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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동 3성(北東三省)과 백두산 기행
1990년, 내가 43세 되던 해 난생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는데 홍콩-중국(백두산)-일본을 돌아보는 10박 11일짜리 여행이었다. 당시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 6개월간 파견교육(음악교육 전문과정)을 갔었고, 그 과정 중에 해외여행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첫 해외 나들이라 느낀바가 굉장히 많았다. 당시는 중국이 공산국가라 홍콩을 거쳐 입국했고 정부에서 안기부(安企部) 직원을 동행시키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도 지금에 비하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중국 북동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중국에서도 변방지역으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들 생활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경제사정이 좋아 도쿄(東京) 일원을 돌아보는 국한된 일본여행이었지만 매우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서는 중국 베이징(北京)과 북동 3성, 그리고 백두산 기행에 국한해서 기록해 보려고 한다.
1. 북경(北京) - 명 13릉(明十三陵)과 자금성(紫禁城)
명십삼릉(明十三陵)은 북경에서 약 50km 떨어진 천수산(天壽山) 기슭에 위치한 황릉(皇陵)으로 명왕조(明王朝) 영락제(永樂帝/3대) 부터 숭정제(崇禎帝/16대) 까지 13명 황제, 23명의 황후, 수많은 왕자와 공주는 물론 셀 수도 없이 많은 비빈(妃嬪)과 궁녀들도 함께 묻혀있는 묘역이다.
명나라는 황제가 모두 17명인데 그 중 13명이 묻혀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중 세 번째 크기인 정릉(定陵)을 발굴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정릉(定陵)은 만력제(萬曆帝/13대)와 두 황후가 묻혀있다고 하는데 묘역의 총면적은 약 40㎢이고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다.
명 13릉 (定陵) / 딩링(定陵)의 내부 모습
북경의 트레이드마크 자금성(紫禁城)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궁궐로 어머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1987년에는 이 또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건설되어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통치했으며,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에서 어린 푸이가 뛰놀던 작은 뜰과 자전거를 타겠다고 문턱을 깎아버린 문도 남아있다.
자금성 앞의 광장(廣場)이 천안문(天安問) 광장인데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인 1976년 천안문 광장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이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칭(江靑)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이를 군사력으로 제압하며 유혈사태를 빚었고, 1989년에도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들을 탱크로 밀어붙여 1만 5천명이 희생되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가이드는 자금성 안에는 800여 채의 건물과 수많은 방이 있는데 방의 수를 외기 어려우니
‘아이가 태어나서 하루마다 방을 바꾸어 재우면 27세가 되어야 모든 방에서 한 번씩 잘 수 있으니 365×27 하면 방의 수를 알 수 있다.’고 계산 비법(?)을 가르쳐준다.
북경 자금성
자금성은 둘레 담장의 길이가 4km, 면적은 약 22만 평이나 된다고 한다. 자금성의 가장 핵심은 명, 청대 24명의 황제들의 옥좌가 있는 태화전(泰和殿)과 황제들이 정사를 보던 중화전(中和殿)이다. 더욱 인상적이던 것은 황제만이 오를 수 있었다는 황제의 계단인데 엄청나게 큰 자연석에 용을 새겨 가운데 놓고 좌우로 기다란 석조 계단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 푸이가 살았다는 교태전(交泰殿)도 흥미를 끈다.
2.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이화원(頤和園)
서태후의 돌 배(淸晏舫/石舟) / 700여m의 장랑(長廊) / 만리장성(萬里長城)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장성은 1시간 거리의 팔달령(八达岭长城)이다. 이 팔달령은 북경에서 변방으로 나가고 들어오고 관문(關門)이라 할 수 있겠다. 숱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중국의 자랑 만리장성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그냥 장성(長城/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팔달령에 이르면 장성 박물관도 있는데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거리고 있고 장성 위를 올라가면 어디까지 갔다 오려는지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암튼 인간이 만들어낸 엄청난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리장성 관광의 에피소드....
