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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이 대공 사격용으로 사용했던 영국제 브렌 기관총, 이정도 화력으로 저공 공습을
시도하는 아랍측 프로펠러 전투기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휴전 협정 (1948년 6월 11일~7월 8일)
국제연합 UN이 개입하여 6월 11일부터 28일간 효력을 발휘하는 첫번째 휴전 협정이 양측에 동의를 얻어 발효되게 됩니다. 이 4주 동안의 기간 동안 아랍 진영은 참전국 간에 반목과 대립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던 반면에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에 턱없이 열세였던 전력의 보강을 위한 황금같은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훗날 4번째 이스라엘 수상으로 임명되는 라빈은 당시 이스라엘군의 사령관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만약 그 기간동안 우리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하지 못했다면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것이다." 첫번째 휴전이 시작된 후에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열강들의 시각도 이스라엘의 전력으로 더 이상 전쟁을 진행하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4주동안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밀려들어오는 유태인 이주민들 중에서 건강한 젊은이들을 새롭게 군에 충원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강력한 군사훈련으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해갔습니다.
4주의 시간 동안 업그레이드한 이스라엘군
불과 4주 동안에 이스라엘 군은 병력을 휴전 이전에 30,000~35,000명에서 무려 65,000명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증가시키게 되었고 25,000정의 소총들과 5,000정의 기관총 그리고 무려 5,000만발의 탄약들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새로운 병력들은 속속 전방 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동족에게조차 단호했던 필승의 의지
첫 휴전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동족간에 유혈 사태가 눈길을 끕니다. 과거 이스라엘 개국 전에 조직된 이르건(Irgun)이라는 민간 무장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침 휴전 기간동안에 "아틀래나"라는 이름의 화물선에 자신들이 향후 사용할 무기들을 운반하여 이스라엘로 반입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무기들을 정부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고 이조직은 그런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제1대 수상(지난 글에는 총리라고 불렀는데 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이스라엘의 공식 정부 수반의 명칭이 수상이므로 이것은 제 오류이라 생각되어 바꿉니다.)이었던 벤구리온은 즉각 아틀래나호를 격침할 것을 명령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서부 텔아비브 앞바다에서 군의 공격을 받은 이 화물선은 승선했던 이르건 조직원들과 함께 수장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무력 강화를 위한 의지라 볼 수도 있고 일단 수립된 정부에 대한 어떠한 불복종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벤구리온의 의지였을 수 있습니다.
(텔아비브 앞 바다에서 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는 아틀래나호의 모습을 보고 있는 텔아비브 시민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직후
초대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좌우로 나뉘어 한국전쟁 발발때까지 5년 동안 끝없는 혼란이 이어진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강력한 정부와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런 정부를 지지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다.)
1차 휴전 종료일 하루 전인 7월 8일에 이집트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군도 휴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병력과 무기로 공격을 개시하게 되는데 국제연합에 의해서 발효된 두번째 휴전 협정이 시작되는 7월 18알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이번에는 이스라엘군이 적진에 고립된 다수의 키붓짐(이스라엘의 집단 농장 지역)의 자국민들에게 보급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어낸 것은 분명히 전쟁 초기의 상황을 전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첫 휴전 기간 동안 국제연합이 보낸 휴전 감시단은 중재자로써 임명된 폴케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미국,벨기에,스웨덴 그리고 프랑스에서 선발된 군장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베르나도트는 이스라엘과 아랍이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치적인 해결 방안을 제안합니다. (사실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한 양 진영이 잠시 총격을 멈추었다고 해서 그 긴장이 완화됬다는 것은 절대 아닌데 그가 너무 주제넘은 행보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제안에 따른 새로운 제안에는 경제적으로 유태인과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종의 경제적 연합을 이루면서 정치적으로는 독립성을 갖는 상당히 "이상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게다다 이 제안에는 예루살렘이 아랍쪽 영토에 포함된 계획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아랍 진영 모두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전쟁의 제 2 막 : 1948년 7월 8일 ~ 18일
