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獻陵 과 인릉仁陵, 합쳐서 헌인릉獻仁陵 이라 불리는 이 곳을 찾은 것은 아마 2012년 늦가을이었을 것이다.
12월이 되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왕릉답사에 제한이 생기기 때문에 그 전에 한 군데라도 더 왕릉을 답사하고 싶었고,
시간을 내서 서울 안에 있어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왜그런지 쉽사리 발걸음이 가지 않았던 헌인릉을 답사하게 되었다.
서울 남쪽 끝 대모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헌릉과 인릉은 조선 초기의 왕릉(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과 조선 후기의 왕릉(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왕릉) 이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곳이다. 그리고, 더해서 길지가 좋지 않다하여 몇 번 이장移葬 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 참고로, 헌릉은 태조의 4대 조부 추존왕을 제외한다면 조선왕조 역사상 5번째로 조성된 능이고(1대 태조비 제릉齊陵, 1대 태조계비 정릉貞陵, 1대 태조 건원릉建元陵, 2대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厚陵 다음이 이 헌릉이다.), 인릉은 조선왕조 왕릉 역사에서 조선왕릉의 규범에 맞춰 지어진 왕릉 중 뒤에서 3번째다(마지막은 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睿陵, 마지막에서 두번째는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 이다.
26대 고종의 홍릉洪陵과 27대 순종의 유릉裕陵 은 대한제국의 창설 때문에 조선왕릉이 아닌
중국 황제릉의 양식에 맞춰서 조성되었다.)
[태종의 아들들]
헌릉의 주인인 조선왕조 세 번째 임금인 태종太宗 의 가계도를 살펴보자.
선죽교에서의 정몽주 살해, 왕자의 난, 양녕대군 폐세자, 그리고 드라마 '용의 눈물'까지 이미 상당히 유명한 역사속 인물인 태종 이방원은 500년이 넘는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은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하나의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카리스마 넘치는 창건자, 그리고 유약하며 권력 싸움에 시달리는 두번째 또는 세번째 왕, 마지막으로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군주가 나오는 시나리오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만 봐도 고려왕조가 그러하였고, 중국 역사를 봐도 전한(前漢)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도 그러하였다. 실제로 능력있는 인물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도 두번째 혹은 세번째 군주가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경우도 부지기수인 점을 보면, 실제로 왕조의 기반을 탄탄하게 닦는 군주의 역할은 창건자에 비교될 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왕조는 1대 태조太祖 이성계가 1392년 왕조를 개창한 이후에 얼마 있다가 바로 권력다툼에 휘말렸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이 그것인데, 이 때문에 원래 세자였던 8남 이방석이 살해당하고 5남 이방원이 권력을 휘어잡는다. 바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었던 권력을 가지게 된 이방원이었지만 아버지 이성계의 극도의 반대 등 바로 왕위에 오르기에는 부담스러웠던지 이성계의 2남인 이방과가 정종定宗 으로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권력은 이방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얼마 후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피도 눈물도 없다는 듯이 외척들과 공신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나라의 국방을 안정화했으며, 관제를 개혁하고 법을 개정하는 등 그의 후손이 마음껏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실제로, 태종의 셋째 아들인 4대 세종世宗 은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권력 기반 위에서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이자 성군으로서 칭송받고 있으니, 그 역할의 절반은 태종에게 돌려도 그리 무리가 아닐 것이다.
1418년 태종은 그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 왕의 자리를 양위하여 상왕으로 물러나고, 1420년에는 태종의 유일한 정비正妃 인 원경왕후가 사망하였으며, 1422년에는 태종마저 58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아들 세종은 현재 대모산 남쪽 자락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쌍릉雙陵 의 형태로 조성하고 왕릉을 만드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헌릉이다.