우리 일행 중 유독 화투놀이를 즐기는 경상도 아저씨가 있었는데 저녁마다 사람들을 모아 돈 따먹기... 만리장성 밑에 버스가 도착하여 모두 내리라고 하는데 이 아저씨는 차 구석에 누워 잠을 자며 다녀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 다음날 명13능 관광도, 이화원 관광도 모두 손사래를 저으며 차에서 잠을 잔다. 밤이 되면 호텔 방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화투장을 내리치고... ㅎㅎ 도대체 무얼 하러 중국을 왔다는 것인지...
이화원(頤和園)은 서태후가 즐겨 찾던 여름 별장이라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昆明湖)와 그 북쪽에는 만수산(萬壽山)이 있고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관광 명소이다. 곤명호(昆明湖)는 원나라와 명나라 때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물 저장고로 사용하며 서호(西湖)라고했는데 청나라 건륭제(乾隆帝/4대)가 호수 바닥을 파내어 확장하고 이름을 곤명호로 고쳤으며, 이때 파낸 흙을 쌓은 것이 만수산이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함풍제(咸豊帝/9대)의 부인이었던 서태후(西太后)는 실권을 거머쥐자 이곳을 여름별장으로 꾸미고 이화원(頤和園)이라 하였는데 엄청나게 많은 건물들을 짓고 기화요초를 심어 천국처럼 꾸미고 너무나 사랑하여 한 번 오면 자금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화원 관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장랑(長廊)인데 곤명호 둘레에 세워진 700여m에 이르는 누각식(樓閣式) 긴 복도로, 벽면에는 중국 고대소설 홍루몽(紅樓夢)과 서유기(西遊記)의 장면들을 화려한 채색화로 그려 붙여 놓았는데 무려 1만 4천여 폭이나 된다고 한다.
이 장랑이 끝나는 곳에 청안방(淸晏舫)이라는 거대한 돌배(石舟)가 물 위에 떠있다. 뱃놀이를 즐기고 싶었던 서태후는 흔들리는 배가 무서웠던 모양으로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돌로 만든 배를 만들어 띄우게 하고 그 난간에 앉아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물론 배는 물속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얹었다니 어떤 날씨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터...
곤명호를 굽어보며 우뚝 솟은 만수산 중턱에는 이화원 최대의 건축물인 불향각(佛香閣)이 있다. 불향각에서 내려다보면 곤명호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곤명호는 그 넓이가 67만평이나 되고 호수 가운데는 3개의 인공 섬도 있는데 호수 둘레의 길이만 6.4km나 된다고 한다.
중국 북동 3성(北東三省)
<백두산 가는 길과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북경 관광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는 백두산인데 먼저 랴오닝성(遙寧省) 선양(瀋陽)에 들렀다가 지린성(吉林省)으로 들어가 장춘(長春), 옌지(延吉)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지나 백두산에 이르는 대 장정(長程)이다.
중국에서는 북동쪽 변방지역의 3개 성(省)인 랴오닝성(遙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묶어 북동 3성(北東三省)이라고 부른다.
베이징(北京)에서 비행기로 선양(瀋陽)까지 이동하고 거기서부터는 황량하고 끝없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버스로 이동한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는 고물 관광버스로 10시간 이상 타다보면 엉덩이가 아픈 것은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맨 뒷좌석에 앉았던 가이드는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머리를 천정에 부딪쳐 이마에 밤톨 같은 혹이 생기기도 했다.
랴오닝성(遙寧省) 성도(省都)인 선양(瀋陽)은 인구 500만이 넘는 대도시인데 예전에는 봉천(奉天)이라고 불리던 도시이다. 중국 간자체(簡字体)로는 심양(沈阳)이라고 쓴다. 일제 점령기 일본이 도시이름을 고쳤었는데 천황을 받드는 도시(奉天)라는 의미이다.
