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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 새 언약(5)_아들로 말씀하심
3) 보좌 우편에 앉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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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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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장 1절부터 다시 읽겠다.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여러분이 외우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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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3]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세대)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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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은 구약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2절부터 신약이다. 이 1절부터 3절까지는 신구약의 총체적인 개요가 다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다 알면 신구약을 다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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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말씀하신다. 오늘은 세 번째 보좌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이다. 보좌우편이라는 말은 왕의 우편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조선시대에 임금이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 좌의정과 우의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좌의정이 더 높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영의정이 있다. 그런데 보좌우편은 임금의 권세를 집행한다는 그런 뜻이다. 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 권력을 받았다는 그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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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내가 주님이라고 섬기는 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지식을 굴복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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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우편에서 하시는 일이 뭔가 지식을 굴복시킨다는 것이다. 지식은 사탄의 지식이다. 어떻게 사탄의 지식을 굴복시키는가? 생명은 지식을 굴복시킨다. 창세기 2장에서 생명나무 열매냐? 선악을 아는 열매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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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길은 선한 것이 되었든지 악한 것이 되었든지 뭣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지식의 노선이다. 우리가 사탄의 길을 가는 데에는 좋은 것도 많이 있다. 여러분 세상을 보라. 좋은 것도 많이 있다. 선한 것도 굉장히 많이 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악한 것은 사탄의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더 근원을 보면 선이든지 악이든지 다~ 선악의 노선에서 나왔다. 그 예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낳았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는 것은 선악의 지식의 노선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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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아무 잘못 없이 지극히 선한 일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른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 아들도 어디에서 나왔나? 아담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아담은 뭘 먹었나?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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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김氏와 결혼을 했는데 자식을 둘 낳았다. 아들 하나는 이씨고 하나는 김씨고 그런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다~ 김씨의 아들이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가인을 낳고 또 동침하매 아벨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세상에서 헷갈리는 것이 이것이다. 선이 전혀 없으면 누가 사탄을 따라가겠나. 선이 전혀 없다면 왜 예수를 안 믿겠나. 거기에도 아주 선한 것이 있다. 아벨 같이 선한 것이 있다. 그래서 헷갈리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 이원론을 주장하는 그것이 핵심이 되어있는 희랍세계에 들어와서 헷갈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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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냐 사탄이냐는 것만 있었는데 희랍세계에는 선이냐 악이냐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은 하나님이고 악은 사탄이라고 된 것이다. 기독교는 거기에 영향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지금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것이 명확하게 구별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렇게 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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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래는 생명이냐 지식이냐 하는 세계인데 지식의 세계에서 선과 악이 나왔다. 그러니까 선과 악은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지식에서 나왔다. “선악을 알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그 지식에서 나왔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는 사탄을 위해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고 그렇다고 우리가 악을 행한다는 말은 아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늘 선과 악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항목이다. 여러분이 잘 듣고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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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으면 그러면 악을 행해도 좋은가? 그렇지 않다. 생명이냐 지식이냐고 해서 우리가 악을 행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헷갈리는 것이다. 분명히 생명의 세계에서도 선을 행해야지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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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명 안에 있는 선과 지식 안에 있는 선이 다르다. 김씨와 이씨가 다른 것과 같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남편이 하나는 이씨이면 자식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선이냐 악이냐를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냐 지식이냐로 넘어서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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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들, 심지어 썩은 것들도 이용하여 식물에게 필요한 비료가 되게 한다. 식물은 썩은 것들을 먹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는 농사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시간에 교육적이냐 농업적이냐는 말씀을 했다. 생명의 세계를 들어가면 지식적이 아니고 농업적이다. 공장에 가면 지식적이지만 농장에 가면 생명적이다. 농장에서는 모든 원리가 생명을 따라야 한다. 공장에서는 모든 원리가 지식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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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도 모양은 똑같지만 어떻게 잘못하면 지식을 따르냐 생명을 따르냐로 교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생명은 지식을 이긴다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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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심지어는 썩은 것들을 이용해서까지라도 열매에 집중하고 있다. 깨끗하냐 더럽냐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에 집중한다. 지금 나오는 비료는 다~ 정제해서 나온 것이라서 깨끗하지만 원래 비료는 더럽다. 옛날에 그것이 다~ 똥이다. 제일 더러운 것이 비료다. 냄새가 엄청나다. 그렇지만 그 비료가 없으면 열매가 안 맺으니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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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지방에서 가을이 돌아오면 바닷말을 배로 걷어 와서 말린다. 그것 한줄 깔고 똥바가지로 한 줄 붓고 또 한 줄 깔고 똥바가지 한 줄 붓고 해서 말아서 씌워놓으면 처음에는 김이 푹~ 푹~ 나는데 온 집안에 난다. 그 냄새가 지금 생각하면 공장에서 나는 냄새하고 아주 다르다. 똥 냄새는 맡아도 안 죽는다. 공장에서 나는 냄새는 맡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거기는 독이 없다. 세균들이 번식한다고 김이 푹~ 푹~ 난다. 속에는 아주 뜨겁다. 