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성지순례 후기 나눔터 - 성모님 성지(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순례영성'
글 : 김순진(요안나)
▷ 첫째 날 - 1월 15일(월)
아침 7시 40분 인천공항 3층 C와 D사이에 집결하다.
일행은 모두 53명[인솔신부님 : 이기락신부님(가톨릭교리신학원 원장)]과 이재룡신부님[가톨릭대학교 교수]의 인솔로 10시 20분발 AF 267 항공기 편으로 파리를 향해 출발. 파리에 도착해 곧바로 리스본행 비행기를 갈아타고 오후 5시 30분 리스본에 도착. 리스본은 ‘조용한 항구’라는 뜻을 가진 포르투갈의 수도. 이미 어둠이 내리고 어둠 속에 안개가 섞인 채 이국의 향취를 물씬 풍겼다.
현지 가이드 문길라 글라라씨의 안내를 받으며 리스본의 한 음식점으로 가서 푸짐한 닭 튀김과 감자튀김으로 이국에서의 첫 저녁을 들었다. 포르투갈의 상징은 닭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장거리 비행에 지친 일행은 본식보다 후식으로 나온 주먹만 한 오렌지에 환호하며 맛나게 먹었다. 음식 인심 후하고 과일 맛 일품, 서빙하는 웨이터들은 중후한 중년의 사나이들로 힘과 관록이 있어 보이고...
우리를 위해 운전을 할 뻬드로씨에게도 큰 박수로 인사를 하며 첫 번 째 숙소 호텔 Praia Mar로 갔다. 대서양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끝내주는 전망의 호텔이지만 짙은 어둠과 적막에 가까운 고요함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 뿐. 이 시간 서울의 혜화동 거리는 불야성이겠지?
로비에 모여 이름을 부르고 방 열쇠를 받고, 그리고 짐과 함께 2명, 많으면 4명이 탈 수 있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 받은 방으로 갔다. 이 일은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반복될 것이다. 달콤한 잠으로의 마무리와 짐풀기와 짐싸기의 반복은 순례의 기본이다.
짐을 풀고 잠시 피곤한 몸을 씻지도 못한 채 침대로 몸을 던졌는데 정전사태가 발생, 이후에도 정전은 다시 발생, 샤워 중이 아니었던 것이 천만 다행.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소 황당한 사태였다.
▷ 둘째 날 -1월 16일(화)
8시에 출발하여 출근하는 차량들 속에 우리들의 버스(우리는 두 대의 버스로 움직였다)는 떼주강을 건너 크리스토레이(그리스도왕 성당)에 도착. 첫미사를 드렸다, 현대적인 성화가 제대 뒷면을 장식하고 있고 벽모서리에 모신 성모상은 금세 우리에게 내려오실 듯 정답다. 미사 후 간이 카페에서 만사니아(케모마일) 차를 한 잔 마시니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이 곳 사람들은 이 차를 매우 즐겨 마신다고 한다.
떼주강을 다시 건너 벨렘탑을 관람하고 바스코다가마를 기념하는 산타마리아 성당과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예로니모 수도원을 순례한 뒤 리스본 주교좌성당과 안토니오 생가의 터에 세워진 안토니오 성당을 순례, 비탈진 작은 언덕을 빨간 작은 전차가 오르고 있었다. 일곱 개의 노선을 운행한다는 전차는 서울의 마을 버스와 같은 것으로 구 도시 언덕의 주민들에게는 귀중한 교통 수단. 앙증맞고 낭만적이다.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리베르다데 대로와 로시우 광장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파티마로 향했다.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숙소 Hotel Casa das Irmas에 도착, 짐을 풀고 곧바로 로자리오 대성당을 찾았다. 루치아, 히야친타, 프란치스코의 유해에 경배한 뒤 성모님이 발현하신 코바 다 이리아 나무를 순례, 오상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파티마 성모님을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다. 하우스 와인과 따뜻한 스프, 샐러드와 바게트 빵이 곁들여진 생선튀김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 다시 파티마 광장으로 모여 원장 신부님을 모시고 드넓은 광장을 행진하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쳤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15분 간격으로 종은 울리고 많은 순례객들이 봉헌한 촛불은 꺼질 줄을 모른다. 숙소로 오는 길에 베를린 장벽의 한 부분을 전시하고 있는 작은 공원에서 분단된 유일한 우리나라를 상기하며 성체조배실로 향했다.
