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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쯤 읽어둬야 할 시론 2
◦ 글쓴이: 정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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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시 표현법의 중요성
1) 시는 표현이다
흔히 '시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즉, 어떤 방법으로 수사(修辭)하여 표현하느냐가 중
요하다. 훌륭한 시인은 적절한 수사법을 동원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의외로 산문을 풀어 놓거나 줄 바꿈이나 한 듯한 시를 쓰는 사람을 자
주 대하게 된다. 특히 요즈음 산문시가 마치 유행처럼 되어 글들을 풀어 놓은 경우도
자주 본다. 그러나 산문시도 어디까지나 산문의 형태를 보였을 뿐, 형식이나 내용은 설
명이 아니고 표현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생각을 노래하더라도 내용도 내용이지만 시로서
의 함축성과 표현이 있어야 한다. 예를 보자.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었습
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
들이 묻어 올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하 략)
--함동선의 <눈감으면 보이는 어머니>중 일부--
따 온 시는 함동선 시인의 최근 시집 중 한 부분이다. 상당히 긴 산문시이다. 어머니
를 북에 남기고 온 시인이 유년시절을 그리며 <길가의 달맞이꽃과 하늘로 나르는 고
추잠자리>를 표현한 대목이다.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피었고 고추잠자리가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별들이 묻어올 만큼>높이 날랐다는 표현을 보니 어떤 느낌이
드는가. 또 보자.
내 곁에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앉는다 향수(香水)보다 진한 속초나
군산 부둣가의 비린내와 묵은 땟자국 같은 내 백목가루 냄새가 어울려
한동안 부부처럼 앉는다 같은 버스 같은 속도 같은 소음 속에서 흔들
린다..........(하략)
-- 문덕수의 <운명> 중 첫연 --
문덕수 시인의 최근 시집 중 <운명>이란 제목의 시이다. 서로 모르는 다른 사람이 생
선내와 백묵 가루 냄새가 <한동안 부부처럼 앉는다>라는 대조적 표현은 어떠한가. 산문
시도 이렇게 훌륭한 표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다운 시가 되는 법이다. 시 표현이
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자유시라고 하더라도 시는 화려하게 장식된 산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말을 줄만 끊어 놓는다고 시가 될 수는 없다.
2)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시란 어떤 면에서 보면 사물을 인식하고 사물의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다. 만일 시인이
산을 노래한다고 보자. 어떤 시인은 산의 빛깔에 초점을 맞출 테고, 어떤 시인은 꽃이
라든가 나무를 노래할 것이다. 또 어떤 시인은 산에 숨겨진 문화를, 또는 산에서 느낄
수 있는 에로티즘을 노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특성이다. 그러
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 표현은 공감과 아름다움, 더 나아가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사물을 어떻게 들어내야 하는가를 보
자. 우선 다음 방법으로 시 쓰기를 전개시켜 보라.
첫째, 눈에 보이는 것이나 또는 어떤 관념을 그대로 그려 본다.
둘째, 눈에 보이는 것의 의미를 캐면서 그려 본다.
셋째,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그려 본다.
예문을 보면서 검토해 보자.
예문 1>
.그녀의 눈은 아름답다.
.그 아이는 예뿐 옷을 입고 있다.
.산이 매우 푸르다.
.산마을에 비가 내린다
.한 겨울 집 모퉁이 양지 바른 곳
.파란 강물이 흐르는데
예문 2>
.그녀의 눈은 밤하늘의 별 같다.
.그녀는 얼음 같다.
.바람은 피리 소리를 내며 산등성이를 달린다
.강낭콩보다 더 푸른 물결 위에
.장독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앵두나무
예문 3>
.그녀의 눈은 터널 같다.
.예리한 강이 흐른다.
.하루에 한 마리씩 죽음을 먹어 치운다
.서슬 시퍼런 절벽을 기어올랐습니다.
.음성은 전염병처럼 나를 엄습하고
.조니 워커처럼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예문 1의 문장은 단지 그녀의 눈이 <아름답다>든가, 산이 <푸르다>든가, 산마을에 비
가 <내린다>는 등 어떤 상태나 사물을 그저 그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예문 2의 문장은
그녀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아름답다든가, 그녀가 <얼음처럼> 차다든가, 산등성이에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피리 소리>를 내며 <달린다>든가 물결이 <강낭콩보다 더>푸
르고, 앵두나무가 장독대 옆에 <쪼그리고> 있다는 직유 또는 은유적인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것이다.
