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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마지막 여로(1) (대 열반경) 마성/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시작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붓다는 북인도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에서 마을로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그 역사적 전후 관계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모두 붓다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설법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1)
그러나 붓다의 만년(晩年), 즉 입멸 전후의 사정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전의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의 세 가지 경전2)에서는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는 그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현재 팔리어 [대반열반경] 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어역,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3) 전해지고 있습니다.4)
이로 미루어 이 경전은 다른 부파에서도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 역본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 붓다 입멸 전후의 사정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성(事實性)이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약간의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묘사된 내용은 역사적, 지리적 사실에 가깝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은 위대한 분의 크나큰 죽음과, 그 죽음을 앞에 두고 설해 남기신 최후의 설법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지니는 가치와 크나큰 매력은 역시 이 크나큰 죽음의 사실과 그 최후 설법에 있어서의 주옥같은 가르침의 말씀입니다.5)
그런데 대승경전에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같은 이름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전은 붓다께서 입멸할 때의 설법을 주제로 한 것으로 아주 딴 경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반열반경]은 팔리어 경전과 그에 해당되는 한역본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의 마지막 여정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출발하여 갠지스강을 가로질러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 이르러 안거를 마치고, 말라(Mallā)국의 도시였던 꾸시나라(Kusinārā, Kusinagara, 拘尸那竭羅)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입적(入寂)하게 됩니다. 그리고 붓다의 입멸 후 화장과 사리분배 등에 관한 후대의 기사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팔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붓다의 마지막 여로에 대한 줄거리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대반열반경]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반 년 내지 일 년 정도 전 라자가하의 깃자꾸따(Gijjhakūta, 耆闍崛山, 靈鷲山)에 머물고 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무렵 마가다국의 아자따삿투(Ajātasattu, 阿闍世) 왕은 밧지(Vajji)국을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밧사까라(Vassakāra)라는 대신(大臣)을 붓다께 보내 그 의향을 여쭤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붓다는 아자삿투왕의 대신 밧사까라에게 직접 답하지 않고,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다음의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6)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7)
얼마 후 붓다는 8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를 떠나 최후의 여정에 오릅니다.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북쪽의 베살리를 향해 라자가하를 출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암바랏티까(Ambalatthika) 동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의 ‘왕의 집(Rājâgārake)’에 머무셨습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도 비구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즉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선정이다. 이것이 지혜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定)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慧)가 실천되면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âsavā), 유루(有漏, bhavâsavā), 견루(見漏, ditthâsavā), 무명루(無明漏, avijjâ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10) 계율과 선정과 지혜, 이 셋은 불교 전체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실천 형태이며, 흔히 ‘삼학(三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학(學)은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라는 뜻입니다.11) 이 삼학은 불교의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이 경전에서 붓다는 반복해서 비구들에게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학에 관한 교설은 이 경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암바랏티까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는 나란다(Nālanda, 那爛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붓다는 나란다에 도착하여 그곳의 빠와리까(Pāvārika)의 망고 숲에 머무셨습니다. 그 때 존자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가 세존의 처소를 찾아와서 세존께 예배드리고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신앙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바른 깨달음에 대해 세존만큼 심오하고 철저하게 도달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며, 현재에도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
그러자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제불세존(諸佛世尊)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불세존이라는 분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함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있지만, 한역의 해당 부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 팔리문과 한역(漢譯) 아함(阿含)의 다른 곳에 나와 있습니다.13)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리뿟따의 신앙 고백은 다른 기회, 즉 붓다의 입멸 직전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일로 여겨집니다.14) 그러니까 팔리문 [대반열반경]의 편집자는 나란다 마을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고장과 관련되어 알려진 사리뿟따의 고백을 여기에 삽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15)
이어 붓다는 나란다를 떠나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 있는 빠딸리가마(Pātaligāma, ‘빠딸리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께서 빠딸리 마을에 도착하자 그 고장의 신자들은 붓다와 제자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지은 공회당에 와서 법문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빠딸리 마을 사람들에게 계율을 지킬 때의 다섯 결과와 계율을 지키지 않을 때의 다섯 결과를 설하셨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재산을 잃게 되고, 나쁜 소문이 일어나고, 모임에 참가할 때 자신이 없고, 죽을 때 우둔하게 죽게 되고, 죽고 나서 지옥에 가게 됨을 설하셨습니다.16)
이와 같이 붓다는 빠딸리 마을 신자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설법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붓다의 분부로 신자들은 물러갔습니다. 붓다는 잠시 후 조용한 곳에 가서 쉬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대신(大臣) 수니다(Sunīdha)와 밧사까라(Vassakāra)가 밧지족을 물리치기 위해 빠딸리가마에 요새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수많은 신들이 빠딸리 마을을 수호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 날 아난다에게 “고귀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중에서, 모든 상업의 중심지 중에서 빠딸리뿟따(Pātaliputta, Pātaliputra, 華氏城)17)가 가장 큰 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빠딸리뿟따는 화재와 수재, 또는 내란[불화]의 위험이 염려된다.”라고 예언했습니다.