이것을 1년 동안 묵혔다가 밭에 뿌린다. 무엇이든지 열매 맺는데 필요한 것은 다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도 교회에서 냄새가 좋냐 안 좋냐는 따질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냐 없냐를 따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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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볼 때도 아~ 저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를 볼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을 것이냐 아니냐를 봐야한다. 농부의 눈으로 봐야 한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하더라 하니까 저 사람도 열매는 맺을 수는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곳에는 쓸 수 없는 사람인데 열매는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대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 아닌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 냄새가 좋은데 비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냄새가 나빠도 비료가 될 수 있고 냄새가 좋지만 비료가 안 될 수도 있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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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이상하게도 썩은 것을 먹고 자란다. 그러니까 깨끗한 것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고 썩은 것을 먹고 자란다. 우리도 오늘 아침에 밥을 먹고 왔다. 먹을 때는 깨끗한 것을 먹고 왔다. 지금 뱃속에서 썩고 있는 중이다. 뱃속에는 냄새가 많이 나지 싶다. 그러니까 우리 뱃속이 비료 통이다. 창자는 비료 통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썩혀서 그것을 먹고 우리가 산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공장을 만드냐는 이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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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그렇지만 원래 출발하기를 열매 맺기를 위해서 출발했다. 그래서 다른 곳하고 다른 것이다. 좀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 복잡할 때도 있다. 공장하고 다르다. 공장은 깨끗해야 한다. 심지어는 전자공장 같은 곳은 먼지가 없어야 하니까 먼지가 안 나는 옷을 입어야 한다. 먼지가 안 나는 옷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천을 만들었다. 먼지가 안 나도록 하는 천을 말이다. 그래서 그 안에 무균 상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먼지가 없도록 한다. 왜냐하면 먼지가 있으면 잡음이 생겨버린다고 한다. 반도체 속에 먼지가 들어가면 잡음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정결하게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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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열매를 맺는 문제는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푹 푹 썩는 데서 열매가 열린다. 알고 보면 생명 안에 있는 것은 썩어도 깨끗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더기는 우리가 보기에 징그럽지만 구더기 속은 깨끗하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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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생명과 지식을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식물은 썩은 것을 먹고 자란다. 식물은 썩은 것을 먹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다. 내 인생에서 맑은 물을 먹고 열매를 맺는가? 아니면 맑지 못한 물을 먹고 열매를 맺는가? 잘 생각해 보면 부정적이고 비료 같은 그런 것을 먹고 우리가 자랐다. 그런 속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이것은 비이성적이다. 무조건 사랑하니까 잘하고 잘못한 게 없다. 무조건 자기 자식을 사랑하니까. 이런 비합리적인 여건 속에서 자랐다. 그런데 딱 합리적인 것만 먹고 자란 것이라면 그 사람이 무엇이 되겠는가? 무서운 사람이 된다. 옛날에 독일 병정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이 사는 것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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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묘하게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은 오히려 만물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승리를 하셨다. 연합이 필요한, 자기 혼자로서는 안 되는 그 어떤 것을 이용해서 승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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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사에서 볼 때 ‘아! 성공이다.’ 이런 것이 성공이 아니고 열매를 맺는 것이 성공이다.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똑 같아 버린다. 여기서 이탈하면 같아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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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지식으로 여러 세대들을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역이용하여 아들이 오는 생명의 길, 즉 열매 맺는 길을 예비했던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자신의 일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사용했는가? 지식을 사용했다. 생명을 대적하는 것은 지식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이 지식을 먹으면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지식의 최고봉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한 세기에 한 명 날까 말까 하는 석학들은 전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옛날 것을 그냥 답습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유능한 사람들은 전 세계 모든 것을 통합해서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천재들이다. 지식의 천재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여러 세대를 만들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세상은 업그레이드 되고, 업그레이드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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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것을 역 이용해서 아들이 오는 생명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러면 ‘저렇게 발전하고 있는 데 생명의 길이 살겠는가?’ 이렇게 하는 데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해서 아들이 오는 길을 예비하였다. 열매 맺는 길을 예비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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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전쟁은 생명이냐 지식이냐의 문제다. 그 최종은 생명은 성장하여 새 예루살렘을 이루고 지식은 부풀리고 조작하여 바벨론을 이룬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전쟁은 생명이냐 지식이냐의 문제다. 하나님과 사탄의 문제는 생명이냐 지식이냐의 문제다. 교회와 세상의 문제는 생명이냐 지식이냐의 문제다. 교회가 사랑이 많으면 교회인가?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 믿음이 좋으면 교회인가? 그것도 아닌 것이다. 생명이냐 지식이냐 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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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성장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가고 지식은 부풀리고 조작해서 바벨론으로 간다. 요한 계시록은 이것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냐 지식의 나무의 열매냐를 요한 계시록에 와서 최종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바벨론으로 가느냐 새 예루살렘으로 가느냐 그 문제다. 요한 계시록을 사람들이 볼 때 점쟁이 책으로 생각해서 거기서 점괘를 치고 있다. ‘이게 몇 년도쯤 오느냐?’ ‘어디쯤 왔느냐?’ 이런 것을 계산하고 있다. 이것을 계산하는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이냐, 사탄의 경륜이냐, 지식이냐 생명이냐의 결론이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지금도 있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이 언제 먼 훗날에 온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있는 것이다. 여전히 지식의 노선과 생명의 노선이 지금도 같이 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땅 위에서 바벨론도 있고 새 예루살렘도 있고 그렇다. 아직 완성이 덜 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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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은 1000년 후에는 오려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천국은 죽은 후에나 오려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천국은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없다. 우리에게만 시간의 개념이 있을 뿐이다. 요한 계시록은 오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일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렇다. 