제1차 휴전이 끝나고 불과 10일 동안 전투가 이어진 후에 제2차 휴전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이 10일 동안 큰 변화가 생깁니다. 전쟁 초기에 전력의 열세로 동쪽과 남쪽, 북쪽 세방향으로 밀고 들어오는 주변국들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유태인 단체 농업 지역 키붓짐의 상당수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황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해졌던 이스라엘은 4주일 동안 체코슬로바키에서 들여온 무기들과 병력 증강으로 괄목상대(刮目相對)의 모습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결국 이 열흘 동안에 이스라엘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황당하게도 공격을 거듭하던 아랍 침략군들은 수비의 입장으로 바뀔 정도로 이스라엘군의 위력은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이집트군과의 남부전선
전쟁 초기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남쪽에 이집트군과의 전황부터 소개드립니다. 이집트군은 휴전 종료 직후 안-파 작전(Operation An-Far)와 "침략자의 죽음" 작전 (Operation Death of the Invader)에서 몇번의 공세를 하였습니다. 초반에는 몇몇 마을들을 추가로 점령하고 작전도 예정대로 진행되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7월 12일에 벌어진 네그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뜻밖에 강력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애초에 공격을 시작했던 이집트군이 도리어 200~300명의 전사자들을 발생시키면서 후퇴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고작 5명의 전사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네그바를 점령하는데 실패한 이집트군은 보다 고립되고 취약한 지역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목표물을 수정하게 됩니다. 7월 14일 갈 온이라 불리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하지만 도리어 현지 주둔 이스라엘 민병대를 중심으로 한 저항에 의해 또 다시 점령에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얼마 후에 그곳을 구조하기 위해 달려온 이스라엘 정규군 부대의 지원으로 이집트군은 후퇴하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이과정에서 이집트군은 또다시 2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반면 이스라엘군은 고작 17명 전사에 15명 부상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이집트가 전쟁 기간 중에 공격적인 공세를 취했던 마지막 전투가 되었고 이 전투 이후에 이집트군은 더 이상 진격을 못하게 됩니다.
동부전선 상황
대니 작전(Operation Danny)는 이스라엘군이 텔아비브 동쪽 경계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아랍군들에게 점령된 이스라엘 지역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야심만만한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아랍의 주요 점령 도시 중에 하나인 리다를 공격하기 위해 다수의 여단이 연합한 최초의 대규모 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도시 북쪽과 동쪽에서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기들의 지원 폭격이 진행 되는 가운데 불과 2~3일 후인 7월 11일에 이스라엘이 수복하게 됩니다. 이 전투 중에 무려 450명에 달하는 아랍진영 지상군들이 사망하였는데 이스라엘군은 9~10명 정도가 전사하는 손실을 입은 후에 작전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군들에 의해 강제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이스라엘 시민들 중에 상당수는 강제 이동 도중에 뜨거운 한 여름의 햇빛 아래 쓰러져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된 리다 공항에서 순찰 중인 장갑 차량들)
7월 15일에서 16일 이틀간 라트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쉽사리 공격이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동족을 구해야 한다는 결사적인 두번째 공격이 7월 18일에 시작되는데 영국 크롬웰 탱크와 그외 장갑 차량을 갖춘 이프타치 여단이 선봉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공격조차 또 실패하게 됩니다. (라트룬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막아선 위치인 탓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목표라는 점에서 이스라엘군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7월 18일에 실제로 국제연합에 의한 두번째 휴전 기간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군이 라트룬을 점령하기 위한 필사적인 공격은 7월 20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아! 예루살렘!