그리스도왕 성당에서의 미사
벨렘탑
예로니모 수도원
리스본 주교좌 성당
안토니오 성인 생가
파티마
▷ 셋째 날 -1월 17일(수)
파티마광장 야외경당에서 아침미사, 이재룡신부님께서 미사집전.
“세계적인 성지 파티마에서 감격적인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모님께서 철부지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신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부르심을 받고 새롭게 태어난 어린이들처럼 우리도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론하셨다.
성모님의 발현장소를 중심으로 꾸며민 십자가의 길은 온통 올리브 숲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가득한데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15처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마치고 세 어린이의 생가가 있는 라주스트랄의 마을을 순례. 루치아의 생가에는 양 두 마리가 순례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시골농가의 검박한 분위기와 집안 중심에 자리 잡은 부엌은 가족의 온기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파티마를 떠나 와인의 생산지이며 포르투갈 제 2의 도시 포르토에 도착, 오리볶음밥과 인도사과로 늦은 점심을 먹고 포르토 시내를 벗어나 산티아고 꼼포스텔라로 이동. 스페인 땅에 도착.
파티마 까딸리나 성당
파티마 로사리오 대성당
십자가의 길 기도
세 어린이의 생가
▷ 넷째 날 - 1월 18일(목)
숙소를 출발해 순례객들이 평생에 꼭 한번은 오고 싶어한다는 산티아고 꼼포스텔라에 도착. 차에서 내리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짙은 갈색의 쌍둥이 종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 야고보 대성당에서는 파이프 오르간이 웅장하게 연주되는 가운데 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미사 뒤 고백성사를 주시기 위해 각 고백소에서 신부님들이 상반신을 보이시며 언어권별로 기다리고 계신 광경이 이채로웠다. 우리 일행은 필라르(기둥)성모님 경당에서 미사. 이기락신부님께서 미사집전. 미사 후 성야고보 성인의 유해에 참배하고, 한 사람씩 영광의 문 중앙 기둥에 손을 얹고 기도(순례객들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한 뒤 영광의 문에 오른 손을 얹으며 감사의 예를 갖춘다는 전통에 따라)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는지 돌기둥에는 선명하게 오른 쪽 손바닥 자욱이 나 있다. 반들반들하게.
성당 정면에는 시청, 오른 쪽에는 예전에는 주교관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국영호텔이 된 건물이 있고, 왼쪽에는 성당 부속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야고보 성인의 상징은 지팡이와 조개가 얹어진 넓은 모자. 야고보 성인은 베드로,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분이다. 성 야고보 성지 순례를 끝낸 뒤 점심 식사 후 중세의 대학도시 살라망카로 이동. 4시간 여를 달리는 가운데 비는 걷히고 끝없는 올리브 농장과 평화로운 농촌, 황홀한 노을을 벗하며 어느덧 살라망카의 레지오 호텔에 도착, 계란요리와 와인, 돼지고기 스테이크로 저녁 식사.
산티아고 꼼포스텔라
▷ 다섯째 날 - 1월19일(금)
동이 트기 무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살라망카 성당으로 이동. 살구빛의 건물로 둘러싸인 마요르광장은 은은한 조명이 밝혀진 채 아침을 기다리고 있고 중앙의 종은 금세 울릴 듯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무덤처럼 어두운데 우리는 침묵 속에 피에타 상이 모셔져 있는 경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현지 신부님들과 우리 신부님들의 공동집전으로 미사는 진행되었다. 미사 뒤 산티아고 기사단의 조개의 집을 밖에서 관람하고 십자가의 사도 성 요한이 공부했다는 신학원의 건물도 잠시 들여다보았다. 당대에 가장 힘이 있었다는 기사단의 집은 현재 은행이 들어서 있다. 예나 지금이나 힘있는 존재들의 소유인 조개의 집이다. 도시 전체가 대학의 거리로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된다.