반면 예문 3의 표현은 그 비유나 상상이 지나쳐 무었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이해가 잘
안되는 표현의 예이다. 읽는 사람이 왜 <눈이 터널 같다>고 표현했는지 어찌하여 강을
<예리하다>고 했는지, 왜 하루에 죽음을 <한 마리씩 먹는다>고 했는지, 절벽은 과연 <서
슬 시퍼런> 것인지, 어찌하여 음성이 <전염병처럼> 엄습한다고 생각하는지, 조니 워커는
꼭 누군가를 <기쁘게만>하는지 아리송하다.
즉, 예문 1 의 것은 사물을 그대로 풀어 놓은 것이고, 예문2 의 것은 상상력이 작용한
문장이다. 그러나 예문 3의 것은 상상력은 작용했지만 그 비유나 상상이 지극히 객관적
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비약되어 독자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도 줄 수
없는 표현이다. 혹자는 그것이 상징적인 표현법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또는 일상의 규칙
이나 관념을 파괴한 표현법이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규칙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규칙을 알고 있는 사람뿐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그러므로 시의 표현
도 최소한의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규칙을 파괴하고 싶을 때도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시란 말장난이 아니다. 또 시란 있는 것 또는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물이나 생각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나 매력 또는 아름다움을
들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표현 중 예문 1과 2가 다름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고, 3의
것이 왜 잘못된 표현인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문 2의 표현과 같이 상상력이
작용한 표현에 관한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그렇다고 예문 1같은 표현법을 시에서 쓸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시어로써 그
맛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때때로 유능한 시인들이 예문 1과 같은 단순 사실의 나열로
깊은 뜻을 숨긴 좋은 시를 쓰는 경우를 종종 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예문 3과같이 비
유가 지나치거나 혹은 말장난 같은 표현은 삼가는 것이 좋다. 철학 부재라고 비난당할
여지도 있을 뿐더러, 또 그런 표현법은 시의 주제나 앞뒤 문장을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는 고도의 표현 기술이 요구되니 습작기에 있는 사람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남의 작품을 읽을 때도 예문1과 2 또는 예문 3의 차이를 알고 읽으면 표현의 섬세함
과 그 깊이에 빨리 접근할 수 있다. 대체로 우수한 시인과 그렇지 못한 시인의 평가가
여기서 판가름되기 일쑤다. 왜냐 하면 시의 맛이 2번과 같은 형상화 단계에서 그 성패
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표현법에 눈을 뜨고 연습을 많이 해야 한
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잘된 표현 몇 가지를 예로 들겠다.
우선 예문 1의 표현법으로도 성공한 시의 경우를 보자.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 난다
........
바람보다 먼저 일어 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김수영의 <풀>중에서--
담담한 표현이지만 의미는 얼마나 강렬한가. 군사 정권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의
시다. 여기에서의 <풀>은 민중을 의미하며,<바람>은 독재 정권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예문 1과 같은 서술적 표현만으로도 강렬한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시는 이미
수준 이상의 작품이다. 여기 어려운 말이나 이해하기 난삽한 문장이 있나 찾아보라.
논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나 눈여겨보라.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 서정주의 <화사>중에서---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이>라고 했다. 논리의
비약이 있는가 보라. 서정주의 시는 시의 리듬에서도 거의 완벽한 셈이다. 자유시라고
리듬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시도 시적 리듬은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산문시라도
음악과 같은 리듬이 있어야 좋은 시라 하겠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엘리베이터
자판기 커피 마시고
전화 받다 구내식당
서류 뒤적이다 소주 마시고 지하철
오늘도 바람은 부는데
이웃집 김 대리가
결이 곱던 은행의 김 대리가
교통사고로 이승을 빠져나갔단다.
