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나이를 연상시키는 별리의 15년, 어느 날, 건축사무소를 찾아온 서연,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하는 서연, 영화의 시작은 운명적 ‘삶의 고리’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서연에게 회사 직원은 승민의 학창시절에 대한 호기심어린 질문을 한다. 영화는 대학시절로 컷 백, 대학 강의실과 강의를 맡은 교수, 달동네와 풋사랑 커플(이제훈-수지)로 전환된다.
“자신이 사는 동네로의 여행,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 그것이 건축학 개론의 시작이다.”라는 교수의 말,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사랑의 축조방식이라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사랑은 숨 가쁘게 시작되었고, 서연을 알아가는 ‘먼 곳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순댓국집 아들 승민에게 약간의 뇌관이 존재한다.
*사랑, 그 서연 섬으로 가는 신비스러움
가족의 상실을 겪은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제주도라는 섬에 대한 신비(서연에 대한 신비)감으로 CD를 같이 듣게 되는 사이로 발전한다. 지금의 추억을 후일에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어깨에 기댈 수 있는 ‘기억의 습작’은 빌려줌의 대상이 된다. 이기적 유전자를 떼어 내고 가슴 아프고 아쉬운 과거를 만들기 위해 감독은 하나씩 스키마를 쌓아간다.
과거를 유추하는 장면들이 바람처럼 흩어지면 위선과 내숭에 관한 에세이가 쓰여 진다. 서로를 탐색하는 유쾌한 장면이자 고답적 방식이다. 쓸쓸함과 외로움은 자연스럽게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의사이고, 개포동에 살고 있고..’ 와 같은 대사가 던지는 허무의 알갱이들이 쏟아진다. 이번에는 남편과의 이혼의 상처를 안고 있는 서연이 뇌관을 쥐고 있다.
스릴이 쌓이는 가운데, 사랑의 감정을 탑재한 우정은 어설프고 정답이 없을지라도 누구에게나 한번쯤 스쳐지나갔을 ‘사랑’을 위한 전투적 동지로 부각된다. 정작 본인도 정답을 모르지만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모습들은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친구의 연애특강으로 승민의 소심함을 표현하는 장치들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감을 산다.
영화에서 가족, 주변, 가족의 직업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것도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건축한 개론』은 역사, 사회, 이데올로기 등의 골조 있는 거창한 영화 창작 자세와는 다른,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순수한 창작정신과 작은 울림으로 촘촘히 써내려간 이용주 감독의 동경(銅鏡)에 비친 모습이다. 이념보다 앞서는 순수를 택한 작품이다.
승민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낯섦, 수줍음, 이질감 같은 것들과 시골스러움 들이 순수로 연결되는 통로라 생각하면 세상은 모두가 보살펴야할 공간임에 틀림없다. 승민의 품성은 곧장 영화로 달려와 세련된 건축으로 신분 상승과 자신감 있는 현실로 바뀐다.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집을 못하던 승민은 서연의 등장으로 자신의 상표로 집을 짓게 된 것이다.
바다를 품은 여자 서연, 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연의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되새겨본 승민의 과거는 작은 질투와 오해로 야기된 자신의 옹졸함을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설계모형 같은 자신, 사랑인지도 모르면서 스쳐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은 집을 짓는 것, 사랑을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참 절묘한 사랑에 대한 수사학이다.
*음미하는 영화, 그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투른 승민은 서른다섯의 나이에도 별반 변함이 없다. 집을 지어 가면서 과거의 기억은 더욱 또렷이 떠오르고, 분노에 차 집모형을 버리고 절교를 선언하고 첫눈 오는 날의 약속을 파기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언제나 청춘과 지난들은 아름다운 후회를 남기는 법이다.
이 영화가 아름답게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처음 만나는 도입부, 영화의 전개 중에 튀어나온 ‘혼자된 사연’에 대한 언급, 유학 포기에 이어지는 약혼 포기, 젊은 날의 선배에 대한 오해 등이 있지만 절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글들이 논리적 무장은 하되 고급에세이로 변해져 있는 현실에서 이 영화는 그 오브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집의 완성은 종지부다. 사랑의 기로이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집은 완성된다. 결정해야 한다. 유학을 포기하면 서연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끈을 연결 시켜주는 시디플레이어가 도착된다. 둘이 다시 음악을 같이 들을 날이 올 것임이 암시되면서 영화는 유쾌한 결말을 맞이한다.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처럼『건축한 개론』은 청춘교과서 목록에 새로 추가된다.
『건축한 개론』은 분석적 입장에서 볼 영화가 아니다. 시를 음미하듯, 선율에 실려 춤추듯 수채화를 한편 보는 느낌으로, 느리고 여린 감성으로 그때의 연애감을 감지해내면 좋을 것이다. 아직도 서연과 승민의 사랑은 푸른빛으로 남아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다. 감상적 영화보기는 순수를 살리는 종모이거나 시적 상상력을 개발하는 촉매이다.
장석용(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