미사가 끝나고 잠시 거리를 순례하노라니 거리는 숨쉬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짙은 안개를 뚫고 알바 드 또르메스로 향했다. 성녀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임종 경당이 있는 곳으로 정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데레사 성녀의 임종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성인의 심장과 팔 한쪽의 뼈, 그녀의 육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 특별한 십자가도 눈에 띈다. 데레사성녀는 수도원 건립에 몰두하시며 동분서주 늘 걸어 다니셨단다. 그날도 이 수도원을 향해 걷다가 갑자기 내리던 비를 피해 잠시 나무그늘에 머물렀는데 바로 옆의 나무에 벼락이 쳤고 소나기가 그친 뒤 벼락맞은 나무를 보니 선명히 십자가모양이 새겨져있었다고 한다. 그 벼락맞은 나무의 십자가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화는 또 있다. 관상기도 후 데레사 성녀는 복도 끝에서 한 어린이를 만났는데 이 어린이는 “나는 데레사의 아기예수입니다.”라고 말했단다. 성녀는 자기도 모르게 “저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입니다”라고 말했단다. 성녀가 기거하시던 방, 사도 성 요한 등을 면회하셨다는 봉쇄 면회소 등을 순례하고 아빌라로 이동. 날씨는 더 할 수 없이 화창하게 변해 아빌라의 장대한 성이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 왔다. 성 아래 버스를 두고 땀을 흘리며 성안으로 들어가 아빌라의 생가에 세워진 성당 방문, 탈혼 체험의 방을 순례하고 묵상하였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탈혼의 경지에 이르는가.
성안의 유서깊은 식당 ‘탑’에서 하몬과 계란, 빵가루가 들어간 토속스프와 생선 구이,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고 광장으로 나오자 재래시장이 서고 있었다. 꿀, 말린 과일. 만사니아 차 등을 사고 성벽 아래 모여 사진 찍기 좋다는 풀밭에서 찰칵 찰칵. 입구와 반대편으로 나와 버스에 올라 세고비아로 향발. 세고비아에 도착해 십자가의 성요한이 운명하신 성요한 수도원성당을 순례. 성당에서 ‘어둔 밤’을 이혜영자매가 낭송하고 다 같이 한 동안 묵상. 데레사성녀는 산문으로, 십자가의 성요한은 운문으로 스페인문학의 두 기둥이다.
이 성을 모방해 디즈니랜드가 탄생되었다는 알카사르(성)아래서 성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 성 내부 관람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세고비아 대성당도 시간이 늦어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번화한 상가를 거쳐 로마시대에 건축되어 지금까지도 수로로 쓰이고 있다는 로마수로교를 관람. 때는 금요일 오후인지라 서울의 신촌거리나 강남역 주변을 방불케 인파가 넘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20여 분간 거리의 벤치에 앉아 건물들과 사람구경하는 여유를 모처럼 가졌다. 중세도시를 활보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의 그림 한 폭 같았다. 저녁을 먹고 톨레도로 이동. Eurostar hotel에 짐을 풀었다. 짙은 안개와 적막에 싸인 거리는 다소 몽환적으로 우리가 또 하나의 중세도시에 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개의 집
살라망카 대성당
알바 데 또르메스
싼타 테레사 수도원
아빌라 대성당
십자가의 성요한 성당·수도원
알카사르 성
세고비아 대성당
로마 수로교
▷ 여섯째 날 - 1월 20일(토)
짙은 안개 속에 숙소를 츨발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동료들의 박해를 피해 탈출했다는 갈멜수도원 유적지를 순례. 수직의 높은 성벽은 고요하고 표지만이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곧 이어 톨레도 성 안으로 들어가 대성당을 관람. 보물방과 벨라스케스 갤러리, 로코코양식과 신고전주의의 양식을 대변한다는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성가대석을 관람. 성가대석에 모셔져 있는 백색성모상은 이곳의 자랑이라고 한다. 제의방의 제의들은 화려함을 넘어 현란하기까지 하여 중세 교회의 위세를 가늠하게 했다. 기념품가게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비좁은 유대인거리를 요리 조리 지나 산토도메 성당에 모셔져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한 점 ‘오르가즈(Orgaz)백작의 매장’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 1년에 오천 오백만 명이 이곳에 오며 관람료가 2유로라고 하니 참 대단하다. 산토도메 성당은 대성당에는 갈 수 없었던 정말 가난한 사람들의 성당이며 오르가즈는 이 어려운 사람들의 따뜻한 이웃이었다는 얘기가 더 위안이 된다.