옌지(延吉)의 용문교와 해란강
선양(瀋陽)에서 장춘(長春)을 거쳐 이도백하(二道白河)까지는 끝없는 만주 벌판을 차가 달리는데 가도 가도 인가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옥수수 밭의 연속이다. 결국 노중에 버스 바퀴가 펑크가 나서 길 옆에 세워놓고 수리를 하는데 도로변에는 막 모심기가 끝난 넓은 논이 있고 논두렁 옆으로 작은 돌무더기와 무너진 흙 담 같은 것이 보이는데 초라한 돌비석에 붉은 한글로 ‘발해고성’ 이라고 씌어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여기서 우리 민족이 세운 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渤海)의 흔적을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민족(韓民族)인 대조영이 세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의 흔적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이곳 만주 벌판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터전이었으니 엄밀히 보면 우리 땅인 셈이다. 이 부근에 살던 중국인(여진, 말갈족 등)들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는데 우리 조선족(韓民族)이 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조선족은 물론 많은 중국인들도 논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어 집 구조나 마을의 모습이 우리나라 시골의 풍경을 보는듯하여 친근감이 느껴진다.
내가 이곳을 다녀온 후 1998년부터인가 중국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는 억지 학설로 역사를 왜곡하려하여 한-중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중국 동북3성 중 지린성(吉林省)은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원수도 급감하는 등 자치주로서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한다.
지린성(吉林省)은 예전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으니 조선족이 많이 살았지만 특히 일제침략기에는 일제의 억압을 피하여 많은 우리 민족이 이주해 살았다. 특히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지역으로 지린성 인구 중 약 38%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는 옌지(延吉)인데 인구는 약 50만으로 절반이상이 조선족이며, 따라서 옌지 시내의 상점 간판들은 모두 한글과 한자를 병기(倂記)한다.
옌지(延吉)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곳이 많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海蘭江)과 용문교(龍門橋), 용두레우물(龍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生家), 그리고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延邊大學), 화룡현에 있는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두었던 청산리계곡 등이다.
우리나라 시골을 연상시키는 연변 시골 / 연변대학교 / 용두레우물(龍井)
청산리계곡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 정예군 200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곳인데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골짜기는 팻말하나 없이 쓸쓸하다. 용두레우물(龍井)은 길쭉한 표지석이 서 있고 가까운 곳에는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도 있다. 우리들의 여행일정 중 연변대학 방문이 있어 연변대학 총장실에 들러 총장과 면담이 있었다.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대학을 설립한 소수민족은 오직 조선족뿐으로 바로 이 연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강의는 중국어로 한다는 답변이다. 중국 학생들도 많지만 조선족도 젊은 사람들도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어 강의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족의 교육열에 대해서 총장이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한국은 농경사회여서 논밭과 소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는 그 논밭과 소를 팔아서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중국의 어떤 다른 소수민족도 그런 민족은 없다.’
백두산의 관문 이도백하 / 백두산 미인송
백두산 관광의 관문이라 일컬어지는 이도백하(二道白河)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인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 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원류라는 의미의 강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한다. 이도백하에 있는 미인송호텔(美人松賓館)에서 일박을 했는데 이곳에는 미끈하고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많은데 미인송(美人松)이라고 부른다. 백두산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장백미인송(長白美人松), 이도백하 미인송(二道白河美人松)’ 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소나무로 키가 엄청나게 크고 잔가지가 없으며 곧게 자라서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껍질은 아랫부분은 회갈색, 위로 올라 갈수록 붉은색을 띈다.
미인송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열악하기 그지없다. 침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화장실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청결상태도 좋지 않다. 이곳 호텔 프런트를 보는 순진한 조선족 아가씨는 예쁘장한데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한국을 꼭 가고 싶은데 갈 방법이... 누가 초청해주면 갈 수 있다는데...’