이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가고 있는 데 지금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항상 현재적이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익어서 열매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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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지식으로 자기의 세대들을 만들게 하고(가라지). 하나님은 씨(생명)로 열매를 맺게 한다(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단과 맞대하여 싸우지 않으신다(마13:25~). 더 완전한 것으로 사단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사탄은 지식으로 자기 세대를 만들게 하고 하나님은 씨로 열매를 맺게 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 좋은 비유가 있다. 밀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났다. 밀을 뿌린 자와 가라지를 뿌린 자가 있다. 사탄이 만든 세계는 가라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세계는 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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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한 번 우장창 해서 사탄을 지옥 유황불 붙는 곳이 있다는 데 거기에다 집어넣으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지루하게 끌어서 세상에 형무소는 많게 하고 이렇게 하고 있을까?’ 이렇게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이 하신다면 사탄을 잡아다가 불구덩이에 넣어 버리면 끝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가만히 놓아두니까 저러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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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도 제사장이고 뭐고 이따위들을 잡아다가 한방 해 버리면 끝날 일을 가지고 왜 그냥 놓아두어서 제자들은 배신자가 되게 하고 했는가? 이것은 아주 답답한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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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우주적인 전쟁에서 하나님과 사탄과의 전쟁은 둘이 맞대결해서 싸울 성질의 것이 못 된다. 밀은 밀대로 가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가는 그런 세계다. 제자들이 말했다. “그러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하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두어라. 결실할 때가 돌아오면 그것이 불거질 것이다.” 하나님은 열매로 승부를 보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맞대결해서 싸우지 않는다. 더 완전한 것으로 사탄을 굴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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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기독교도 만일에 이런 노선을 따른다면 세상과 맞부딪쳐서 네가 이러니저러니 싸울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수준에서 싸우는 것이다. 같은 문제를 놓고 싸우는 것이다. 뼈다귀를 놓고 개끼리 싸우는 것이지 개와 닭이 싸우겠는가? 개와 소가 싸우겠는가? 뼈다귀를 놓고서는 개끼리 싸운다. 그러니까 사탄이 원하는 것이 다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 사탄은 열심히 바벨론을 만들고 하나님은 열심히 씨를 키워서 새 예루살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둘이 막 붙어서 격투하는 격투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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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지식으로 방해를 하지만 지식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생명이 자랄 때까지만 장난을 부리는 것이다. 아들(생명-열매)이 오면 그는 곧 멸망한다.
사탄은 지식으로 방해하지만 지식은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생명을 이기는 지식은 없다. 지식은 생명이 자랄 때까지만 장난을 한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작용을 한 것이다. 생명이 자라기 전에,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기 전에 미리 선악과를 먹였다. 그 이유는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었더라면 아예 지식의 나무를 먹지 않을 것이니까 그래서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아들이 오면 그는 멸망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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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크기 전에는 정승이 임금 노릇을 했다. 임금이 나이가 많고 하다 보니까 정승이 임금 노릇을 했는데 왕자가 커서 성인이 되면 정승은 도로 정승이 되는 것이다. 종은 도로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 아들이 크기 전에 자기 세력을 넓혀서 세상을 지배해 보려고 했다. 악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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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 승부는 아들에게 있다. 지고이기는 것은 아들에게 있다. 아들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하신다는 말이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 아니다. 통치한다는 말이다. 아들로 통치한다. 그러니까 아들의 세계가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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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말씀하심(통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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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들은 누구이며 열매는 무엇인가? 하나님 생명과 마음이 인격으로 표현되면 아들이라 하고, 생명의 씨가 자라서 결실하면 후사, 즉 열매라 한다. 그러니까 아들은 인격적인 후사다.
그러면 ‘누가 아들이고 누가 열매인가?’ 이것이다. ‘무엇이 열매인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마음이 인격으로 표현될 때 아들이라고 한다. 생명의 씨가 자라서 결실하게 되면 이것을 보고 열매라고 하고 후사라고 한다. 후사라는 말은 열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들은 인격적인 후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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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땅 위에서 영이신 자신의 생명과 마음이 아들로, 즉 인격으로 표현되고 이어지며, 열매로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여 아담을 지으신 것이다(창1:26,7).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땅 위에서 영이신 자신의 생명과 마음이 아들로 인격으로 표현되고 그것이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열매로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오직 이것이다. 자신이 영이시니까 나타날 수가 없다. 영을 봤다는 사람들은 다 헛것이다. 영은 볼 수가 없다. 볼 수가 없으니까 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볼 수 없는 그분 자신의 마음과 뜻을 인격화시켜서 그것이 표현되고 그것이 이어지며 그것이 번성하기를 원한다. 아담에게도 그랬고 아브라함에게도 그랬고, 이삭, 야곱에게도 다 똑 같은 축복을 하는 데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려라.’ 이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준 축복이고 약속이고 그렇다. 아담을 지으신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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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명과 마음을, 성품과 마음을 인격화 하는 것,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것, 인격화 되어야 우리가 그것으로 말도 하게 되고 행동도 하게 된다. 인격이 되어야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지식으로 할 수가 없다. 그 사람됨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엄마 노릇을 지식으로 할 수가 있는가? 아무리 다른 사람이 엄마노릇을 하려고 해도 엄마가 엄마노릇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엄마는 그러려고 안 해도 엄마가 된다. 다른 사람은 노력을 해야 된다. 그런데 노력을 한다고 똑 같아지는가? 똑 같아지지 않는다.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계모는 만날 욕만 얻어먹는 것이다.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니까. 안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아니 왜 저러느냐? 저것 밖에 안 되느냐?’ 이렇게 된다. 참 어려운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친 엄마와 똑 같다면 이것은 정말 성인군자든지 아니면 성모 마리아든지 이래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느 정도 하면 참 잘하신다고 해야 하지 완벽하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도 얼마나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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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이 하게 사람 속에 와서 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 말이 그 말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신약에 대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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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단이 방해하므로 하나님은 후사를 잃었고 사람은 생명의 원천을 잃었으므로 우주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 방해를 하여 하나님은 후사를 잃어버렸다. 