어느 덧 점심 시간, 성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고 톨레도 성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로 향했다. 아침에 안개가 끼면 날씨가 좋다고 했던가? 정말 화창하기 그지 없어 웅장하고 고풍스런 톨레도 성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 한편으로는 영화 ‘엘시드’의 배경이 되었다는 성이 보이고...
순례의 길은 지체할 수 없는 법. 아쉬움을 사진 찍기로 대신하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그 유명한 프라도 미술관에서 우리는 벨라스케스와 고야, 루벤스를 집중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 보려면 일주일이 걸린다니 이것도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마요르광장을 거쳐 마드리드 왕궁을 컽으로 보고, 성벽의 성모상으로 유명한 주교좌 성당과 역사공원을 지나 고려정으로 향했다. 야호 오늘 저녁은 한식이다. 된장찌개와 한치 볶음, 푸짐한 야채 쌈과 김치로 정신없이 밥을 먹는 일행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 된장찌개를 먹어도 반주는 와인이다.
십자가의 성요한 탈출 수도원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서당 내 백색 성모상
톨레도 대성당
▷ 일곱째 날 - 1월 2l일(일)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가량 버스로 달려 로에체스 마을의 봉쇄 가르멜 수도회로 갔다. 열 두 분의 수녀님으로 이루어진 수도공동체, 이 먼 곳에 손숙경마리아 수녀님이 계시다. 원장수녀님의 짧은 환영의 말씀에 이어 주일미사가 집전되었다. 역시 스페인에서 공부하시고 톨레도에서 우리 일행과 잠시 합류하신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 집전하셨다. 미사 후 만남의 방에서 손마리아 수녀님과의 짧은 만남을 나눌 수 있었다. 이 수도원에서 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말로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동양인이 서양에서 수도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 순간이 순교이며 그래서 은총” 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우리는 대 데레사의 글로 이루어진 ‘아무 것도 너를’ 이라는 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수녀님을 감히 격려하였다. 우리는 침묵 속에 수녀님과 인사하고 또 침묵 속에 버스를 타고 그리고 조용히 수녀님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다. 오는 길에 라만차 광야의 휴게소 ‘티피코’에 들려 커피와 만사니아 차를 한 잔 마시고 작은 토산품도 구경하고 길게 줄을 서 화장실에서 볼 일도 보았다. 라만차 광야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동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들판으로 유명하다.
다음 행선지는 코르도바. 장거리를 이동하여 메스키타를 순례하였다. 유대인의 번영과 아랍인의 문화와 크리스찬의 신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메스키타와 유대인 마을을 순례하고 스페인 전국에 단지 두 개만이 남아있다는 시나고가를 방문하였다. 그 하나는 톨레도에 또 하나는 이곳 코르도바로 유대인 지구에 있다. 그러나 주일은 폐쇄,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네카의 고향이며, 토마스아퀴나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마이모니데스의 고향, 시나고가 바로근처에 마이모니데스의 앉아 있는 동상이 친근하게 우리를 맞았다. 8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메스키타의 성당에서는 일요일은 3번, 평일에는 1번의 미사가 봉헌되고 있단다. 유대인의 주거환경을 볼 수 있는 마을 순례도 감칠맛 난다.
