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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십일. 대한신문 싱가포르 지사 오후 세시.
본국에서 돌아 온 지섭은 이영수 지사장과 회의실에서 민채영 일가에 대한 귀순 작전에 대해 의논했다. 본사에서 이 작전에 대해 지사장에게 극비연락이 있었다.
“민채영씨가 북한으로 소환되기 전에 박 특파원이 어떻게든 접촉해서 이쪽에 협력하도록 결심을 얻어내야겠군.”
“그런데 지금 연락이 안됩니다. 시간이 없는데, 오늘 퇴근해서 대사관 근처에 가봐야겠어요.”
“대사관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게 요령껏 해.”
“알았습니다.”
이날 오후 여섯시. 싱가포르 북한 대사관 앞.
지섭은 벌써 구석에 몸을 숨기고 정문을 주시했다. 그는 낮에 공항에 도착하면서 곧 채영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하지만 수신자가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녹음만 들렸다. 저번 본사출장 때 문자를 주고받은 후 문자에 대한 응답도 없었다.
‘벌써 북한으로 갔나? 아직 며칠 더 있다 간다고 했는데...’
그는 애가 탔다. 이날 기사 송고를 마친 그는 차를 몰고 거리를 질주했다. 지름길로 삼십분 쯤 달려 멀리 북한 대사관이 보이는 거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사관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관 업무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채영이 퇴근 해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그때였다. 대사관 정문이 열리며 비교적 풍채가 좋은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남자직원 두 명이, 그리고 아, 채영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십대 남자는 대기한 검은 구형 승용차에 오르면서 두 남자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지섭은 그 남자가 북한 대사라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남자 직원들은 연신 굽실거리며 대답을 했다. 대사로 보이는 사람은 차에 오르려다 채영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는 손짓을 섞어 채영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는 차에 올라 어디론가 갔다. 두 남자와 채영은 다시 대사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채영 사라지면 안 돼. 지섭은 자기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누르려다 그만 두었다. 다른 직원이 있어 위험했다. 어떻게 연락한다?
그는 전신의 맥이 빠졌다. 대사관 건물 어디 접근할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십분 쯤 지나 대사관 건물이 다시 열렸다. 채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조그만 손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지섭은 약간 떨어져 그녀를 따라갔다.
대사관에서 멀어지자 지섭은 걸음을 빨리했다. 거리가 십 여 미터로 좁혀졌다. 그는 채영 옆을 스쳐 지나가며 “채영”하고 불렀다. 그녀가 돌아보며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지섭이 걸음을 더욱 빠르게 해서 옆에 붙어서 함께 걸었다.
“왜 연락이 안되요?”
“쉿, 지섭씨, 떨어져서 걸어요.”
“감시자가 있어요?”
“여기선 안보이지만 누군가 망원경으로 감시할 거예요.”
지섭이 약간 걸음을 빨리 해 자연스레 앞서 나갔다. 채영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섭씨, 위험해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안돼요. 전화도, 문자도 안 되고 오늘은 물러날 수 없어요.”
“이러면 피차 위험해요.”
“이대로 채영씨, 북쪽으로 보낼 수 없어요.”
채영이 한숨을 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내가 저 앞 사거리까지 똑바로 천천히 갈게요. 사거리 왼쪽 모퉁이에 세븐 일레븐이 있어요. 지섭씨 차 있지요. 얼른 차타고 그 근처로 가서 전화하세요.”
지섭은 자연스레 앞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 온 듯이 돌아서 주차장 쪽으로 갔다. 주변을 살폈으나 감시하는 남자는 안보였다. 아마 몸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지섭은 주차장으로 가자마자 차에 올라 재빠르게 운전을 해서 사거리 쪽으로 갔다. 사거리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시킨 후 채영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채영씨. 이제 전화통화가 되니 살 것 같네요. 지금 가게 안에 있어요?”
“네, 물건 사는 척 하다가 나가려구요.”
“어떻게 혼자 외출하게 됐어요.”
“대사님으로부터 특수임무를 부여받아 특별 외출허가를 받았어요. 그치만 멀리서 감시하는 자가 따라 붙을 거예요.”
“어떻게 따돌려 봐요. 그런데 어떤 임무예요?”
“러시아 대사를 만나서 물건을 받아오는 거야요. 내가 조금 있다가 버스를 탈 거야요. 멀지 않은 곳이니까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아요. 지섭씨 한 시간 뒤에 오키드 공원에서 봐요.”
지섭은 뛸 듯이 기뻤다.
한 시간 뒤 오키드 공원.
벌써 황혼이 지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지섭은 초조하게 채영을 기다렸다. 약속한 한 시간에서 오 분이 지났다. 휴대폰 문자를 넣으려다 저쪽 사정이 어떤지 몰라 그만 두었다. 그 때 채영의 모습이 공원 입구에 나타났다. 지섭은 미행자가 없나 살폈다. 채영이 지섭을 보고 걸음을 빨리했다.
지섭이 벤치에서 일어나 채영의 손을 잡고 벤치에 앉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서로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요.”
지섭의 말에 채영의 눈이 젖어왔다.
“볼 일은 잘 마쳤어요? 무슨 임무?”
“아버지께서 우리 대사님에게 특별 부탁을 했나 봐요. 내가 러시아 대사를 만나서 물건을 받아 오는 거야요. 공화국으로 가기 전 시내구경이라도 하라는 배려 같아요.”
“어떤 물건인데요?”
“내용물은 잘 모르겠고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건가 봐요.”
“감시자는 잘 따돌렸어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해서 아마 따라 오늘 걸 포기했나 봐요. 대사님이 허락한 외출이니까 더는 따라오지 않을 거야요.”
“그런데 왜 전화도 안되고 문자도 안되요?”
채영이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이윽고 말했다.
“그냥 공화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냥 가다니, 채영씨. 이번에 가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가려구요.”
지섭의 언성이 높아졌다.
“보면 서로 마음만 아프잖아요.”
“채영씨는 정말 그냥 갈 수 있어요?”
그녀가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아까 왜 맘이 변해서 보자고 했어요?”
“지섭씨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거봐요. 채영씨도 그대로는 북쪽에 못가잖아요. 근데 아버지가 왜 소환하신 거예요?”
“자세한 말씀은 안하지만 여기 계속 근무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언제 가지요?”
“이월 이십일.”
앞으로 십일 남았다. 두 사람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침묵이 흘렀다.
“채영. 어떡해서든 다시 와요.”
“어디 그게 내 맘대로 돼요.”
‘이제 싱가포르 근무는 끝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여기 근무를 못하게 하려고 부르시는 거야’ 채영은 직감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지섭은 그녀의 눈에서 절망을 보았다. ‘이제 당신은 못 오는구나’
지섭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채영, 오늘 내 아파트에 가요.”