서울 대모산 남쪽 자락 동측에는 헌릉이 조성되었고, 서측 자락에는 인릉이 조성이 되어 있다. 헌릉은 1400년대 초반에 조성되었고, 인릉은 그보다 한참 후인 1800년대 중반에 조성되었다. (인릉은 원래 최초 파주 장릉長陵 근처에 위치하였었는데, 25대 왕 철종 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최고의 길지吉地 조성될 수 밖에 없는 조선왕릉의 특성상 왕릉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조성되어 있는 이 대모산 남쪽 자락은 언뜻 보면 훌륭한 명당으로 보인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인릉이 조성되기 전에 헌릉의 왼쪽, 즉 서쪽 자락 근처 (지금 인릉이 있는 곳보다 바로 서쪽인 국정원 내 위치. 지도에는 국정원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에 두 번이나 왕릉이 조성되었다가 천장遷葬 되기를 반복하였다는 점이다. 4대 세종이 승하한 후에 아버지 근처에 묻히고 싶어서 영릉英陵 이 원래 이 근처에 조성되었으나 현재 여주의 영녕릉英寧陵 구역으로 이장되었고, 11대 중종의 1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도 최초에는 이 근처에 있었다가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 구 영릉의 위치는 현재 인릉이 있는 바로 근처라고 하며, 구 희릉의 위치는 지금의 국정원 내에 위치했다고 한다. 또 재미있는 것은 영릉과 희릉이 현재 위치한 곳으로 이장할 때 이 곳(헌릉의 서쪽 자락)이 흉당이라는 논리로 이장되었다고 하는데, 인릉이 조성될 당시인 1800년대 중반 지관들은 이 곳이 길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지역을 두고 과거에는 두 번이나 흉당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명당이라고 한 것이다.
관련 뉴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174304
어쨌든, 헌릉과 인릉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헌인릉길이라고 쓰여져 있는 길 좌측 끝에는 굉장히 넓은 부지위에 국정원이 위치하고 있다. (국가 주요 건물이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 근처에 위치했었는데, 기껏 이전한 곳이 또 왕릉 근처다;;) 지도의 가운데 제일 아래쪽 길가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네모난 구역의 건물은 헌릉과 인릉의 재실이다. 왕릉의 입구는 인릉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헌릉을 가려면 인릉과 헌릉의 중간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이동해야 한다. 주변에는 비닐하우스가 어지럽게 널려있기 때문에, 꽤 정신없다. 그 덕분에 헌릉으로 들어가는 길이 남쪽부터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릉을 통해서 좌측부터 들어가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헌인릉의 입구와 카탈로그의 모습.
여느 왕릉과 별로 다른 점 없이 헌인릉 안내도와 사적 표지석,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이 관람객들의 눈에 띈다. 헌릉/인릉 안내 카탈로그에 나와있는 장명등은 인릉에 자리잡고 있는 장명등이다. 헌인릉의 주인은 아무래도 헌릉이라고 보여지는데, 카탈로그에 나와있는 장명등은 인릉의 그것이라는 점이 조금 의아하다. 헌릉의 모습도 카탈로그에 담기에는 부족함 없이 위엄이 넘치는 점을 보면 더 그렇다.
헌인릉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면, 바로 앞에 인릉의 정자각이 보인다. 보통 왕릉의 매표소는 능역에 바로 붙어있지 않고 좀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헌인릉은 특이하게도 왕릉의 홍살문 바로 앞에 매표소가 위치하고 있다. 역시 기형적인 구조라고 생각이 든다.
바로 앞에 인릉이 보이긴 했지만, 역시 헌인릉의 주인은 헌릉이라는 생각에 인릉은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우측의 오솔길을 따라 헌릉의 능역으로 이동한다. 겨울이 다가왔음이 느껴지는 늦가을이다 보니 시원하고 선선하기보다는 춥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오솔길에서는 관람객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오솔길의 나무도 헐벗어 있다 보니 스산하기 그지없다.
오솔길을 지나 헌릉의 입구에 들어섰다. 왕릉의 남쪽부터 들어가는 코스가 아니라 좌측에서 들어가는 코스이다 보니, 들어가서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홍살문이 아니라 정자각과 봉분 사이에 있는 넓다란 사초지였다. 사초지를 바라보고 우회전해서 홍살문부터 답사를 시작한다.