초청해 준다, 어쩐다... 적당히 둘러대면 뭐든지 다 할 표정이다. 당시 한국의 못된 사기꾼들이 조선족들을 속여 한국으로 데려와 팔아먹고... 그런 사기꾼들이 속여먹기에 딱 좋겠다 싶어 안타까웠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정도 걸린다.(34km)
1. 아! 아! 백두산(白頭山)<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靈山 白頭山)>
우리 한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중국에서는 장바이샨(長白山)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이 백두산과 정상의 천지(天池)를 신성하게 여기는데 우루무치 천산산록에도 또 다른 천지(天山天池)도 있다.
이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성산(聖山)일뿐더러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여진족(女眞族), 말갈족(靺鞨族) 들도 자기 민족의 성산이라고 한다며, 각각 개국신화(開國神話)들이 있다고 한다.
<1> 백두산 노천온천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장백폭포(長白瀑布) 앞 노천온천 입구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장백폭포는 천지에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나오는 물줄기(폭포)인데 중국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이 된다고 한다.
백두산 노천온천 / 오리알 삶아먹기 / 송화강의 원류 장백폭포
우리나라에서 천지폭포(天池瀑布)라 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에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샘으로 솟아나와 강의 원류가 된다. 6월초인데도 백두산은 골짜기마다 눈이 덮여있고 날씨도 제법 서늘하다. 버스에서 내려 골짜기로 올라가자 갑자기 유황냄새가 나며 자욱이 안개가 서리는데 가까이 가면서 보니 넓은 바위위로 물이 흘러넘치는데 수증기를 무럭무럭 뿜어대는 노천온천이다.
너럭바위 위로 흘러넘치는 뜨거운 온천수가 얼마나 아까운지... 여기에다 호텔을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서 가이드가 봉지에 오리 알을 담아가지고 나서기에 뭘 하려나 했더니 우리에게 두 개씩 나누어주며 온천물에 넣었다가 5분쯤 후 꺼내면 반숙이 된다며 각자 해 보라고 한다. 바위 구멍에서 퐁퐁 솟아나오는 온천수에 손을 넣으니 기절할 만큼 뜨겁다. 그 속에 오리 알을 넣었다가 나중 꺼내려고 손을 넣으니 기절한 만큼 뜨겁다. 이걸 어떻게 꺼내지?? ㅎㅎ
노천온천 조금 아래쪽에 허름한 온천욕장이 있는데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입장료도 없고, 문도 없는 시멘트 가건물 두 칸인데 한쪽은 남탕(男池), 한쪽은 여탕(女池)이라고 씌어있다. 그런데 두 칸 사이에 웬 창문을? 그런데 문도 달지 않아서 구멍이 휑하니 뚫려있다. 바위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남탕과 여탕으로 들어가 욕탕을 채우고는 철철 흘러 넘쳐서 다시 바깥으로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아이구 아까워라....
장백폭포까지는 눈이 많아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2> 백두산 오르는 길
지금은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까지 관광버스가 올라간다지만 당시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버스는 올라가지 못하고 별다른 교통편도 없었다. 가이드는 산 입구에 우리를 앉혀놓고 근처 공사장에서 트럭을 빌려와 우리를 태우고 올라가며 울화통을 터뜨린다. ‘저런 돼지 같이 멍청한 여진족 놈들 같으니라고... 쯧쯧’ 하며 혀를 찬다.
중국 돈 200위안에 흥정이 되었는데 외국인이 쓰는 중국 돈인 외환폐(外貨兌換券)를 주었더니 못 보던 돈이라며 내국민이 쓰는 인민폐(人民幣)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같은 200위안이라도 외환폐가 인민폐보다 두 배는 더 가치가 있는데 무식한 사람들이다보니 인민폐를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눈 덮인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중간쯤 올라가다가 차를 세우고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데 이곳 이름이 풍구(風口)란다. 정말 골짜기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가는 통로다. 풍구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백폭포와 잔설이 쌓인 계곡 풍경이 넋을 잃게 한다. 이곳이 2500m 이상 되는 곳이어서 그런지 제법 숨이 가쁘다.
