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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산실(産室)을 찾아서 5
김철교 (시인, 배재대교수)
11. 아홉째날: 디자인, 골프 그리고 시인(詩人)
오늘의 주요 일정은 영국 디자인의 메카 글래스고우(Glasgow), 골프 역사의 현장 에어(Ayre), 스코틀랜드의 대표시인 로버트 번즈(Robert Burns, 1759-1796)의 고향 알로웨이(Alloway)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가까운 스털링성(Stirling Castle)을 돌아본 후, 스코틀랜드 경제의 중심도시인 글래스고우를 찾았다. 스털링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한다고 하여 스코틀랜드의 운명을 건 전쟁이 자주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진 현존건물은 15세기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이후 건설된 것이다. 스럴링성 전시실에는 김대중대통령이 6.25전쟁 50주년에 보내온 참전 감사 편지와 북한깃발을 비롯한 한국전쟁관련 당시의 신문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대중대통령의 스털링 성에 있는 6.25참전 감사편지> <6.26참전 관련 신문기사>
에딘버러가 행정. 문화 중심의 도시라면, 글래스고우는 상공업 중심의 도시이며 매킨토시의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글래스고우 미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는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1868-1928)가 모교를 위해 설계한 대표작으로 1899년과 1909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글래스고우가 디자인과 건축의 도시로 명성을 얻은 것은 매킨토시의 덕택이다. 스코틀랜드 전통과 자연 그리고 일본의 심플한 형식에서 착안한 작품은 글래스고우 스타일로서 유럽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윌로우 티룸(Willow Tearoom)은 가구와 장식, 그릇, 종업원 의상까지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찻집이다.
21세기에는 상품들이 기능이나 효용성 같은 기술적, 실용적 측면보다는 고객들의 미적 감성에 호소하는 디자인에 의한 경쟁력이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예술성과 창의성이 산업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학교 교육도 문학, 음악, 미술 등에 보다 역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글래스고우 예술학교> <턴베리 C.C.의 클럽하우스에 있는 우승자들 사진>
글래스고우에서 에어로 이동하는 도중 턴베리 골프장(Turnberry Golf Course)에 들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대회인 브리티시 오픈(The British Open)이 이번 7월에 열리는 곳이다. US오픈골프선수권대회, 마스터즈대회, 미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와 더불어 세계 남자 4대 메이저대회의 하나이다. 1860년 창설되어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대회로서 전 세계 골프의 규칙을 관장하는 영국왕립골프협회(The Royal & Ancient golf club)가 주관한다. 공식명칭은 ‘The Open Golf Championship’이지만 흔히 ‘The Open’이라고 부른다. 8개 코스(스코틀랜드에 5곳, 잉글랜드에 3곳)를 순회하는데 모두 바다를 끼고 있으며 험난한 코스와 악천후로 악명이 높다.
골프 경기는 흔히 인생과 비유된다. 넓고 넓은 페어워이가 있음에도 흔히 옆으로 날아가 숲이나 벙커나 호수에 빠지기 마련이다. 마음을 비우고 힘을 빼고 유연하게 휘둘어야지 힘껏 후려치면 영낙없이 옆으로 도망가버린다. 인생과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는 비결도 마찬가지 아닐까. 또 티박스에서 그린까지는 먼 거리지만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갔다고 하더라도, 좁은 그린 안에서는 정말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해야 홀컵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진행상 돈내기하는 골프가 아닌 경우 OK하고는 구멍에 넣지도 못하고 그린을 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기만 하고 넣지는 못한다’는 좀 야한 유머가 딱이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열심히 일해서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과도 같다. 여하튼 세상일이 잘 안플릴 때, 그리고 어려운 상대와 협상을 할 때 골프는 좋은 돌파구를 열어준다. 비싼 값을 치루고라도 즐길만한 운동 중에 하나가 골프가 아닐까.