노을이 지고 있는 메스키타의 오렌지정원과 코르도바를 뒤로 하고 우리는 그라나다로 향했다.
로에체스 가르멜 수도회
라만차
메스키타
▷ 여덟째 날 -1월 22일(월)
또다시 월요일.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 산토 안젤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이기락신부님께서는 “대사제 이사야는 새로운 계약의 시대는 피로서만 열린다고 하셨다며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회상할 것”을 강조하셨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며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절망하는 죄도 이에 해당한다고 강론하셨다. 순례는 변화를 위한 것이며 변화의 내용은 회개라는 말씀이 화살처럼 꽂힌다.
미사 후 그라나다 대성당을 찾았다. 스페인을 가톨릭국가로 완성한 걸출한 여장부 이사벨여왕과 그녀의 남편 페르디난도, 어린 아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기념관을 나오는데 중세 유럽의 가톨릭은 사실 그녀에게 빚을 진 셈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오늘 순례의 핵심은 알함브라 궁전. 엘비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이사벨이 아랍의 그라나다 왕국을 몰아낸 것을 자축하기위해 건립했다는 승리의 광장 공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알함브라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권 예매는 필수이며 시간을 1분이라도 어기면 입장할 수 없다는 가이드의 엄포에 가까운 주의로 우리는 순간 긴장.
그러나 알함브라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세의 느릿하고 여유로운 길과 붉은 성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의 궁전에 드디어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던데 실망하지 않아도 되었다. 1238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1년에 완공되었다는 알함브라는 본래의 모습은 96%가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4%에 불과하니 상상력을 동원해 관람하라고 현지 가이드가 일깨운다. 왕이 사람들을 접견하고 공무를 집행하는 공간과 황실의 여인들이 기거했던 하렘, 적군 탐지를 위해 마련된 요새였으나 지금은 그라나다 전 시가지를 굽어 볼 수 있는 전망대, 왕이 사냥을 즐기며 피서하기 위해 지었다는 여름궁전,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슬람지구를 관람하고 나오니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지고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조경된 숲을 빠져나오며 모두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궁녀들이 머물렀다는 지하의 공간은 아름다운 채색은 생략된 일터일 뿐이었다.
산토 안젤라 성당
그라나다 대성당
알함브라 궁전
▷ 아홉째 날 - 1월 23일(화)
우리는 또 다시 장거리를 이동, 세비아로 갔다. 콜럼브스의 도시이자 해양탐험의 출발지인 세비아, 스페인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세비아 대성당은 명성에 걸맞게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아라비아식 종탑은 화려한 내부에 비해 소박하고, 장엄제대 후면의 목제 장식은 길이만 20미터에 목제조각을 도금한 금의 무게가 2톤에 달한다고 했다. 13세기에 제작되었다는 성모상이 핵심이다. 기념관의 전시품들은 금과 각종 보석들의 잔치로 신대륙을 통해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내용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웅변하고 있었다. 중세 교회가 왜이리 금부치와 보석을 좋아했는지 모를 일이다. 세비아성당의 한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비탈계단을 뛰듯이 걸어 종탑이 있는 전망대에 올라 시가지를 조망하고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정원에서 일행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며 교회의 흥망을 잠시 되새겼다. 한때 이 세비아의 가톨릭인구가 750만 명에 달했다는데 지금 유럽가톨릭의 현실은 어떠한가?
봄처럼 따뜻하고 화창한 도시를 잰 걸음으로 걸어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1시간 20분간의 비행동안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만 자고 아래를 보라고 뒷자리에 앉으셨던 신부님이 한 말씀 하셨다. 지중해 해안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지도를 보니 발렌시아 지역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는 동북쪽, 어둠이 내린 공항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쌩하다. 새 가이드와 새 버스가 우리를 맞았다. 한국식당 Lee에 들어서자 텔레비전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갈비찜, 김치, 깍두기, 김치두부국, 버섯나물, 스텔라 맥주 한 잔으로 건배하며 바르셀로나 입성을 자축했다.