풍구(風口)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백폭포 / 백두산 입구
다시 차에 올라 눈 덮인 비탈길을 트럭은 용케도 미끄러지지 않고 덜덜거리며 올라가는데 트럭 뒤 짐 싣는 곳에 앉은 우리는 추워서, 무서워서 오들거리며... 얼마쯤 올라왔는지 갑자기 눈이 병풍처럼 쌓여서 길이 반쯤 묻혀있는 곳까지 와서는 트럭운전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주저앉는다. 가이드는 몇 번 실랑이를 하더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걸어가자고 한다. 눈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10여분 걷는데 고산증세인가 숨이 턱까지 찬다. 다행히 곧바로 눈에 덮여있는 기상대가 보이고 바로 언덕 너머가 천지였다.
지금은 중국 쪽이나 북한 쪽에서 천지를 오르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東坡, 南坡, 西坡, 北坡)가 있다지만 당시(1990년)에는 중국에서 오르는 주 등산로조차 공사가 겨우 끝난 후라 도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중간쯤에는 이 도로를 닦다가 순직한 인부들의 추모비도 서 있다.
<3> 아! 아! 천지(天池)
눈 덮인 백두산 천지(6월)
하늘에 구름이 좀 끼기는 했지만 제법 맑은 날씨로 백두산 전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백두산 정상 부근에 기상대(氣象臺)가 있는데 거기에서 언덕을 오르면 곧바로 천지(天池)가 조망된다. 천지를 마주하자 엄청난 장관에 숨이 막히고 민족의 영산에 올랐다는 감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곳 백두산은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워 3대가 덕을 쌓지 않으면 맑은 날씨에 천지를 볼 수 없다는데 조상님들의 음덕(陰德)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천지와 그 둘레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높고 낮은 눈 덮인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호수 천지(天池)는 둘레의 길이 14km, 깊이는 평균 수심이 200m로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384m 나 된다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화산호수(칼데라호)라고 한다. 가이드는 빨리 사진이나 찍고 서둘러 내려가자고 연신 성화다. 날씨가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알 수 없으니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벼르고 온 민족의 성산 백두산이고, 천지인데 금방 내려가자니...
벅차오르는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고 일행 중 한 명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자 가이드는 질겁하며 절대로 만세를 부르거나 태극기를 흔들면 안 된다고 한다. 이 백두산과 천지는 모두 한국 땅이었는데 한국전쟁(6.25)이 끝난 후 김일성이 백두산을 반을 나누어 새로운 국경을 긋는 바람에 천지도 절반만 한국 땅, 절반은 중국영토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중국 땅이다. 우리가 서있는 중국령 천문봉(天門峰)에서 천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북한쪽 백두산은 최고봉인 장군봉이 높이 솟아있고 조금 낮은 곳에 북한 초소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초소에서 천지로 내려오는 가파른 계단이 가물가물 보인다.
채근하는 가이드를 못 본 체 우리는 들고 온 간식 중에서 빵과 술, 과일들을 펼쳐놓고 제사를 올렸다. 일제히 재배를 올린 후 우리는 꿇어 엎드려있고 제일 연장자가 즉흥 제문(기도문?)을 읽고 다시 큰 절을 올리고.... 예정에 없던 즉흥적인 제사지만 모두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백두산 아래쪽 기슭은 숲이 울창한데 특히 하얀 껍질이 일어나는 자작나무숲(白樺林)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천지 가까이 오르면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들만 보이는데 고도가 높고 비바람이 심하고 추워서 키 큰 교목(喬木)들은 자라지 못하는 모양이다. 천지 부근의 키 작은 관목(灌木) 숲에 들어갔는데 관목조차 30cm 이상 자라지 못한다. 꽃을 보니 진달래가 틀림없는데 줄기가 모두 땅위에 누워있다. 꽃도 조그마하고 잎도 작고... 그리고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진달래를 닮았지만 좀 다른 첨보는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백두산 노랑만병초(萬病草)라고 한다. 진달래 과에 속하는 노랑만병초는 황화두견(黃花杜鵑), 석남화(石楠花), 들쭉나무라고도 부른다는데 천지 주변은 온통 노랑만병초 천국이었다. 아! 북한 술의 유명한 브랜드인 백두산 들쭉나무 술!!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음악 전공 팀)보다 사흘 전에 이곳으로 왔던 미술전공 팀은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쳐서 중간에 도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려 해도 셔터가 얼어 눌러지지 않았다고... 우리 음악전공 팀은 매우 운이 좋았던 셈이다.
