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도 빛나는, 2소대 전우들의 마나님들"
매년 현충일만 되면,2소대 마나님들은 전 전 날 부터 음식을 장만..국군묘지에서
만남이 가족들 소풍날 같고 분위기는 화기애애...더구나 미색 옷을 입으신(사진앞쪽
등이 보이는분) 마나님은 작고하신 박석근 전우 대신으로 매년 오신다.
그런 정성을 가진 모임은 다른 전우회에서 찾을길이 없다. 원래는 2소대 전우 모임
으로 만나기 시작 했었는데 이제는 마나님들 모임에 2소대 전우들이 따라다니는 것
처럼"투이 전우회"가 됐다.
2소대의 약력을 보고 드리고 부인님들께 말씀을 전합니다.
백마 1진 28연대 2중대 2소대원이 월남에서 헤어진지 21년만에 국군묘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그것은 다른 참전전우들은 적어도 중대 아니면 같은 연대에서 근무했던 병력이,몇명씩 합해서 만나는 경우지만,함께 같은날 2소대가 파병됐다가 살아 돌아온 소대원들이 조국에서 당시의 그 2소대가 다시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 입니다.
21년만에 만나서 또,23년이 흐르는 세월동안 서로가 변치않고 이곳 동작동 국군묘지에서 부부동반과 자녀들을 대동해서 만나는 일도 다른 파병 전우들과 비교해 봐도 기적에 가까운 일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2소대는 66년 2월에 처음 만나 6개월이 넘게 양평에서 월남의 정글과 동굴 작전에 대비한 호된 유격 교육을 받았습니다.중앙청에서의 행사와 서울 종로거리 시가 행진을 위해 당시의 비행장 였던 여의도에 열흘간 주둔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9월 초에 월남 나트랑에 도착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역만리 월남에 우리들의 목숨이 어찌 될지도 모른체 지상 전투부대로 파병됐던 것입니다.
전투부대는 글자 그대로 월남의 공산주의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부대를 말 합니다.서로가 이념이 다른 적(敵)들 끼리 서로 총 뿌리를 겨누고 죽이고.죽는 전쟁 입니다.
우리는 젊기만 했을 뿐 전쟁 경험은 전혀 없는..어떻게 보면 오합지졸에 불과 했습니다.
요즈음 처럼 학력이 높은 사람들도 아니였고 나중에 월남에 간 후배들 처럼 지원을 해서
파병 된것도 아닌 .. 거의 국가의 명령을 받고..죽음의 형틀 아래로 뛰여든 것 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찍으러 간게 아닌 참으로 위험한 곳에 버려진 어린아들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살기.또는,장애자가 됩니다.실제로 우리 2소대도 박부웅 전우는 하반신 不具,이상근 전우는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3분대장 이만생과 이차세.이기현,임인성,박남수,황음주,김정관 전우들은 敵이 쏜 총탄과 수류탄 부비트랩에 구만리창천의 젊은 목숨이 월남의 정글과 동굴,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곳 국군묘지 26과 25 월남묘역에 있습니다.
86년도 현충일날,이곳 월남 묘역 722번.. 고,이만생 전우 묘비 앞에서 당시의 우리 김동복 소대장님과 나,김영배와 만났습니다.무슨 약속이라도 한듯이 만난것 입니다.
그때 서로가 눈물 글썽이며 얼싸앉았을때,소대장님이,
"1분대장 오랜만이오"
헤여진지 20년이 지났어도..특유의 굵은 경상도 사투리의 소대장님 말씀은 여전했습니다.
월남에서 작전 전날, 선임하사 장금환,향도 박춘길,1분대장 김영배 2분대장 김찬섭,3분대장 이만생,(3분대장 전사후, 그 자리엔 양대호 전우가 맡음)화기분대장 전재연,위생병 엄기복 무전병 이기동,이렇게 여덟명을 집합 시켜놓고 작전 지역과 작전 상황을 설명하던...짧고 무사 귀대를 당부하던 굵은 사투리의 김동복 소대장님,
2소대원들은 귀국후, 제각각 다른 고장에서 살면서도 그 목소리를...서로의 얼굴을 그리워 했을것 입니다.귀국하며 헤어진 당신의 부하들이 그리워 소대장님은 그때부터 할 일이 소대원을 찾는 일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오늘날 만남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 입니다.
나와 만난 그때부터 소대장님은 살아돌아왔을...당신의 2소대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같이 근무 했을때 소대원들의 주소가 따로 있었던것도 아닙니다.서울을 비롯해 전국각지에서 모인 2소대원..그 저 아는건 막연히 어느道 출신 이라는것뿐,휴대 전화도 인터넷도 없을때 입니다.
소대장님은 우리 2소대를 인솔했던 경험을 살려 하던일 집안일 전부 무시하고 전국을 상대로 2소대원을 거의 찾아서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된것 입니다.
다른 파병 전우들은 생각도 못했던 전우찾기를..월남에서와 지금에 일을 똑같이 소대장님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어려운일을 해낸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전우찾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월남에 있을때나,귀국해서도 변함없는 소대원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소대장님의 그 정성으로 우리는 이렇게 뭉치는 것 입니다.)
우리가 파병되기전에 우리나라는 몹시 가난했습니다.
60년대 초,시골에서 20세쯤 되는 처녀가 시집을 갈때,그 때까지 그처녀가 먹은 쌀이 한홉도 안됐다는 사실처럼 우리나라는 많이 궁핍 했습니다.
우리가 월남에서 목숨을 담보로 벌어들인 달러로 나라의 경제는 조금 나아 졌다곤 하지만,전체적 으론 모두가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우리 2소대원은 귀국을 해서 살아가는 방침이 "굶지만 않으면된다" 는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게 모자란 힘든 현실에 적응을 하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부인님 들은 그러한 우리에게.배운것도 가진것도 없는...
그야말로 백수의 우리에게 시집을 오셨습니다.
오로지 젊음이라는 것과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배우자들을 마다 않고 우리를 택했습니다.
또한 국가도,국민들도 무시하고 인정해 주지않는 우리 참전자들을 믿은것 입니다.
가진것도..배운것도.. 아무런 장래의 희망도 없는 우리를 택해 주신것도 고마운데 어려운 살림에 자식까지 낳아 훌륭하게 키워 주시며 오늘날 까지 살아 주신데 대하여 '사랑'이라는 기적을 보는듯 합니다.
"누군가 돌봐줄 대상이 생겼을때사람들은 그때부터 강해진다." 라고 어떤 누군가 말했듯이 부인님들은 내일또,내일의 행복을 바라보며 어려운 생활을 꾸리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
또한,살고 계십니다. 더구나 전우들은 우리 남자들 인데 이제는 원래가 부인들 께서 전우들이고 우리 남자들은 그 모임에 따라 다니는 것처럼 전대 미문의 일이 됐을 정도로 가족같은 분위기로 변 했습니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부인님들의 적극 협조 덕 입니다.
흔히...남자들은 철 이 좀 늦습니다.
이제 부터라도 우리 전우들은 부인님들께 헌신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