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 이른 아침. 인적 없는 거리에 노란 택시 한 대가 멈춰 선다. 택시에서 내린 한 여인. 우아한 리틀 블랙드레스에 목을 휘어감은 진주목걸이와 얼굴의 반을 덮은 선글라스. 팔꿈치까지 오는 긴 드레스 장갑. 파티장이 아닌 도시 거리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인데도 너무나 당당히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같다.
한 손에는 크로와상을, 다른 손에는 커피를 들고 쇼윈도 앞에 서 있다. 크고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보석 가게 ‘티파니’ 다.

1961년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헵번은 매일 아침 티파니 보석상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티파니가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여성들에게는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 됐다. 여성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 중 하나는 아마 하얀 리본을 묶은 하늘색 상자일 것이다. 바로 티파니 보석 상자다. 티파니 보석상자의 ‘티파니 블루’만으로도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티파니는 미국 뉴욕에서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연 문구류와 팬시용품 전문점으로 출발했다. 그 뒤 미국을 대표하는 보석브랜드로서 명성을 이어왔다. 1902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가 가업을 물려받는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 다자이너의 한 사람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만들 때, 그는 팀원들을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전시회에 데려가 견학시키곤 했다. 개발자들이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항상 아름다운 예술품과 세계 최상급 상품에 둘러싸여 있어야만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매킨토시 개발팀이 있던 빌딩의 로비에는 그림과 함께 뵈젠도르퍼의 그랜드 피아노, BMW의 오토바이와 같은 물건을 장식해 놓기도 했다. 잡스는 맥 개발자들이 스스로 예술가로 여기도록 격려했다. 잡스는 “애플의 모든 제품은 미치도록 위대한 예술작품이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애플에는 패키지부터 타 제품과 비교할 수 없는 멋이 있다. 두근두근 상자를 열고 제품을 보면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세련된 제품이 그 안에 있다. 애플에는 이러한 소비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바로 감동이다.
잡스는 제품 그 자체만큼이나 포장상자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상자에서 자신이 구입한 제품을 꺼내면서 처음의 떨림과 흥분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치 티파니의 보석상자처럼. 다른 말로 풀면, 바로 고객 감동이다.
아이폰 상자에는 검은색 바탕에 실물 크기의 아이폰 사진이 인쇄돼 있다. 상단엔 아이폰 모양을 볼륨으로 넣었고, 옆면으로 빙 둘러서 애플의 사과 로고가 찍혀 있다. 상자 뚜껑을 열면 군더더기 없이 박스가 꽉 차게 아이폰이 보인다. 박스 자체가 아이폰 같다는 느낌을 준다.
매킨토시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올 때였다. 매킨토시에도 리사처럼 마우스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우스는 보편화되지 않았다. 잡스는 고객들이 마우스에 익숙해지도록 전체 박스 속에 작은 칸막이를 만들어 마우스를 따로 포장했다. 사용자가 마우스의 포장을 직접 뜯고 설치해야 마우스와 친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 잡스는 애플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이 포장 뜯기 수법을 적용해왔다. 그러다 보니 애플 컴퓨터의 박스는 디자인 자체가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수집 대상이 될 정도였다.
잡스는 차가운 IT업계에서 일했지만, 그의 탐미성은 유별나다. 잡스가 예술가처럼 탐미 그 자체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한 건, 바로 고객 감동을 위해서였다. 기술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바꾸려는 그의 열정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되는 감동으로 다가 간다. 기술을 단지 상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예술작품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영혼이 없는 회색 컴퓨터에 절제된 디자인과 재질, 완벽한 비율과 단순함을 더해 새로운 감각의 컴퓨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 제품 하나하나에 가치를 불어 넣는 것이었다. 잡스는 기계뿐 아니라 감동과 감성까지 파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선보이며 기술력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고객들의 만족을 이끌어냈다.
잡스는 애플의 최대 고객인 젊은이들의 욕구를 직접 발견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모이는 클럽에 MP3를 귀에 꼽고 나타나 그들과 몸을 부비며 춤을 추기도 한다. 고객의 욕구를 직접 읽어내고 고객에 감동을 선사할 혁신 제품을 구상하는 것이다.
애플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CEO인 잡스의 인생도 한 몫한다. 잡스의 인생 자체가 감동이다. 성공과 실패 뒤 다시 재기하는 인생은 감동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그의 인생을 아는 사람은 쉽게 감정이 이입된다. 그리고 그의 성공을 바라는 팬이 되 버린다. 잡스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애플로 전이되는 셈이다.
최근 환경변화는 기업에게 혁신의 패러다임을 바꾸도록 하고 있다. 과거에는 품질혁신, 원가절감 같은 효율성이 중심이 되는 기술혁신이 유행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비자의 요구가 까다로워지면서 단순한 품질보다 고객 감동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one more thing)'
잡스는 감동과 함께 감성의 가치도 일찍부터 간파했다. 애플은 기술개발에 앞서 고객들의 감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제품 차별화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세련된 디자인과 감각적 터치, 다양한 콘텐츠로 소비자의 흥미를 유발해 전 세계에 '애플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스타벅스를 마시면 뉴요커가 된 듯하고, 나이키를 신으면 마이클 조던과 같은 스포츠맨이 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애플을 쓰는 사람은 잡스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플처럼 세련된 컴퓨터를 폼 나게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마케팅 용어로 말하면 감성 마케팅이다.
애플 제품은 하드웨어적인 기술혁신 외에 고객중심의 ‘감성코드’로 연결되어 있다. 감성코드의 중심에는 애플의 디자인 철학과 철저한 고객중심의 사고가 스며들어가 있다. 기술적 우수성으로 소비자의 손과 머리를 만족시키며, 감성적 디자인으로 소비자의 오감을 만족시키 결국은 소비자의 마음까지 빼앗았다.
잡스는 픽사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컴퓨터라는 기술 세계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닌 감성세계를 경험했다. 이런 경험으로 컴퓨터 기술과 감성이 결합하는 새로운 문화를 열게 만든 촉매제가 됐다.
아이폰의 핵심 전략은 기술을 앞세운 ‘하이테크’(high-tech)가 아닌,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하이터치’(high-touch)에 있다. 기술적 기반에 감각적인 디자인을 더해 소비자를 유혹하고 오감을 자극하는 기능으로 소비자 만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지금 우리는 품질과 기능뿐 아니라 감성 선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애플은 기술적 완성도 외에도 소비자 중심의 감성적 가치추구에 많은 고민해왔다. 애플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도 그런 고민이 필요할 때다.

by 정혁준 http://blog.hani.co.kr/j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