자신을 이어갈 자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게 되었다. 예수님도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말은 아주 높이 계신다는 뜻만이 아니고 땅에 안 계신다는 뜻이다. 땅에 못 계신다는 말이니까 이것이 얼마나 슬픈 말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했다가 안 되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했는데 이것이 알고 보면 하늘로 밀려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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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 집에 있어야 되는데 아들을 잃어버렸으니까 아들 집에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데로 갔다. 그와 비슷한 것이다. 아들 집에 못 있고 다른 집에 간 것이나 비슷하다. 그래서 후사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후사를 잃어버린 아버지처럼 외롭고 슬픈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생명의 원천을 잃어버렸다. 영원한 생명의 공급처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생명은 없이 사람의 혼만 작용하니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인 없는 말이 뛰면 그것이 혼란이다. 주인은 없고 말만 혼자 뛴다면 그것이 혼란이다. 개도 큰 개는 묶어놓지 않고 자기 혼자 뛰면 그것이 혼란이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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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원천을 잃었으니까 환경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인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단히 불안한 존재이다. 오늘 저 사람이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해서 내일 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옳을대로 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바꿔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굳게 믿지 마라. 그러니까 적당히 믿어야지 굳게 믿었다가는 배신이네 한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 가면 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한다. 그것이 나쁜 게 아니고 잘못한 것이 아니고 당연히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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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에 빠진 인간은 방향을 잃고 자신을 속인 자를 위해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쳤으나 사람은 근본이 빗나갔으므로 가르칠수록 빗나가고 교정할수록 왜곡되었다.
혼란에 빠진 인간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머리가 없으니까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자신을 속인 자를 위해서 바벨을 건설한다. 그러니까 원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속여 먹은 놈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좋아서 그냥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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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그런데 근본이 빗나갔으니까 안 된다. 율법을 주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가시적인 많은 것을 보여줬다. 그런데 가르칠수록 빗나가고 교정할수록 왜곡된다. 유대인들은 그 좋은 복을 받았고 그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빗나가서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잘못 퍼트리고 있다. 하나님을 잘못 퍼트리고 있다. 잘못하면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잘못 퍼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의 표준이 됐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그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곡시켰으니까 문제가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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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주구다.’ 앞잡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서구 개척사, 서구의 식민지사가 다 그렇다. 왜냐하면 선교사들과 식민지를 개척하는 군인들이 같이 갔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먼저 가서 선교를 하는데 원주민들이 모르고 마구 죽였다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앞잡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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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머리가 없어지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율법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빗나간다. 그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저주했다. 저 율법 없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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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보복을 아랍세계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공연히 저렇게 하겠는가. 얼마나 무시를 받았고 얼마나 핍박을 받았으면 저렇게 하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기독교라든지 기독교 국가 같은데서 유대인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아랍만 잘못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억울하다. 잘못한 사람들을 보고는 잘못했다고 안하고 오히려 잘한 사람을 보고 더 잘못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 좀 헷갈리는데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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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당연히 미국이 세상을 주관하고 주도하고 있는데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태인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잘못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니까 중동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내 생각 같아서는 팔레스타인 자치국을 갈라주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이다. 그런데 갈라주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보고 갈라주면 될 것을 가지고 왜 그러냐고 하면 아마 우리도 사정이 있어서 못한다고 할 것이다. 자기들도 사정이 있다. 미국도 사정이 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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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하여 우주 질서를 바로잡아 참된 평화를 이룰 것인가?
그러니까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서 우주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인가. 그리고 참된 평화를 이루게 될 것인가. 이것이 우주적인 문제이다. 전 세계적인 문제고 우주적인 문제이다. 세계는 평화가 없다. 간단할 것 같은데 안 된다. 중국하고 미국하고 둘이만 잘 지내면 간단하다. 그런데 안 된다. 둘이 서로 으르렁 거린다. 호랑이끼리 만나니까 그런다. 호랑이하고 사자하고 만났는지 곰하고 만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둘이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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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사람인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문제, 즉 하나님과 만물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고 원래대로 바르게 할 자가 누구인가?
누가 이것을 해결할 사람이 있는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문제를 누가 해결할 사람인가. 하나님과 만물을 포함한 인간 자체의 문제,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할 것인가. 원래대로 누가 바르게 할 것인가. 누가 하나님이 창조한데로 바르게 해 놓을 것인가 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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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교가 이것을 할 것인가. 불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그동안에 선이냐 악이냐 하고 싸웠다. 그래서 대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안 된다. 불교는 대립이 아니고 화해와 협력이다. 왜냐하면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대는 불교 시대가 온다. 그것이 맞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 하도 오래 싸우다보면 그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서양 사람들의 사고는 선이냐 악이냐 둘 중에 하나다. 이기느냐 지느냐 이것밖에 없다. 중간지대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누가 원래대로 바르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안하고 부처님이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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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성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가! 그러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고 갔던 것이다. 혹시 자기 홀로는 이루었다 해도 모두 함께는 갈 수가 없는 길이었다.