헌릉은 조선 초기의 왕릉으로서 중/후기의 왕릉과 비교해 봤을 때 상당히 특이한 점이 많다. 보통 조선 초기 왕릉이라 하면 1대 태조 건원릉建元陵, 정비 신의왕후 제릉齊陵, 계비 신덕왕후 정릉貞陵, 2대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厚陵, 3대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英陵 등 총 6기의 왕릉을 말하는데, 제릉과 후릉은 북한에 있고, 정릉과 영릉은 최초에 조성된 곳에서 후에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므로, 현재 조선 초기의 왕릉의 양식을 제대로 보려면 태조 건원릉이나 이 곳 태종 헌릉을 찾아와야 한다. 중/후기의 양식과 다른 조선 초기의 왕릉 양식을 찾아보는 것도 왕릉을 답사하는 묘미 중의 하나다.
헌릉의 홍살문에 서보니 정자각과 그 뒤로 우람한 쌍릉雙陵 양식의 봉분이 시야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면 홍살문/정자각/봉분이 정확히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삐뚤어져있다. 사진을 봐도 정자각 뒤 가운데에 쌍릉의 가운데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원래 일직선이어야 할 텐데, 이렇게 약간 삐뚤어진 적은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康陵 에서도 보았었던 기억이 난다. 또 재미있는 것은 홍살문 바로 우측에 배위(拜位, 왕이 왕릉에 제사하러 왔을때 왕릉에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절을 하는 널찍한 돌)가 없다는 것. 배위가 어디있는지 찾아보았더니 봉분 바로 무인석 사이에 배석拜石 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양식은 조선왕조 초창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데 맨 아래 사진 무인석 앞쪽에 네모난 판 같은 것이 배석이다. 건원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뻗어있는 참도參道 도 다른 왕릉 처럼 신도神道 와 어도御道 의 두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하나의 단으로 쭉 뻗어있다. 정자각 앞에서 우측/좌측/좌측으로 세 번 굽어져 있는 부분에서는 잔디가 참도 사이사이에 많이 들어와 있어서 왠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정자각의 형태는 다른 왕릉에 있는 정자각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정자각 동측에 있는 신계神階 와 어계御階 의 계단 수가 상당히 적은 것이 특이하다. 다른 왕릉의 정자각에서는 다섯 계단으로 이루어진 곳도 종종 보았는데, 이 곳 헌릉의 신계와 어계는 두 계단으로 굉장히 간소하다. 모든 것이 위엄이 넘치는 헌릉의 모습에서 유일하게 간소하고 단순화된 느낌을 주는 구조물이다.
이 곳 헌릉에는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아직도 더 있다.
우선 정자각 좌측 뒤에 있는 소전대燒錢臺. 소전대는 돈을 불사르던 돌이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이 헌릉의 소전대 같은 모양이 넓다란 돌판 모양이었는데, 이후에는 땅 바로 위에 네모나게 둘러싸는 모양(예감으로 불림)으로 대체되었다. 이 소전대는 건원릉와 정릉, 그리고 이 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다.
※ 참고로,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의 저자 이정근씨는 그의 저서에서 소전대는 한자의 뜻만 보더라도 錢, 즉 돈을 불태우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소전대와 예감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소전대에서 태운 돈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렇다면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왕릉에서 왜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으로 대체된 것인지, 그리고 조선 초기의 왕릉에서는 축문은 묻지 않은 것인지 등에 대한 정확한 답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12대 인종(仁宗)이 묻혀있는 효릉(孝陵)에서 소전대와 예감이 같이 위치한 걸로 봐서 소전대와 예감은 분명히 다른 용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소전대를 검색해 보더라도 소전대의 정확한 용도는 나와있지 않다. 학문적 접근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는 정자각 뒤편으로 이어진 신로神路. 두 번째 사진에 나와있는 길인데, 참도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길이라면, 신로는 정자각 뒤쪽에서 봉분쪽으로 이어진 길을 말한다. 조선 초기 특유의 양식은 아니지만, 다른 왕릉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신도비각神道碑閣. 원래 조선 초기 왕릉에는 왕릉의 주인인 왕의 행적을 매우 큰 비석에 굉장히 자세하게 새겨놓았었는데, 4대 왕 세종의 영릉까지는 신도비를 세워놓았다가 이후의 왕릉부터는 사라지고 대신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와 어떻게 왕릉이 조성되었는지 간단히 알려주는 비각碑閣으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대체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실려있다.