내가 처음 골프채를 잡은 것은 1980년 제1회 국제그룹 해외사업전략회의가 파리지사에서 열렸었는데 내가 속한 기획실에서 기획했던 일이라 직위가 대리에 불과하였지만 참여했던 적이 있다. 마침 양정모 회장이 파리에 근거를 둔 사업가와 골프를 베르사이유 가까이에 있는 생농 골프장에서 쳤기 때문에 수행하느라 골프장에 발을 처음 들여놓은 것이다. 한나절동안 경기가 끝날 때까지 심심해서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또 골프 스윙 연습하는 곳에서 기획실장으로부터 골프채를 잡는 법을 배우고 휘둘러 본 것이 생전처음이었다. 골프장 호수에는 백조들이 여유롭게 떠있고 아름다운 꽃들이 여기 저기 새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촌놈에겐 천국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정식으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이나 주로 방학때만 연습하니 겨우 100타를 넘지 않는 수준이다. 경영학과는 특성상 기업인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아 가끔은 골프에 초대받을 때가 있어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의 충고에 의해 말년에는 골프가 좋은 운동이라 하여 집사람에게 몇 번이나 배우기를 강권하였으나, 자기는 체질이 아니라고 여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늘그막에 부부가 골프를 치며 한나절을 대화하며 걷는 것은 참으로 그림같이 행복한 관경일 것 같다.
턴베리골프장은 브리티시 오픈 준비로 분주했으나 현지 가이드가 골프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어서 자세히 안내를 받을 수 있었고, 2층 클럽하우스에서 넓고 푸른 코스를 바라보며 마신 홍차의 맛은 일품이었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 3개의 골프코스(27홀)와 골프 아카데미, 5성급 호텔, 콘도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세계 골프 경기를 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유명한 골프장이다. 1차,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공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활주로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에어(Ayre)에 도착하여 라마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5시경에 나는 팀원과 헤어져 번즈가 태어나 자란 알로웨이에 있는 번즈국립공원(Burns National Heritage Park)로 향하였다. 시인 이름이 국립공원 이름으로 사용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한 곳이 아닐까. 공원지역에는 번즈 부모님 묘지가 있는 알로웨이 교회(Alloway Parish Church), 번즈 대표작에 나오는 탐오샌터 체험장(Tam O'Shanter Experience), 번즈 생가와 박물관(Burns Cottage & Museum) 등이 있다.
번즈와 관련된 지역은 생가가 있는 알로웨이, 농장경영에 실패했으나 결혼을 하게된 모클린(Mauchline) 그리고 마지막을 보낸 덤프리스(Dumfries)가 있는데 이번 여행에는 생가가 있는 알로웨이에 들렸다.
호텔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하기에 물어물어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길을 물었던 어떤 중년 신사가 자기 차로 번즈 생가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여 쉽게 갈 수 있었다. 차안에는 번즈의 시낭송 CD가 많았고, 가는 도중에 번즈의 시낭송과 노래(올드랭사인)를 들려주었다. 대단한 번즈 예찬론자였다. 번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섹스피어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의 시는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스코틀랜드 시골말로 스코틀랜드 자연과 시골 미인들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찬양한다. ‘탐오섄터(Tam o'Shanter, 1791)’를 비롯한 이야기시와, ‘빨갛고 빨간 장미(A Red, Red Rose, 1796)와 같이 자연과 여자를 노래한 서정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1788)과 같은 민요시가 유명하다.
‘탐오섄터’는 번즈의 유명한 시다. 스코틀랜드 위스키가 유명하듯이 스코틀랜드인들은 술을 좋아 한다. 주인공 탐도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이다. 장날 친구와 술을 마시고 밤이 깊어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알로웨이 교회를 지나다가,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나와 마녀와 도깨비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본다. 탐이 몰래 지켜보다가 들켜서 죽을힘을 다해 말을 달려 도망하는데 ‘짧은 속옷 치마(cutty sark)'을 입었던 명랑한 매춘부 유령 내니(Nannie)가 극성스럽게 따라붙어 다리까지 쫓아와 탐이 타고 있는 말의 꽁지를 잡아챈다. 그러나 꽁지 빠진 말을 타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름을 딴 커티샥이라는 스코트랜드 위스키도 유명하고, 그리니치에 전시되어 있는 옛 상선 이름도 커티샥이다.