얼마나 많은 성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갔다.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안됐다. 혹시 자기 자신 홀로는 내면적인 평화를 갖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함께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수양을 통해서 이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같이 수양할 수 없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히말라야 산에 올라갔다고 누구나 다 갈수 있느냐 하면 못 간다. 힘 있는 사람만 가지 힘없는 사람은 못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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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말씀하심(통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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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완전한 길을 개척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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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십자가에서 말씀한다. 십자가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자기 혼자 수양을 해서 하나님 앞에 간 것이 아니고, 보좌 우편에 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포함해서 함께 갔다. 이것이 신기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이것은 세상에는 없다. 한 사람이 공부를 해서 친구들 몽땅 데리고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100점을 맞아서 아니면 150점을 맞아서 다 데리고 가서 합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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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는 묘한 방법이 있었다. 잉여공덕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100점만 맞으면 되는데 공덕이 너무 많아 150점이 되는데 그러면 50점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잉여공덕설이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을 하면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500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줄 수가 없다. 사람됨에 따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주겠는가. 물건 같으면 나눠주면 되지만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무도 함께 갈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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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께서는 자기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포함하고, 이 안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한 복음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여기 와서 아무리 주여주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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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모르고 각자 열심을 내서 조금이라도 앞에 가고 조금이라도 천당에 가서 앞자리 앉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말짱 헛일이다. 그것이 그렇게 해서 갈수 있는 데가 아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기도는 할 때 기도를 해야 하는데 열심히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갈수 있는 그 자리가 아니다. 자리 자체가 성질이 틀리다. 시험은 열심히 노력을 하면 점수가 올라가지만 이것은 열심히 노력한다고 점수가 올라가는 세계가 아니다.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완전한 길이다.
죄 없는 의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는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을 폭로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 아들이라 했지만 “보라 나도 사람이지 않느냐? 사람은 사람이다.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죄 없는 의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죄 없는 의인으로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을 폭로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죽는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죄가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죽더라는 것이다. 죄가 없어도 의인이어도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죽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폭로했다. 사람은 이것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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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했다. 베드로만 그랬겠는가. 제자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봐라. 나도 사람이지 않느냐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상도 될 수 없고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봐라 나도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이 말 한마디가 입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보여준다. 보여준 그림을 글로 쓰면 이 말이다. 나도 사람이다. 이런 말이다. 그림이 말을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분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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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같이 된 줄 아는 인간과, 그렇게 된다고 했던 사단을 함께 심판하고 가르쳐도 안 되고 교정해도 안 되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여 원위치로 회복(구속)하고 올바른 위치에 옮겨놓았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같이 된다 했던 사탄! 하나님 같이 될 줄 알고 따라간 인간! 다 심판했다. 하나님 같이 될 줄 알고 교정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훈련도 시키고 모두 해도 도저히 안 되는 모든 인간! 이 인간을 모두 원위치로 복귀시킨 것이다. 이 한마디로 봐라 나도 사람이지 않냐! 나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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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참 불쌍하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억울하게 죽느냐? 하나님이 계시면 저렇게 놔둘 수 있냐?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있는데 저럴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의인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럴 수 있느냐? 이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그리고 유태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냥 죽었다. 죽었다는 말이다. 여러분 죽은 것은 확실히 아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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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안 죽었다. 초대교회 이런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죽겠냐! 그것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이단이라고 했다. 신학적으로는 가연설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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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람이 아니고 사람처럼 죽었지만 사람처럼 죽은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럴듯하다. 신이라는데 아구가 맞아진다. 그런데 확실하게 죽었다! 확실하게 죽었다!! 다른 말씀 하면 안 된다. 확실하게 죽었다! 다 돌아봐도 다 그렇다고 한다. 확실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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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변명할 수도 없고 피할 길도 없게 되었다. 수양이 부족하다. 교육이 부족하다. 무엇이 좀 부족해서 안 된 것이니 조금만 더하면 된다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죽지만 어떤 사람은 안 죽는다. 이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우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변명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내가 잘 못하니까 죽고 이것도 아니다. 잘 하면 안 죽는다. 이것도 아니다. 사람이니까 죽는 것이다. 인생이니까 죽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수양이 부족해서 교육이 부족해서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이 좀 부족해서 안 된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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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알 것이다. 항상 무엇이 부족하다. 기도도 항상 무엇이 부족하다. 조금 더 해 봤으면 될 텐데 조금 더 라는 것을 못한다. 나도 그런 형이다. 조금만 더 이런 형이다. 어느 한의원 가니까 누가 그러는데 조금만 더 그것을 버리라고 한다. 조금만 더 그것을 버려라 그 사람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옛날 그 세계에 있을 때는 조금만 더 잘 했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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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절망을 했다. 조금만 더! 사람들이 다 그렇다. 수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것이다. 조금만 더 하면 성자가 될 텐데 조금만 더 하면 누구처럼 될 텐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사람 죽이는 것이다. 조금만 더 해도 안 된다. 사람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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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뭡니까? 죽음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이 그렇다. 사람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될 생각하지 말라! 신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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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이끌고 모든 죄들(어그러진 것들)을 정결케 하였다.
