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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원어강해설교 5회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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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약하고 소외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본문: 고전 1: 25-31
Ⅰ. 서론
미련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보면 십자가의 도는 세상 지혜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시는 뜻에 따라 깨닫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누구도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오늘 본문도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25-28절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지혜 없고, 무능하고, 문벌 없는 소외된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음 29절은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30-31절에서는 보잘것없는 위치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주님만을 오직 자랑해야 함을 가르친다.
Ⅱ. 본문강해
1. 부름 받은 자들의 모습
25절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과 하나님의 약하신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26절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학식 없는 미련한 자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약한 것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권세 없는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 속한 미련하고 약한 자들이 세상의 지혜롭고 권세 있는 자들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즉,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6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보잘것없는 자들임과 왜 보잘것없는 자들을 택하셨는지 그 까닭을 가르쳐 주고 있다.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할 때 부르심이란 <클레시스>로서 24절에서 불러서 택하여 주신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 속에 담긴 의미는 사실 놀라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됨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을 받고 양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음과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영생을 소유한 신적 존재가 된다고 하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이미 영생을 누린 자들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세상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자들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음을 일깨운다. 육체를 따라서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타고난 조건 곧 태어난 환경과 배경을 말한다.
지혜 있는 자라는 <소포스>는 여기서는 학벌이 좋은 사람을 뜻한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제자들 중에서 배운 자가 많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를 통하여 학식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세상 지식과는 관계없이 영적인 지식이 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남으로써 사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능한 자는 <뒤나토스>인데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다. 당시의 교인들은 힘있는 로마인들보다는 피지배지의 억압받는 사람들이 많이 믿었으며, 돈 많은 사람보다는 돈 없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많이 되었다. 또 남성보다 여성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한편 문벌 좋은 자인 <유게네스>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계급을 가리키는데, 귀족보다는 가문의 배경 없는 평민 계층이, 평민보다는 노예 계층이 많이 믿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 온통 무식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가졌으므로 가문적으로 배경이 든든하였고, 또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교의 율법을 배웠고 헬라 지식에도 풍부하였으므로 학벌로도 누구에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바리새파로서 당시엔 권력층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빌라도로부터 주님을 달라고 하여 예비한 무덤에 안장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이는 부자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바나바, 아볼로, 회당장 그리스보, 니고데모 같은 이는 학식이 많은 자였고, 백부장처럼 권력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밖에도 많은 부자들과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출신 배경이나 환경이 어려운 이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천하고 약한 자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까닭에 대해서는 29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2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한다. 미련한 것이라는 <모로스>는 머리가 나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학식 없는 자 또는 배움이 없는 자를 뜻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말 미련한 자들은 학식이 많음을 뽐내면서 자신이 멸망 길로 가고 있음을 모르는 자들이다. 택하다라는 <에클레고>는 26절에서 부르심이라고 한 <클레시스>와 같은 말이며, 교회라는 <에클레시아>와도 같은 뜻으로서 모두 세상과 구별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지혜 있는 자는 학식이 있고 세상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런데 학식 있는 자들이 부끄럽게 되는 이유는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학자인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음으로써 지혜가 자라고 인격이 성장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놀라게 된다. 행 4:13에 보면 베드로가 붙잡힌 후에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뭇 서기관들 앞에서 설교하듯이 변론할 때 그들이 베드로를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놀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먼저 믿은 자들 중에는 학식 없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믿은 학식 있는 자들이 그들을 보면서 늦게 믿음으로써 자신들의 영적 지식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약한 것이라는 <아스데네스>는 강함이라는 <스데네스>에 부정 접두어 <아>가 붙어서 장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세상의 약한 것이란 이러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강한 것은 <이스퀴로스>인데 강점(장점)이 있는 사람 또는 권력 있으므로 힘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사도는 약한 자들이 오히려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 있는 자들은 세상에서 세도를 부리며 자신들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다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금방 위축되고 자신들이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된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남을 돕고 힘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부패하고 무능하여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지만, 처음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시기에는 기독교와 성도들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기독교가 타락하지 않고 정상적이라면 복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부끄러움은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부끄러움이란 과연 상상할 수 없는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생애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서 모든 자랑과 교만과 온갖 정욕 속에서 살았으나 그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결국 자신들이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몸부림치며 통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8절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하였다. 세상의 천한 것들이란 초대 교회 당시의 노예 계층, 창기, 문둥병자 등과 같이 천대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멸시받는 것들은 같은 뜻이다. '없는 것들'이라는 <메 온타>는 존재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 가치가 없음을 의미하며, 이상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다음, 있는 것이란 <온타>인데 Be 동사 <에이미>의 분사형으로 존재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폐하신다는 <카타르게오>는 일없게 만드신다는 뜻으로 무가치하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며 곧 멸망의 존재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28절의 의미는 겉으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부르심에 응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 많고, 오히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여 멸망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보면 세상에서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못 믿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들은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구원 얻는 길이 이렇게 너무나 쉽기 때문에 잘난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29절에서 말씀하듯이 아무도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힘있고 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가 힘들므로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약하고 소망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더 잘 받아들이므로 실제로는 그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무식하고, 무력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약함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세상의 지혜자와 권력자들은 자신을 믿고 살다가 멸망당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힘있게 살아가면서 끝내는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 부끄러워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비록 세상 사람들보다 약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고,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을 소유함으로써 만물을 소유한 능력 있는 자들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디에 속한 자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세상의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자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사람'임을 자랑해야 할 것이다.