번즈 아버지가 진흙과 돌을 이용하여 혼자 지었다는 생가 오두막집은 갈대로 지붕을 엮어 얹어 놓았다. 높이도 아주 낮고 크기도 아주 적은 전형적인 가난한 시골집이다. 아버지는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번즈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고 마을 학교에도 보냈다. 어머니는 오래된 스코틀랜드 민요를 번즈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자들을 사귀며 난봉꾼처럼 놀던 번즈는 178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남으로써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에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클린(Mauchline)이 있는데, 모클린 부근의 모스길(Mossgiel)에서 농장을 임대하여 경작을 했지만 실패하고, 1788년 덤프리즈로 이사하게 된다.
사업실패로 절망스러운 삶이었지만 그는 스코틀랜드의 로우랜드(Low Land)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전래 민요들을 모아 1786년 첫 번째 시집 <주로 스코틀랜드 방언에 의한 시집(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 1786)>을 출판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번즈는 공식적으로 11명의 사생아를 두었다고 밝힌 것처럼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1788년 진 아머(Jean Armour)와 결혼하게 되는데, 번즈보다 8살 연하로 벽돌공의 딸이었으며 그 마을의 미인이었다. 진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소문 나쁜 번즈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결혼을 반대했으나 번즈가 인기가 오르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말년을 번즈는 덤프리스 니스강 가까이에서 1793년부터 1796년까지 살았다. 지금은 ‘번즈 하우스 박물관’으로 남아있고 아내 진은 이곳에서 34년을 더 살았다. 마을의 번화가는 번즈의 길(A Burnz Trail)로 명명되고 있다. 번즈의 장례식은 대단했다고 하며 지금은 번즈하우스 길 건너편 세인트 마이클 교회에 묻혀 있다.
<번즈 국립공원 입구> <번즈 생가>
12. 열째날: 아일랜드(벨파스트와 슬라이고우)
내가 꿈에도 그리던 예이츠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박선부선생님(후에 한양대 영문학과 교수)으로부터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The Lake Isle of Innisfree)'과 에드가 알란 포(Edgar Allan Poe)의 ‘애너벨리(Annabel Lee)’를 배우고 암송한 기억이 항상 나로 하여금 행복한 추억 속에 잠기게 한다. 영시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리듬을 잘 살려서 암송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일랜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에어에서 스트랜레어(Stranraer) 항구까지 버스를 타고 달렸다. 09:55분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로 가는 페리를 탔다. 영국에서 이동할 때 사용했던 버스도 함께 배에 올랐다. 배위에서 2시간동안 쇼핑도 하고 음료도 마시며 아일랜드 여행 계획을 점검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지만 곳곳에 아일랜드 국기가 걸려 있다. 17세기에 아일랜드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 신교도들의 이주정책을 감행하였다. 아일랜드는 격렬한 독립운동으로 1920년에 독립했지만 신교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북아일랜드 지역은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영국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IRA를 만들었고, 북아일랜드 신교도들은 얼스터(Ulster) 지역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1969년부터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고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는데 영국정부군이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런던데리(Londonderry)에 가면 이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지금은 IRA의 무장해제 이후 과거와 같은 긴장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관광객에게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이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벨파스트는 17세기부터 조선업으로 명성을 날렸던 곳이다. 영국의 화이트스타사가 1911년 타이타닉(Titanic)호를 건조했던 조선소의 도크도 방문하였다. 동일한 설계로 3척이 건조되었는데 모두 침몰하는 불행한 종말을 맞았다고 한다.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는 배 한 척으로는 운항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항상 배가 두 척 이상 필요하여, 올림픽호를 먼저 건조하고 같은 해에 타이타닉호를 건조하였으며 조금 늦게 브리타닉호를 건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영국 사우샘프턴항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 1912년 4월 14일 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떠도는 빙산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였다. 