그녀는 흠칫했다. ‘난생 처음 남자의 아파트로 어떻게, 그것도 남조선 청년이 혼자 있는데를...’
“오늘 단 몇 시간만이라도 우리 맘 놓고 지내봐요.”
“남자 혼자 있는 집에 막 가도 될까요. 내가 타락한 여자 같애...”
“당신, 절대 타락한 여자 아녜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까요.”
“우리 생각이 중요해요.”
“...”
지섭은 채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열시까지는 숙소로 들어가야 해요.”
모든 것을 각오한 목소리였다. 시내 볼일을 끝내고 적어도 여덟시 까지는 들어가야 하지만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지섭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일찍 들어가야 되는 줄 알지만 오늘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 대사관에서 난리가 나겠지. 미안해요.”
두 사람은 공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차는 번화한 거리를 무섭게 질주했다. 지섭은 차를 오차드 로드에 세웠다. 그는 채영을 이끌고 쇼핑센터로 들어섰다. 지섭은 보석상 앞에서 쇼윈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채영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지만 아직 시내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부신 듯 쇼핑센터를 둘러보았다. 아, 이런 세상도 있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지섭의 손에 끌려 보석상 안으로 들어갔다.
“채영씨, 이 목걸이 어때요?”
“어머, 참 예뻐요.”
휘황한 불빛에 찬란히 빛나는 푸른 사파이어 목걸이. 비록 조그만 알이 박혀 있지만 디자인이 아름다웠다. 지섭은 그 목걸이를 채영의 목에 걸어 주려 했다.
“어머 지섭씨, 난 이런 거 안해요.”
“그냥 한번 걸어 봐요.”
지섭은 억지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난 당신에게 이걸 꼭 사주고 싶어 몇 번씩 여기 왔어요.”
“지섭씨, 비싸서 안돼요.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이거 나한테 안 어울려요.”
“그만한 월급은 받아요. 또 나 혼자서 돈 쓸데도 없고... 몇 달치 모았어요. 자 내 선물...”
채영은 이런 물건에 익숙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했다. 보석상 점원이 손뼉을 치며 영어로 말했다.
“뷰티플. 부인이세요? 너무 잘 어울려요.”
채영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지섭은 말릴 사이도 없이 얼른 돈을 치르고는 어리둥절한 그녀를 이끌고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그 다음에는 수퍼마킷으로 들어섰다.
“지섭씨, 정신없어요. 천천히 가기예요.”
“이제부터 천천히 할게요. 집에 가서 먹을 걸 좀 살까요?”
“참, 지섭씨. 혼자서 어떻게 식사 해결해요?”
“아침은 대충 빵 한 조각에 우유나 커피로 때우고 점심, 저녁은 아무거나 밖에서 사먹어요.”
“그러면 몸 상해 안 돼요.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네.”
“기자하느라 아무거나 잘 먹고 건강해요.”
채영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저어, 오늘 저녁식사 해드릴까요.”
그녀는 얼떨결에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채영은 될수록 심한 북한 사투리를 줄이고 지섭의 말투에 맞추려 노력했다.
“정말? 채영...”
지섭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필요한 식료품을 산 뒤 슈퍼를 나온 그들은 차를 타고 톰슨로드에 있는 아파트로 질주했다. 아름다운 가로등 빛을 받은 열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채영은 밤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는 길가의 형형색색의 열대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절망 속에서도 꽃처럼 흔들렸다. 자동차들이 뜸한 한적하고 깨끗한 도로로 접어들며 고층 아파트 군이 보였다. 이십 층짜리 아파트 앞에서 차를 주차시키고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밤중에 남자 혼자 있는 집을 처음 가보는 채영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엘리베이터 안. 십오 층 지섭의 아파트로 올라가는 채영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지섭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만히 어깨를 안았다. 엘리베이터가 십오 층에 멎고 문이 열렸다. 지섭이 현관문을 열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채영은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거실에 티브와 오디오 세트, 간단한 응접세트 등이 있었다. 그녀는 지섭의 안내에 따라 서재 겸 기사를 쓸 때 사용하는 방을 둘러보았다. 책꽂이에 꽂힌 러시아 문학전집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오디오 옆에 가지런히 꽂힌 시디 중에는 러시아 작곡가 음악이 꽤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었던 채영을 생각하며 이 책을 보고 음악을 들었어요.”
“지섭씨, 그렇게까지...”
채영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이런, 이제 보니 울보 아냐.”
지섭의 농담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다가 주방에 가서 쇼핑해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합동으로 차린 저녁 식탁에 그들은 마주 앉았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틀고 불빛을 은은하게 줄였다. 그들은 포도주를 잔에 따라 마주 바라보며 건배하고 마셨다.
“지섭씨, 러시아 문학을 공부할 때 외웠던 시가 있어요. 음... ‘작은 새 놓아주어라. 비록 한 마리 새지만 산 것에 자유를 주고 아쉬운 생각은 없으니 나의 마음은 평화로워라’ 난 이 시에서처럼 작은 새가 되고 싶어요.”
채영은 푸시킨의 ‘작은 새’중 한 구절을 외며 지섭을 건너다보았다.
“채영, 당신은 자유로워 질 수 있어요. 그렇게 돼야 해. 신념을 가져요.”
두 사람은 오늘이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저녁식사 후 무거운 분위기를 피하려고 차를 마시며 잠시 함께 음악을 들었다.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이 가슴을 적셨다.
시간은 사정없이 흐르고 있었다. 벌써 여덟시 반. 열시까지는 한 시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 점 초조해졌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창가로 가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영롱한 불빛이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지섭은 채영의 어깨를 돌려 세우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북쪽으로 가면 아버지를 설득해서 가족이 전부 망명해요. 그 길 밖에 없어요.”
“그건, 그건 거의 불가능해요.”
“잘 들어요. 아버지께서 끝까지 망명을 반대하시거나 우리 만나는 걸 못하게 하시면 북에 가지 말고 지금 채영만 당장 우리 쪽으로 망명해요. 이쪽에는 다 준비가 돼 있어요.”
지섭이 단호하게 말했다. 채영이 경악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공화국에 남은 아버지와 동생은 어떡하라구요. 나만 살자고 도망친다고요? 그건 안 돼.”
채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당신을 놓치지 않겠어. 어떤 경우든 절대로. 북쪽으로 가면 거기라도 쳐들어가겠어!”
이때 채영이 무명지에 끼고 다니던 가느다란 금반지를 빼냈다.
“지섭씨,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끼시다가 돌아가실 때 물려주신 건데 지섭씨에게 드리갔시오.”
“이걸 내게?”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언젠가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의 표시야요.”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이걸 끼고 있을게요.”
