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래 목사님 말씀 요약
(191201, 주일말씀 중)
형제를 늘 보고 살면 천국,
서로 이렇게 보고 사는 것이 ㅎ의 나라다. 불교는 인간 자신의 문제, 그것을 파고 들고 있다. 왜 병들고 늙는가, 왜 살고 죽는가 그런 문제로 시작하여 나는 누구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 철학이다. 백양사 입구에 큰 바위 있는데 ‘이게 뭐꼬,’ 그렇게 새겨져 있다. 뭔가 인간의 의문되는 문제를 찾느라 그런 철학이 생겼다. 샤머니즘과 결합하여 종교가 되었다. 그런데 그 종교를 벗으면 그 철학만 드러난다. 끊임없이 그 법을 설법하고 있는데 그 불교의 법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다. 들어보면 끊임없이 같다. 자기를 찾자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 처음부터 관계다. 관계로 시작, 마지막도 관계다. 요한계시록 보면 신랑과 신부가 또 ㅎ과 어린양, 이렇게 상대적이다. 관계 완성되는 것이 역사의 완성이다. 관계 완성되면 뭐하는가? 또 세계가 시작된다. 결혼하고 나면 혼자 사는 세계에서 둘이 사는 세계로 바뀌듯 둘이 되면 아기 낳는 세계로 바뀐다. 성경은 처음부터 창조주와 피조물, 하늘과 땅, 그렇게 두 관계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등 관계 사회로 들어온 것이다. 이 관계 사회 완성이 인격의 완성이자 세계의 완성이다. 잘나듯 못나듯 둘이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어가는 세계다. 교회 안의 어떤 부부, 둘이 사이가 안좋았다. 그런데 뭐가 보였는데 둘이 자기 인생 바쳐서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개 닭보듯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는지. 인간 사회는 둘이 사는 세계다. 둘이 맞아야한다. 재미있는 세계이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 세계다. 둘이 사는 것 때문에 세상이 복잡하고 시끄럽다. 그렇게 세계 유지되고 있다. 싸워도, 문제 생겨도 같이 살아야한다. 같이 살아야 뭐가 나온다. 좀 북적거리고 시끄러워도 해결되면 좋다.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다른 종교와 좀 다른 점, 죄라는 것이 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그것인데 관계사회이기에 그런 것이 대두된다. 둘이 살면 좋은 것, 나쁜 것 다 생긴다. 그러면서 한쪽은 죄인이고 범죄자 된다. 왜 이스라엘에 죄문제 나왔는가 종살이 할 때는 그런 문제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광야에 나오니 법이 없으면 안되었다. 법을 만들어놓으면서 죄 문제가 나온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을텐데, 법이 생기고 범죄가 생겼다는 것이다. 법이 오니 범죄가 생겼다, 예를 들면 옛날 교통사범이라는 것이 없었다.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다 차가 생기고.. 교통법규가 나오니 교통사범이 생겼다. 벌금, 징역 등 그런 것이 발생했다. 법이 만들어진 이상 법을 안 지키면 죄인된다. 파란 신호 빨간 신호 약속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안 지키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벌을 받는다. 법이 없었으면 범법자가 안되는데 법이 생기면서 범법도 생겼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나오니 법이 필요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게 되었다. 법이 없을 때는 범법자가 없었는데 법이 생기니 죄명도 생겼다. 이스라엘 사람의 율법, 아주 오래되었다. 교회에도 죄라는 문제 많다. 잘 보라.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 안드는가? 계속 죄 회개하라고 한다. 죄 때문에 교회 간 사람도 있겠지만 교회 들어가면 죄라는 문제 나오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그러면서 모든 사람 죄인된다. 저는 죄를 안 지었다 하면 다들 난리다. 네가 어떻게 죄인 아니란 말이냐? 죄목을 일일이 따지면 죄인 아닌 사람 없다. 죄인이라 해야 출발이 된다. 그래야 회개시키고 지옥, 천당 가르친다. 어떤 어르신, 어떤 교회에서 처음에 성경공부 시키면서 당신이 죄인이라고 하니까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니 결국 상대가 포가하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 와서 여기가 천국이네 하고 간증하셨다. 내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 죽었다 하는 것이 용납도 안되었지만 감사도 안되었다. 믿음이 없어서인지 그냥 답답했다. 관계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쫄아들 필요도 없다. 이웃과 나 사이의 잘못, ㅎ과 나 사이의 잘못 각각 자기가 알아서 해야한다. 뒤범벅 섞여서 말하니 난처하고 막상 해결해야할 문제를 해결못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해결 못할 것이 없다. ㅎ의 관계는 내가 해결하고 싶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ㅎ과 나 사이가 정상적이 안되고 비틀어지게 한 존재가 있는데 그게 사탄이다. 