이것은 성경에 읽은 대로 능력의 말씀이다. 능력의 말씀이 불이 확 가는 것이 아니고 나도 사람이지 않냐! 이것이 능력의 말씀이다. 아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말을 바꿀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고, 이것이 능력의 말씀이다. 어찌할 수 없다. 천하의 어떤 사람도 이것을 바꿀 수가 없다. 공자님이 와도 안 되고 석가모니가 와도 안 되고 어떻게 바꿀 수가 없다.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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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우리가 이 능력의 말씀 앞에 붙잡혀 왔다. 이 능력의 말씀 때문에 나는 인생이구나! 여러분 그렇게 알고 왔죠? 그렇게 앉아 계시죠? ‘아 나는 인생이구나!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인생이구나!’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또 인생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만나로 오시는 것이니까 인생으로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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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재림하면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 올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다른 존재로 오면 내가 어떻게 만나겠는가. 사람을 찾아오려면 사람으로 와야지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또 사람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아닌 사람은 못 만날 것이다. 사람 되는 길을 피해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못 만날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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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도 초창기 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이 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못 견디고 가 벼렸다. 여러분들도 아시다 시피 몇 사람이 그렇게 해서 갔다.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늘 무엇이 안 된다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이 되라고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항상 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엉뚱한데 찾아가서 전능자를 찾아 갔다고 그런다. 와~왜 이렇게 틀어져 버리는지 모르겠다. 뭐가 되고 싶은 데 자기는 안 되는 것이다. 뭐가 되고 싶은데 안 된다. 이것은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안 된다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교회 가있었더니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교회 가 있어도 뭔가 되는 세계가 아니다. 여기는 뭔가 되는 데가 아니다. 사람 되는 것은 되지만 사람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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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이 말은 “이끌고” 라는 말이다. 어그러진 것들을 정결케 했다. 죄를 정결케 했다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가? 어그러진 것이 죄다. 하나님께서 딱 정해 놓은 것을 어그러지게 한 것 이것이 죄다. 과녁을 향해 화살을 쐈다. 그런데 빗나가 버렸다. 이것을 보고 죄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길로 안 가고 다른 길로 빗나가 버린 것이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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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왜 가로 막혔나 이 죄 때문에 가로 막혔다. 그런데 이 죄 때문에 가로 막힌 것을 사람들은 빗나간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결과로서 저 밑에 있는 결과로서 도덕적인 것만 생각한다. 자기 양심적인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거 없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느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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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도하러 가서 보면 “인간은 죄인입니다.”그렇게 말하면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얼른 생각하면 받아 드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니 사람은 다 죄가 있지요.” 이 말이다. “사람은 다 죄가 있어서 사는 것 아닙니까 뭐가 문제입니까?”이 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막힌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고 길이 빗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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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들은 율법에 저촉 되는 것들을 다 죄라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못 간다. 이렇게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설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없다. 율법이 없으니까 율법을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의 율법이 우리에게는 도덕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항상 하나님에게 못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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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는 죄들이라고 말했다. 만물을 이끌고 모든 죄들을 정결케 했다고 했다. 어그러진 것들을 발랐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위치만 바르게 되면 모든 것들이 깨끗해진다. 위치를 바르지 않고 아무리 씻고 닦아 봐야 안 된다. 위에서는 흙탕물이 계속 내려오는데 밑에서 물을 아무리 깨끗케 해 봤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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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는 누런 물이라고 한다. 원천에서 흙이 녹아 그것이 눌 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밑에서 아무리 물을 깨끗하게 해 봐야 안 된다. 우리 대구 신천이나 서울의 청계천 이런 곳은 아주 더러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깨끗한 물이 흐른다. 왜냐하면 물의 원천자체가 깨끗한 물이었는데 중간에 오염이 됐다. 그것만 걷어 내니까 깨끗해 졌다. 그러데 황하는 계속해서 내려오니까 안 된다. 그리고 깨끗한 물만 남게 하는 청계천과 다른 것은 청계천은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딴대로 뽑아 버렸다. 지금 우리 대구의 신천도 그렇다. 오수는 오수대로 따로 배관을 만들어서 회수했다. 알고 보면 엄청난 돈이 든 것이다. 하수구에서 나온 물은 신천으로 안 들어간다. 다 다른 길로 나간다. 그래서 물이 깨끗한 것이 가능하지만 황하는 그것이 안 된다고 한다. 전체가 흙탕물이라서 밑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해봐야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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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씻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왔지만 안 된다.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이 아니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은 거짓이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 모두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을 들었제.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보다 권세 있는 말이 어디 있나. ‘수양해라, 뭘 쌓아라, 뭐 어떻게 해라, 뭐 어떻게 해라.’는 말을 왜 듣고 있는가 하면 뭐가 될 줄 알기 때문이다. 뭐가 될 것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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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노력한다고 신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사탄은 사탄인 이 질서를 누가 바꾸겠느냐 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졌는데 누가 이것을 바꾸겠는가.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또 이것은 바꿔지면 안 돼. 이렇게 갈라져 있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어야지 하나님이 사람 되기도 하고, 사람이 하나님 되기도 하면 이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혼란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어야 해! 사람은 사람이어야 해! 남자는 남자여야 하고, 여자는 여자여야 해! 그런데 여자가 어떻게 어떻게 하더니 남자가 되었다하더라 그러면 억울한 여자는 다 남자가 될려고 할꺼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나! 엉망이 되지 않겠나. 엄마 될 사람이 아빠 되고, 아빠 될 사람이 엄마 되고 이래 버리면 주민등록 매일 바꿔야 되고 동사무소 복잡해지고 뭐가 되겠는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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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사단은 사단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 질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사탄은 사탄이고, 구별되어야 한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고 이렇게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연합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루도록 만들어 놓았다. 구별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통일이 되는가. 연합을 통해서 통일이 된다. 우리 통일은 연합적인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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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두 조각이 있는데 이 두 조각이 한 조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안에서 싹이 나서 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합이지 절대로 한 덩어리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이다. 그래서 우주질서가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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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질서는 사람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데서부터 비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치가 바로 되면 온 우주가 바로 되고 안정 되는 것이다. 인생을 이렇게 확고하게 정의할 말씀이 있었던가?
