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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으로 대표되는 고조선의 기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숫자가 2333이다. 이것은 단기(檀紀)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숫자이다. 금년이 서기 2020년이니 단기로 하면 4353년이 되겠다. 우리나라의 역사서는 고조선의 기원을 BC2333년이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기원을 BC24세기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삼국유사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古記》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은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그리고 일연은 주석에서 「요 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즉위 50년이 되는 해는 정사년이 된다. 경인년이 아니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는 자신의 견해까지 달았다.
여기서 무진년은 BC2333년이고 경인년은 BC2311년이며 정사년은 BC2284년이다. 단군조선의 기원이 경인년이 맞다면 건국 연도는 BC2311년이 된다.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해가 맞다고 하면 건국 연도는 정사년인 BC2284년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는 BC2311년이 되거나 BC2284년이 된다. 일연 자신도 주석을 통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삼국유사》보다 5년 정도 늦게 출간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기원을 어떻게 보았을까? 이승휴는 구체적인 연도는 밝히지 않은 채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요 임금 원년은 무진년이 아니고 갑진년이어서 BC2357년이 된다. 무진년이 BC2333년이 맞지만 요 임금의 원년이 아니기 때문에 이승휴 역시 단군조선의 기원에 대해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합당한 근거를 기준으로 단군조선의 기원이 BC2333년이라는 것을 누가 주장한 것인가? 조선 초기인 1485년 서거정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통감》에서 단군조선의 기원을 BC2333년이라고 규정하였다. 서거정에 의하면《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 임금과 더불어 무진년 (BC2333)에 함께 즉위하였다 는 기록을 근거로 단군조선의 기원을 BC2333년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서거정은 요 임금이 실제로 즉위한 해가 무진년 (BC2333)이 아니고 갑진년 (BC2357)이라고 보았다. 서거정은 《古紀》의 내용이 실수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단군이 무진년에 즉위한 것이 맞다면 요 임금의 즉위 25 주년이 되는 무진년 (BC2333)에 단군이 즉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서거정이 요 임금의 즉위 연도를 갑진년 (BC2357)으로 본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송(宋)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은 요임금이 실존했다고 믿고 요임금이 즉위한 해를 BC2357년으로 계산했다. 후한(後漢) 말에 태어난 황보밀(皇甫謐)도 《제왕세기(帝王世紀)》라는 책에서 요임금이 갑진년인 BC2357년에 즉위하였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단군왕검의 기원 출처와 관련하여 일연의 삼국유사가 《古記》에 근거를 두었다면 서거정의 동국통감은 《古紀》에 근거를 두었다. 둘 다 《고기》인데 한자가 다르다. 불행하게도 《古記》와 《古紀》는 오늘날 현존하지 않는다. BC2333년이란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가 삼국유사와 연계되어 오늘날 회자되는 이유는 삼국유사가 BC2333년이란 연대를 구체적으로 언급해서가 아니고 BC2333년이라는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BC2333년이라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아닌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그 근거를 둔다.
위만조선의 기원은 위만이 準왕을 축출하고 권좌에 오르는 BC194년이며 위만조선은 BC108년에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이것과 관련해 재야사학계나 주류사학계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시기는 BC2333년에서 BC194년까지의 2000여 년이 넘는 긴 기간이다. 기간이 이처럼 길다 보니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2개의 왕조로 구분해서 접근하는 게 일반적인 학계의 동향이다.
대표적인 접근법이 단군조선과 후조선 그리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다. 전자는 기자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조선의 통치자로 군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 계열의 새로운 왕조인 후조선이 단군조선을 승계했다는 입장이다. 후자는 기자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조선의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승계하였다는 입장이다.
전자의 시각은 재야사학 내지는 민족사학 진영에서 주로 주장되는 내용이고 후자의 시각은 모화사상, 사대주의, 소중화 사상에 기반을 두어 역사가 자못 깊다. 13세기 후반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기자조선 내용이 강화된다. 성리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기자가 예찬되고 숭상되기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의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이 부인된다. 그 이유는 기자조선을 인정할 경우 고조선의 역사가 일본 역사의 기원이라고 주장되는 BC600~700년보다 앞서게 되기 때문이다.
BC2333년에서 BC194년까지의 기간을 두고 고조선을 3개의 왕조로 구분한 학설은 아직 없다. 그 이유는 그 시대를 조명할 역사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고조선을 단군조선과 후조선 혹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개의 왕조로만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위만조선을 더하면 고조선은 3조선 왕조가 된다.
