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크츠크에는 하바로프크크에서 러시아 국내 항공을 이용해서 3시간 30분 정도 비행하여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
한 밤중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만나 버스로 호텔을 향해 이동하였다.
이 곳의 바이칼 호수가 워낙 유명하여 관광객이 몰리다보니 호텔을 잡기 힘든가 보다.
우리 일행을 2군데의 호텔에서 나누어 묵게 되었다.
오랜만에 느긋한 아침을 즐겼다.
호텔에서 부페로 러시아식 식사를 마친 후 시내투어에 나섰다.
현지가이드가 바뀌어 있었는데 현지 유학온 대학생이란다.
이 곳 이르크츠크는 남한의 8배 크기이며 인구는 250만 이란다.
시베리아의 팔이라고 불리며 여름에는 새벽 4시에 해가 떠서 밤 10시에 진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백야이다.
햇살이 꽤 따가왔는데 그늘만 들어가면 시원했다.
대학 유학생의 등록금, 기숙사비까지 일년에 250만원 정도면 해결이 된다고 한다.
모스크바나 쌍테페테르브르크에서는 거의 수천만원대에 든다고 하니 엄청 저렴하다.
먼저 승리의 광장을 관람했다.
러시아에서는 광장, 성당이 주 관광거리 인가보다.
승리광장은 추모광장이라고도 하며 이 곳 역시 사시사철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 지방 출신 용사들의 영원을 지키는 불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이르쿠츠크 출신 참전용사는 20여만 명이었고 그중 50,000여 명이 전사했다.
그들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했다.
겨우 몇칠 훈련을 받은 시베리아 출신 어린 병사들이 줄줄이 투입되었다.
그들에겐 총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이 남긴 총을 주워서 싸웠단다.
이르크츠크에서 우리가 묵었던 델타호델
이르크츠크 시내
레닌동상
사랑의 약속을 상징하는 꿈속의 안내자 토끼
이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투어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어느 도시든지 중앙로는 레닌 거리, 칼막스 거리등으로 이름이 붙여 있단다.
우리도 이르크츠크의 중앙로를 지나면서 시내투어를 하였다.
러시아의 화장실 문화는 정말 열악하다.
공공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유료로라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화장실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공중화장실은 일요일이라 문이 잠겨있다.
우리 일행이 화장실이 급하여 가이드는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도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화장실이 1칸 밖에 없단다.
여자분들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볼일이 급한 남자들은 조금 떨어진 수도원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다고 하여 급히 이동해서 볼일을 보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
다음으로 카잔스키 성당을 찾았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크츠크에서 가장 화려한 외형을 가진 웅장한 성당이다.
카잔의 성모성당이라고도 불리며 미사가 자주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부의 성당벽화는 정말 아름답다.
이성당은 제정 러시아때 건축 되었는데 소련시절 종교박해가 이루어지면서 완전히 부수어졌다.
부서진 파편을 광장에 깔아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는데 거의 1m나 채워졌다고 한다.
소련 붕괴 후 다시 건축하였는데 처음보다는 축소된 형태라고 한다.
카잔스키 성당
러시아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뒤 리스트비안카를 관람하기로 하였다.
버스로 장시간 이동하였는데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
러시아는 이름이 상당히 긴데 자기이름 + 아빠의 성 + 가족의 성으로 쓴단다.
여성이 1위로 보호를 받으며 2위가 아기, 3위가 고양이 등이란다.
차에 여자가 서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단다.
커피문화가 없고 차문화가 있으며 커피도 뜨거운 커피를 먹느다고 한다.
아이스커피도 있는데 그냥 커피에 얼음 2조각 띄워준단다.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다고 한다.
이 곳에는 몇가지 사회 법칙이 있는데 가이드가 우스개 소리로 소개를 한다.
첫째 40도 이하의 술은 술도 아니란다. 그냥 음료수라이라고 한다.
둘째 지름 4km 이하의 호수는 호수도 아니란다. 그냥 웅덩이라고 한다.
