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고기 멋진 새, 기러기의 생활사 우리 조상들은 기러기를 아주 멋진 새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두 다리를 바짝 뒤로 모으고 높은 하늘을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행렬은 낭만적인 정취가 가득 있어 보인다. 기러기는 그 우는 소리가 처량한 정을 자아내게 하므로 예로부터 사랑하는 임과 이별의 아픔을 담은 시(詩)와 노래로 많이 읊어져 왔고, 동양화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여 왔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기러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다가 편평한 모래펄에 맵시있게 내려앉은 모습을 묘사한 성어로서 글이나 문장이 매끈하게 잘 되었음을 비유하는 뜻으로 전용(轉用)되어 왔다. 기러기는 오리과의 물새로서 쇠기러기·큰기러기·흰기러기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주둥이가 넙죽하고 물갈퀴가 달린 것은 오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목이 길고 다리가 짧으며 덩치는 오리보다 배 이상 크다. 기러기는 3월부터 10월까지 사흘에 두 번 정도 알을 낳으며 1백일 가량 자라면 성조가 되는데 다 자란 수컷은 몸무게가 5∼7kg 정도까지 나간다. 강·바다·늪가에 살며 갈뿌리를 파 먹거나 이삭을 주워 먹는다. 해마다 가을이면 시베리아·사할린·알래스카 등지에서 날아와 월동하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겨울 철새다.
기러기의 언어문화 가을이 깊어가는 무렵 북쪽에서 찬바람[朔風]을 타고 하늘 구만리를 날아온다고 하여 기러기를 ‘삭조(朔鳥)’, 서로간에 신의가 깊다고 하여 ‘신조(信鳥)’, 큰 기러기와 작은 기러기를 ‘홍안(鴻雁)’이라고 부른다. 이밖에 북녘에서 날아와 서리를 전한다고 ‘상신(霜信)’,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지낸다고 하여 ‘이계조(二季鳥)’라는 별칭이 붙어 있으며, 한방에서는 양기에 좋다는 뜻으로 양조(陽鳥), 보양의 왕이라 하여 왕조(王鳥)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황금알을 낳는」거위는 영어명(英語名)이 ‘goose’이고, 야생의 기러기는 ‘wild goose’라고 한다. 거위는 기러기의 변종인데 일찍이 가금으로 길러진 까닭이다. 한자문화권에서 거위[鵝]를 ‘家雁(가안)’이라고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러기는 신라 문무왕이 축조한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에도 등장한다. ‘안항(←雁行)’은 기러기의 행렬이란 뜻으로 남의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이며, 먼 곳에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안신(雁信)·안백(雁帛)·안서(雁書)’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기러기를 ‘긔려기’라고 불렀다. ‘기러기’라는 말은 이 새가 ‘기럭기럭’ 우는 데에서 나온 의성어이다.