[ 명하여 현릉(顯陵) 에 비석을 세우는 일의 가부(可否)를 정부에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정인지(鄭麟趾)는 말하기를,
“대저 임금의 공업(功業)은 국사(國史)에 기록하는데, 어찌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예전에 세종(世宗)께서 헌릉(獻陵)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시므로 신(臣)이 ‘불가합니다.’고 하였더니, 세종께서 그대로 따르고자 하셨으나, 변계량(卞季良)이 헌의(獻議)하기를, ‘제왕(帝王)의 원릉(園陵)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명(明)나라 태조 황릉(黃陵)에 비석이 있고, 우리 나라 건원릉(健元陵)에도 또한 비석이 있는 것은 모두 창업(創業)한 연고 때문입니다. 이제 태종(太宗)께서는 비록 창업한 임금은 아니나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것은 모두 그 공(功)인데 비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여, 세종께서 그 의논을 따랐습니다. 문종(文宗)께서도 장차 영릉(英陵)에 비석을 세우시려 할 때, 신이 또 의논하여 ‘불가합니다.’고 하였더니, 문종께서 말씀하기를, ‘세종께서는 대통(大統)을 입계(立繼)하여 우리 조정의 법제(法制)를 환연(煥然)하게 모두 갖추어 후세(後世)에 끼쳤으니, 백세(百世)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이시다. 역시 비석을 세워 덕업(德業)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시고, 드디어 세우게 하셨습니다. 문종(文宗)께서는 나라를 다스리심이 오래지 않아 별달리 기록할 만한 일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한확(韓確) 등은 말하기를,
“현릉(顯陵)의 비석은 이미 만들었으니, 마땅히 오는 가을을 기다려 세우게 하소서.”
하니, 세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 세조 2년 1456년 1월 25일 ]
이처럼 정인지의 끈질긴 주청 덕분에, 신도비각은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람하기 그지 없는 두 개의 신도비. 왼쪽은 최초의 헌릉 신도비이고, 우측은 조선 중기 숙종대에 새로 세워진 신도비이다. 너무 커서 신도비가 비각의 천장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다. 최초의 신도비는 비석 아래의 거북이 머리가 깨져있고, 글씨도 대부분 마모되어 살피기 어려우나, 새로 세워진 신도비는 거북이 머리만 보아도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글자도 대부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해독 불가;;;
※ 태종헌릉신도비 내용 :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pds1&nnew=2&y_number=71
우람한 비각을 나와 헌릉의 봉분을 보기 위해서 사초지 왼쪽에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계단 아래쪽에 조선 태종 헌릉 상설도가 간단히 안내되어 있고, 그 위로 계단이 이어진다. 왕릉 보호를 위해 아예 정자각 뒤편에 목책을 주욱 설치해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곳이 상당히 많아서 답사객의 입장에서는 아쉽기 그지 없는데(그래도 눈치보고 몰래 후다닥 뛰어 올라갈 때도 많지만;;;), 이처럼 좌측에 계단을 두어 왕릉을 옆쪽 가까이에서 보게 만들어주었으니 헌릉 관리소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 보면 헌릉의 좌측 데크에서 왕릉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헌릉을 처음 본 느낌은 '매우 정신없다';;;;라는 느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러치는 우람한 쌍릉은 둘째 치고, 모든 석물石物 이 다른 왕릉에 비해서 2배씩 많다. 보통 단릉이든, 합장릉이든, 쌍릉이든 모든 석물은 2쌍의 석양과 석호, 1쌍의 문인석, 1쌍의 무인석, 2쌍의 석마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 곳 헌릉만은 예외다. 석양/석호/석마가 4쌍, 문인석과 무인석도 2쌍씩이다. 그 때문에 봉분과 곡장 사이가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석물들이 빽빽하게 차있다.
좀 더 자세하게 봉분을 구경하고 싶어서 왕릉 안으로 살짝 발을 들여놓은 상태에서 사진을 찍고 봉분 쪽으로 들어갈려는 찰나, 저 계단 아래에서 관리원 아저씨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정을 하고 봉분 안쪽에서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사정하였으나, 불가 ㅠㅠ 더구나 사진 찍을때도 계속 옆에 계셔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ㅠㅠ;; 하긴, 왕릉에 왔으니 왕릉의 예절에 맞춰서 답사를 하긴 해야겠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헌릉의 망주석과 혼유석의 모습. 우람한 능침에 비해서 망주석은 키가 조그마한게 언밸러스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준다. 혼유석을 보면, 혼유석을 받치는 받침돌(고석 鼓石 이라고 함)이 다른 왕릉처럼 4개가 아니라 5개다. 사진에는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런 고석의 숫자는 조선 초기 왕릉의 특유의 양식이다.