스스로 죄를 진게 아니라 ㅎ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는데 사람은 본성적으로 거역하고 싫어한다. 그리고 ㅎ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얼마나 중대한 것이 있는줄 모른다. ㅎ의 표현체, ㅎ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렇게 귀중한 자가 이탈하고 갔으니 큰 문제인 것이다. 내가 ㅎ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줄 모르면 회복이 어렵다. 말단직이 잘못한 것과 비서실장이 잘못한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내 책임이 중대하면 그만큼 중대한 죄를 짓게 되고 잘하면 큰 영광을 받게 된다.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했다. ㅎ이 나에게 갖고 있는 생각, 왜 나를 만들었는가 알게 되면 내가 그분의 이러이러한 점을 거역하고 있었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죄와 다르다. 모른 사람, 죄를 범했는데 무슨 죄를 지은줄 모른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라는 것, 그것을 알아야 죄도 알고 감사도 안다. ㅎ과 우리 관계, 특별하다. 그냥 가는 존재 아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잘못하면 절대 안되는 존재다. ㅎ이 웃는데 내가 성낸다고 보라. 그러면 안되지 않겠는가? 나로 인해 ㅎ이 오해되어 분이 나는 ㅎ이 되고 만다. 큰 문제다. 사람은 아무렇게나 있는 존재 아니다. ㅎ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 ㅎ의 얼굴이 될 존재, 그의 모습, 그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 그보다 영광스러운 존재 없다. ㅎ과 관계가 그런 관계다. 이렇게 처음부터 알기 힘들다. ㅎ이 나를 살려놓으신 이유, 이것 때문이구나. 저 사람을 살려놔야 사람들 숨좀 쉬지 않겠나 해서 살려놨구나 생각 든다. 그러니 배짱을 세운다. 하나님, 제가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필요하면 넉넉하게 하시고 안 그러면 데려가셔도 됩니다. 전혀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그런 입장이다. 벌써 죽음도 준비해놓고 또 여기 있으면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살고 있다. 그러니 의사도 내 죽음에 대해 숨길 일이 아니다. 요즘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시간은 많은 것 같아도 막상 할 시간은 없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어 살고 싶다. 저희 집 오셔도 되는데 오기만 하면 내가 말하는 이 소리, 무조건 들어야한다. 내 할 일이 많아서 그것만 들으려면 와도 된다. 할 말은 많은데 쓸모없는 말도 많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이 세상 천지다. 예수님 하신 말씀, 없으면 안되는 말씀 하셨다. 성경의 말들이 그런 말들이다. 어제 청년부에서 한 말, "태초에 ㅎ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그 말은 절대 없으면 안된다. 그 말이 없으면 내가 어디 설곳이 없다. 나는 누구입니까, 부득이 나는 원숭이 새끼가 되어야한다. ㅎ이 나를 지었다 해야 내가 갈 곳이 있다. 그 한 말씀 때문에 내 인생이 자랑스럽게 존재한다. 내가 인생이구나, ㅎ의 피조물이구나, ㅎ의 필요로 지었구나 그렇게 그 한마디로 인해 아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날 필요 없다. 세상 가보라. 잘난 사람 비교할 수 없이 많다. 그러니 ㅎ의 한 말씀이 내 인생 세워준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누가 봤나, ㅎ을 본일 있나, ㅎ이 천지 창조할 때 본일 없는데 그 한 마디가 내 인생 세워준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한 말 없으면 나는 동물원에 가야한다. 내 조상 보러 가야하는 것이다. 이 한 말씀, 이렇게 복되게 할줄 몰랐다. 내가 너를 지었다, 복음 중의 복음이다. 육신적으로도 부모가 없으면 불행이다. 아무도 내 부모 아니라 하면 어떻겠는가. 그래도 내 아버지, 나를 지은 분이 있다는 것. 그러니 고통이 크든 어려움이 많든 나는 아버지 있는 사람이다. 다른 것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다. 지으신 분, 그냥 지었겠는가. 지으신 분이 나를 그냥 지었겠는가. 그분을 인정해놓고 나니 하나님, 왜 나를 지었습니까? 질문이 나왔다. 존재를 인정하고 나니 이어서 그런 질문 나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요, 내가 왜 필요합니까, 그런 질문이 나온다. 정당한 질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할 질문이다.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 그런 질문 생각하는데 그런데 딱 부르셨다. 내가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었다, 준비되면 다 일을 시킨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안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파리 한 마리 죽여도 누가 뭐라할 자 없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 한 마디가 그렇게 소중하다. 