---이길원의 <두더지> 전문--
현대인의 생활을 예문 1과 같은 표현법으로 담담하게 나열했다. 현대인의 나약한 삶
과 허무, 그리고 산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그 속에 숨
기고 있다. 이처럼 예문 1과 같은 표현법은 그 속에 어떤 철학을 담지 않으면 시로서의
효과가 떨어진다. 평면적인 표현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3) 이미지가 형성되어야
이제 예문 2와 같은 표현법으로 쓴 시의 경우를 보자. 대부분 자주 읽혀지는 좋은
시라고 평가되는 시들이 이런 부류에 들어간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눈여겨 익히
고 연습해야 하는 표현법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 중에서-
나그네를 <구름에 달 가듯 간다>고 표현하니 어떤 기분이 드나. 이렇게 어떤 이미지
가 떠오르도록 써야 한다. 사실 이와 같은 표현은 단숨에 나오지도 않는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문덕수의 <선에 관한 소묘> 중에서-
선이 <달아 나고> 또<실뱀처럼> 뒤 쫒는다는 표현은 어떤가. 이렇게 상상을 자아낼 수
있도록 표현해야 맛이 나는 법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지고지순의 말을
아직 한번도 똑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눈빛의 반벙어리로
이렇게 짧은 한 세상을 가슴 치듯 살고 있음은
내 입속의 혀가 조금은 짧기 때문이다
내 입속의 혀에 너무 많은 때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김용오의 <두 사람에 관한 성찰>전문--
입속의 혀가 <짧으며> 입속의 혀에 <많은 때가 묻어 있다>는 표현을 보라. 어떻게 쓸
때 맛이 나는지 생각해 보라.
동백꽃 봉우리가 다하지 못한 몸짓
바닷물이 받아서 웅얼거리는 소리
---서정주의<봄추위>중에서---
동백꽃 봉우리가 다하지 못한 <몸짓>을 바닷물이 받아서 <웅얼거린다>는 표현은
어떤가.
음악은 가슴 깊숙이
날카로운 쟁기를 대고
밭을 갈고 있다
--문효치의 <음악> 중에서--
쟁기가 <날카롭다>는 비유에 무리가 있나 보라. 훌륭한 시인은 음악을 표현할 때도
음악이 <깊은 감동을 준다>든가 또는 <아름답다>는 등의 상투적 표현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날카로운 쟁기가 밭을 가는 것처럼>가슴을 파고든다고 표현한다.
또 보자. 예문 3의 경우와 흡사하나 공감을 주는 좋은 시를 보자.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 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최승호의 <공장지대>중에서--
공업지역에서 무뇌아를 낳은 사실이 사회 문제가 되었을 무렵 쓴 환경시이다.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라고 표현했지 <내 몸은 공장이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단어 한자에도 이 처럼 상식적 논리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보면 예
문 3과 비슷하다 하겠지만 앞뒤 문장의 연계를 보면 예문 2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듯했다.
- T.S.엘리어트의 <황무지> 중에서-
모더니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T.S. 엘리어트의 <황무지>의 첫 연이다.<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며 <겨울이 오히려 따듯했다>는 표현은 어떠한가.
소위 잘 지어졌다는 시들을 보면 예문 2의 경우와 같은 표현이 대부분임을 명심해
야 한다. 예문 2와 같은 표현을 많이 익히도록 하라. 또 어떻게 써야 제 맛이 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시를 써 보라. 단 한편을 써도 제대로 된 시를 써라. 좋은 시를 쓰
는 솟대 문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빈다.(*)
한 번 쯤 읽어둬야 할 시론 3
◦ 글쓴이: 정건우
http://cafe.daum.net/bok2206/1ILN/14
제4장 리듬의 중요성
1) 시의 음악성
시에도 음악성이 있어야 한다. 20년 전쯤이다. 박 목월선생님이 술좌석에서 이런 이야
기를 하셨다. "시와 음악과 그림은 회로가 같아 시를 좋아하면 음악도 그림도 다 좋아
하지. 음악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시를 좋아해." 사실이다. 시인치고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시인이 있던가? 음악성이 있는 시인은 시를 쓸 때도 운율이나
가락에 자연히 리듬을 타게 된다. 그래서 보다 수월하게 읽힌다.