※ 참고로 역시 조선 초기인 태조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의 고석의 숫자는 5개도, 4개도 아닌 2개뿐이다. 이는 신덕왕후를 계모로조차 인정하지 않은 태종이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할 때 격식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1쌍이 배치된 장명등의 모습. 정릉에서 보았던 사각 장명등이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이 곳 헌릉의 장명등은 그러한 고려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조선 특유의 양식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쌍의 장명등은 쌍둥이 모형인데, 자세히 보니 기분탓인지 실제로 그런건지 좌측 태종릉의 장명등이 우측 원경왕후릉의 장명등보다 조금 더 날씬한 것 같다.
봉분 주위와 중계中階, 하계下階 를 지키고 있는 석양, 석호, 석마의 모습들. 시대가 오래 지나서 그런지 석물들의 표정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여전히 잘 살아있는 것 같다. 석양은 왠지 웃는 듯한 모양새로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고, 그에 반해 석마는 다리가 짧고 약간 통통한 느낌이다. 석마의 배와 다리 사이에 빈 공간이 있는 것도 이 곳 헌릉의 특징. 석호는 앞다리를 곧게 펴고 입가에 이빨 조각도 있는 것이 사나운 느낌을 준다.
각각 2쌍씩 총 8기가 배치되어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의 모습들. 봉분 정면이 아닌 관람 데크에서 사진을 찍는 바람에 자세한 얼굴상은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멀리서 무인석의 조각을 보아도 굉장히 섬세한 것이 석공이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가 있다. 이 곳에서 600년 가까운 시간을 헌릉을 수호하면서 자리를 지킨 석물들이다.
헌릉을 둘러싸고 있는 곡장의 모습. 담벼락 아랫부분에서 중간부분에 있는 불이라도 났었나? 그을음 같은 것은 어떤 연유 때문에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
헌릉의 능침에서 아랫부분의 신도비각과 정자각을 바라본 모습. 웅장한 신도비가 두개나 들어있는 신도비각이 상당히 큰 것이 눈에 띈다. 정자각 저 멀리 비닐하우스 촌이 보이는데, 헌인릉 구역이 정비되면 아마도 정자각 너머 홍살문 앞쪽으로 좀 더 왕릉다운 구역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헌인릉 입구 바깥쪽에 멀리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재실의 모습. 왕릉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아치인 능참봉이 거주하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인 재실은 오늘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드문 편인데, 이 곳 헌인릉의 재실도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헌릉 인릉 봉향회'가 사용하고 있다. 그나마, 제례를 시행하는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헌릉은 지금까지 답사한 왕릉 중에 가장 위엄이 넘치는 왕릉이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던 신도비각과 두 쌍씩 서있는 석물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창업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이라고 했던가. 조선 왕조를 창업한 것은 태조 이성계였지만, 누가 뭐래도 조선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닦아놓은 것은 태종 이방원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기반을 닦아 놓은 군주가 묻혀있는 왕릉답게 헌릉 역시 위엄을 잘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가 우람한 쌍릉의 모습과 능침을 수호하고 있는 수많은 석물들을 보면, 확실히 이 곳의 주인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다만, 왕릉 주변에 비닐하우스촌, 국정원이 위치해있고, 멀지 않은 곳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많은 차량들이 통과하면서 과거의 신성함은 많이 사라졌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다른 왕릉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물과 유적 등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헌릉의 가치는 크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제 헌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인릉으로 가보자. 인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 관련 사이트
헌릉 관리사무소 : http://heonin.cha.go.kr/n_heonin/index.html
조선왕릉 전시관 : http://royaltombs.cha.go.kr/
- 관련 읽을거리
위키백과 태종 :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D%83%9C%EC%A2%85
위키백과 원경왕후 : http://ko.wikipedia.org/wiki/%EC%9B%90%EA%B2%BD%EC%99%95%ED%9B%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