세째 4번이하로 결혼한 것은 결혼한 것도 아니란다. 이혼률이 매우 높아 거의 4번이상 결혼을 한단다.
네째 400km이하의 거리는 거리도 아니란다. 그냥 가까운 이웃이란다.
다섯째 40살 이전에 예쁘다는 소리를 못 들으면 여자도 아니란다. 젊은 여자는 정말 예뻤다.
현지인 친구가 가이드에게 여자를 소개한다고 한 적이 있단다.
2번 결혼했지만 아직 아기는 없다는 소리를 듣고 기겁했단다.
그는 이 곳 이르크츠크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군대가 모스크바까지 점령을 하고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고 프랑스 군은 겨울의 극심한 추위와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게 된다.
러시아에서는 젊은 장교들을 뽑아 기마대를 구성해서 그들을 추격한다.
프랑스 군을 쫒아 추격전을 벌이며 드디어 파리까지 입성하게 된다.
젊은 장교들은 유럽에서 승리를 만끽하며 천천히 러시아로 개선한다.
러시아로 돌아와 보니 전쟁 전의 왕의 부정부패가 계속되고 있자 유럽 물을 먹은 이들이 혁명을 계획한다.
마침 왕이 후자없이 사망하고 혼란기가 있었다.
후임왕이 취임식에서 군대의 충성을 약속 받으려 했으나 이 때 혁명을 일으킨다.
농노제 폐지와 전제 군주정치 종식을 외치며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만다.
주동자들을 체포해서 당시 유배지로 사용되던 이 곳으로 보내 강제노역을 시켰다.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이들의 부인들이 남편들을 따라 이 곳으로 오게된다,
이 곳에서 귀족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평민의 신분으로 사면된 남편들과 어렵게 살게된다.
이들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라고 하는데 이들에 의해 유럽풍으로 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르크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한단다.
드디어 리스트비안카 입구에 도착했다.
자작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산길을 한참을 걸어갔다.
중간에 에벤키 족의 여름집과 브리아키 족의 풍장흔적을 보았다.
딸지 민속촌이 보였다. 초기에 이주해오거나 추방당했던 사람들이 살던 모습이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곳에 풍부한 통나무를 이용하여 지은 가옥, 축사, 학교, 성당 등 개척당시의 모습이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으며 창문을 작게 내어서 겨울의 극심한 추위를 막았다.
마침 민속 옷을 대여하는 곳이 있어서 집사람과 원장님이 민속옷을 차려입고 즐겁게 기념촬영을 했다.
민속촌을 나와 조금 더 가면 앙가라강이 나오는데 바이칼 호수물이 흘러나가는 곳 이란다.
바이칼 호수를 관광하기 위해 다시 버스에 탑승하였다.
버스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근본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단다.
결혼 전에는 여자를 위하여 남자가 모든 것을 해준단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남편의 지위로 일을 하지 않고 여자가 모든 것을 희생한단다.
그러다보니 갈등이 생겨 이혼하기 일쑤인데 이혼율이 상당히 높단다.
여자가 양육권을 갖고 미혼모에 대한 복지도 좋다고 한다.
남자는 월급에서 양육비를 떼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리스트비안카 입구-자작나무 숲속에 있는 에벤키족의 여름 집
자작나무 숲 길
브리아키 족의 풍장 흔적
딸지 민속촌-민속의상을 입고
앙가라 강
바이칼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는 비교적 큰 도시가 조성되어 있었다.
호수는 둘레가 2200km 이며 가장깊은 곳은 수심 1600m 란다.
전에는 흑해로 통하는 수로가 있었으나 지진으로 막혀 호수가 되었다 한다.
여러개의 선착장이 있어 사람들이 끝까지 가 맑은 호수물을 보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집사람 친구가 있는 이천 선생님들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신나게 한바퀴 돌았다.
보트에는 러시아 여인에게 안긴 아기도 있었는데 무서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했다.
바이칼 호수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뒤 한참을 걸어 우리 버스가 있는 곳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내일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비교적 빠른 시간에 호텔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바이칼 호수
바이칼 호수 마을에 있는 정교회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