케뎀 작전(Operation Kedem)은 이스라엘과 아랍 모두 성지로써 절대적으로 점령해야 하는 도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이스라엘군의 작전입니다. 하지만 작전에 충분한 이스라엘군이 투입되지 못한 탓에 현지에 이르군과 레히와 같은 민간인 무장 조직들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자신들만의 병력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해서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당시까지도 아직 이스라엘 정규군이 전체 전선을 커버하지 못하고 상당 지역들이 정규군에 편입되지 못한 이르군, 레히, 하가나가 중심이 되어 아랍군에 대항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투는 제2차 휴전이 발효되기 이틀 전인 7월 16일에 오후 8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작전은 어그러지기 시작하였고 예정 시간에서 무려 6시간 가까이 지연된 후에 시작됩니다. 이르군이 예루살렘 초입을 통과했을 때 나머지 부대들은 이라크 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각자가 맡은 지역에서 작전 목표 달성에 실패하게 되었고 결국 이르군조차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후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초기 작전들이 실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7월 14일 치열한 전투 후에 말하 지역에 아랍 마을들을 점령한 이르군은 아랍군의 강력한 반격을 동반한 재탈환 시도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정규군 부대가 뒤이어 도착하여 결국 현재의 거점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남부 갈릴리 지역의 전투 상황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신약성서에 예수님의 행적을 따르다 보면 자주 나오는 몇곳의 지명 정도는 귀에 익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루살렘이 대표적인 지명들입니다만 "나사렛 예수"라고 해서 예수님 이름 앞에 붙게 되는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까지 약 30년간을 살아온 고향이었고 지금 얘기할 갈리리 호수 주변 지역은 예수님이 대부분의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지로 여겨지던 탓에 1차 중동전쟁 중에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면 유태인들에게 갈리리 지역은 역시 같은 이유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던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1947년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지역 구분안에는 갈릴리 지역의 대부분이 아랍인들의 영토로 구획되어있었던 탓에 막상 전쟁이 시작되고 먼저 점령하는 쪽이 그 땅의 임자가 되는 상황이 되자 이곳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1차휴전이 끝나고 전투가 재개된 후에 2차 휴전이 발효되는 7월 18일까지 불과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데켈 작전을 통해서 갈리리 남쪽 지역에서 서쪽으로 나사렛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결과 남부 갈릴리에서 서쪽으로 주욱 선을 그으면 지중해 해변가에 위치한 하이파(위에 지도 참고하세용!)까지의 지역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1차 중동전쟁 기간 중에 2차대전 중에 사용된 영국제 크롬웰 탱크들을 구입한 이스라엘은 데켈 작전에서 신속한 기동력과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여 아랍 진영을 몰아내고 목표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합니다. 사진은 이스라엘 전쟁 박물관에
전시 중인 당시 사용했던 크롬웰 탱크의 모습)
이작전은 1차 중동전쟁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북부 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대규모 작전으로 기록됩니다. 특히 캐나다 출신 유태인으로 2차대전 중에 캐나다군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던 벤 던켈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제7 기갑 여단은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작전에는 제7기갑여단 외에도 골라니 여단과 카멜리 여단의 보병 병력들이 함께 투입되었습니다.
(벤 던켈만(1913년~1997년)의 캐나다군 장교 시절의 모습)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는 이미 2차대전때 진절머리가 나도록 전쟁터를 누볐던 던켈만은 종전 후에 캐나다로 돌아가서 전역을 하고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스라엘을 여행하자는 결심을 하고 순전히 여행객 신분으로 중동전쟁이 발발하던 1948년 이스라엘 땅을 밟게 됩니다. 그가 도착한 그 싯점에 전쟁이 터지게 되자 이스라엘 군은 2차대전 중에 전투 경험을 쌓은 유태인들을 찾아 혈안이 되었고 마침 그를 발견하자 당장 코 앞에 쳐들어오는 침략군들에 대항하기 위해 새롭게 조직한 이스라엘 최초의 기갑 여단을 맡아달라고 제안하게 됩니다. 이렇게 맡게된 그의 제7 기갑 여단은 단 10일 동안 보병 부대들과 함께 이스라엘 북부를 누비면서 갈릴리에서 지중해 해변에 이르는 아랍군의 점령지를 탈환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참전 기간 중에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유태인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전쟁 후에 두사람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갈릴리 동쪽 상황
갈릴리 동쪽 상황은 서쪽 지역처럼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점령 중인 시리아 군에 타격을 입히고 목표 지역을 탈환하려던 브로쉬 작전(Operation Brosh)은 양진영의 치열한 전투 끝에 200명의 시리아군과 100명의 이스라엘군이 전사하였지만 이스라엘군의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 작전에서 이스라엘 공군은 최초로 다마스커스를 공습합니다.