한편 마가다국의 대신 수니다와 밧사까라는 붓다와 제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나간 문을 ‘고따마의 문(Gotama Gat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넌 장소를 ‘고따마의 나루터(Gotama Fort)’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너기 위해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배를 타거나 혹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너려고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마치 역사(力士)가 굽힌 팔을 펴거나 혹은 폈던 팔을 굽히듯이 순식간에 저쪽 강가에 모습을 나타내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 기적에 관한 종교적 의미는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18)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33.
2) Mahāparinibbāna sutta(大般涅槃經), Mahāsudassana sutta(大善見王經), Janavasabha sutta(闍尼沙經) 등이다.
3) ①[遊行經](大正藏1, pp.11-30); ②[佛般泥洹經](大正藏1, pp.160-175); ③[大般涅槃經](大正藏1, pp.191-207); ④[般泥洹經](大正藏1, pp.176-191); ⑤[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大正藏24, pp.384-402) 등이다.
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33.
5)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반영규 옮김, [붓다, 그 생애와 사상](서울: 대원정사, 1987), pp.264-5.
6) Dīgha Nikāya(PTS), Vol.Ⅱ. pp.73-76.
7) Dīgha Nikāya(PTS), Vol.Ⅱ. pp.76-77.
8) Dīgha Nikāya(PTS), Vol.Ⅱ. pp.77-81.
9) 후지타 코타츠 외,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민족사, 1989), pp.109-111.
10) Dīgha Nikāya(PTS), Vol.Ⅱ. p.81.
11)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327.
12) Dīgha Nikāya(PTS), Vol.Ⅱ. p.82.
13) 사리뿟따와 붓다의 대화는 Dīgha Nikāya(長部)의 Sampasādanīya Sutta(自歡喜經)(D.Ⅲ, pp. 99-116)과 Samyutta Nikāya의 Satipatthāna Samyutta(念處相應)(S.Ⅴ, p.159)에 길게 설해져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인기 있는 대목이었으며, 아쇼카왕의 비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London: PTS, 1910), p.87, No.2 참조.]
14)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도 [대반열반경]에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92), 참조.]
15)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329.
16) Dīgha Nikāya(PTS), Vol.Ⅱ, pp.85-6; Vinaya Pitaka(PTS), Vol Ⅰ, pp.227-8; Udāna (PTS), pp. 86-7.
17) 여기서 시골의 빠딸리가마(Pātaligāma)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그 이름이 빠딸리뿟따(Pātaliputta, 현재의 Patna)로 변경되었다. 나중에 이곳은 마가다 왕국을 발전시킨 아쇼카 황제의 수도로 유명해졌다.[Bhikkhu Ñānamoli, The Life of the Buddha,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2), p.357.]
18) 와다나베 쇼오고는 이 기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o.332-3를 참조하기 바란다.
붓다의 마지막 여로(2)
갠지스 강을 건너신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띠가마(Kotigāma, 꼬띠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다음에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반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의미에 도달한 사람 혹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 생존의 원인이 되는 것을 단절하고, 다시 미망된 태어남을 받지 않느니라.”
