶었다. 당당한 걸음걸이가 분명 양 도령이었다. 눈을 의심하였다.
갑자기 와아 와아!! 함성이 터졌다. 양 도령 앞으로 달려갔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이장이 동생 양 도령을 껴안고 볼을 부비며 울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함께 울먹였다.
“형님 약속을 지켜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호랑이를 생포하여 여러분에게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여의 치 않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 하여 주십시오. 저 수풀 속에 호랑이를 죽여서 묶어 놓았으니 동네로 가져갑시다.”
누구라 말을 할 수 없이 모두가 우루루 수풀 속으로 달려갔다.
호랑이가 목욕을 한 것 같이 물에 젖어 피를 한 바가지나 흥건히 쏟아 놓고 다리에 삼 줄이 칭칭 감긴 채 누어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것이 금방이라도 일어 설 것 같았다.
다들 겁을 내어 접근을 꺼렸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양 도령이 짚신 발로 호랑이 머리를 지긋이 밀었다.
“곧 어두 어 질 것입니다. 빨리 운반 합시다. 다리를 단단히 묶었으니 들고 계시는 나무창을 꿰어서 목도를 하면 될 것입니다.”
앞뒤로 두 사람 씩 네 사람이 목도를 하였다. 와아 와아 ! 소리를 내 질렀다.
여러 사람이 양 도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 도령을 무등을 태우고 개선장군처럼 윗동네로 행했다.
동네에 다다르니 언제 소문이 났는지 아랫마을 윗마을 어린이들까지 나와서 주막집은 물론 그 이웃집 마당에 까지 가득 찼다.
다들 싱글벙글 하였다. 이제는 안심하고 산에 나무도 하러 가고 약초며, 산나물도 캐러 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춤을 추는 할머니도 계셨다.
완전 잔치판 이다.
집집마다에서 가져 온 음식과 술등을 여럿이 나눠 먹으면서 마당의 멍석위에 누여 있는 호랑이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은 한 결 같이 밝았다.
이장이 양 도령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불렀다.
“동생! 오늘 수고 했다. 호랑이를 잡는 사람은 포상을 하겠다는 관아의 방침이니 관아에 신고하는 게 어떻겠니?”
“형님 신고하면 호랑이를 멀리 있는 관아로 메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호랑이 가죽은 저가 가져갔으면 합니다. 천애고아인 저를 먹이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로 하자. 그럴 려면 가죽을 벗겨 기름이 마르도록 까지 한 열흘 정도 걸릴 것이니 그때까지 여기서 푹 쉬었다가 가고 그 동안은 우리 집에서 쉬도록 하지.”
“예 형님 고맙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양 도령은 그곳에서 열흘을 넘게 지내며 제주 조천에서 개미 쳇 바퀴 돌 듯한 생활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았는지 이번 유람을 통하여 알게 되어서 앞으로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고향의 일가친척은 찾을 길 없었으나 함경도 이 곳 사람들의 원수인 호랑이라도 내손으로 잡아서 화근을 없애고 나니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볍고 기뻤다.
열흘도 꿈같이 흘러가고 홍 삼식 형님과 동네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호피를 괴나리봇짐에 싸서 묵직하게 짊어지고 남쪽을 향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