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시장은 한 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주로 오전과 저녁에 열린다.
야시장이 활기차고 유명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만의 중장기념관을 관광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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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만인들은 장개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2차대전의 패망으로 일본이 대만에서 물러가고 장개석 정부의 관리가 부임했다.
대만인들은 정말 좋아하며 이들을 환영했다. 엄청난 환영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부임한 관리들은 대만인들을 무시하고 부정부패를 일삼게 된다.
정도가 너무 심하여 채 1년도 안되 반정부 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인들은 오히려 일본의 강점시기가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일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친일의 성향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개석 사 후 외국에 사는 화교들의 모금으로 중장기념관이 건립된다.
장개석 기념관이며 휴식처,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장개석의 어릴때부터 성장기, 손문에게서 정치를 배우는 시기, 정권을 잡고 공산당과 싸우는 시기,
대만으로 옮겨와 현재까지 많은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부인인 손미령여사의 가족과 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가이드가 한류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폈다.
대만은 우리보다는 훨씬 친일감정을 갖고 있단다.
우리와 같이 일제 강점기를 겪었으면서도 많은 다른세력에게 강점을 당한 것과 비교하면
일제시기때가 살기 좋았다는 것이다.
대만은 자체내의 TV드라마를 거의 만들지 않는단다.
대신 주로 일본의 드라마를 돈을 주고 사와 더빙하여 방송하였다고 한다.
일본 드라마의 값이 점점 비싸져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눈을 돌려 한국드라마를 비교적 싼값에 구매하여 방송을 하였단다.
그랬더니 반응이 의외로 폭발적이었단다.
한국의 사회, 문화적 정서가 그들과 맞으면서도 드라마 구성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구해 더빙하여 방송을 했단다.
가이드 말로는 대만의 모드 TV방송드라마가 한국 것이 되어 걱정이 될 정도였단다.
대만뿐만 아니라 중화권이 이 더빙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중국 본토사람들도 알게되어
본격적으로 한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게르마늄 매장을 잠시 방문했다.
이 곳에서 약간의 선물과 물건을 구매하고 대만에서 마지막 점심식사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대만의 충열사를 방문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충열사 앞에서 위병의 근무서는 모습을 보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충열사는 중화민국을 위해 죽은 이들의 위폐를 모신 곳이라고 한다.
중장기념관 - 장개석 총통을 기리기 위해 건립
장개석 총통 동상
중장기념관에 있는 김구선생님
대만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
대만의 인도-건물 1층을 인도로 활용
충렬사에 근무 중인 위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