건조 당시 '신(神)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낙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당시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에 벨파스트성을 구경하였다. 일명 고양이성(The Castle Cat)이라고도 하는데 현지 가이드는 7마리의 고양이가 정원에 있는데 모두 찾으면 장수한다는 설이 있다고 하여, 우리 팀들은 성 구경보다는 고양이 찾기에 열을 올렸다. 특히 ‘고양이가 짐짓 당신을 믿을만한 친구로 여기기 전에, 죽 한 그릇 정도의 존경의 표시는 필요하다(Before a cat will condescend/To treat you as a trusted friend/Some little token of esteem/Is needed, like a dish of cream)’는 T.S.Eliot의 싯구가 적혀 있고 그 옆에 음식 그릇에 얼굴을 넣고 있는 모습이 돌판에 새겨진 고양이 그림을 비롯하여, 살아있는 나무를 고양이 모습으로 전지한 것은 물론, 고양이 석상과 고양이 무늬의 바닥타일까지 다양한 모습을 정원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벨파스트 성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화재 등으로 소실되어 1870년에 지금의 성이 도네갈 백작(Earl of Donegall) 사저로 완성되었고 현재는 예식장으로 쓰이고 있다.
벨파스트성을 구경하고 2시간여를 버스로 달려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s Causeway)에 도착하였다. 연무암의 다각형 기둥들이 파이프 오르간, 거인의 모습 등 다양한 모양을 연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6각형 돌이 여기 저기 솟아 기둥을 이루고 있으나 사각형에서 10각형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자연유산으로 정해졌으며 중심부는 높이 솟아 벌집형태를 이루고 있고 해변으로 갈수록 다각형 기둥들이 이루어내는 경사들은 완만해 지고 있다.
<벨파스트의 타이타닉호 건조장> <자이언트 코즈웨이>
오후 6시경에 아일랜드 슬라이고우에 사는 석호철씨가 자이언트 코즈웨이로 나를 찾아왔다. 나의 아일랜드 문학기행을 안내하기 위해 사전에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지업체에게 팔려버린, 우리나라 새한미디어 아일랜드 공장에서 근무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더블린에서 여행사를 하는 박윤영 사장의 소개를 받아, 석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면서 예이츠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일행과 헤어진 나는 그와 함께 슬라이고우로 향했다. 노벨문학상을 탄 시머스 히니(Seamus Heaney, 1939-)의 고향인 런던데리를 지나갔으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머물 수는 없었다.
히니는 1939년 4월 13일 벨파스트 북서쪽에 있는 런던데리에서 화목한 가톨릭교 가정의 9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현재는 더블린에 살고 있다. 벨파스트의 퀸스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초기 시집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Death of a Naturalist, 1966)>에 실려 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채굴(Digging)’이라는 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던 토탄 채굴을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비유로 묘사한 시다. 실제로 히니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경험과 농장생활, 그리고 아내와 세 자녀를 포함한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2년에 아일랜드로 이주한 후 더블린과 옥스퍼드대학교 및 하버드대학교를 오가며 지냈는데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1989-94년 시를 가르쳤고, 하버드대학교에서는 1985년부터 석좌교수로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시집 <길 잃은 스위니(Sweeney Astray, 1983)>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의 저주를 받아 몸의 절반이 날짐승으로 변한 채 정처없이 대지를 떠돌아다니는 전설상의 아일랜드 왕에 관한 고대의 시를 현대적인 주제로 재해석했으며, 시집 <스테이션 섬(Station Island, 1984)>의 제2부에 실려 있는 표제시에서는 단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서술형식을 이용해, 북아일랜드의 고통스러운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여행을 떠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5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스웨덴 아카데미는 히니의 작품이 “일상의 기적과 살아 있는 과거를 찬양하는, 서정미와 윤리적 깊이를 지닌 작품이며, 정치적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고향인 북아일랜드의 갈등을 다룬” 점을 높이 샀다고 한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923), 조지 버나드 쇼(1925), 새뮤얼 베케트(1969)에 이어 노벨 문학상을 받은 4번째 아일랜드 작가가 되었다.