지섭은 더 참지 못하고 채영을 품에 안고 입술을 찾았다. 그녀도 더는 억제하지 못하고 지섭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지섭은 채영을 안아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채영은 처음에는 놀라 젊은 여성의 본능으로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곧 힘을 잃었다.
‘그래. 우리는 지금 시간이 없어.“
채영을 침대에 눕힌 지섭은 그녀의 눈을 드려다 보았다. 바다처럼 맑은 눈이었다. 호수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온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사랑,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두 사람을 서두르게 했다. 지섭은 일어나 불을 껐다. 푸른 달빛이 창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지섭은 채영의 겉옷에 손을 댔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겉옷을 벗기려 하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곧 한숨을 쉬고 저항을 포기했다. 겉옷이 벗겨졌다. 드디어 속옷만 남았다. 어둠 속에서도 드러나는 균형 잡힌 몸매. 지섭은 자신도 겉옷을 벗고는 그녀의 곁에 가만히 누웠다. 옆으로 누우며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았다. 채영의 몸은 열에 뜬 것처럼 뜨거웠으나 떨고 있었다. 지섭이 포근히 안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상태로 안고 있었다.
“채영. 사랑해. 이상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당신이 좋았어. 아마 전생에서부터 사랑했나 봐. 평생 동안, 아니 죽은 후에도 사랑할 거야.”
“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 내가 이렇게 변했어.”
지섭이 그녀의 온 몸을 껴안았다.
“남조선 청년 지섭씨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이야. 사랑해요, 내 목숨보다 더...”
“채영. 진달래 꽃 필 때까지 우리 쪽으로 와.”
“진달래 꽃 필 때까지? 진달래 꽃. 진달래...”
“그때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정말? 정말 그럴까?”
지섭이 얇은 채영의 속옷을 천천히 벗겼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흰 몸이 드러났다. 그는 보석처럼 숨겨졌던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부푼 채영의 가슴이 지섭의 가슴에 뭉클하고 닿았다.
“꼭 안아 줘요.”
채영이 열에 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언제나 시간이 없어.”
“그래요. 시간이 없어. 다 가져요.”
둘의 벗은 몸이 빈틈없이 밀착됐다. 지섭은 입술로 채영의 젖은 입술을 찾았다. 그의 손이 채영의 어깨를 어루만지다 팔을 지나서 허리로 향한 뒤 머뭇머뭇 가슴으로 옮겨 갔다. 채영이 흠칫 놀랐다. 지섭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봉긋한 가슴에 손을 댔다가 부드러운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채영이 ‘흑’ 하며 불에 댄 것처럼 놀랐다. 그러나 곧 지섭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지섭이 탄력 있는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더듬다 분홍빛 꼭지를 입에 물었다. ‘아’ 하며 그녀가 몸을 떨었다.
지섭의 입술이 가슴에서 배로, 그 아래로 내려가 온 몸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은 경직되었지만 곧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의 온 몸이 뜨거워졌다. 지섭이 위로 올라가 두 몸을 한 몸으로 결합했다. 채영의 손이 지섭의 등을 안았다. 푸른 달빛은 창문을 통해 여전히 쏟아져 들어왔다.
스물여섯 해 간직한 그녀의 성(城)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시간은 사정없이 흐르고 그들은 짧은 시간의 격랑을 불태웠다.
방안의 공기 중엔 ‘사랑의 정’(精)이 날아다녔다. 사랑의 요정과 공기의 요정은 은빛 날개 짓을 하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두 요정은 사뿐 사뿐 날아다니며 두 연인을 지켰다. 그들이 날아다닐 때마다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은 궤적이 생겼다.
두 사람의 귀에 교향곡이 들렸다. 이른 봄의 미풍이 볼과 코끝을 스쳤다. 졸 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나무의 순이 돋아나고 꽃나무는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잔잔하게 연주되던 전원 교향곡은 점점 강해지고 열정을 더해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드디어 폭풍우가 몰아쳤다. 한동안 몰아치던 폭풍우가 점차 가라 안고 드디어 평온을 되찾았다. 다시 들리는 새소리와 시냇물 소리, 얼굴을 스치는 미풍.
온몸의 에너지가 한곳으로 뭉쳐 터져 나간 후 지섭은 채영을 껴안고 볼과 눈망울에 입술을 갖다 댔다. 방안에 아직도 떠돌던사랑의 정은 이제 푸른 달빛 속으로 서서히 물러났다.
험난한 파고가 두 사람에게 밀어닥친다 해도 아름다운 남십자성의 나라, 열대의 밤은 향기로웠다.
이월 십이일. 창이국제공항.
지섭이 입국하는 승객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약 십분 쯤 지나자 저쪽에서 은경이 경쾌한 걸음걸이로 트렁크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나오는 게 보였다. 지섭이 손을 흔들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전에 왔어.”
그녀는 흰 티셔츠, 청바지에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발랄해 보였다. 시내로 들어가는 지섭의 차 안에서 그녀는 계속 재잘거렸다.
“와, 참 깨끗한 나라다. 어머, 저 건물 좀 봐. 오빠,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워.”
“에어콘 나오는 차 안에서 봐선 어름다워 보여도 건설 현장에 한번 가 봐라. 적도의 무더위가 사람 쪄 죽인다. 우리나라 근로자들 체력이 좀 강하니? 그런데도 중동보다 습한 더위 땜에 더 힘들대.”
“그럴 거야. 오빠 건설 현장에 자주 가나 봐.”
“응, 뭐랄까. 아시아의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의 힘찬 동맥 같은 게 느껴져 기분 좋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섭은 채영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참, 은경이가 부탁한 취재원들 미리 면담 예약을 해놓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느 새 지섭의 차는 은경을 위해 예약한 도심이 호텔에 도착했다. 안내된 룸으로 들어간 은경은 땅거미가 진 도심을 내려다보며 신이 나 있었다.
“오빠가 근무하는 곳에 오니 기분이 이상해. 오늘 야경 실컷 구경시켜줘야 해.”
“그래, 좀 쉬고 있어. 지사에 가서 오늘 기사 마무리해 놓고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프런트에서 전화할게.”
“알았어.”
은경은 콧노래를 부르며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지섭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번에 어떻게든 채영과의 일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때, 뉴톤 서커스에 있는 싱가포르 최대의 호커센터(야외 식당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은경은 생전 처음 보는 갖가지 음시에 놀라워하며 이것저것 호기심을 갖고 먹어 보았다.
“오빠, 여기 잘 왔어. 구경거리도 많고 아주 생기가 넘쳐.”
“그래. 유명 레스토랑은 다음 날 가고 여기가 명물이니까 오늘은 여기부터 구경해.”