이처럼 꼬띠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나디까(Nādika)1) 마을에 도착하시어, 그곳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 벽돌 회관)’2)에 머무셨습니다.3)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이곳 나디까 마을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에 대해 붓다께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나디까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와 제자들은 베살리(Vesāli, 毘舍離城)로 이동하였습니다. 베살리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암바빨리(Ambapāli, 菴婆婆利)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습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습니다. 그 자세한 설법 내용은 생략합니다.
당시 베살리에는 ‘암바빨리’라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자신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붓다께 문안드리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유녀 암바빨리는 기쁨에 넘쳐, 내일 자신이 세존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붓다께서는 침묵으로써 수락하셨습니다.
그때 베살리의 릿차비(Licchavī)족 사람들도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릿차비족 사람들은 서둘러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붓다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유녀 암바빨리의 마차와 부딪쳐 릿차비족 사람들의 수레가 부셔져 버렸습니다. 릿차비족 사람들은 유녀 암바빨리를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암바빨리는 내일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에 초대하기 위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사죄했습니다. 가문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릿차비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십만금(十萬金)에 권리를 양도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암바빨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릿차비족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릿차비족은 붓다시대에 인도의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캇띠야(Khattiya, 刹帝利, 王族)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붓다 입멸 후, 자기들의 나라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불사리(佛舍利)의 분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5) 그들의 수도는 베살리였으며, 밧지스(Vajjīs)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밧지족 연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거대한 통일체를 형성했는데, 만일 릿차비의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모든 사람들이 문병을 갔다고 합니다. 릿차비의 집에서 실시되는 행사에는 전체 부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방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명예스럽게 모두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6)
그들이 화려한 색상의 의복을 입고 밝게 색칠한 마차를 탄 모습을 매우 아름다웠다고7)고 합니다.8) 이처럼 부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던 릿차비족들이 자기 마을을 방문한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릿차비족 사람들이 붓다를 친견하고 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붓다와 제자들에게 먼저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암바빨리의 공양을 받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릿차비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유녀 암바빨리는 자신의 정원에 잘 요리된 딱딱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세존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동산을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들에게 기진(寄進)하겠사옵니다. 부디 수락하여 주소서.” 붓다께서는 그녀의 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붓다는 유녀 암바빨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으며, 그녀를 격려하여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암바빨리의 거처를 떠났습니다.
붓다께서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벨루와(Beluva, Venu, 竹林) 마을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벗이나 지인(知人) 혹은 지기(知己)를 의지하여 베살리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우기를 지내도록 하여라. 나는 이 벨루와 마을에 남아 우기를 보내리라.” 그리하여 비구들은 베살리의 각 지방에 흩어져 그곳에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만은 혼자 이곳 벨루와 마을에 머물면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기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붓다께서는 중병(重病)에 걸렸습니다.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붓다께서는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존하시어 마음이 번잡하지 않게 고통을 참았습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 붓다께서는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9)을 확립하여 병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편찮으신 동안 저에게는 티끌만한 걱정도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숨 돌리는 정도의 시간이다’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어떤 지시를 주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열반에 드시는 일은 없다’라고.”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이어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아난다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 느낌(受)에 대해 … 마음(意)에 대해 …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섬으로 삼아[自洲]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法洲]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11)
Notes: 1) 나디까(Nādika)는 꼬띠가마(Kotigāma)와 베살리(Vesāli)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밧지(Vajji)국에 속한 지역이다. 여러 책에서는 냐띠까(Ñātika)와 나디까(Nādika) 두 가지로 이 마을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일찍부터 두 가지 철자법 모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Ñātika는 ñātigāma였기 때문이고, Nādika는 Nādika 연못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Rhys Davids는 Nādikā(복수)는 종족의 이름이고, Nādika는 그 종족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한다. Woodward 역시 Nādika로 읽는 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 이름은 nadī(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Originally Published in 1937), Vol. Ⅱ, pp.976-7 참조.]
2)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를 ‘연와(煉瓦)의 가(家)’ 혹은 ‘연와당(煉瓦堂)’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벽돌 회관’으로 옮겼다. Rhys Davids에 의하면, ‘벽돌 회관’은 여행자를 위한 공중 휴게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대부분의 건물은 나무로 지어졌는데, ‘벽돌 회관’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이 단어를 ‘Brick Hall’로 번역했다.[T. W. and C. A. F. Rhys Davi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p.97, no.1.]