관계다. 전능하신 이와 관계있다. ...(생략) 여러분 한 사람 만큼 ㅎ이 나타나 계시는 것이다. 점 하나 찍기 따라 명품일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ㅎ이 될수도 있다. 나와 관계된 자가 누구인가? 그래서 자랑스럽다. 전능자가 나를 지은 것이다. 실제로 맞다 ...(생략) 그는 참 ㅎ이시오 영생이시다 그는 유일한 분, 예수보고 하는 말이다. 얼마나 귀중하면 사람더러 참 ㅎ이라 하겠는가. 신이라는 말 아니다. 내 ㅎ이라는 말이다. 그는 내 참 구속의 ㅎ이시다, 그리고 나에게 영생이신 것이다. 나를 나 되게, 참 사람 되게 한 데는 ㅎ보다 실제적인 ㅎ이라는 것이다. 영생이시라. 그런즉 너희는 우상에서 멀리하라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이다. 갑자기 나오는데 그것 외에는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분만이 참 ㅎ이고 영원한 행복이다. 관계가 점점 발전해서 내 뼈중의 뼈 살중의 살 그렇게 발전해야한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이름지으라 했고 이름한 바가 그 이름되었다 한다. 관계 설정이다. 나와의 관계다. ...(생략) 내가 인간이라고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빌딩 안지어도 새들 보라. 잘 살지 않은가? 우리가 유일하게 자랑할 것, 우리가 ㅎ의 배필이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 이것이 유일한 자랑해야한다. 힘자랑하거나 용감 자랑하면 코끼리, 호랑이 앞에 가면 부끄럽다. 사람에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람보다 나은 데 가서 자랑할 일이다. 짐승 앞에서 자랑이 되겠는가. 관계 속에서는 행복이고 불행이다. ㅎ과 사람 사이 관계 잘 되면 영생이고, 끊어지면 멸망이다. 간단하다. 영원히 사는 그런 것 아니다. ㅎ이 없으면 못사는, 그것이 영생이다. 연합 안에 ㅎ의 나라 있다. 연합 없는 것은 ㅎ의 나라 안된다. 연합된 세계, 그게 아니면 다 바벨탑이다.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생이고 천국이고 연합이다. 서로 조건이 맞아야 연합이 된다. 자기 잘남으로는 안된다. 연합이 안되면 아무 것도 안된다. 그래서 구속, 예수 구속안에 오면 누구와 연합 안될 자 없다. 방법이나 조건, 기술이 있는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것 없으면 아예 시작이 안된다. 기본이 안되면 ㅎ의 나라 안된다. 기초가 중요하다. 이 복음, 이 기초를 확산해야한다. 기초가 없는데 무엇이 되는가? 아무리 말해도 결론이 없다. 바닥이 좋지 않은데 지붕 올린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뿌리, 그게 연합이다. 관계에서도 그게 중요하다. 모든 것이 관계다. 그것을 중요시해야한다. 그 관계 잘 하려면 구속 안에 들어와야 한다. 십자가 못 박혀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자리에서만 관계, 연합이 된다. 다른 데서는 아무리 별다른 신앙이 있다 해도 안된다. 만인구원론 결국 다 만민이 구원된다는 말, 참 좋다. 그런데 어떻게 다 만민이 구원되는가? 그런 길은 없다. 즉 만민 연합된다는 말인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것도 ㅎ의 절대적인 사랑, 의지로 된다는데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그 절대적인 사랑과 의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한 사람의 죽음 그 시시한 한 사람의 죽음이 만민을 구원한다. 이 복음 없이 아무 것도 안된다. 성경 아무리 읽어도 안된다. 모든 것, 그 기초 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 만들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세상은 갈수록 혼자 산다. 관계, 영원한 관계 안에서 함께 사는게 축복이다. 지금 좀 덜되어도 그게 목표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전에 나는 8년 설교했는데 그 당시 아무 목표가 없었다. 좋은 말은 많이 했어도 소용없는 말을 했다. 우리는 확실한 복음 가지고 있다. 아무데나 있는게 아니다. 시시한 것 아니다. 그리스도 사역의 중심, 구속이다. 그것 아니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세상에 계실 이유도 없다. 구속이 아닌 기적, 구약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 구속이 희미해서 안 잡혀있다. 그러니 인생도, 교회도 안 된다. 유사한 것밖에 안 나온다. 주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길을 보여주신 것이 감사하고 이런 것 나누는 것이 행복이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다.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시에 의해 알아지기에 누군가 전해야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저절로 아는 것, 그것은 아무리 좋아도 신념에 불과하다. 들음에서 나야한다. 이상이다. 또 다음달에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