“쭈아. 그런데 여기 세계 인종이 다 모인 것 같애. 어쩜, 저기 봐. 서양사람, 일본인, 중동 사람들, 흑인, 와 인종 전시장이야.”
“자, 맥주 한잔 쭈욱...”
그들은 맥주잔을 부딪쳤다.
“근데, 오빠는 언제까지 여기 근무야?”
“한 이, 삼년은 있어 보려고 해.”
“그렇게 오래? 오빠가 국내에 없으니까 쓸쓸 해. 보고 싶어 죽을 뻔 했단 말야.”
언제나 속에 있는 말을 주저 없이 하는 은경이다.
“이 아가씨야. 이렇게 싱싱하게 살아 있는데 뭘 죽을 뻔 해.”
지섭은 될수록 가볍게 응대했다.
“피이, 정말이야. 오빠 빨리 한국에 와. 왜 하필 싱가포르에서 오래 있으려고 해. 워싱턴, 파리 특파원도 있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니?”
“본사로 돌아오겠다고 해. 사회부에서 오빠 필요할 거 아냐?”
무덥던 더위도 밤이 되자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바람도 약간 불어 은경의 머리칼을 날렸다. 그녀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은경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 한인성 부장검사는 요즈음 특명수사 임무를 띠고 차출되어 다른 기관과 합동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연계된 사건인데 어떤 내용인지 극비에 부치고 있다고 했다.
“담은 드라이브 코스야, 오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갔다.
다음 날부터 은경은 지섭의 도움으로 연결된 싱가포르 정부 관계 부처와 산하 기관, 항만시설 등을 취재하러 뛰어 다녔다. 그런 중에도 채영이 북한으로 가는 날자가 화살처럼 점 점 다가왔다.
은경이 온지 사흘 째 되는 날, 두 사람은 인터내셔널 플라자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때 지섭이 휴대폰이 울렸다. 지섭은 번개같이 머리를스치는 예감과 함께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진 창가 쪽으로 가서 받았다. 채영이었다. 그날따라 화상모드였다. 가슴이 저려왔다. 채영이 화면에 나타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화국으로 가는 날자가 좀 앞당겨졌어요, 지섭씨.”
“언제, 언제예요?”
“이월 십칠일. 사흘 남았어요.”
“뒤에 보이는 게, 집 같은 데?”
“숙소예요. 잠깐 혼자 있는 틈에 전화하는 거예요.”
“가기 전에 만나요, 우리. 언제 볼지 모르는데...”
채영이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만나요, 지섭씨. 어떻게 해볼게요.”
“시내 나올 수 있어요?”
“중국어 학원에서 오늘 저녁에 파티가 있다고 오래요. 잠간 얼굴만 내밀고 나오겠어요. 그럼 여덟시 반 쯤 될까.”
지섭이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이십 분이다. 앞으로 한 시간 십분.
“그럼 그 시간에 우리가 만나던 버스 정류장으로 갈게요.”
은경의 자리로 오는 지섭의 표정이 비장했다.
“무슨 전화야, 오빠? 내가 들으면 안 되는가 봐.”
“조금 있다가 얘기 해 줄게.”
지섭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채영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한다’
지섭은 식사가 끝난 후 가까운 공원으로 은경을 데리고 갔다.
“아까부터 오빠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은경아, 내 말 화내지 말고 들어 줘. 사안이 워낙 중대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마침 아까 전화가 와서 이 기회에 말해야겠다.”
은경의 긴장된 표정으로 지섭을 보았다. 지섭은 모스크바에 취재 갔다가 채영을 만난 경위부터 싱가포르에 오게 된 사연까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말까지.
“뭐라고, 오빠!”
은경의 경악과 충격...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쪽으로 달려가 언덕 아래 야경을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머리를 움켜잡기도 하고 작은 주먹으로 나무를 두드리기도 하더니 지섭에게로 달려왔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설레었는지 알아? 그러니까 취재 땜에 그 북한여자한데 접근한 게 아니라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 아냐?”
“은경아, 어쨌든 미안하다. 여기까지 달려온 네게 이런 얘기를 해서... 잔인하다고 나한테 욕하고 때려라. 평생 날 미워해도 돼. 그치만 이 얘기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그 북한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그 여자를 계속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야? 서로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서로 사랑한다. 반드시 장벽을 넘을 거야.”
“사랑한다고? 흥, 그게 맘대로 될까. 그 여자가 한국으로 귀순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더구나 북한에 가족을 놔두고...”
“그렇게 해야 돼.”
“일가족 귀순이 쉽다고 생각해?”
“쉽진 않지만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있어.”
“이유라니?”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한반도의 운명이 걸렸어.”
“한반도의 운명? 전쟁이라도 난단 말야?”
“보통전쟁이 아니라 남북한 핵전쟁이 걸린 문제야.”
“뭐? 핵전쟁?”
지섭은 백두산 작전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신문사에서도 이 사실을 알아?”
“응, 알고 있고, 그래서 채영씨 일가족 망명 작전을 거론하는 거야.”
“잠간, 아까 그 민채영이란 여자 아버지가 저번에 대한신문에 난 민영대박사라고 했어?”
“그래. 그래서 민 박사 귀순이 문제해결의 열쇄가 되는 거야. 이 모든 게 극비사항이야.”
은경은 당시에 보도된 민 박사 일가의 가족사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내뱉듯 말했다.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폭로했다는 그 여자가 이중간첩인지도 모르잖아. 북한이 고도의 대남전략으로 이용하는 이중간첩일 수도 있지.”
“그 정도는 알아. 채영씨는 그런 사람 아냐.”
“흥, 벌써 편드는 거야? 지금 오빠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이건 고도의 스파이 작전이라고. 사랑인지 뭔지에 빠져 눈이 멀었어.”
은경은 다시 주먹으로 벤치를 두드렸다.
“몰라, 몰라.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오빠를 만나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그녀는 말릴 사이도 없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채영은 달리는 버스에서 생각에 잠겼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내가 이렇게까지 변했나. 사회주의 신념은 다 어디로 갔지? 자본주의에 물들어 타락해 가는 건가. 근데 그가 더 보고 싶어지는 이 맘은 뭔가.’
지섭이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내린 그녀는 지섭의 차로 달려갔다. 지섭이 차문을 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드는 그녀를 껴안았다. 채영이 그의 가슴에 한동안 머리를 묻고 숨을 골랐다.
“보고 싶었어.”
지섭의 말에 채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만남이 잦을수록 불안한 마음이 더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골목 안에서 얼핏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섭은 얼른 차 밖으로 나가 골목 안을 살폈다.
“왜 그래요, 지섭씨. 누구 수상한 사람이라도...?”
“글쎄, 내가 잘 못 봤나? 이상한데...”