3) Rhys Davids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어떤 장소에 여행자가 도착했다는 것을 기술하는 관용구적인 어법이라는 것이다. 즉 X라는 곳에 도착하여 Y에 머물렀다. X는 도시 혹은 마을의 이름이고, Y는 여행자가 사용하는 숙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디까’ 마을에 도착하여 ‘벽돌 회관’이라는 숙소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4) ‘여래(如來, Tathāgata)’라는 호칭은 붓다께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92), p.1. No.1 : "Tathāgata is the title used when he speaks of himself. Etymologically it means 'he who has gone(or come) thus', but the exact sense is disputed.";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1 No. 3: "Tathāgata lit. means 'One who has come to truth', i.e., 'One who has discovered Truth'. This is the term usually used by the Buddha referring to himself and to the Buddhas in general."]
이를테면 천자(天子) 혹은 왕(王)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짐(朕)’이라고 자칭(自稱)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제자들이 붓다를 ‘여래’라고 부른 예를 초기경전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의례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수정되어야만 한다.
현행의 여래십호는 사실상 열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①여래(如來, Tathāgata), ②응공(應供, Arahant), ③정변지(正遍知, Sammāsambuddha), ④명행족(明行足, Vijjācaranasampanna), ⑤선서(善逝, Sugata), ⑥세간해(世間解, Lokavidū), ⑦무상사(無上士, Anuttara), ⑧조어장부(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⑨천인사(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m), ⑩불(佛, Buddha), ⑪세존(世尊, Bhagavā)이다. 여기서 여래를 제외하면 정확히 십호(十號)가 된다.
5) Dīgha Nikāya(PTS), Vol. Ⅱ, p.165.
6) DA. Ⅱ, p.519.
7) Dīgha Nikāya(PTS), Vol. Ⅱ, p.96; Anguttara Nikāya Vol Ⅲ, p.239.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779.
9) ‘유수행(留壽行)’으로 옮긴 팔리어 원어는 Jīvita-sankhāram adhititthati이다.
10)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 Dīgha Nikāya(PTS), Vol. Ⅲ, p.58, 77; “atta-dīpa(bhikkhave) viharatha atta-saranā anañña-saranā, dhamma-dīpa dhamma-saranā anañña-saranā.” 여기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자주(自洲, 자기의 섬) 법주(法洲, 법의 섬)’로 옮겨야 한다. 이수창(마성),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제6hj, 003, pp.157-184 참조.
11)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101; Dīgha Nikāya(PTS), Vol. Ⅲ, p. 58, 77.
12) 임승택, “경전에 나타나는 위빠사나”, 『2004년 여름연수회 자료집: 고집멸도(DSNM)명상상담』(명상상담연구원, 2004), pp.23-38 참조.