바르셀로나는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 현재 스페인 국민총생산의 20%를 담당하고 있으며 자부심이 대단하고 스스로 스페인보다 프랑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곳 시민들의 생각이란다. 남부 스페인과는 말도, 인심도, 경제력도 아주 다르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황영조가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땄으며 저 유명한 가우디의 고장일 뿐이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어둠 속의 거리 풍경은 정말 남부 스페인과는 다른 것 같았다. 산업도시의 냄새가 짙은 도시.
스페인 광장
세비아 대성당
▷ 열째 날 -1월 24일(수)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자 철저한 도시계획과 고도제한으로 일사불란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구 시가지를 관통해 구엘공원으로 갔다. 다소 쌀쌀하고 바람이 조금 있었지만 태양의 나라 스페인이라는 말에 걸맞는 날씨다. 공원이라기 보다 거대한 예술품을 전시해 놓은 듯한 공원, 여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는데 멀리 지중해가 우리의 시야를 탁 트이게 하고 눈부신 태양은 구불구불한 세라믹 벤치와 광장을 찬란히 비춘다. 파도터널의 산책로를 걸어 그리스신전을 연상케 하는 장터에 서니 햇빛은 더욱 따사롭다. 우리에게도 이런 공원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우디의 성가정 성당으로 향했다. 탄생의 문인 동쪽 문 멀리서 가우디의 작품을 찬찬히 살피고, 수난의 문인 서쪽 문을 통해 지금도 계속 건축 중인 성당 내부와 가우디의 기념관을 관람했다. 속죄의 마음으로 성당을 주님께 봉헌하고 그의 모든 건축물에 반드시 십자가를 삽입했다는 가우디, 그러면서도 우주와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가우디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나의 머리속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태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제자와 후손들에 의해 백년이 넘도록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성당을 떠나며 훗날 다시 이곳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성전들을 집중 순례하다 만난 현대의 이 성당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몬주익 언덕과 붉은 악어 꽃이라고 불리운다는 알로에 꽃과 선인장, 그리고 기세등등한 용설란이 무성한 몬주익 전망대에 서니 바르셀로나 신시가지는 물론 지중해가 더욱 가깝게 발아래 펼쳐진다. 해양박물관과 세관을 지나 바다의 람브라스 다리를 건너 지중해를 향해 힘차게 팔을 뻗고 있는 콜럼브스의 동상을 바라보며 점심을 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뒤로 하고 검은 모자상과 이냐시오 성인이 3일동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며 회심하였다는 몬세랏 성지로 향했다. 1025년에 지어져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고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이 있는 몬세랏. 천 년의 신앙의 신비를 간직한 몬세랏은 이탈리아의 수비야코를 연상시켰다. 간 밤에 내린 비로 군데 군데 낙석이 보이고 멀리 눈 덮인 피레네 산맥도 보였다. 검은 성 모자상에 경배하고 경당에서 프란치스코 드 살 프란치스코 기념미사를 드린 후 하산하며 1,000년에 세워졌다는 산 중턱의 성세실리아 수도원을 돌아보았다. 갈 길은 멀고 우리는 필라르 성모성당이 있는 사라고사를 향해 갔다.
바로셀로나 구엘 공원
성가정 성당
몬세랏
▷ 열 하루째 날 -1월 25일(목)
숙소에서 걸어서 사라고사 주교좌성당과 필라르 대성당을 순례했다. 1948년 비오12세 교황께서 방문하시어 성당을 바실리카로 명명하셨으며,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셨다는 표지가 나란히 벽에 부착되어 있다. 광장에는 뜻밖에도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림으로 만났던 고야의 무덤이 있고. 그의 묘비명은 “이성과 결별된 판타지는 괴물을 낳는다. 그러나 이성과 결합된 판타지는 아름다운 예술을 낳는 어머니가 된다.”고 쓰여 있다고 미사 강론 중에 신부님이 말씀해 주셨다. 필라르 대성당에서는 성무일도를 겸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중앙 제대와 성가대석이 마주하고 있는 양식은 대성당 어디서나 같았는데 그 쓰임새의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두 시간이나 계속된 성무일도와 창 미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끝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였다. 성모님께서 성 야고보에게 발현하셨다는 기둥에 경배하였다. 이곳에 며칠 묵으며 저 창미사에 매일 참례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지고.