슬라이고우에 도착하니 오후 9시였다. 슬라이고우는 해안 경치가 뛰어난 아일랜드 서해안의 주요 항구의 하나이다. 이 일대는 신비한 이야기가 많은 지역으로 고인돌과 성채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예이츠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예이츠는 더블린 교외에서 태어났지만 외가가 있는 슬라이고우에서 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외가는 슬라이고우 지역의 부자여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다.
예이츠가 자주 말을 타고 찾았다는 벤불벤(Ben Bulben)산을 등에 지고 로시스 포인트(Rosses Point)에서 10시 15분에 석양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자연이 예이츠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워즈워스의 고향도, 예이츠의 고향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자연은 바로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시심을 키워주는 어머니가 아닐까.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이츠는 화가를 지망하여 1884년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서정시를 발표하는 등 1886년에는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1887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시인으로 인정받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예이츠는 영국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아일랜드의 전설과 시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89년 출판한 그의 처녀 시집 <오이신의 방랑(The Wandering of Oisin and other Poems)>’은 당시의 세기말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1891년 아일랜드 문예협회와 1899년 문예극장을 창설하여 아일랜드 문예운동의 중심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초기시는 대체로 아일랜드 전설을 소재로 한 것과 사랑을 읊은 낭만적인 것이었으며, 후기시는 상징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1917년 조지 하이드 리스(George Hyde-Lees)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심령술을 할 수 있어 영모로서 영혼의 말을 썼고, 그것을 이용하여 예이츠는 역사, 인류, 사후세계 등에 대한 철학적인 이론을 엮어내어 1925년 ‘환상(A Vision)’을 발표하였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하자 1922년 상원의원이 되고 다음해에 노벨상을 탔다. 1937년 요양차 남부 프랑스로 갔다가 1939년 객사하였으나, 1937년 탈고한 ‘벤불벤 산 아래(Under Ben Bulben)’에서 그가 지정한 슬라이고우로 1948년 이장되었다. 나는 으스름에 드럼클리프(Drumcliffe)에 있는 예이츠 무덤을 찾았다. 그의 말년 시 ‘벤불벤 산 아래에서’에 실려 있는 ‘냉철한 시선을 던져라, 삶과 죽음에, 말 탄자여 지나가거라’(Cast a Cold Eye / on Life, on Death / Horseman Pass by)라는 싯구가 묘비명으로 새겨져 있다.
저녁에 석선생님 댁에서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다. 보름동안 영국여행에서 거의 대부분이 양식이었고, 가끔 중국식을 먹었으나 중국식은 양식보다 못했다. 나는 전혀 음식을 가리지 않아 오히려 해외여행에서 현지식을 즐기는 편이나 보름만의 김치맛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슬라이고우에 있는 예이츠의 묘지> <락길호수 초입에 있는 기적의 샘에서 석선생님과함께>
13. 열 하루 째 날: 슬라이고우와 더블린
아침 일찍 일어나 8시에 예이츠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석선생님과 함께 집을 나서 락길(Lough Gill) 호수로 차를 몰고 갔다.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섬을 안고 있는 슬라이고우 지역의 넓은 호수로, 많은 전설들을 담고 있어 예이츠의 시적(詩的) 보고(寶庫)가 되었다. 맨 먼저 가톨릭에서 기적의 샘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토버날 샘(Tobernalt Holy Well)에 들려 석사장님과 함께 촛불을 켜고 기도하였다. 이 샘에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일요일인데 교회도 가지 못하고 여행을 하기 때문에 초미니 예배를 본 셈이다.