우선 자신이 써 놓은 시를 큰소리로 낭송해 보라. 숨이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리듬이
맞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탁하게 읽힌다거나 발음이 어색해지면 이 역시 언어 선택
이 잘못된 경우이다
다시 말해 시를 쓸 때도 음악성, 즉 리듬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읽을
때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부드럽게, 운율이 맞도록 써야 맛이 난다. 낭송할 때도 막힘이
없도록, 마치 물 흐르듯 유연하게 읽을 수 있도록 써야 한다.
요즈음 산문시가 유행이지만 산문시에도 내재율이 있을 것이다. 한국어로 쓴 시만
리듬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영시는 특히 더 그렇다. 우리 시가 글자 수로 리듬을 맞춘
음수율(音數律)과 박자로 리듬을 맞춘 음보율(音步律)로 보듯이 영시도 단어의 구성이나
수의 배치로 맞춘다고 보면 된다. 영시의 한 예를 보자.
Like as the waves make towards the pebbled shore,
So do our minutes hasten to their end;
Each changing place with that which goes before,
In sequent toil all forwards do contend.
조약돌 깔린 해안을 파도가 달리듯
우리의 시간도 종말을 향해 서둔다
앞에 간 것과 서로의 자리를 바꾸며
꼬리이어 뒤쫓으며 앞으로만 간다
시간의 흐름을 파도에 비유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형식인 14행시 중 일부이다. 이
시의 어미를 보라. 1행의 shore와 3행의 before. 2행의 end와 4행의 contend를 보라.
그리고 1행과 3행, 2행과 4행의 글자 수도 비교해 보라. 영시도 이렇게 읽을 때의 리듬을
중요시했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시를 읽을 때 발음이 주는 유연성과 단어
의 배열이 주는 부드러움을 느낄 것이다. 번역도 리듬을 맞추어 해 보았다.
한국어로 쓰인 우리의 시는 영시보다도 더 리듬을 중요시 했다.우리의 전통 가락인
시조는 엄격히 자수를 제한해 가며 함축성 있는 표현을 요구했다. 혹자는 요즈음 현대
시에 그런 리듬의 규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호에서도 이
야기했듯이 진정 규칙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규칙을 알고 있는 사람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2) 자유시를 쓰기 전에 정형시의 음률을 익혀라
흔히 7.5조니 8.5조, 4.3.4조, 3.3.4.조니 하며 글자 수를 가지고 음률을 맞추는 것이
낡은 듯 보이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산문시도 마찬가지이다. 산문시의 긴 문
장도 읽을 때 호흡이 막힌다거나 끊김이 있다면 리듬에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복잡한 시 리듬의 규칙이나 음악적 박자론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아주 기본적인 규칙은 알고 있어야 한다. 간혹 요즈음 시를 쓰는 사람 중
에서 전혀 리듬을 무시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자주 읽혀지는 좋은 시들을 보면 대체
로 시적 리듬에 충실했다는 점을 밝혀 두겠다. 미당 서 정주 선생님의 경우만 보아도 전
통 음율(7.5조 또는 3.3.4조 4.3.4조 4.4조)에 충실한 시를 쓴다. 그의 <동천>을 예로
보자.
내 마음 속 / 우리 님의 / 고운 눈 눈썹
즈문 밤의 / 꿈으로 /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 옴기어 /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 나르는 /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 시늉하며 / 비끼어 가네
4.4.5/ 4.3.5/ 4.3.5/ 4.3.5/ 4.4.5 의 전형적인 음수율로 7.5조에 바탕을 두고 있
다. 소리 내 읽어 보라. 읽는 데 부드러움을 느낄 것이다.
김영랑(1903~1950)의 시도 한번 보자. 아직 시조의 영향을 받던 시대이지만 그도 7.5
조 또는 4.4조의 변형된 리듬의 혼합형을 사용했다. 리듬의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파격을
보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보자.