채영이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신경 쓰지 말아요.”
채영이 지섭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까실한 턱수염을 만졌다.
“어제 잠을 잘 못 잤죠? 밥도 잘 못 먹고...”
“어떻게 알아요? 꼭 점쟁이야.”
“이제는 다 알아요. 지섭씨가 잠을 잘 잤는지, 일을 많이 했는지, 밥도 잘 먹었는지, 얼굴만 보면 다아 안다니까.”
“자기 만나나는 시간을 만들려고 낮에 취재도 더 많이 하고 또 밤새워 기사도 쓰고...”
“그래도 식사는 제 시간에 해야지요.”
지섭은 차를 질풍 같이 몰아 마운트 파버 공원으로 갔다. 두 사람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 채영은 아름다운 불빛이 명멸하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지섭이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안으며 말했다.
“불교에는 윤회사상이 있어요. 당신과 난 전생에서부터 엄청난 인연이 있었나 봐. 모스크바 커피 샵에서 자기를 봤을 때 왜 그렇게 가슴이 찌르르 했을까.”
“사실은 나도 이상해. 모스크바 대학에서 내게 편지 줬잖아요. 보통 때 같았으면 버렸을 텐데 왜 버리지 않았을까. 그걸 운명이라고 하나.”
그 때, 검은 그림자들이 그들을 서서히 포위하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세에서는 내가 여자가 되고 채영이 남자가 되면 어떨까?”
“싫어요. 내가 여자로 있어야 남자인 지섭씨 사랑을 받죠.”
그들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그때다. 서 너 명의 검은 그림자가 안개가 스며들 듯 그들을 에워쌌다.
“당신들, 누구야?”
지섭이 채영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그들은 모두 세 명. 검은 복장에 검은 복면을 했다. 두 사내는 손에 재크나이프 같은 흉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지섭을 공격했다. 지섭도 방어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당신들, 누군지 모르지만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있으면 시끄러워질 걸.”
그 소리에 사내들은 나직하게 웃었다.
“칼이에요. 조심하세요!”
채영이 소리쳤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동남아 사람들은 아니고 한반도 북쪽 사람들이군.”
상대는 대꾸도 없이 지섭을 공격했다. 사내들 중 두 사람은 흉기를 들고 있는데다 숫자가 많아 이쪽이 불리했다. 지섭은 우선 칼을 들고 있는 자들을 집중 공격했다. 세 명 중 두 명은 상당히 무술훈련을 받은 것 같고 한명은 전문가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칼 든 자 중 건장한 사내가 지섭을 향해 칼을 날렸다. 지섭은 가까스로 칼날을 옆으로 흘리며 그 자의 딴족을 걸며 팔을 구부려 팔꿈치로 몸통을 찍었다. 그 자는 허탕을 치자 비틀했으나 곧 자세를 바로 하며 지섭을 재차 공격했다. 그 뿐 아니었다. 칼을 든 다른 사내가 지섭을 공격했다.
나머지 남자는 채영을 공격했다. 그녀는 자신을 움켜잡으려는 사내의 손을 옆으로 피하며 발차기로 그 자의 가슴을 공격했다. 채영의 호신술이 만만치 않았다. 그 자는 채영의 발길을 간신히 피하기는 했으나 방심하고 있던 차에 비스듬히 가슴을 차이고는 잠시 비틀했다.
“이 종 간나이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그는 몸을 바로 하더니 발길로 채영을 공격하는 한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녀는 손길을 피하며 재빨리 사내의 뒤로 돌아 팔 굽으로 그 자의 등을 찍었다. 사내는 이번에도 채영에게 당하고는 화가 나서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돌진해 들어갔다. 그 통에 채영이 주먹으로 어깨를 맞았다.
한편 칼 든 자는 지섭의 빈 옆구리를 향해 칼날을 날렸다. 칼날이 지섭의 옷을 찢고 살갗을 스치며 지나갔다. 지섭은 통증을 참으며 살판 뜀으로 몸을 훌쩍 날리고 발을 높이 들어 사내의 얼굴을 찍었다. 다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칼 든 손을 가격했다. 사내가 칼을 놓치고는 손목을 움켜잡으며 상을 찌프렸다.
하지만 또 다른 칼잡이가 숨 쉴 틈도 없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날렵하게 생긴 그 사내는 동작이 유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지섭은 가슴을 노리며 들어오는 칼날을 피하며 그 자의 힘을 이용해 손을 옆으로 돌려 수도(手刀)로 쳤다. 사내가 목을 맞고는 비틀했으나 역시 몸을 바로 하고 지섭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날렸다. 이들은 단순히 지섭을 혼내주려는 게 아니라 살해하려 한다는 목적이 분명했다.
채영의 상대는 전문적으로 무술을 익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마구 주먹과 발길을 휘두르며 채영을 잡으려고만 했다. 그녀를 사로잡으려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자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며 그 힘을 역이용 해 중심을 잃게 해서 팔 굽으로 가슴이나 등을 가격했다. 아까 그 자의 주먹에 어깨를 맞아 통증이 왔으나 참았다. 그가 발길질을 하며 쳐들어 왔다. 구둣발이 이번에는 채영의 옆구리를 엇비슷하게 찼다. 그녀는 옆구리에 통증을 느꼈으나 돌려차기로 그의 가슴을 가격했다. 그 자가 통증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채영이 다시 발차기로 가슴을 찼다. 사내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지섭은 상대가 칼로 공격하기 때문에 주변에 무기로 쓸 만 한 물건이 있는지 살폈으나 그런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섭이 날렵한 사내를 상대하는 사이 칼을 놓쳤던 자가 다시 칼을 주워들고 동시에 덤벼들었다. 아무리 지섭이 무예를 좀 익혔다 해도 칼을 든 두 전문가에 비해 불리했다. 다행히 채영이 제몫을 해주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채영에게 맞아 쓰러졌던 사내가 주섬주섬 일어나고 지섭과 싸우던 날렵한 자가 채영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섭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날렵한 자는 채영을 위협하며 부상이라도 입히려는 듯 이리 저리 칼을 그어댔다. 채영에게 얻어맞았던 자도 그녀에게 화가 난 듯 함께 달려들었다. 지섭이 이를 보고 건장한 사내를 내버려 두고 옆의 싸움 판으로 뛰어 들어 채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싸움은 이제 혼전이었다. 지섭과 채영을 에워싸고 칼잡이들이 공격하고 다른 한 사내도 싸움을 거들었다.