숙소의 짐을 찾아 이냐시오의 생가가 있는 로욜라로 향했다. 산천이 눈으로 뒤덮였다. 전날 폭설이 내렸단다. 경찰들이 나와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빨간 베레모에 회색 자켙, 빨간 색의 승마복 바지에 검은 부츠의 경찰은 아동극의 한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교통 통제로 아쉽게도 로욜라 행은 불발, 40km만 가면 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이제 국경을 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향했다. 국경 도시 이룬(Irun)에서 스페인 가이드 홍승연씨와 헤어지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그대로 프랑스의 루르드로 달렸다. 계곡의 물은 힘차게 흐르고 피레네 산맥의 설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순례의 환상적인 장면의 절정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짐을 푼 곳은 루르드 성지에서 10분 거리도 안되는 아메리카 호텔.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수녀님은 김성자 글라시아 수녀님(예수성심시녀회). 이곳에 파견되어 4년째 한국인 순례객들을 위해 사목활동을 하신단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루르드의 성모님이 계신 마사비엘 동굴로 달려갔다. 우리의 성지순례는 파티마에서 시작하여 루르드에서 끝난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순례의 대단원의 막 앞에 우리는 서있었다.
끝없이 같은 소리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는 샘. 겸손한 모습으로 서 계신 성모님. 평생 한 번은 왔으면 했던 성지에 나는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동굴의 바위를 어루만지며 이 바위처럼 굳은 신앙을 청하며 노래로 삼종기도를 바쳤다. 수녀님께서는 루르드 성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처음 발현하신 표지를 안내하셨다. 우리는 각자 기도시간을 가진 뒤 숙소로 돌아 왔다. 한결같은 사랑, 그리고 쉼없이 흐르는 사랑의 인사로 성모님은 우리를 맞이하셨다.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루르드 박물관
루르드 성당
루르드 십자가의 길
▷ 열 이틀째 날 -1월 26일{금)
8시 30분 마사비엘 동굴에 모여 미사를 드렸다. 이기락 신부님께서는 우리의 성지순례가 이곳에서 마무리됨을 알리시고 순례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셨다. 또 이곳에서 피정하는 심정으로 머물 것을 요구하시며 알퐁소 성인의 말을 인용하셨다. “온 마음(정신)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들어가라. 홀로 머물러라. 그리고 새 사람이 되어 나오라.”
이를 위해 내적인 침묵을 견지할 것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성모님을 기억할 것을 주문하셨다.
미사 후 루르드의 벨라뎃다 박물관과 그의 생가였던 방앗간의 기념관, 방앗간에서도 쫓겨나 살았던 감옥의 단칸방(까쇼)에 꾸머진 기념관을 찾았다. 1857년에서 1858년 까지 여섯식구가 살았던 감옥의 단칸방은 벨라뎃다 일가가 얼마나 가난하게 그러나 오순도순 살았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방앗간 2층 벨라뎃다가 태어난 작은 방의 침대 위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놓여져 있었다. 벨라뎃다가 성모님 발현을 알리러 사제관을 찾았을 때 사제는 그 부인의 이름을 알아 올 것과 한 겨울에 장미를 피워 오라고 했다는데 이 겨울 싱싱한 장미 한 송이가 벨라뎃다에게 봉헌되고 있었다. 18번이나 이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에게 주신 가르침은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 였다. 왜 너에게 성모님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보잘 것 없기에 자신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성녀의 믿음이 루르드 성지 순례의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루르드샘의 침수와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로자리오 기념성당에서의 묵주기도와 성수 긷기, 촛불 봉헌 등 모처럼 묵상과 기도의 시간이 각자에게 길게 이어졌다.