우주질서는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데서 비뚤어졌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다. 불교도 유교도 이런 말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해서 비뚤어졌다. 이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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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성선설, 성악설이 있다. 사람은 본래부터 선하다. 근본은 선한데 나와서 잘못되었다. 어떤 사람은 근본이 악하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답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악을 따로 만들고 선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뭐가 잘못 들어가서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된다. 여기서부터 틀어진 것이다. 근원부터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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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보고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듣는다면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된다. 문제를 보더라도 근본을 보는 사람이 된다. 둘이 싸우는 것을 봐도 싸우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근본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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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안 보이는 사람은 이편에 들든지 저편에 들든지 그렇게 된다. 오늘은 이편 들었다가 내일은 저편 들었다가 그런다. 오늘은 김형제 편에 들었다가 내일은 이형제 편에 들었다가 그런다. 그거 사람 우습게 된다. 누구편만 드는 사람, 어디가든지 누구편만 드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근본을 모르고 끝에 것만 보니까 말단만 보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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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면 우리가 근본을 보는 사람이 된다. 의사도 공부를 제대로 하면 병의 근본을 볼 것이다. 표면만 치료하는 것은 그냥 기술자이고 근본을 아는 사람이 진짜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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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위치가 바로 되면, 근본에서 보니까 위치가 삐틀어졌구나. 위치가 비틀어지면 모든 문제가 생긴다. 그 위치에서는 모든 문제가 생긴다. 문제가 생긴 것을 보고 옳으니 그르니 하면 안 된다. 그 길에서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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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누구에게 편지를 하면서 네가 잘못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근본을 잘못 뛰어들었다고 썼다. 근본을 잘못 뛰어들면 그렇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된다. 근본을 바꾸어야 된다. 판을 바꾸어야 된다는 말이다.
사람의 위치가 바로 되면 온 우주가 바로 된다. 그리고 안정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고 되면 바로 되고 안정된다. 내 위치가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조용해진다. 왜 시끄러워지는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인데 왜 안 되느냐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해야 되는데 왜 내 마음 대로 안 되느냐는 것이다. 인생 문제가 다 그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이라고 알게 되면 자시 분수를 알게 된다. 자기 분수를 알게 되면 사람이 조용해진다. 분수를 모르니까 모두 다 날뛰는 것이다. 자기한테 못 올 것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당하지 못할 것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분수를 모르면분만 난다. 그런데 분수를 알면 조용해진다. 우주가 안정되고 내 모든 것이 안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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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이렇게 확고하게 정의할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내 인생이 확실하게 정의가 되면 모든 보는 것이 달라지게 되고, 상대가 다 달라지게 되고, 헛된 길을 가지 않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말했다. 신은 신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했다. 여산여수(如山如水)라는 말이 그 말이다. 좋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 있는데, 이것이 실천이 안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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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씨의 인생관이 여산여수(如山如水)다. 물 흐르는 데로 간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대통령을 못하고 2인자로 끝났다. 그러면 전혀 억울한 것이 없어야 된다. 내게 정해진 것은 2인자구나, 하면 되는데 억울한 것이 있다. 분명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맞는데 여산여수(如山如水)를 보지 못했다. 산천을 보았지만 그러한 인격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한 것이다. 자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자격이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아깝다고 생각한다. 욕심을 조금만 부렸으면 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쁘다고 비판을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통 세상 사람으로는 생각이 넓은 사람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자기가 잡을 수 있는 때가 있었는데 억지로 하지 않았다. 세상은 억지로 하지 않으니까 안 되는 것 같다. 결국 실패자처럼 되었다. 실패자인지 성공한 사람인지 모른다. 성공했다는 사람도 별 것 없다. 그 싸움에서 이겨도 별 것 없다. 5년 해먹고 나왔는데 아무것도 없다. 별로 잘한 것도 없다. 한 번만 하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5년 갖고 되겠는가? 5천만명이나 되는 인구를 5년 갖고 해결이 되겠는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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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확고하게 정리한 말씀이 있었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이 안 됐다. 불교, 유교, 도교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서양에서만 된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도교도 그렇고 유교도 다 그렇다. 불교가 인도에 있을 때는 초월을 주장한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도교를 만나서 해탈을 한다. 초월이 아니라 해탈로 간다. 서양은 얕고 중국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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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문제, 즉 하나님과 만물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능력의 말씀으로 원래대로 회복하고 완전하게 정결케 할 것인가? 있다면 그는 당연히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누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문제, 즉 하나님과 만물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능력의 말씀으로 원래대로 회복하고 완전하게 정결케 할 것인가? 있다면, 이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 사람이 그리스도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자기가 다 짊어지고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대제사장이다. 자기 피는 아니지만 양의 피를 가지고 갈 사람은 대제사장 한 사람이 뿐이다. 이 피가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피다.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의 그림이다. 대제사장만 하나님께로 가는 휘장을 열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만이 이 휘장을 완전하게 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다. 그 아론의 후손인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만 열었다. 그런데 예수는 영원히 열어놓았다. 이제 새롭고도 산 길을 열어놓았다. 우리는 이제 해마다 드리고 예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양 한 마리의 피를 흘려서 대제사장이 대신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로 말미암아 직통된 길, 열려진 길을 우리가 가게 되었다. 완전한 제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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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연히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위엄의 우편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북한에서는 존엄이라고 한다. 김정은 존엄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존엄이라는 말이 위엄의 우편이라는 말이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위엄의 우편이다. 그래서 이름을 조금이라도 잘못 불렀다가는 큰일나는 것이다. 만일 철자하나만 틀려도 즉시 총살이다. 이번에도 측근 중에 한 사람을 처형했다고 한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 다 죽는다. 왜? 가까운데 있다 보니 뭐가 발견될 것이다. 발견되면 즉시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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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우주 질서를 회복하여 새 생명의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창1:16)을 회복하여 그 영광의 광채로서, 본체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아들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주 질서를 회복하여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었다. 