날렵한 자가 아마추어인 지섭의 방어 자세에서 빈 공간을 파고들며 예리하게 칼을 휘둘렀다. 빈손인 지섭이 많이 지쳤다. 지섭은 마지막 힘을 짜내 두 남자의 칼을 피하며 살판 뜀으로 곤두질을 하며 날렵한 자의 칼을 피했다. 동시에 다리를 그 자의 정수리까지 올려 필살기로 얼굴을 찍었다.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안면에 결정타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싸움의 고수였다. 번개같이 피했다. 그러나 필살기를 피하기는 어려워 턱을 강타 당했다. 인중 급소를 피한 게 다행이었다. 지섭이 가쁜 숨을 고르며 땅에 내려서는 순간 건장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 때 채영이 그 자를 막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가격하고 발을 들어 턱을 찍었다. 사내가 주춤하는 사이 턱을 쥐고 있던 날렵한 사내가 재빨리 칼날을 날려 채영의 팔을 찔렀다. 칼날은 채영의 팔을 스쳤다. 그녀가 팔에서 피를 흘렸다. 지섭이 채영을 막아서며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들어 날렵한 사내의 가슴을 찍었다. 그때 건장한 사내가 지섭의 옆구리로 칼날을 날렸다. 중과부족의 싸움에 지친 지섭이 재빨리 옆으로 껑충 뛰어 피했으나 칼날이 제법 옆구리를 깊이 찔렀다. 무기를 들지 않은 사내가 발길로 지섭을 복부를 걷어찼다.
“아 앗!”
채영의 비명. 지섭은 옆구리에 불같은 통증을 느끼며 길 옆 언덕 아래로 기우뚱했다.
“아악! 지섭씨!”
채영이 팔에서 피를 흘리며 지섭 쪽으로 몸을 던졌으나 지섭은 이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채영이 지섭이 떨어진 언덕 아래로 뛰어 내리려 했다. 이 때 무기를 안 든 사내가 채영의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채영이이!” 언덕 아래로 구르며 외치는 지섭의 부르짖음.
“지섭씨!” 사내들에게 붙잡힌 채영의 외마디 비명...
두 남자가 부상당한 채영을 덮쳤다. 그녀는 지쳐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섭이 부상당한 채 언덕으로 구르는 걸 보고 더 싸울 의욕을 상실했다. 그들은 채영에게 수갑을 채웠다. 한 사내는 지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그가 굴러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요란스러운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달려왔다. 소란스런 격투소리에 아베크 중이던 젊은 남녀 몇 쌍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괴한들은 지섭을 포기한 채 채영을 끌고 대시시켜 놓았던 검은 승용차에 강제로 태웠다.
채영이 끌려가면서 부르짖는 “지섭씨!”하는 외마디 소리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채영!”하는 지섭의 피를 토하는 외침이 밤하늘에 메아리졌다.
싱가포르 빅토리아 병원 응급실.
“채영. 채영이. 어디 갔어.”
지섭이 무의식중에 헛소리를 하며 허공중에 팔을 휘둘렀다. 몸을 일으키려다 입을 딱 벌렸다. 옆구리에 타는 듯 한 통증을 느꼈다. 목이 마르고 왼팔과 오른 쪽 다리도 아팠다. 눈을 번쩍 떴다. 흰 천정이 보였다. 여기가 어딘가. 차츰 의식이 돌아오며 주위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병원이었다.
‘아, 그렇지. 채영씨가 끌려갔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북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누워있으면 안되지.’
지섭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간호사가 놀라 달려왔다.
“아, 안돼요. 아직 일어나면 안돼요.”
간호사들이 지섭이 몸을 찍어 눌렀다. 지섭이 힘없이 몸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때 지섭의 머리에 번개 같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진영 형, 그리고 아나스타샤! 그는 간호사에게 벗어놓은 양복상의 호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말렸으나 신문기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긴급연락 사항이라고 말했다.
“아니, 너 민채영씨와 만나다 북한 요원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많이 다쳤니”
지섭의 전화를 받은 진영이 놀라 소리쳤다.
“형, 나보다 채영씨가 큰 일 났어요. 그 자들한테 끌려갔는데 북한에 가면 호된 보복을 당하겠지. 어떻게 해요.”
“그게 큰 문젠데... 거기 싱가포르 지사에 연락했지?”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여기 병원에서 신분증을 뒤져 연락했대요. 좀 있으면 지사 사람들이 올 거에요.”
“이건 대한민국 언론인이 북한여자를 취재하다 테러를 당한거야. 중대한 사건이지. 본사하고 의논해서 회사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해.”
“일단 다른 언론에는 새 나가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비밀로 해야지. 근데 거기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면 다른 언론에 새나갈 염려도 있다.”
“경찰에 비밀로 해달라고 지사차원에서 부탁할게요. 근데 형. 아나스타샤 있잖우. 북한하고 좀 통하는 걸로 아는데 그 여자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지만 우선 급하니까 좀 부탁해서 채영씨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 줘요.”
“그래 그게 젤 급하다. 내가 즉시 알아봐 달라고 할게. 민영대 부총리 딸이니까 알 수도 있을 거야.”
“형, 채영씨가 정말 정말 걱정돼요.”
지섭이 목이 메었다. 진영도 말을 못하다가 위로했다.
“그저 자나 깨나 그 여자생각... 너무 걱정마라. 민영대 딸 정도면 북쪽에서도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는 못한다.”
“그럴까. 형.”
“그래. 그리고 아나스타샤 한테도 인맥을 총동원해서 채영씨를 보호해 달라고 할게.”
잠시 후 대한신문 싱가포르 지사장을 비롯해 기자들이 응급실로 들이닥쳤다.
“많이 다쳤나 본데, 북한 요원들이 습격한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민채영씨를 끌고 갔다며. 어떻게 냄새를 맡았지?”
“평소에 민채영씨를 밀착 감시하고 있는 보위부 요원이 있어요. 그 자가 미행했나 봐요.”
“우리 작전에 차질이 생겨 큰일이네. 민채영씨도 큰 고초를 겪을 거고...”
지사장이 걱정했다. 지섭이 민영대 가족 귀순문제로 채영과 마지막 협상을 하기 위해 만나고 있는 것으로 회사에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제 실숩니다. 죄송합니다.”
“그들 국가조직을 개인 혼자 당할 수 있나. 우리도 좀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해 작전을 펼 걸 그랬어.”
“그러면 민채영씨가 오히려 움츠러들어 피했을 겁니다.”
서울의 대한신문 편집국.
“북한이 박지섭 특파원과 민채영의 접촉 사실을 냄새 맡고 두 사람을 습격했으면 백두산 작전이 변경 되는 거 아닌가?”
강 국장이 회의실에서 편집국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민채영이 백두산 작전을 알고 있는지 심문하겠죠. 그 여자가 쉽게는 불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정치부장이 말했다.
“북으로 연행된 민채영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볼 채널이 있나요?”