두번째 휴전 협정 : 1948년 7월 18일~ 9월 15일
국제연합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또 다시 휴전이 발효되고 전선에서는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습니다. UN 감시단장인 베르나도트는 휴전 발효 이틀째인 7월 16일 또 한번 팔레스타인 지역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구획하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문제는 양진영 모두 정치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양자가 서로 양보하는 태도로 절충안을 이끌어내보자는 베르나도트의 노력에 대한 양쪽 모두의 반응은 냉담할 정도가 아니라 일부 이스라엘 급진 세력에게는 베르나도트의 이런 시도가 이스라엘의 국익에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7월 16일 예루살렘에서 베르나도트를 태운 차량은 이스라엘 무장 결사 조직 레히의 단원에 의해서 총격을 받고 차 속에 탑승해있던 베르나도트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 온 직후에 사망합니다.
(UN 감시단장 베르나도트의 암살 사건 기사, 이스라엘 측 레히 소속 암살범은 훤한 대낮에 그가 탄 차량에
갱스터 무비에 등장하는 토미건을 들이대고 발사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뒷자리에 앉아있던 프랑스군 장교는
그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암살할 때 사용된 "토미 건"은 바로 시카고 갱스터 무비에서 흔히 나오는
사진 속에 이 기관총을 말합니다. 사실은 미군이 2차대전 중에 애용했던 톰슨 기관총을
사용하기 좀 더 편리하게 모양을 바꾼 형태의 기관총입니다.)
베르나도트의 암살을 승인한 이스라엘 비밀 무력 조직 레히의 막후 지도자들 3명중에는 훗날 이스라엘의 제7대 수상으로 임명된 이츠하크 샤미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전에 유태인 갱 두목 출신인 그가 훗날 이스라엘 수상에 오르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입니다.)
(베르나도트의 암살 배후였던 잇츠하크 샤미르(1913년~2012년), 그는 당시에 이스라엘
급진 조직인 레히의 보스였지만, 훗날 이스라엘 제7대 수상까지 올라갑니다.)
결국 국제연합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두번째 휴전 기간 동안에는 UN 감시단장인 베르나도트의 암살으로 전쟁을 멈추기 위한 시도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를 마음대로 선을 그어가면서 국제연합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동안의 상황에 대해서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휴전이 끝나기 전인 9월 15일에 이스라엘 국회는 "앞으로 전쟁 중에 이스라엘군이 새롭게 점령한 지역은 1947년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지역 구획 결정에 추가로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될 것임"을 의결하고 선포하게 됩니다. 즉 남은 기간 동안 본격적인 땅 따먹기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될 것임을 의미하는 선언이었고 동시에 국제연합이나 열강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제권의 결정적인 약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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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에도 역사적 사건들을 흥미롭게 서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청 속독이신가봐요? 저 글 올린지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다 읽으셨어요??
방금 끝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래서는 안될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 못됐다는 생각이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까돠 중재를 위해 가있던 국제기구의 책임자를 죽이는 것이나 깡패두목이 권력의 수장에 오른다거나,
따지고 보면 강력한 민족주의 바탕에 이런 결집력이 생겼던 것인데 2차 대전 때 똑같은 이유로 자기네들이 당했던 것들을 그대로 주변에 저지른 것에 지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이스라엘이 영악하다면 아랍은 미련했습니다. 결국 1차중동전쟁의.패인들 중에 하나가 아랍의.내부분열입니다.
카페에 들어오면 혹여 김작가님 글 올라오지 않았나 먼저 생각 하게 됩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경우 그냥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글을 보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네요
간절한 사람들과 간절하지 않은 사람들의 싸움...
간절한 사람들이 뭉치면 무섭네요.
김작가님 오늘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감사합니닷!!! 요즘에 연거퍼 올리시는 제작기 열공하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이 전쟁도 상당하네요. 후~
사실 현대전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과 이라크 걸프전이 주골격인데 확실히 배경을 알고 게시판을 만들어가자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중동전쟁 자체가 여러분들의 관심과는 좀 멀어서 걱정했습니다. 뭐 어쨌든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 할 이야기들이라서 밀어붙혀볼라고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구요.
전쟁이나 암살이야 어찌 되었든 사진으로 보는 토미건은 너무 멋집니다.
저 곡선들은 예술이네요. ^^
하하하
아...준만형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중이네요..네버엔딩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