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총선 출마... 신군부 압력으로 중도 포기" 기사등록 : 2007-11-30 오후 5:30:34
“5·18은 신군부가 작정을 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5·18 진압군 지휘관들이 장관이 되고 표창을 받을 수 있습니까”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31사단장이었던 정 웅(79) 전 국회의원의 말이다.
“저는 당시 부하들에게 무혈진압을 강조했으나 명령계통이 이원화돼 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5월 18일까지는 ‘육군본부 - 소준열 2군 사령관 - 윤흥정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 - - 정웅 31사단장 - 3·7·11 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정식 지휘라인이 가동했습니다.
그러나 5월 19일부터는 다른 명령체계가 가동했습니다.
즉 ‘육군본부 - 공수특전단 - 공수여단’으로 지휘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 저의 명령이 밑으로 하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정 전 의원을 지난달 28일 서울 청담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 15년여가 지나서 기자 만나기를 꺼릴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는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중학교 친구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 두 시간 이상 정 전 의원은 담담하게 과거 기억을 되새겼고 현재 생활을 편안하게 소개했다.
순천에서 태어난 정 전 의원은 순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49년 육군 호국군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30년이 넘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정리된 후 군에서 정규군 외에 호국군을 모집했습니다.
한 달에 3주는 직장에 다니고 1주만 군에서 근무하는 것이 호국군이었는데 당시 젊은 공무원 사이에서 호국군사관학교 입교자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자원했지요.
소위로 임관했고요.” 그러나 호국군은 창설 1년여 만에 해산된다.
“방위군이 창설되면서 호국군은 해산됐습니다.
그런데 방위군 측에서 소령을 달게 해준다면서 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무원 생활을 다시 하려고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6·25가 발발했습니다.
그래서 군에 소집됐지요.” 정 전 의원은 이후 32년간 군생활을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군사학교 교관만 8년을 했다.
“6·25 때 초등군사반 장교교육을 받는데 성적이 좋다고 교관으로 남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1년 동안 교관으로 지냈지요.
그리고 나머지 2년은 전쟁 현장에 뛰어들었고요.
또 소령 때는 상무대 보병학교 교관을 5년이나 했습니다.
중령 때도 진해 육군대학에서 2년 동안 교관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보병학교 교관을 대표해서 ‘교수능력 향상대회’에 참가했는데 25명 참가자 중 1위를 했습니다.” 정 전 의원은 1973년 사단 참모장, 1974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기획과장을 거쳐 1976년 준장으로 진급하며 별을 달았다.
“1976년 준장 진급자는 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호남 출신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서울, 경기, 충청 출신이 각 3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영남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장성진급자 중 호남 출신이 5명 정도 됐고 지금은 3∼4명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 전 의원은 1980년 1월 광주의 향토사단인 3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신군부에 의해 5월 30일 해임됐다.
“신군부가 저에게 5·18의 모든 책임을 떠넘긴 것이지요.
가해자는 모두 진급을 하고 나중에 장관을 했는데 어찌 보면 저도 피해자인 셈이지요.” 정 전 의원은 전역 이후에도 보안대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사생활을 침해받았다.
5·18에 대한 진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한 신군부 측에서 정 전 의원을 견제한 것이다.
그러던 1981년 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3월에 11대 총선이 실시되자 그는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매도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시민을 폭도, 불순분자, 용공분자 등으로 불렀으니까요.
그래서 국회에 들어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당을 찾아갔지요.
하지만,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무소속으로 광주 동구에 출마했지요.” 하지만, 정 전 의원은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법으로 정해진 네 번인데 이미 두 번 유세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저의 연설 내용은 ‘국회에서 5·18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보안부대원들이 저를 납치해서 고문까지 가하면서 후보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아내가 인감을 가지고 와서 사퇴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차에 태워서 광주일보사로 갔습니다.
사퇴 기자회견을 하라고 했습니다.
차 안에서 기자회견문도 줬습니다.” 후보 사퇴 후에도 보안부대의 감시는 계속됐다.
정 전 의원은 1985년 치러진 12대 총선에도 나갈 수 없었다.
정 전 의원의 고난의 세월은 이렇게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7년.
같은 교회에 다니던 고려대 이문영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됐고 민추협에도 들어갔다.
1987년 8월부터는 민추협 부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0월엔 평민당에 입당, 안보·국방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87년 대선을 도왔다.
/박지경기자 jkpark@kwangju.co.kr /사진 = 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약력
▲1928년 순천 저전동 출생 ▲순천중(5년제), 육군호국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31사단장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평민당 안보·국방위원장 ▲13대 국회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