“통일부 쪽으로 알아볼 수는 있지만, 일단 우리 신문사 계획이 대외비니까 취재하는데 한계가 있을 겁니다.”
다른 부장이 말했다.
“민영대씨가 저명인사니까 그 딸의 신변에 관한 거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북한이 한국 언론에서 백두산 작전에 대해 냄새를 맡았다는 걸 알면 백두산 작전도 다소 변화가 있겠죠.”
“모스크바 이진영 특파원을 통해 아나스타샤인가 하는 여자에게 알아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여자가 그 정도로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민채영이 우리에게 협조하려다 북에 끌려갔으니까 그 여자의 신변에 대한 걸 잘 알아보고 편집국 취재진을 동원해 북한 사정을 취재해 봅시다. 아직까지는 대외비 작전이니까 조용한 가운데 신속하게 움직입시다.”
강인태 편집국장이 결론지었다.
싱가포르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채영을 납치한 승용차를 추격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지섭을 우선 응급실로 옮긴 후 한국 언론인 피습사건에 관한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단서도 잡지 못했다. 현지 최대신문인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 사건을 삼단 기사로 보도했다.
은경은 분하고 비참한 심경으로 공원을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괴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열대도시의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하필 북한여자를... 고도의 스파이 전술일 거야. 그 여자가 이중간첩인 줄도 모르고 빠져 들어간 거지. 만에 하나 스파이가 아니라도 서로 습관과 정서의 차이가 심하고 체제의 벽이 높은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거야. 오빠의 일시적인 감정이야’
그녀는 외출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이건 실정법 위반이야. 어떻게 남북한 남녀가 사사로이 만날 수 있어. 아버지께 말씀드릴까. 그러면 법적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은경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해졌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남자가 북한여자를 만난다고 어떻게 법으로 막아. 오빠 맘이 문제야. 그 여자에게 환멸을 느끼게 해야 해. 관습과 정서의 벽을 넘을 수는 없어. 그나저나 그 여자 어떻게 생겼을까. 뭐가 오빠를 사로잡은 거지.’
그녀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은경은 특집기사를 취재할 의욕이 나지 않았으나 그냥 귀국할 수도 없어 다음 날 취재를 대강 마무리 했다. 호텔로 돌아온 은경은 객실로 올라가서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데 오빤 전화도 없어.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니. 넌 자존심도 없니.”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섭이었다.
‘받을까, 말까.’
그녀는 한참 망서렸다. 전화는 계속 울려댔다.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오빠, 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어?”
“은경아, 그렇게 가버리고 맘에 걸려서...”
“걸릴 거 뭐 있어. 나 없으면 그 여자하고 잘됐지.”
“너 간 후에 일이 좀 있었다.”
“일이 있다니?”
“북한 요원들이 미행해서 우리들을 습격했어.”
“뭐? 오빠. 그럼 지금 어떻게 됐어? 어딘데?”
“응, 채영씨는 그 자들에게 납치돼 끌려가고 난 그 자들과 싸우다 좀 다쳤어. 지금 병원에 있다.”
“어머머, 오빠. 많이 다친 거야?”
“응, 뭐 조금.”
은경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지체하다 택시를 타고 지섭이 가르쳐준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 건 잘된 거야. 그 여자가 북한 요원들에게 끌려갔다면 북에 가서 혹독하게 당하겠지. 다신 못나올 거야. 차라리 잘 됐어. 그 여자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됐어.“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이 때맞추어 이렇게 잘 풀릴 수 있을까.
은경이 병원에 도착해 병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지섭은 팔과 옆구리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급히 다가가 지섭의 부상당한 팔을 어루만졌다. 그가 눈을 떴다.
“어머 어머 오빠, 많이 다쳤네. 옆구리를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전신에 상처투성이 아냐. 어떻게 해.”
그녀는 막상 지섭을 보더니 원망을 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울상을 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모처럼 만에 해외 출장 왔는데 이런 꼴만 보이고 면목 없다.”
“무슨 소리야. 빨리 치료해서 나아야지. 그런데 이 상처 칼로 찔린 거야?”
“그 자들이 칼을 들었더라.”
“북한 요원들이 몇 명이나 됐는데?”
“세 명이야.”
“그 사람들 대단한 전문가들일 텐데. 오빠 혼자서 이렇게 당했구나. 얼마나 치료해야 돼?”
“한 달 정도는 있어야 한데나 봐.”
“여기 오빠 혼자 있잖아. 누가 돌 봐 주고 식사는 어떻게 해.”
그녀는 다시금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밥은 혼자 먹을 수 있고 화장실 출입도 하니까.”
“이런 몸으로 어떻게 밥 먹고 화장실 출입은 해. 세수는 어떻게 하고... 가만있어 봐. 내가 취재한 기사는 일단 송고하고 혼자 여기 사는 친척오빠가 아파서 사정이 급하다고 회사에 얘기해서 휴가를 얻을까?”
“은경아, 그러지 마, 정말.”
지섭의 말에 은경은 병실 창 가로 가서 잠시 생각했다. 공원에서 뛰쳐나올 때를 생각하면 괘씸했다. 그러나 그 민채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이제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시원했다. 그래 그 여자가 없으니 오빠는 내거야.
은경은 다시 지섭의 침대로 와서 곁에 앉았다. 지섭이 피곤한데 호텔로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한참 조잘거리다 피곤한지 침대모서리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았다.
무섭게 달리는 승용차 안.
수갑이 채워진 채영의 양 옆에는 두 사내가 앉았다. 괴한들은 그제 서야 얼굴의 복면을 벗었다. 뒷자리 가운데 앉은 채영의 오른 쪽 사내는 지덕만이었다. 그녀는 그가 지덕만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지덕만은 기회가 왔다는 듯 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왔다. 채영은 가능한 몸을 움추려 그를 피하려 했으나 좌석이 비좁아 어쩔 수 없었다. 채영의 왼쪽에는 날렵한 칼잡이가 앉았고 건장한 사내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지 동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는 겁네까?”
채영이 항의했다.
“민채영 동무가 더 잘 알거 아니오? 민 동무가 지금까지 한 짓이 얼마나 무서운 국가반역 범죄인 줄 아시오?”
“근거도 없이 국가반역 운운 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알아 봤시오. 아까 그 남자 남조선 기자 아니오? 우리 공화국 인민이 남조선 사람과 사사로이 만나는 것도 안 되는데 남조선 기자라니. 그 사람은 기자를 가장한 남조선 첩자요. 국가반역에 간첩죄요.”
지덕만이 겁을 주려고 협박했다.
“간첩이라고요? 지 동무는 소설도 잘 쓰는군요.”
“소설이 아니면 어디 한번 해명해 보라우요.”
