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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거인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거인
6월 제14기 백두대간 5회차 | |
산 행 지 |
(백운산-영취산 ) 토요당일 |
종주코스 |
중재-중고개재-백운산-영취산 산행5시간 (무룡고개로 하산) |
출발날짜 |
6월26일 토요일 당일 |
출발장소 |
06::30 동대문 운동장역 8번출구 |
경 유 지 |
07:00 양재역 1번출구 축협앞 07:10 죽전 07:20 신갈 |
회 비 |
30,000원 (산행보험은 개인적으로 가입해 주세요) |
연 락 처 |
02-736-2929 / 이구대장 010-5282-2929 |
준 비 물 |
식수, 간식, 의류, 도시락, 랜턴 |
중재-무룡고개 구간
백두대간 종주 제 5구간 안내
- 중재 - 백운산 - 영취산 - 무령고개
(도상거리 약 16.5km)
중재에서 출발하여 약 40분 정도 진행하면 중고개재가 나오고. 또다시 백운산까지 오르막을 2시간 가량 운행한다. 두 개의 묘지가 있는 봉우리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헬기장 건너에 백운산 정상 표지목이 있다.(묘지 오른쪽으로 가지 말 것) 백운산 정상에 오르면 왼쪽 방향의 표지기를 따라가야 하며 영취산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영취산에는 정상석과 3정맥 안내판이 있으며 영취산 정상에서 왼쪽으로 20분쯤 내려서면 무령고개가 나오면 백두대간 5구간이 끝이난다
. 북쪽 방향 약 100m아래에 간이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으며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도로 오른쪽에 샘터가 있으며 가게와 민가는 전혀 없다.
장수삼절
장수삼절의 첫째는 주논개, 둘째는 정경손, 셋째는 순의리이다. 1726년 당시 장수현감 정주석은 이 세명을 삼강행실도에 추천하는 장계를 올려 세사람 모두 삼강행실도에 게재됨으로써 '장수삼절'로 추앙하게 되었다.
진주성이 무너지자 모두 도망가는데 당시 향교지기 였던 정경손은 도망가지 않고 혼자서 향교를 지키고 있었다. 왜군이 향교에 불을 지르려 하자 정경손은 단정히 앉아 "여기는 성전이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꼭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고 외쳤다. 왜장이 그의 충성심과 기상에 반하여 "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마라 "고 하여 장수 향교가 남게 되었다. 장수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기려 1846년 향교 앞에 비를 세웠다.
1678년 봄, 장수 현감 조종면이 전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천천면 장판리를 지나게 되었다. '장척애'라는 험한 벼랑길을 지나는데 갑자기 꿩의 울음소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현감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소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본 마부는 손가락을 깨물어 꿩과 말의 그림을 바위에 그리고 '타루(墮淚)' 두자를 써놓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주인을 따라 죽은 노비의 충절이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다. 1802년 당시 현감으로 부임한 최수형이 그 자리에 타루비라는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 주었다. 타루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장수향교 대성전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장수읍 선창리에 창건되었다가, 숙종 12년(1686)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보물 제 272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수향교 대성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이다. 측면 3칸 가운데 앞쪽 1칸은 퇴칸으로 비워두었다. 이퇴칸은 일종의 전이공간(轉移空間)으로서 일상의 영역과 성역을 구분 혹은 매개하는 구실을 하며, 기능적으로는 건물에 깊이감을 자아내어 묘우(廟宇)인 대성전의 권위와 가라앉은 분위기를 유도한다. 또 주심포 양식이라고는 해도 기둥은 민흘림에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 소로, 살미첨차들이 모두 다포계 형태를 취하고 있어 고전적인 주심포 양식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주두 밑에서 기둥머리에 맞짜인 헛첨차나 초제공의 살미첨차는 끝이 위로 솟구친 앙서형인데, 끝부분보다 뿌리 부분이 훨씬 가늘어 매우 나약한 인상을 지울 길 없으며, 그 위에 연꽃을 새김질해 얹은 것도 의례적인 장식일 뿐 참신한 맛이 없다. 모두 조선 후기, 거기서도 시대가 한참 내려서는 시기의 양식이다.
칸마다 기둥머리를 서로 연결하는 평방 위에는 화반이 두 개씩 놓여 주심도리의 하중을 받는 장여를 받치고 있다. 앞뒤의 귀기둥 네 곳에는 이곳 대성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부재가 덧붙어 있다. 귀기둥의 중간에 하늘을 향해 팔을 반쯤 벌리듯 가볍게 S곡선을 그리는 부재가 덧대어져 있는데, 그 끝부분을 창방 뺄목에 결구하면서 동시에 귀공포의 첨차를 받치도록 고안되어 있다.
우리 전통건축에서 앞면의 처마와 뒷면의 그것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장수향교 대성전도 그러하여 앞면은 단면이 둥근 서까래와 네모진 덧서까래가 갖추어진 겹처마인 반면 뒷면은 서까래만 한줄로 놓인 홑처마이다.
정면의 벽면 구성은 질서와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중심선을 설정하고 보면 좌우가 딱 들어맞는 대칭을 이루면서도 가운데의 어간과 좌우 양쪽 협칸의 벽면이 서로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간은 세로로 사등분하여 가운데는 두짝 밖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좌우로는 중방과 띠장을 지른 다음 그렇게 해서 생겨난 칸칸에 널을 메움으로써 일종의 널벽을 이루었다. 양쪽 협칸 또한 세로로 사등분하여 가장 안쪽은 어간처럼 널벽을 치고 다음 칸에는 외짝 밖여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십자로 구분된 칸마다 널을 대어 널벽으로 꾸몄다. 그리고 띠살문의 궁판마다 삼태극무늬를 집어넣어 모양을 내었다. 이리하여 대성전의 앞면은 문과 창과 널벽이 어울려 규육성과 통일성 속에서도 단조로움을 벗어난 변화의 맛을 보여준다.
논개(論介?∼1593)
논개는 진주목의 관기로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이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 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이후 영조 16년 (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일명 장계) 주촌(朱村)마을이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 사당과 논개의 수명비(竪名碑)가 세워져 있다. 한편,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있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