붓다의 마지막 여로(3)
붓다께서 벨루와(Beluva) 마을에서 우기(雨期)의 안거(安居)를 보내고 있을 때, 심한 병에 걸려 격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정진을 통해 자신의 병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우기가 끝나고 붓다는 다시 베살리(Vesālī)로 돌아왔습니다. 붓다께서 베살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짜빨라 쩨띠야(Cāpāla cetiya)로 자리를 옮겼습니다.1) 그곳에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우데나(Udena), 고따마까(Gotamaka), 삿땀바까(Sattambaka), 바후뿟따(Bahuputta), 사란다다(Sārandada), 짜빨라(Cāpāla) 등의 쩨띠야(cetiya, 制多, 支提)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쩨띠야(cetiya, Skt. caitya)는 원래 ‘성스러운 나무 혹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을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 당시의 제띠야는 ‘노천의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었다고2) 합니다. 이기영(李箕永)은 쩨띠야를 흔히 ‘묘(廟)’ 또는 ‘예당(禮堂)’이라고 한역되지만, ‘신성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석조(石造) 혹은 벽돌로 된 것들은 대개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塔婆) 모양의 것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붓다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 위에 만들어진 토총(土塚) 또는 그 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 위에 총(塚)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쩨띠야는 스투파(Stūpa, 塔婆)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했습니다.3) 이 쩨띠야를 영어로는 ‘tumulus’(古墳), ‘sepulchral monument’(무덤의 기념물), ‘cairn’(돌무더기) 등으로 번역하는데,4) 우리말로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쩨띠야를 불교의 사찰로 이해하면 잘못된 것입니다.5)
붓다는 이곳 짜빨라 쩨띠야에서 아난다에게 수행이 진전되어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을 획득한 사람은 그가 원한다면 일겁(一劫)6)이나 그 이상도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래는 이미 신족(神足)을 닦은 자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원하기만 하면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음을 아난다에게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 의해 마음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간의 자애를 위해, 인천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처럼 세 번씩이나 암시했는데도 아난다는 이미 악마에게 홀려 있었기 때문에 세존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물러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가 물러난 뒤, 악마가 세존 가까이로 다가와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바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선서(善逝)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이제 열반에 드셔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열반에 드시도록 권했을 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사옵니까?”7)
“‘악마여! 나에게 비구제자들이 있고, 또 그들이 총명하여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받들어 지니고, 가르침을 바르게 행하고자 하며, 바른 방향으로 행동하며, 스승의 말씀을 잘 파악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설명하고 표현하며, 알리고 납득시키며, 이해시키고 분별하게 하며, 명백하게 하고, 또 외도의 삿된 설이 나타날 때는 그 삿된 설을 진리로 제지할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는 가르침을 설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결코 열반에 들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세존이시여! 지금 이러한 바람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가 온 것이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열거하면서 열반에 들도록 유혹받으신 세존께서는 마침내 악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나의 입멸(入滅)에 대해 더 이상 마음 괴로워하지 않느니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이리하여 세존께서는 짜빨라 쩨띠야에서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셨던 지금까지의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중지하셨던 것입니다.8) 세존께서 유수행을 버렸을 때,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너무 무서워서 온 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습니다.
한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난다 존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벗이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벗이여!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참으로 이 지진은 대단하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무서워 몸의 털이 곤두섰다. 또 하늘의 큰 북도 갈갈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다.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因), 어떤 간접적 원인(緣)이 있기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서 아난다 존자는 그 이유를 묻고자 세존의 처소로 갔습니다. 세존의 처소에 가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큰 지진이 오늘 있었사옵니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두려워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사옵니다. 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 어떤 간접적 원인이 있기에 이런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옵니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 경우이니라. 그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아난다여! 이 대지는 수계(水界) 위에 있고, 수계는 풍계(風界) 위에, 또 풍계는 허공(虛空) 중에 있다. 그런데, 아난다여! 풍계에 어떤 원인으로 큰 바람이 불면, 그 큰 바람은 수계를 진동하게 한다. 수계가 진동하면 대지도 진동한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1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다음으로 아난다여! 이곳에 한 사람의 사문 혹은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神通力)이 있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자. 혹은 대단한 초능력(大神通力), 대단한 역량을 가진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대지의 관상(觀想)을 행하고, 혹은 한없이 수(水)의 관상을 행할 때, 그것은 이 대지를 대단히 그리고 격심하게 진동하게 하고, 격렬하게 진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2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그리고 붓다는 이어서 나머지 여섯 가지의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어머니가 되는 사람의 태 안에 들 때입니다. 넷째는 이 보살이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로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입니다. 다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때입니다. 여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法輪]를 처음으로 굴리셨을 때입니다.