“그 사람은 내가 중국어 학원에 다닐 때 한 반에서 우연히 만난 남조선 상사 직원이요. 무슨 근거로 그가 첩자라고 하는 거요.”
“그런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국가보위부에 가서 해명하든지 마음대로 해보라우요.”
채영을 미행해서 그를 끌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물론 지덕만이었다. 비록 지섭은 놓쳤지만 그녀를 끌고 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흥, 네가 그동안 도도한 척 하고 나를 무시하고 멸시했지만 이번에 두고 봐라. 아버지 공을 믿고 까불더니 내 손아귀에 잘 걸렸다. 네 운명은 내 보고서에 달려있어 너는 이제 내 거야. 흥.’
지덕만은 속으로 웃었다. 이번 사건은 그의 보고서 내용에 따라 상당한 중죄에 처해 질 수도 있고 그 보다 덜한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이월 십오일. 평양공항.
채영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말자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에게 연행되었다. 그녀는 보위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민채영, 너 아버지 위세를 믿고 함부로 남조선 남자를 만나서 뭐한 거야?”
저승사자 같은 심문관이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남자는 중국어 학원에서 우연히 만난 거 뿐입네다.”
“공부하라고 비싼 돈 들이고 학원에 보냈더니 남조선 남자를 만나? 그 것도 사사로이...”
“사사롭게 만난 잘못은 인정합네다. 그렇지만 그 것 뿐입네다.”
“그 남자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만나고 다니나.”
“남조선 무역상사 직원이라는 것밖에 모릅네다.”
“네가 뭘 했는지 따끔한 맛을 보면 곧 알게 될 거이다.”
채영은 주위에 널려 있는 무시무시한 고문도구를 보면서 몸서리 쳤다.
이제 한밤중. 끈질기게 계속되던 심문도 잠시 중단되었다. 그녀는 어두운 방에 갇혀 모포를 덮고 누워 있었다. 천정 쪽에 있는 손바닥 만 한 창으로부터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아직 매서운 늦겨울 추위가 몸을 얼려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 그 얼굴은 변함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지섭씨. 그녀는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 보았다. 채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차가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 모든 것을 단념하자. 스물여섯 살의 인생. 비록 남조선 남자지만 그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모든 것을 바친 남자. 그가 있는 한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어. 난 행복하게 죽을 거야. 그러나, 그러나 나 때문에 곤경에 처할 아버지와 수영은 어떻게 하나.’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채영은 언제까지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영대 부총리 집.
그는 국가안전보위부의 호출명령을 받았다. 보위부로 가기 전 급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상국이 성님, 저 영대야요. 지금 보위부 호출을 받고 나가기 전에 전화 드리는 거야요.”
“채영이 일 때문에 그러디? 내가 영일이와 상의해서 여러 군데 손을 쓸 거이니까 너무 걱정 말라우.”
“에미나이 갸가 그리 경솔한 아이가 아닌데 기어이 일을 저질렀는지 믿을 수 없습네다. 제가 보위부 가면 자유롭지 못 할 테니 성님께서 경위를 좀 자세히 알아봐 주시라요.”
“그래, 알았어. 채영이가 그럴 아이가 아니디.”
민 박사는 채영이 남조선 기자와 만나다 발각되어 긴급 체포되어 연행돼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했다.
‘그 아이를 좀 더 단속했어야 했는데 내 실수야. 내 말대로 자숙할 줄 알았지. 남조선 기자를 만날 줄이야...“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국가안전보위부 조사실.
민 박사에 대한 조사관의 추상같은 추궁이 벌어졌다.
“아무리 민영대 동무라 해도 딸의 행동은 용서될 수 없수다. 딸이 남조선 기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디요?”
“전혀 몰랐습네다. 평소 당성이 강하고 모범적인 갸가 그런 줄 몰랐디요.”
“상대는 남조선 기자란 말이요.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우리 공화국의 어드러한 기밀을 넘겨줬는지 곧 밝혀질 거요. 지금 동무가 알고 있는 기밀만도 어마어마한 거 아니요. 딸이 국가반역죄나 간첩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있갔소. 당장 총살 감이디.”
민 박사가 바짝 긴장했다.
“그 아이는 상대가 기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수다. 중국어 학원에서 그냥 우연히 남조선 기업체에 다니는 청년을 만나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이외다. 간첩, 반역죄라뇨. 얼토당토않소.”
“말 몇 마디 나눈 게 아니지 않소. 남조선 남자를 사사로이 만나 공원에 가서 연애질이나 하고... 그것만 갖고도 위원장님께서 결심하시면 조사고 뭐고 없이 총살이디. 싱가포르 대사관으로 보낸 것만 해도 영광스런 일인데, 딸 관리를 잘못한 동무 책임이 크오.”
민 박사 부녀가 한 건물에서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 시간, 이상국 당 정치국 위원과 한영일 비서국 비서는 김백주 정치국 상무위원을 급히 면담했다. 이들에게 감시요원이 따라 붙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민영대 딸 사건을 빌미로 반대파들이 이들을 압박할 것이다.
“영대 딸이 고약하게 걸렸는데 구해낼 방법이 없겠습네까?”
이상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백주에게 말했다.
“이번에 워낙 큰 실수를 했구만. 외국공관에선 특히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데... 일단 남조선 청년을 우연히 만난 것으로 하고 기밀누설이니 간첩죄니 하는 소리를 못하게 막아야 할 기야. 그런데 채영이 갸가 그 남조선 기자와 연애하는 거 아닌가?”
“그건 어떻든 그냥 우연히 만난 것으로 해야 중벌을 면할 겁니다.”
한상일이 덧붙였다.
“대남 강경파들이 이번 사건을 빌미로 영대와 가까운 우리를 압박하려 들 기야. 상국이 아우가 만일의 유사시를 대비해서 일단 배동명 대장과 박기웅 대장을 만나 보게. 나도 정치국에서 영대를 옹호하게 손을 쓸 테니까. 영일이도 비서국에서 여론조성을 하라우. 그런데 문제는 위원장의 의중이야.”
세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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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녀의 마음은 절망 속에서도 꽃처럼 흔들렸다.. 죽은 후에도 사랑할 거야…"
채영과 지섭이 그들의 城이 무너지고 합일 되는 동안,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방해 공작의 나사가 조여진다.
남한 핵 공격이라는 무시무시한 음모 속으로 들어가는 채영과 지섭의 순애,
그들의 눈 먼 사랑은 존중 될까.
세상은 사랑에 너그럽지 않다.
하늘의 도우심을 빌어야 하나…채영, 지섭을 위해 제발 다치지마!
진달래 꽃 필때면 ....얼마 안 남았는데... 채영, 지섭이 만나게 될가?
소설도 재미 있지만 임수자씨 댓글이 더 재미있내요. 스포츠 중계 해설자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