2. 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
29절은 하나님께서 왜 약한 자들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가르치는 구절이다. 아무 육체라고 할 때 <사르크스>는 원래는 육체(Flesh)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바울 사도가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는 사람에 대하여 흔히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구조와 다름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 세상은 잘난 사람이 인정받고 못난 사람이 버림받는 구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는 잘나서 구원하시고 못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데,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그것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절대로 공로가 아니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구원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자는 없으며, 결국 사람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자비로운 사람이 고아들 중에서 양자를 삼기 위하여 그들 중에 누가 양자로 오겠느냐고 물었을 때 어떤 아이가 제가 가겠노라고 대답함으로써 그 집에 양자로 갔다고 치자. 그 아이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으나 양자로 가게 되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자비로운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양자로 가겠다고 말한 것밖에는 없다. 그것이 양자가 된 것에 공로가 될 수 있는가?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란 복음을 듣고 반응으로서 화합한 것뿐이다(히 4:2). 따라서 그것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세상 어떤 누구도 자신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데 강제적으로 믿어지게 된 사람은 없다. 믿음이란 믿어지므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자는 믿고 어떤 자는 믿지 않는 것일까? 이는 어려운 신학 논제가 될 수 있으나,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믿음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만 대답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믿음은 은혜를 받아들이겠다는 반응(히 4:2)인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모든 인간에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주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을 때 우리들 속에 없던 능력이 외부에서 갑자기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믿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여 구원을 얻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그것을 사용치 않음으로써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즉, 누구나 주신 믿음을 사용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믿음을 사용치 않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물어 나중에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믿음을 사용치 않음으로써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로 볼 때 불량품이며, 이는 피조물의 한계인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한계인 불완전성 즉, 가변적인 성질 때문에 언젠가는 타락의 여지가 있는데, 영계의 피조물인 천사가 먼저 타락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도 피조물이므로 그 속에 내재된 불완전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타락할 수 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자들은 피조물이 가진 한계인 불완전성에 속한 불량품이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 이전에 아담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을 만드셨는데, 아담이 불순종하여 타락하므로 아담 안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인간이 구별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인간에 내재된 불완전성 쪽에 속한 인류가 제거되는 것이며, 나머지 아담에게 남아있는 순정품 쪽에 속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는 사 1:25에서 내가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제하여 버린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믿게 된 우리는 불량품이 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면서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오직 주님만을 자랑함
마지막 30-31절은 미련하고 약하며 보잘것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제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주님만을 오직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라고 하는 말은 얼핏 출생을 말하는 것처럼 번역되었으나, 원어로는 <에크사우투>인데, 여기서 <에크>라는 전치사는 원인을 나타내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롬 11:36과 고전 8:6 등에서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할 때도 <에크> 전치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에크>가 출생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라는 말은 우리가 주님과 연합된 관계를 뜻한다. 연합이란 <쉼프토이>인데 원래는 함께 자란다는 뜻이다. 이는 요 15:4-6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성도가 주님께 접붙은 가지가 되어 항상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말라버린다는 말씀으로부터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살았지만, 주님과 연합한 이후에는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의 생명으로 열매맺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다는 <아포 데우>는 주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을 뜻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나, 성부이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여기에 열거한 것들은 모두 중요한 단어들로서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중요한 개념만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지혜는 <소아>인데, 성경은 지혜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으며, 특히 잠언에서 지혜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다. 잠 3:15-18에서 지혜는 가장 값진 것이며,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하였으며, 잠 3:19-20에서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혜로 생명을 만드셨다고 하였다. 곧 지혜의 본질은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지혜가 아니라 실존하는 인격으로서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다.
다음, 의로움이란 <디카이오쉬네>인데, 원래는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의로움이란 주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던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동적 사역으로서의 의를 뜻한다. 주님은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인의 상태를 죄 없는 무죄한 상태로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의 중요한 개념이다.
다음, 거룩함이란 <하기아스모스>인데, 원래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구속하신 자들을 세상의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거룩한 무리들로 만드셨다. 마지막으로 구속함(Atonement, Redemption)이란 <아폴뤼트로시스>인데 사람을 구해내어 죄를 면제받게 한다는 뜻이다. 구속은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속전(Ransom)인데, 이는 옥에 갇힌 자, 노예 등을 속전으로 풀어주는 것을 말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이 사망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해내신 것이다. 둘째는 해방(Release, Liberation)이다. 이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며,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다. 셋째는 회복(Restore)인데 원래 <소조>라는 말은 치료하다라는 뜻이었다. 이는 우리의 타락한 영을 원상으로 회복시켜주신 것을 의미하는데, 마 17:11에서 사용된 회복이라는 뜻의 <아포카디스테미>와 유사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앞에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을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관련하여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님과 연합한 자들이 되게 하셨으며,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의 지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의 원천이 되게 하시며, 우리를 거룩한 자들로 만드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도는 이제 31절에서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결론을 내린다. 기록된 바라는 말은 렘 9:23-24에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예레미야 원문의 뜻은 아무도 자신의 지혜나 용맹을 자랑치 말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깨달으라는 것인데 사도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주안에서 자랑하다'는 <카우카오마이 엔 퀴리오>를 번역한 것인데, 자랑하다 라는 동사 <카우카오마이>는 항상 <엔>전치사를 수반한다. 로마서에서도 하나님을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한다고 할 때 모두 <엔> 전치사가 수반되었다. 따라서 <엔>은 ~안에서 라는 뜻이 아니며, <카우카오마이>동사에 동반되는 전치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죄인만이 남을 뿐이다. 사도는 엡 2:9에서도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한다고 하였고, 빌 3:3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한다.
Ⅲ.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먼저 부르신다고 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이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원이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자랑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