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를 송악산 트레킹과 휴식으로 보내고 사실상의 도보 종주 첫 시작을 오늘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밤새 민박집 창밖의 파도치는 소리가 마음을 착잡하게 하더니 아침 5시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본다. 바람은 거세고 바다는 어제와 다름없이 성난 듯 파도치고 있다.
여기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07시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유람선 선착장에 알아보니 오늘도 배가 뜨기는 어려울 거라는 대답. 민박집 주인에게 혹시라도 오후에 파도가 가라앉아 배가 뜨게 되면 즉시 연락을 좀 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우리는 등산화 끈 조여매고 배낭을 메고 08:20에 길을 나섰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마라도는 뒤로 미루고 우선 도보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에겐 역사적인 순간이다. 식당 주인 여자 말로는,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날씨 때문에 마라도를 포기하고 송악산에 올라 마라도를 바라보며 발대식을 하고 떠난다고 한다. 우리 3인방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배만 뜨면 즉시 건너가기로 하였다.
첫 출발부터 환상적인 도보 길이 이어진다. 앞쪽으로는 머리에 구름을 인 산방산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갓길은 자전거 도로로 꾸며져 있어 걷기가 한결 안심이다. 길옆으로는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서 지루하지가 않다.
사계리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흰둥이 한 마리가 앞장을 선다. 마치 우리에게 길을 인도하듯이 가다가 뒤돌아보기를 반복하더니 산방산을 지나서야 용머리 해안 쪽으로 사라진다. 봉수대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아스팔트길에 자동차 바퀴에 치어 납작해져 죽어버린 뱀 한 마리. 차도를 건너다 처참하게 비명횡사를 한 모양이다.
우리는 1시간 걷고 10분 휴식을 취했다. 길가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감귤 밭이 이어진다. 길섶에는 철쭉이랑 온갖 꽃들이 반긴다.
길가에 농장에서 운영하는 한라봉 직판장이 보이기에 들어갔다. 한라봉 3개를 4천원 주고 사서 먹었는데 싱싱해서 확실히 맛이 달랐다. C 얘기로는 이정도면 서울 백화점에서는 6개에 3만원한다고 하니 우린 주인의 배려로 싸게 사먹는 모양이다. K가 우리 배낭에 단 국토종주 페넌트를 보여주며 가게 여인들에게 작업을 건 덕분이다. 떠날 때는 생수까지 얻어 마셨다.
이번 종주길에는 3인방 각자의 역할 분담이 분명하게 이뤄지고 있다. 식사를 예로 들면, 일단 배가 고파오면 무얼 먹고 싶은지 두 사람 의중을 간파해서 식당을 찾아 들어가는 것 까지가 '기획담당'인 내 소관이라면, 다음은 '노상총무'를 자처하는 K가 나설 차례. 주인 여자보고 지금 도보 여행 중이라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지 못하니 경노우대 하는 셈 치고 밥값을 좀 깎아줄 수 없겠느냐, 모자라는 반찬을 좀 더 달라거나 커피도 뽑아달라고 해서 얻어 마시고, 나올때는 생수까지 물병에
가득 채워서 나온다. 마지막에 '재무담당'인 C는 밥값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꼬박꼬박 챙긴 후 꼼꼼하게 기록을 한다.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하니 15:40. 이제 다리가 뻐근해 온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우산을 받아야 할 정도로 오기 시작한다. 무릎 관절과 장딴지 근육이 당기고 발가락도 아파온다. 오늘 도보일정을 이쯤해서 마쳐야 할 모양이다.
비는 내리는데, 서귀포 천지연 폭포 근처에서 적당한 숙소를 물색하다가, 첫번째 들렸던 곳은 세 사람이 잠자기에는 방이 너무 협소해 보여 나와 버리고, 두 번째로 찾아 들어간 곳이 '천호각모텔'이다. 천호각에 들어간 것은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시각은 17:10.
짐을 풀고 뜨거운 물에 샤워도 하고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몸을 담그기도 한다. 옷을 갈아입고 빨래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K의 실력이 또 나온다. 안주인에게 어떻게 부탁을 했는지 우리 빨래를 모두 모아가지고 가더니 맡기고 온다.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숙소를 나와 뻐근한 다리를 질질 끌고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이화삼계탕' 이라는 간판이 보이기에 ‘이화’ 이름에 이끌려 들어가서 한방삼계탕으로 오늘 하루 소진한 체력을 보충했다.