한편 단군조선이 중간 왕조라 할 수 있는 후조선이나 기자조선을 경유 하지 않고 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간다는 학설(BC2333 ~ BC194)도 있고 단군조선(BC2333 ~ AD ?)과 위만조선(BC194~BC108)이 시기적으로 공존했다는 윤내현 교수의 단군-위만 병존설 도 있다. 단군-위만 병존설이 있다면 단군-기자 병존설도 가능하지 않은가? 아직까지는 단군-기자 병존설 관련 학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겼다. 이 부분은 후술하는 왕조의 구분 시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이제 국사 교과서 편찬자인 주류사학의 입장은 과연 어떠한지 살펴보자. BC2333년과 관련된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규정한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고 추정되는 BC10세기 경에는 국가로서의 단군조선이 태동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교과서에 이런 내용을 명확히 기록하지는 않고 단지 고조선이라고 표기할 뿐이다. 교과서는 위만에 의해 축출된 준왕이 후조선의 마지막 왕인지 아니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준왕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위만조선 전에 고조선에 단군조선이라는 하나의 왕조만 있었는지 아니면 단군조선과 후조선 내지는 기자조선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주류사학은 함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고조선의 기원을 BC2333년으로 보는 기존 입장이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입장은 고조선의 기원을 BC3000년경으로 본다. 박경순이란 역사저술가가 고조선 관련 북한 학계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주장도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을 단군조선(전조선), 후조선, 만조선 이렇게 3 조선으로 분류한다.
단군조선은 BC3000년 경에 생겨 BC1500년 경에 멸망하며 후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BC194년까지 존재하고 위만조선으로 알려진 만조선이 후조선을 계승하여 한 무제에게 멸망하는 BC108년까지 존재한다. 최근 대동강 북쪽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과 고대 성곽들이 기원전 30세기의 유적으로 추정됨에 따라 단군조선의 첫 중심지는 평안도 평양이 맞으며 단군조선의 기원이 BC2333년이 아닌 BC3000년 경으로 소급이 가능해졌다.
고조선의 기원과 관련한 단재 신채호의 견해를 살펴보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말하기를 “기존 역사서에 의하면 단군 원년인 무진년이 요 임금 25년이라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BC841년 이후에야 연대를 제대로 기록하게 되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단군 원년을 뜻하는 요 임금 25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고 아사달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하니 고구려 건국 이전 2000년이 단군왕검의 원년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 기원을 BC190년 전후 수십 년이라고 본다.” 신채호는 고조선의 건국 원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BC2190년 전후 수십 년으로 추정하였다.
이제 고조선 왕조의 구분 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단군조선과 다음 왕조인 후조선 내지는 기자조선의 구분 시점은 언제인가? 만약 중간 왕조가 기자조선이라면 답은 바로 나온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니 기자가 바로 동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마침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가 조선의 통치자가 되어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 시기가 BC1122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의하면 BC1046년에 은(=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다고 하니 BC1046년이 기자조선의 기원이 된다. BC2333년 ~ BC1046년은 단군조선의 기간이고 BC1046년 ~ BC194년은 기자조선의 기간이 된다. 그리고 위만에게 축출되는 準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고 하니 내용이 얼추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후조선이다. 단군조선의 다음 왕조가 후조선일 경우 구분 시점이 언제가 되는가? 후조선의 실체도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기원을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BC1500년경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BC1285년경, BC800년경, BC425년경 무척 다양하다. 연구자 입장에서 본인의 학설이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이 사료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학계의 동향은 후조선 기원의 근거가 되는 1차 사료를 《삼국유사》의 내용에서 찾아낸다. 그 이유는 단군조선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사료는 《삼국유사》가 가장 앞서며 그 이전에 편찬된 중국의 사서는 고조선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1282년경에 나온 《삼국유사》와 148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의 내용을 살펴보자
