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이 제시하는 대승의 수행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존속해 나간다.
‘생’은 생겨남이고 ‘주’는 이어짐이며,
‘이‘는 달라짐이고, ’멸‘은 사라짐이다.
우리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며
지옥으로부터 천상세계를 윤회하며 살고 있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은 이번 생의 행동들이며
그 행동들은 곧 ’지금‘ 생각 생각의 흐름이다.
따라서 생각의 생주이멸을 잘 관찰하여
습관에 따른 생주이멸을 멈출 수 있으면
그것은 곧 업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업력중생이 아니라
원력보살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생각의 흐름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너무 세밀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6가지가 있고
파악하기 어러운 것은 3가지가 있다.
이를 ‘삼세육추’라고 한다.
쉽게 파악할 수 있는 6가지라 함은
크게볼 때, 앞서 존재의 흐름인 생주이멸 중
주(머물고), 이(변하고), 멸(사라지는)의 과정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3가지는 ‘생(생겨남)’에 배대된다.
어째서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파악하기 쉽고
생겨나는 것은 파악하기 어려운가.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움직임이 있기에
‘생(생겨남)’보다는 쉽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겨남은 매우 세밀한 것이어서 알기 어렵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을
이미 존재의 토대 위에 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컨데, 물고기가 물을 알지 못함과도 같다.
모든 존재의 생주이멸을 세밀히 관하여
업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관찰하여 끊는 수행의 힘’이 필요한데,
이를 지관이라 하며
‘멈추어 보는 것(止, 사마타)’과
‘관하여 끊는 것(觀, 위빠사나)‘이 바로 그것이다.
멈추어 보는 것은 풀을 벨 때
풀을 움켜쥐는 것에 비유되고,
관하여 끊는 것은 낫을 들어
풀의 밑둥을 베는 것에 비유된다.
따라서 초심자에게는
이 마음을 멈추어 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멈추어 본다는 것은 어떤 마음 작용을
다음으로 이어가지 않도록 바라본다는 것이다.
곧 풀을 강하게 움켜쥐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밑둥을 베어내기 수월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화가 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을 주시함으로서
다음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다음 행동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인지
넓게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하여
멸하는 생각으로부터 달라지는 생각,
머무는 생각, 생겨나는 생각이
차례대로 소멸하면 현재의 고통이 줄고
내세의 선업락과(선업의 즐거움)이 늘어난다.
5. 대승기신론의 전체구조
글:울산 신흥사 인경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