벨라뎃다 기념관
까쇼 기념관
▷ 열 사흘째 날 -1월 27일 (토)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아침식사를 끝내고 툴루즈 공항으로 이동했다. 무수한 새벽별이 빛나는 가운데 북두칠성도 반짝이고 있었다. 어두운 버스 속에서 아침기도를 바치고 구노가 작곡한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를 반복해 불렀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며 루르드의 성수가 새지 않을까 조바심했다. 9.11테러 이후 모든 액체는 화물짐으로 부쳐야만 한다.
파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점심시간, 식사 후 세느강 주변과 에펠탑 등 시내 투어를 마치고 노트르담 성당으로 갔다. 파리 시내는 어디를 가도 복잡하다. 프랑스의 살아있는 영웅으로 불리었던 아베피에르 신부님의 장례식이 전 날 있었고, 오늘은 토요일, 노트르담 성당 안은 추모 인파와 순례객으로 정신없이 붐비고 사람들에 밀려서 들어가 잠시 피에르신부님의 사진을 향해 화살을 쏘듯 추모의 기도를 하고 나왔다. 이제 우리가 갈 곳은 프랑스 외방전교회와 기적의 메달성당, 외방전교회의 지하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해외 선교, 실은 순교하기 위해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며 파견되었던 현장(뜰)을 순례하였다. 앵베르, 모방, 샤스탕, 오메트르 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숙연해졌다. 파견의 의미가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곳. 순교의 출발 지점.
옆의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는 곧 미사를 봉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마지막 숙소로 향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 외방전교회
▷ 열 나흘째 날 - 1월 28일(일)
아침 6시, 호텔에서 주일 미사이자 순례단의 파견미사가 집전되었다. 은총과 감사가 응집된 미사는 우리에게 순례의 의미를 각인시키는 성찬의 잔치였다. 미사 후 아침식사를 한 뒤 개선문을 관람하고 12개의 도로가 뻗어있는 빠리 시가를 조망한 뒤 몽마르트 언덕의 예수성심 성당으로 향했다. 환락의 거리 무랑루즈 거리를 지나 24시간 성체현시를 볼 수 있다는 이 성당에서의 성체조배가 우리의 마지막 코스가 되었다. 쟝발잔이 은촛대를 훔쳤다는 베드로 성당에서는 오르간이 연주되고 있고, 거리의 화가들이 운집해 있다는 작은 광장은 아직 개업 전, 일이백년은 족히 넘었다는 카페들은 가격표를 밖으로 내걸고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차 대신 작은 골목길을 둘러보는 것으로 우리의 순례는 정말 끝났다. 그러나 집으로 가기까지는 순례가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법, 선진국 프랑스의 드골공항에서도 크고 작은 해프닝은 계속되었다. 뻑뻑한 문고리 때문에 화장실에 갇히는 게 아닌 지 당황하게 만드는가 하면, 짐 부치는 수속 중 자동벨트가 멈춰 작동하기를 마냥 기다리기도 하고, 무슨 사연인지 비행기 탑승권 검색대에서 새치기를 하는 일군의 프랑스인 무리를 만나지를 않나 이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예수성심성당
몽마르뜨
▷ 열 다섯 째 날 - 1월 29일(월)
아침 8시 10분, 예정대로 인천공항에 전원 무사히 도착, 착륙하기 무섭게 비행기 안에서부터 휴대폰이 켜지고 가족들에게 무사 귀환을 알리는 대화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이동통신 대국 한국에 왔다.
후회의 마음이 감격이 되었다는 진솔한 말씀을 하시며 우리의 목자 이기락 신부님은 상기되셨다. 강복을 받고, 우리는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각자 자기의 갈 길로 흩어졌다.
아디오스! 하느님께 이를 때까지 우리는 때로는 함께, 그러나 마침내는 홀로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하느님께 찬미. 성모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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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금 도움이 될까하여 미리 보는 성지순례 올려보았습니다. 여기 이 그룹은 14박 15일로 내년 저희 일정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로니모 수도원, 싼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세비야, 그리고 그라나다와 알람브라 궁전, 메스키타 등은 저희 이번 계획에 없는 코스입니다. 참고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