《삼국유사》에는 후조선의 건국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어떠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을까? 《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름하여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여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한편《동국통감》에서도 후조선의 건국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동국통감》에 단군의 치세가 1048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이란 우리가 시조로 여기는 단군이란 인물이 아니다. 어떻게 단군이란 사람이 나라를 1500년 다스리고 1908세에 산신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단군왕검은 역사가 아닌 신화의 내용에 갇혀있게 된다. 여기서 단군왕검이란 단군조선이란 나라를 대대로 통치해 온 역대 왕들을 뜻한다. 조선왕조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태조 이성계부터 순종까지의 왕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니 단군조선은 BC2333년에서 BC833년까지 존속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서 1500년이란 막연한 숫자가 문제 될 수 있는데 뒤에 나오는 1908 이란 구체적인 숫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00이란 숫자도 1499나 1501, 1502가 아닌 1500이란 구체적인 숫자라고 판단된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이란 BC1122년을 뜻하는데 이는 기자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병존 가능성을 열어둔 아주 중요한 글귀이다. 글 말미에 단군왕검께서 1908세에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단군조선이란 왕조가 1908년 만에 망했다는 뜻이므로 단군조선은 BC425년에 망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김종서 박사는 단군조선의 멸망을 BC425년으로 보았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병존 가능성을 다룬 《삼국유사》에 수록된《古記》내용을 살펴보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 와 관련하여 기자는 기묘년인 BC1122년에 조선의 왕이 되고 단군은 장당경으로 낙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古記》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상상도 가능해진다.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단군조선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되 일부 영역인 장당경을 단군의 통치지역으로 남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 모두를 차지하게 되니 단군은 고조선 영역 밖에 있는 장당경이란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기자와 단군은 시기적으로 같은 시기에 서로 이웃에 있으면서 통치자로 군림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시기적으로 병존하였음을 의미하며 기자조선이 등장함으로써 단군조선이 멸망했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새로운 주장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상상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된 억측에 불과할 수 있다. 《古記》에서 전하는 통상적 의미는 기자가 단군조선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고 단군으로 하여금 그 영역 내에 있는 장당경이란 곳에 이주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BC1122년, BC833년과 BC425년이란 사료적 근거가 마련된다. 1908세에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문맥상으로 BC425년에 단군조선이 망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멸망 이외에 다른 의미가 내포될 수 있다. 이를테면 정변으로 통치자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이 대거 교체되었으나 왕조는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이다. 삼국유사의 자료를 근거로 BC833년과 BC425년은 단군조선이 망하고 후조선이 건립되는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동국통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군조선의 멸망을 암시하는 해가 BC1285년(2333-1048)이다.
학계에서 이단으로 통하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고조선 관련 내용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에 나온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왕검에 의해 BC2333년에 조선이 건국하며 BC1285년에 색불루 단군에 의해 제2왕조가 성립한다. BC425년에 구물 단군이 등장해 국명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며 대부여는 BC238년에 망하게 된다. 6년 후 BC232년에 해모수가 등장하여 국호를 대부여에서 북부여로 바꾼다. BC58년에 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에 오르고 BC37년에 국명을 고구려로 바꾼다. BC1285년은 동국통감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BC425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여서 《환단고기》내용이 그럴 듯 해 보인다.
《환단고기》에서는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단군왕검 시절부터 나라를 3등 분하여 만주 일대인 진조선은 단군이 직접통치하고 막조선인 한반도 지역과 번조선인 지금의 하북성 일대는 副단군을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 이것을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한다. 진조선의 단군 입장에서 보면 막조선과 번조선은 진조선의 커다란 제후국인 셈이다. BC323년에 번조선에 기자 후손인 기후란 인물이 정변을 일으켜 단군의 윤허를 받아 왕에 오르고 그 지위가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준왕)에게까지 이어진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100여 년 후 위만이라는 사람이 연나라에서 넘어와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을 찬탈하여 그곳에 위만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게 된다. 한나라(前漢)의 지원을 받은 위만조선이 번조선을 모두 점령하자 이제는 진조선의 영역으로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단군조선으로 대표되는 진조선 입장에서 위만조선은 중국의 外臣으로 한나라의 괴뢰 정권이었던 것이다. 위만의 번조선 찬탈 부분은 윤내현 교수의 학설과 비슷하다. 번조선을 기자국으로 바꾸고 진조선을 고조선으로 바꾸면 윤내현 교수의 견해와 같아지게 된다.
국명을 기준으로 보자면 《환단고기》는 고조선을 시기적으로 3개의 왕조로 구분한다. 조선(BC2333 ~ BC425), 대부여(BC425 ~ BC238), 북부여(BC232 ~ BC37) 그리고 조선의 적통이 고구려로 계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