일곱째는 여래께서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유수행을 버리셨을 때입니다. 여덟째는 여래께서 남김없이 완전한 안락함의 세계(無餘依涅槃)에 드실 때, 이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대단히 진동하며, 격심하게 진동하고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이 있을 때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멸을 예고했습니다. 그때서야 아난다는 붓다께서 입멸하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열반에 드시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이제는 너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허나 어쨌든 아난다여! 나는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것이라고 곧 이별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하겠느냐? 태어나고 살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무너지지 말라’고 막더라도, 그것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느니라. 이러한 것을 아난다여! 여래는 이미 내던지고 배제하며 방출하고 버렸으며 벗어났다. 그리고 유수행도 나는 버렸다. 이리하여 여래는 결정적인 말을 했느니라. ‘머지않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라고. 이제 와서 생명을 영원토록 하겠다고 하여 그 말을 취소한다는 것은 존재의 도리(道理)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문을 아난다에게 설하신 다음, 붓다는 아난다에게 마하와나(Mahāvana, 大林)의 꾸따가라(Kūtāgāra, 重閣講堂)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베살리 주변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라고 당부했습니다. 비구들이 모이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를, 잘 알아 지녀 배우고 수행하며 많이 닦아야만 하느니라. 그리고 이 청정한 행이 이 세상에 오래오래 존재하며, 그 결과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의 바탕이 되고, 세상 사람들을 연민하여 신들과 인간의 복리가 되고, 이익과 안락이 되도록 하여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이익과 안락한 진리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예컨대 네 가지 바르게 사념하는 경지(四念處), 네 가지 바르게 노력해야만 하는 것(四正勤),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 다섯 가지 선한 과보의 뿌리(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지분(七覺支),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 등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이니라.” 이상과 같은 가르침을 설하신 다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비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나는 너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알려야만 하리라. 명심해서 들음이 좋으리라.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有爲)은 결국 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여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리라. 여래는 이제부터 3개월 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만한 이 큰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다시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하셨습니다.
생명의 불꽃 가냘퍼지니, 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여, 끝없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하여 선계(善戒)를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은 다하리.
이 경전에 의하면 붓다께서 빨리 입멸하게 된 까닭은 아난다가 붓다께 요청하지 않은 과실 때문이라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는 “이러한 질책의 가혹함은 붓다에 의한 것이 아님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러한 전설이 창작된 후, 교단에서 일으킨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1결집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에 의하면 아난다는 승단에서보다 먼저 자신의 과실을 시인했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학자들도 이 내용의 의미를 각자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에 의하면, 짜빨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대반열반경] 중에서도 하나의 절정을 이룹니다. 붓다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신자들에게도 있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자연사(自然死)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원시적 심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이 일어나는 데에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는 매우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물며 붓다와 같은 비범한 존재의 입멸이라고 생각할 때, 특별한 원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짜빨라 사당에서의 ‘생명력의 포기’는 붓다의 입멸에 있어서 필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수하여, 시자(侍者) 아난다의 허물과 악마의 유혹이 곁들여집니다. 붓다의 입멸 후 아난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몇 가지 허물을 문책 당하게 되는데, 짜빨라 사당의 사건이 가장 큰 것이었다. 아난다는 그러니까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며, 이것도 민속학에 많은 사례가 있는 일반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입니다.”9)
1) Cāpāla cetiya는 베살리 근처에 있었다. Anguttara Nikāya 주석서에서는 붓다께서 전도를 시작한 후 전반기 20년 동안 종종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약카 짜빨라 (Yakkha Cāpāla)의 거처였지만, 나중에는 붓다께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옆에 사찰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법현(法顯)은 그곳에서 탑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탑은 짜빨라 쩨띠야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Ⅰ, p.863.]
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36.
3) 李箕永, [석가](서울: 지문각, 1965), p.257.
4)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PTS, 1921-1925), p.272.
5)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Fourth edition (London: PTS, 1959), p.100, n.2.
6) 겁(劫, kappa)는 한없이 긴 시간의 단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겁은 이러한 본래 의미로 쓰인 것이다. Mahāvastu(大事), iii 225에서는 분명히 이 의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Buddhaghosa(佛音)는 당시 인간의 완전한 생애 100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92), p.146. n.2.]
7) 여기서 인용한 말은 붓다께서 처음 염소지기의 니그로다(Nigrodha) 나무 밑에서 열반의 기쁨을 즐기고 난 뒤, 말씀하신 것이다.
8) 이 부분의 원어는 ‘āyu-sankhara ossaji’이다. ‘āyu-sankhara’는 수행(壽行)이고, ossaji는 ‘해방되다’, ‘버리다’,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ossajati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생명 연장의 포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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