기적의 샘물을 마시고 한참을 차로 달려 이니스프리 호수섬(Inishfree Lake Isle)에 들렸다. 이니스프리 섬은 길호수(Lough Gill)에 있는 작은 섬이다. 슬라이고우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호수 안에 있는 섬이어서 크진 않아도 여름엔 숲이 우거져 아담하게 보였다. ‘이니스프리’라는 이름은 아일랜드어로 섬이라는 뜻을 가진 ‘이니스’와 야생 관목인 ‘히스’의 뜻을 가진 ‘프리’가 합친 단어로 히스로 덮인 섬이란 뜻이다. 이니스프리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에 프리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의 애인이 이 섬에서 자라는 열매를 따 달라고 졸랐다. 그 열매는 신의 음식이어서 용이 지키고 있었는데, 청년은 용을 죽이고 금단의 열매를 따서 먼저 맛을 보고서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를 슬퍼한 애인도 열매를 먹고 따라 죽어 두 연인은 호수 속의 낙원인 이 섬에 묻혔다고 한다.
드로마헤어성(Dromahair Castle)을 거쳐서 해즐우드(Hazelwood) 공원을 끝으로 락길호수의 드라이브를 끝내고 예이츠가 기거했다는 리자델(Lissadell)에 들렸다. 내부 수리중이라 구석구석 볼 수는 없었고 그저 외부만 구경하고 돌아섰다.
<헤이즐숲에 있는 예이츠 마을 안내도>
<이니스프리 호수섬> <슬라이고에 있는 예이츠 동상>
슬라이고우 시내(Sligo Town)로 돌아와 예이츠 재단 빌딩(Yeats Building)과 예이츠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예이츠 동상은 독특하여 바짝 마른 몸매에 걸친 겉옷이 알파벳(예이츠 작품)으로 가득차 있다. 눈이 원래 사시라고 하나 동상은 안경을 걸치고 있어 날카롭게 보인다. 미녀가 사랑하기엔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예이츠가 평생 쫓아다녔으나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모드곤(Maud Gonne)과의 사랑은 유명하다. 모드곤은 예이츠의 재능만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예이츠의 청혼을 여러번 거절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또다시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편지에 ‘당신과 나의 아이들은 시(詩)’라는 변명으로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가장 모범적인(?) 짝사랑의 사례라 할 것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가까운 바닷가 카페에 들려 석선생 내외와 커피를 마시고, 오전 11시 기차를 타고 3시간 후에 더블린에 도착하였다. 석선생이 우리나라 회사가 만든 기차라 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객실 내외장이 모두 멋있고 깨끗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철도차량 회사인 현대로템(Hyundai Rotem)의 상표가 출입문 위에 붙어 있었다.
더블린 역에 도착하니 박윤영사장 회사의 직원이 마중나와 있었다. 작가박물관, 조이스기념관, 내셔널 갤러리, 트리니티 대학을 거쳐 기네스 맥주 공장에서 벨파스트에서 헤어진 일행들과 합류했다. 나는 자이언트 코즈웨이에서 슬라이고우를 거쳐 더블린에 도착했지만, 우리 일행들은 벨파스트에서 바로 더블린으로 온 것이다.
더블린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리피강 북쪽은 신시가지, 남쪽은 구시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더블린은 세계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작가박물관은 1991년에 문학도시 더블린의 역사와 영예를 빛내고자 개관하여 과거 300여년의 아일랜드 작가들의 초상, 생활상과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예이츠에 초상과 관련 자료들, 특히 아름답고 기풍이 당당한 예이츠의 평생연인 모드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기뻤다.
<더블린 작가박물관의 예이츠와 모드곤 뉴스 스크랩> <예이츠의 초상화>
영국 소설의 선구자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는 더블린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에게서도 버림받은 고아였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성직자로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는 당시 영국의 정치, 종교,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우화적인 풍자로 가득 차있다.