모란이 / 피기 까지는
나는 아즉 / 나의 봄을 / 기둘리고 / 있을테요
모란이 / 뚝 뚝 / 떨어져 / 버린 날
나는 비로소 / 봄을 여윈 / 서름에 / 잠길 테요
5월 어느날 / 그 하로 /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 꽃잎마저 / 시들어 / 버리고는
천지의 / 모란은 / 자최도 / 없어지고
뻗쳐오르든 / 내 보람 / 서운케 / 무너졌느니
모란이 / 지고 말면 / 그 뿐 / 내 한해는 /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 한양 섭섭해 / 우웁내다
모란이 /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 기둘리고 / 있을테요 / 찬란한 / 슬픔의 봄을
이 시가 발표될 1934년 당시는 4.4조나 7.5 조에 익숙해 있을 때이니 당시 독자들에
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 시를 일부러 한 음보씩
< / >을 그으면서 글자 수를 나누어 본 이유는 이 시도 7.5조나 3.3.4 또는 4.3.4
아니면 4.4 조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3행의
<뚝뚝>도 장음이므로 <뚜욱뚝>의 음보로 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도 마치 아기가 숨을 쉬듯 조용히 흐르는 특이한 리듬을 볼 수
있다. 그의 시 중<십자가>를 보자.
쫒아 오던 / 햿빛인데
지금 교회당 / 꼭대기
십자가에 /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 저렇게도 / 높은데
어떻게 / 올라갈 수 / 있을까요
종소리도 / 들려오지 /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 서성이다가
괴로웠던/사나이
행복한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 드리우고
어두워 가는 / 하늘밑에
조용히 / 흘리겠습니다
음보율에 충실한 시다. 정형시 못지않게 자수와 박자에 의한 리듬의 정형화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시에 대한 우리의 리듬은 시조의 가락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긴 산문시
의 경우도 4.4 조나 7.5조 또는 3.3.4 조로 마치 시조라도 쓰듯 자수나 박자를 맞춘다면
막힘없이 읽히는 시를 쓸 수 있다. 시를 쓸 때 그 의미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읽힐
때의 운율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실례를 들겠다.
어지간히 구성진 / 노래 끝에도 / 눈물나지 / 않던 것이 /
문득 머언 / 들판을 / 서성이는 / 구름 그림자에 / 눈물져 / 울 줄이야.
사람들아 / 사람들아./
우리 마음 /그림자는, / 드디어 / 마음에도 / 등을 넘어 / 내려오는 / 눈물이 /
아니란 / 말인가.
---박재삼의<사람들아.사람들아>일부--
대부분 잘 읽혀지는 시들의 경우를 보면 이렇게 우리 시조의 가락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7.5조 4.4조 3.3.4조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보다는 필요에 따라 위의 박재삼
시인의 경우처럼 때로는 7.5조였다가, 4.4조 3.3.4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3) 시행과 운율
시행 역시 운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통 시행을 <운율적으로 짜여진 줄>이라고
말하는 것도 시행이 운율과 상당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유시나
산문시에는 시행이 운율과 더불어 이미지나 의미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시를 쓰는데 낱말이나 표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보다 행을 어떻게
가르고 몇 행을 모아 1연을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점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시를 쓰는 데 이런 점이 큰 과제이다. 1행을 한 센텐스로 할 것인가 아니면 2
행을 한 센텐스로 하느냐 아니면 3행 혹은 4행이냐 5행이냐에 따라 리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한행을 체언으로 끝나게 할 것인가 부사형이나 접속형으로 끝나게 할 것
이냐 하는 문제도 고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보자.
늦겨울 / 눈밭에 / 아편꽃과 / 세월을 / 묻어 두겠오
이른 봄쯤, / 아편 술로 / 무루 익어 / 있을 것이오
목발 지닌 / 새들은 / 한 모금씩 / 축이고 / 날아 오르시오
--유영금의<비문>전문--
삶과 죽음과 절망을 해체적으로 묘사한 단 3행의 이 시는 3.3.4.3.5의 첫 행과
4.4.4.5 그리고 4.3.4.3.5의 음수의 리듬에 단 3행으로 그 의미를 함축했다. 물론 시인
스스로 리듬을 생각하고 자수를 맞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3행을 한 연으로
묶은 점도 뛰어나다. 이와 같이 리듬을 맞출 때 마치 구성진 노래라도 듣듯 정겨운 법
이다.
