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 안동차전놀이
왕건과 견훤의 결투 “차전놀이”

차전(車戰)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동채는 약 10미터 쯤 되는 통나무 두 개를 사다리 모양으로 교차시킨 뒤 윗부분을 새끼줄로 단단히 묶고, 사다리꼴의 안쪽에는 폭 1m 정도의 판자를 얹어 고정해 만든 것으로 곧고 위아래 굵기 차이가 없는 참나무를 사용해 만든다. 이 놀이를 위해 연말에 안동 근처에서 적당한 나무를 미리 골라 두었다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 운반하며, 동채를 제작할 때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그고 만든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안동에서는 동서로 편을 갈라 차전놀이를 한다. 편은 거주지 위주로 나누지 않고, 출생지를 기준으로 나누기 때문에 같은 가족끼리도 편이 달라진다. 대장, 머리꾼, 동채꾼, 놀이꾼 등으로 구성돼 진행되며, 상대방 대장을 밀어 제치고 들어가서 자기편 동채로 상대방의 동채를 땅에 닿도록 하면 이긴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타고 동채꾼을 지휘한다. 대장의 신호와 구호에 따라 수백 명이 모여 서로 어깨로 밀며 상대편을 공격하며, 싸움 도중에 혹 상대편의 대장이 쓰러지면 즉시 후퇴해 구출하고 다시 승부를 겨룬다. 머리꾼은 맨 앞에 위치한 정예군으로 상대방을 밀어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며, 동채꾼은 동채를 매고 움직인다.
차전놀이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보통 고려 태조가 된 왕건과 후백제의 왕 견훤이 안동에서 결전하게 됐는데, 김선평, 권행, 장길 등 세 사람이 왕건 편에 가담해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전해지기 시작됐다고 전며, 이 전설에 따라, 차전놀이의 시작은 고려 초기로 추측한다. 차전놀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08년에 쓰여진 권기의 ‘화산지(花山志)’로 “차전은 석전과 같다. 동채를 서로 부딪혀 부서지는 쪽이 진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내용이 17세기 차전놀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되고 있다.
차전놀이와 비슷한 놀이로는 강원도 춘천, 경기도 가평지방의 차전, 경남 영산의 나무쇠싸움, 경북 의성의 가마싸움 등이 전해진다.《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춘천의 풍속에 외바퀴수레를 마을별로 만들어 떼를 지어 앞으로 몰고 와서 서로 싸워 그 해의 연운(年運)을 점치며, 쫒겨 패하는 편이 흉하다고 한다. 가평의 차전놀이도 유사하다. 이들 놀이는 싸움 시기가 음력 정월대보름 전후라는 점, 전 주민이 참여하는 집단놀이라는 점, 나무로 만든 기구를 메고 공중에서 맞부딪쳐 상대방 기구를 땅에 닿게 해 승부를 결정한다는 점 등에서 안동의 차전놀이와 같은 계열의 놀이로 분류되고 있다. 이 지역들은 크게 보아 안동문화권에 속하던 지역들로 이 지역들의 놀이는 안동에서 전파돼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다.
안동지방에서 차전놀이는 1937년까지 연중행사로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날 낮에 강변 백사장이나 벌판에서 거행했다. 하지만 1922년부터 일제에 의한 탄압이 시작돼 결국 중단됐고, 이후 1966년 안동중고등학교에서 계승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부활했다. 1969년 1월 7일에는 ‘안동차전놀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인정받았으며, 제1대 기능보유자 김명한 선생에 이어 제2대 기능보유자 이재춘 선생을 중심으로 안동차전놀이 보존회가 결성돼 현재에 이르렀다. 음력 정월대보름에 시행되던 차전놀이는 지금은 매년 10월 초에 벌어지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