더블린에서 태어난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대학 재학때부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은 작가의 인생관, 예술관, 도덕관을 투영한 모자이크 풍의 장편 소설로, 수려한 외모의 청년 도리언이 관능적 쾌락 추구와 무수한 죄과로 인해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관능적 향락주의의 말로는 41세 때 동성연애 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해진 채 파리에서 객사한 것이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의 비서이기도 했던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89)는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 정착하였고 프랑스어로 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의 성공으로 1969년 노벨상을 받았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였던 그는 조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에는 영어로 시집 <호로스코프(Whoroscope)>를 출판하였으나, 소설과 희곡은 불어로 씌어졌다. 모든 작품을 통하여 세상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이고 허무한 인간의 조건을 일상적인 언어로 묘사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더블린에서 태어난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가난하여 사환으로 일하면서 음악과 그림을 배웠으며 소설도 썼다. 아버지는 애주가로 가정생활에 무능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가사보다는 음악에 더 열중하였다. 일찍부터 음악과 미술에 눈을 뜬 쇼는 20세때 런던으로 나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1884년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예술에 있어서 사상성을 중요시하고 미적요소는 등한시하여 낭만주의는 일체 배격하고 사실주의를 지지하였다. 1903년에 연애이야기를 인류 진화론적 입장에서 다룬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으며, 1923년 잔다크를 다룬 <성녀 존(Saint Joan)>은 인물 성격면이나 구성면에서 뛰어나 섹스피어 비극이후 영국의 최우수 작품으로 인정받아 1926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95세에 유산의 대부분을 공익사업에 기증하라는 뜻과 영국문호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니라 생전에 살던 정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엄격한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04년에 애인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각국을 유랑하면서 교사, 은행원, 개인교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아일랜드와 고향 더블린을 대상으로 작품을 썼다. 1940년 취리히로 갔다가 이듬해 사망하여 취리히의 프룬테른 묘지에 묻혔다.
조이스는 프랑스의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 작품으로 출발하여 상징적 전위적인 작품을 써 20세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07년 일종의 연애시를 모은 시집 <실내악(Chamber Music)>을 발표하고, 1914년에는 모국의 정신적 현실을 진단하는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출간하였다. 1917년 출간한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7)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1918년부터 <율리시스(Ulysses)> 일부를 미국의 잡지 <리틀리뷰>에 발표하여 풍기문란으로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이스를 널리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1922년 파리에서 대본업을 하던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의 희생적 노력으로 <율리시스>가 간행되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 작품은 ‘오디세이’와 대응되는 줄거리로, 애인 노라와 첫 데이트를 한 1904년 6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을 세분화시켜, 두 주인공이 겪는 의식의 흐름을 좇아 18개의 일화로 엮어 놓고 있다. 각 삽화마다 숱한 은유와 상징을 자유분방하게 활용하고 각기 주제와 형식, 문체를 달리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테마와 등장인물과 장소의 연속성을 지닌 구성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조이스 스스로 ‘만일 더블린이 파괴된다면 나의 작품으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 할 정도로 더블린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매년 6월 16일에는 주인공인 블룸의 발길을 따라 더블린 문학순례 행사가 열린다. 엘리엇은 ‘신화를 사용하여 현대와 고전 사이에 대비를 솜씨 있게 다루는 방법으로 현대사라는 공허와 혼란에 찬 풍경을 통제하고 질서 짓고 거기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조이스의 작품체계가 너무 완벽하여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더 이상 무엇을 쓸 수 있었을 것이며, 굳이 더 쓸 필요가 있었을까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격찬하였다.
나는 예이츠와 가족들의 초상화를 보려고 국립박물관(National Gallery of Ireland) 21번방에 들렀다. 그러나 더블린 사람들은 예이츠 보다는 율리시즈에 더 열광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네스 맥주 공장 맨 꼭대기 층 전망대 겸 시음장은 유리창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제임스 조이스 작품에 나오는 글귀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비록 노벨문학상은 타지 못했지만 제임스 조이스를 가장 좋아 한다고 하다. 시내에는 조이스 다리도 세웠고 조이스 동상도 거리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블린 시내에 있는 조이스 동상> <더블린 기네스 맥주공장 전망대에 있는 율리시스 작품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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