그렇다고 정형시의 행 구분처럼 틀에 맞추어 넣거나 기계적인 구분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행 구분에서도 변화를 일으키고 정형시의 틀에서도 변조를 일으켜 생기를 돋우도록
해야 한다. 같은 내용의 표현이지만 행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주는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 예를 하나 보자.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김 소월의 <가는 길> 1연과 2연을 붙여 보았다. 실제의 이별의 갈등이나 현장감이 떨
어 지고 맥이 없다. 원본대로 행 구분을 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이와 같이 1행을 3행으로 나누어 1연으로 만들어 보았다.7.5조이기는 하나 7.5조의
1행과 7.5조의 3행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7.5조의 3음보격을 1행으로 처리 하는 것
은 틀에 맞추는 기계적 처리이므로 완전히 감정을 죽이고 만다. 왜냐하면 7.5조의 3음
보격을 1행으로 배열해 놓고 읽어 보면 리듬의 속도가 그만큼 빨라져 실제로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이라는 심리적 갈등과 감정의 기복이 리듬의 속도에 죽어 버리기 때문
이다. 이처럼 리듬이 시의 행을 구분하는 요인임은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음의 수나 박
자를 함께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단락을 나눈 셈이다.
시인 문덕수(文德守)선생님은 "리듬이 단지 형식적이며 기계적인 음수나 음보의 단
위가 아니라 그것이 그대로 감정 또는 시상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서
“시에 있어서 리듬이나 음악의 요소는 그 자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사상에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춘수(金春洙)시인은 시의 행을 "의미의 한 단위 또는 이미지의 한 단락"이라고 말
한 바 있다.행이 의미의 한 단위라는 것은 앞에서 예로 본 소월의 시에서도 나타났다.
의미의 한 단위라고 하더라도 리듬과 밀착되어 있고 그런 경우에는 리듬의 한 단위가
곧 의미의 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리듬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쟈유시에 와서는 오히려 "의미의 한 단
위" 또는"이미지의 한 단락"이라는 쪽에 더 치중해 행을 가르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도 글자 수를 어떻게 배열하고 어디쯤에서 행을 가르고 어느 대목에서 이미지나
또는 의미를 구분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 사실 이 과정이 시 쓰기의 상당 부분을 차
지하고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4) 그렇다고 규칙에 얽매이지 마라
결론을 내리겠다. 자유시를 쓰기 전에 정형시부터 먼저 써 보는 과정을 밟는 것이
좋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형시라면 우리의 시조를 말한다. 시조를 먼저 써 보라는 말은
시조 시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시조가 가지고 있는 정형적 구조를 익혀 형식적 규제를
터득하는 것이 곧, 자유시의 전체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언급한대로 행수를 미리 정해 놓고 자수율, 즉 7.5조니 4.4조 8.5조를 지키면서 시를
써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령 4.4조 4행시, 7.5조 10행시, 8.5조 5행시, 또는 서양의 소
네트 형식인 14행시 같은 것을 써 보는 것이 형식의 훈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음수의 제한과 리듬의 제한 속에 들어가 봄으로써 사상과 감정과 리듬의 조화, 사상
및 감정이 리듬에 미치는 영향, 반대로 리듬이 사상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구조적으로
터득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압축과 생략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압축과 생략은 산문과는 다른
시의 본질적인 부분인데 이런 면은 은유나 상징과 같은 비유에서도 가능하지만 율
격에서 받는 형식적인 통제에서도 가능하다. 아무리 사상과 감정이 풍부하더라도 리듬
을 지키려고 하면 부득이 리듬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은 배제되고 필요
한 부분들은 압축 또는 요약되기 마련이다. 즉, 운율의 묘미를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인 자유시를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
자유시를 쓰다 보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행을 나누고, 나눈
행을 모아서 연을 만드는 형식적 구속이 따르는 것이다. 그 때 내재율의 적절한 조화도
요구된다. 자유시라고 해서 리듬에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렇다고 글자의 수나 박자 등에 얽매여 지나치게 리듬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이런
규칙을 알고 흐름에 맞추면 되지 리듬에 얽매여 좋은 시상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규칙을 알고 있으라. 그래야만 과감히 규칙을 깰 수도 있다. 시는 형식적 구속과 그것에
저항하는 정신과의 갈등에서 창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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