전통 혼례식의 전안례 전통 혼례식 때 행해지는 전안례(奠雁禮)란 의식은 지난날 농경사회에서 풍요 및 다산(多産)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전래혼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와서 혼례를 행한다. 전안례는 홍안지례(鴻雁之禮)라고도 하는데 신부집에서는 먼저 안마당에 차일을 치고 안방에 전안청(奠雁廳)을 준비한다. 다리가 높은 탁자에 붉은 보를 깔고 곡물과 과일 등을 차린다. 탁자 앞에는 돗자리를 깔고, 대문에서 탁자 앞까지 행보석(行步席)을 깐다. 신랑은 백마를 타고 신부집에 가는데, 기러기 한 쌍을 든 기럭아비[雁夫]가 신랑보다 앞서 간다. 신랑이 당도하여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바치면 신부 어머니는 기러기를 치마에 싸서 전안청에 안치한다. 전안례가 끝나면 신랑이 장인께 재배하고 나서 안대청에 마련된 초례청(醮禮廳)으로 안내되어 신랑 신부가 상견례를 하며 초례(교배례:혼례식)를 올린다. 이런 경사스런 자리에 수많은 금수(禽獸) 중에 하필 기러기를 택한 것은 기러기처럼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아들딸을 많이 낳아 백년해로하게 해달라는 기원의 표시라는 것이다. 조상들은 한 해 농사를 모두 마친 늦가을에 질서있게 무리지어 날아와 금실 좋게 짝을 이루며 사는 기러기를 신의·화목·정절을 상징하는 새, 모두에게 풍요로움을 전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겼던 까닭이다. 처음에는 전안례에 산 기러기를 쓰다가 점차 나무로 만든 목안(木雁)이나 닭을 대신 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난날 전통의 뿌리가 깊은 마을에서는 혼례를 위해 ‘기러기집’을 한 채씩 지어 수·부·귀·다남 등 오복(五福)을 모두 갖춘 집에서 관리하고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한 번 빌려 쓰는데 쌀로 셈하여 받았다. “기러기집 딸은 묻지 않고 장가든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오는 것은 이런 집 딸이 행실과 용모도 단정하거니와 눈썰미·손썰미가 매서워서 오랜 경험 끝에 비법으로 전해온 음식맛을 내는 솜씨 또한 뛰어났기 때문이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이옥(李鈺)이란 여인은 지나온 신혼 시절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신랑은 목안(木雁)을 쥐고/ 신부는 건치(乾雉)를 쥐었으니/ 그 꿩이 울고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
기러기고기 요리 기러기고기는 뛰어난 강정(强精) 효과 때문에 프랑스·남미·대만의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고, 중국 요리책에는 닭보다 오히려 거위·오리·기러기 등을 이용한 요리법이 많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초의《임원십육지》에 거위·오리·기러기를 삶는 법이 설명되어 있고. 고종 18년(1881)에 나온《규합총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쇠고기를 쓰거든 쌀밥을 하고, 양을 쓰거든 피밥을 하고, 돼지를 쓰거든 기장밥을 하고, 개를 쓰거든 조밥을 하고, 기러기를 쓰거든 보리밥을 하라 하고, 생선을 쓰거든 오이를 쓰라 하니, 존비와 사시를 이름이다.” 《예기》의 내칙(內則)을 인용하여 음식상을 차릴 때에 음식맛의 조화를 이상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집짐승이 귀하던 옛날에는 야생의 기러기 고기를 저며서 소금에 절여 말렸다가 안포(雁脯)를 만들거나 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기러기를 잡아 먹으면 부부간에 이별수가 있다”는 금기도 전해 오는데, 이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짐승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불상생(不相生)의 생명정신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기러기알을 인공 부화하여 길러 ‘기러기 로스구이·기러기 한방탕·기러기 영양보쌈’ 등을 만들어 파는 음식점을 겸한 농원이 도시 근교 여기저기에 생겨나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 기러기의 연한 가슴살은 얇게 저며서 회(膾)로 무쳐 먹는다. ‘기러기 로스구이’는 다진 마늘과 파즙·참기름으로 가볍게 양념한 고기를 가스불에 구워서 소스나 소금에 찍어 먹는다. 소스는 간장에 다진 마늘·부추·양파·식초를 섞어 만든다. 상추나 쑥갓에 싸 먹어도 좋다. 고기맛은 담백한 편이다. 오리고기보다는 연하고 쇠고기보다는 약간 질기다는 느낌이 드는데, 기름기가 거의 없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쉽게 질리지 않는다. ‘기러기 한방탕’은 구기자·당귀·녹각·삼백초·산마·행귀·창출·어성초·육종육·대추·밤·감초 등 온갖 한약재를 섞어서 달인 물에 기러기를 넣고 끓여낸다. 음식이라기보다는 보약인 셈이다. ‘기러기 영양보쌈’은 당귀·오향·대추와 인삼을 약간 넣고 삶은 고기를 보쌈김치에 싸 먹는다. 기러기의 머리와 뼈를 푹 곤 국물에는 밥을 말아 먹거나 수제비를 넣고 끓여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