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길을 완전하게 열어놓았다. 열어놓고 우리보고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 안에 우리를 포함하고 들어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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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창1:16), 창세기를 읽으면 우리 형상과 우리 모양을 따라라고 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어떤 모습인가를 볼 수가 없다. 사람을 만들 때 우리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보면서 이 사람이 바로 그때 말하던 그 사람이구나. 그 영광의 광채로서, 본체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아들이 된 것이다.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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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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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자신의 죽음(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이끌고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잡아 정결케 하고 우주적 통치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다. 그 광채와 그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본체의 나타남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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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자신의 죽음(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이끌고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잡아 정결케 하고, 우주적 통치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다. 누가 이렇게 할 사람이 있는가? 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는가? 해결하면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그 광채와 그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본체의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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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항상 어떤 것으로 나타나야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다. 예수를 본 사람이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에게서 나타났다는 말이다. 옛적부터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겠는가? 모양이라는 말이겠는가? 그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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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 영광! 그것을 보고 한 말이다. 하나님 본체와 영광의 나타냄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나타나는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렇게 명백하게 우리 주님이 나타났다. 내가 그 안에 포함된, 나를 포함시킨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포함시키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내가 발견한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저 외국 땅에서 나만 한국말을 산다면 다른 사람은 다 다른 말을 하고 사니까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찌어찌하다가 6.25때 한국에 와보니까 자기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야~ 이 사람들이 다 나를 포함하고 있네. 한국말을 하는 한국민족 안에 자기가 다 있는 것이다. 내가 한국사람이네, 이렇게 알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볼 때 내가 저 안에 있구나, 내가 저 안에 있는 사람이구나, 저 안에 포함된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된다. 내가 저 안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고 저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인데 내가 모르고 벗어나려고 애를 썼구나. 그리고 벗어나서 바깥에서 헤매고 뭘 해보겠다고 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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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헤맬 일도 없고 나댈 일도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본분을 행할 때가 되었다.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으로 살 때가 왔다. 자기 안에 지금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내 안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는 참 안 된다. 나도 옛날에 많이 해봤는데 있는 것 같다가 없는 것 같다가 참 안되더라. 아침에는 된 것 같다가 저녁에는 안 된 것 같고, 저녁에는 된 것 같다가 아침에는 안 되니까 종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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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발견되니까 내가 잠을 자도 되고 놀아도 된다. 그 안에 있으니까. 내가 외국에 가서 한국인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하면 참 어렵다. 그런데 한국 땅에 오면 한국인이라는 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 다 한국사람이니까. 왜 고국을 좋아하는가? 자기나라에 오면 편안하다. 다 자기 같은 사람이니까. 내가 다 그 사람 속에 들어있으니까. 여러분이 다 외국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상당히 불안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말도 통하지 않고 생각도 다르니까 상당히 불안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과 같이 있으면 불안한 것이 없다. 다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아주 편안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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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대구교회에 오신 분들은 다 한 통이니까 너무 편하고 좋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보고 하는 말이 사람들이 얼굴이 대단히 밝다고 한다. 왜 그런가? 모두 안심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긴장이 없어지니까 불안이 없어지고 편안하니까 그럴 것이다. 교회까지 왔는데 각자 따로 놀면 어찌되겠는가? 밖에 나가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좀 다르다고 볼 것이다. 얼굴이 다르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전도를 해보라. 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있다. 저 사람은 얼굴이 좀 다르네, 할 것이다. 교무실에서 늘 보던 사람인데 우리와 얼굴이 좀 다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 말을 안 하면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말을 해야 된다. 가서 ‘선생님 나를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죠?’하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렇다고 하든지 아니라고 하든지 말을 할 것이다. 말 실마리를 꺼내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게 해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 친해진다. 그 다음에는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 말이 되지 갑자기 가서 성경책 들이밀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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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이다. 나는 잘 모를지라도 남들이 보면 그렇게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모르지만 뭔가 다르다고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곤란하다. 최소한도 그렇게는 보여야 된다. 마음이 편안하면 편안한 것이 얼굴에 드러난다. 그런데 마음이 괴로우면 괴로운 것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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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이 우주 안에서 완전하게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주님이다. 내가 그분 안에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또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청와대에 있는가? 국회에 있는가? 맨날 싸운다. 그 사람들은 머리가 아플 것 같다.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는 것 같다. 사람 못할 일 같은데 뭐가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365일 늘 만나도 싸울 일이 없으니까 싸우지 않는다. 싸울 일이 있다가도 교회에 오면 다 없어진다. 혹시 오늘 교회에 올 때까지 문제가 남아있던 사람들은 지금은 다 문제가 없어졌을 것이다. 다 없어져야지 지금 없어지지 않으면 순모임 때 없어져야 된다. 순모임 때도 없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때는 결사적으로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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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우리를 정말 복된 곳으로 인도하신 것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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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주님의 복된 세계 안으로 부름 받았는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세계 안에 온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누림으로써 이것을 세상 앞에 자랑하고 공급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안에 있는 축복, 창세 전부터 사람을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으로 우리가 누리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