저녁을 먹고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방으로 돌아오니 그새 탈수까지 마친 빨래가 기다리고 있다. 마음씨 좋은 안주인 덕분이다. 방안에 임시 빨랫줄을 치고 널어놓는다.
첫날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두 군데나 생겼다. 바늘로 물집을 터트리고 옛날에 배운 대로 삼계탕 집에서 얻어온 밥풀을 이겨 붙인다.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해 놓으면 내일 아침이면 물집이 바싹 말라붙어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에 내일도 제주도에는 호우주위보가 내렸는데 걱정이다.
▶오늘 걸은 거리 : 32km(9시간)
▶코스 : 송악산-중문-서귀포
<식사>
아침 : 된장찌개(송악산)
점심 : 흑도야지불고기(천제연)
저녁 : 삼계탕(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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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 댓글>
<캡화백>한 달간을 총무 노릇해야 하니 집에 가면 가족들이 나를 몰라 볼 것 같다. 왜냐고? 경비 절약차 아양을 떨며 구걸하느라 그나마 있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3인방을 위해 몸 바쳐야지? 06.05.09 22:36
<캡화백맏딸>하하하~ 아빠~ 아주머니들한테 너무 인기가 좋으신 거 아니세요? 엄마가 아시면 살짝 삐치실 것 같은데요? 이거이거.. 엄마께 말씀 드릴까요~ 말까요~? ^^ 06.05.10 13:07
<whitekimkj>날씨 땀시 일정은 바뀌어도 대신 아름다운 제주도를 걸으시게 됐네요 다 뜻이 있는 거 같습니다. 너무 힘들이지 말고.. 안전제일 입니다 힘찬 박수 보냅니다 안녕^^ 06.05.09 23:51
<장화백>워낙 상냥하고 애교가 있으시니 앞으로 종주 마칠 때 까지 그 실력 더더욱 발휘하시길...정말 상상도 못할 머언 거리 32Km 라니... 발인들 성할 리 있겠는지요? 불쌍한 3인방의 다리여! 굳세어라. 06.05.09 23:54
<만보>물집의 훈장~ 첫날의 일기부터 감동입니다. 꼭 만보도 함께 걷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06.05.10 04:56
<신현식>정말 환상산적인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여행기 한줄 한줄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I hope you have a good trip! 06.05.10 09:03
<짬송>사진과 함께 보니 마치 곁에 계신 듯 반갑습니다. 아픈 다리도 얼렁 다져져 먼 길 걷는 데 전혀 불편하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비가 내리는 오늘은 또 다른 낭만과 환상적인 앞길이 놓여지겠지요, 힘내세요, 힘!! 06.05.10 09:26
<나그네>행두형님! 다리조심. 깹이형님! 머리카락 아끼시고, 목사님! 할렐루야!!! 매일 시작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출발하시기를... 06.05.10 09:31
<조설모딸>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 두 손 남쪽으로 뻗고 안마동작 들어갑니다. 3men 아버지들 힘내세요. 다음엔 물집 잡힌 발 사진도 한컷 올려주세요. ^^ 06.05.10 12:46
<조설모>안마 잘 받았다. 참 시원하다. 다행히 아직 물집은 없구나. 계속 그래야 하는데. 고맙다. 06.05.11 07:19
<wanju42>위풍당당 3인방 힘내시고, 발바닥의 물집 잘 아물어 차질 없는 걷기가 되기를 빕니다. 06.05.10 23:26
<벗꽃>대단하십니다 06.06.25 17:03
첫댓글 위원장님 발솜씨?도 대단하시지만, 글솜씨 또한 발솜씨 못지않습니다그려~~~ 숨겨놓았던 솜씨가 이제서야 빛을 보다니,,,, 마치 내가 함께 걷고 있는 듯한착각을 하게 합니다. 발병은 나지 않았지만, 정말 실감나는 이야기, 다음 이야기가기다려 집니다.
글솜씨 라니, 당치않습니다. 매일매일 도보 마치면 시골 PC방 찾아 카페에 글 올리다 보니 '발로 쓴 종주기'랄까....글에 자신이 없어 거의 사진으로 치장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