<4> 백두산 녹용(鹿茸)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는 쇼핑을 했는데 가이드가 데리고 간 가게는 시골 한약방을 연상케 하는 어두컴컴한 가게인데 백두산 산삼, 녹용, 모피, 이름 모를 한약재 등을 팔고 있다. 백두산 산삼이라고 내 놓은 상품은 이끼를 깔고 하얀 수염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된, 제법 통통한 산삼인데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제법 귀한 약재로 보였고 우리 돈으로 20만 원쯤 한다. 그리고 젓가락같이 가느다란 산삼뿌리를 수북이 쌓아놓고 한 뿌리에 우리 돈 천원이라며.... 주인 말로는 백두산에서 캔 진짜 산삼이라지만 장뇌삼이겠지... 나중 한국에 온 후에야 그까짓 천원인데 몇 뿌리 사서 씹어 먹을걸 하고 후회를 했다.
나는 이곳에서 큰 맘 먹고 녹용을 하나 샀는데 두 갈래로 갈라진, 보송보송 솜털이 있는 30cm 가량의 녹용인데 우리 돈으로 8만 원 쯤 주고 샀다. 한국으로 입국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안기부 직원을 쳐다보았더니 그냥 눈을 꿈적이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런데 이 녹용이 엄청난 효과가 있을 줄이야....
귀국 후 잘 아는 한의원에 가서 녹용을 보여주었더니 꽃사슴 뿔이라며 한국에서도 요정도면 1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다며 별로라는 표정이어서 조금 떨떠름했었다.
아들을 먹이려고 사왔으니 우선 아들 먹일 한재를 먼저 짓고 나머지는 내가 먹을 것인데 적당히 배분해서 한재를 짓던지 몇 첩을 짓던지 하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며 무게를 달아보더니 아이들은 7첩이 한재이고 어른들은 20첩이 한재인데 조금 모자라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들과 나를 한재씩 지어준다.
그때 아들 녀석이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잘 먹지 않아 빼빼 말랐다. 초등학교 때에는 키도 반에서 제일 작았고 혈액순환이 좋지 않아 겨울이면 입술이 새파래지고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의사가 추울 땐 보온을 잘 해주고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해서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히고 마스크에 장갑에... 그래도 행여 동상이 걸릴까 항상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이 녹용을 먹고 나서 완전히 체질이 바뀌고 건강해졌으니... 기적 같은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올 줄은 정말 몰랐다.
아들 녀석이 살이 오르기 시작하고 혈색이 돌아왔음은 물론 겨울이 되면 오히려 덥다고 옷을 벗어던지고 덥다고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키도 1년에 20cm 가까이 자라고 체중도 불어나고...
완전히 체질이 바뀌었으니 보는 사람이 신기할 밖에... 대학 때 아들녀석은 키가 180cm, 체중이 80kg이 넘었다.
나도 몇 년간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져서 녹용의, 백두산 녹용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 이도백하에서의 에피소드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의 이른 아침, 친구와 둘이 호텔을 나서 아침산책을 했는데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광장 한쪽에서는 손수레에 국수와 만두, 빵, 우유 등속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고 있고 몇몇 사람들이 둘러서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이렇게 아침 식사를 집에서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사먹는 풍경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는 옆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30대 후반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떡처럼 굳어있고 얼굴도 땟국물이 꾀죄죄, 옷차림도 언제 세탁했는지...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뭐라고 말을 건다.
‘노, 아이 캔트 스픽 차이니즈(No, I can’t speak Chinese)...’
그런데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나라 말이다.
알고 보니 조선족으로 나보고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거였는데 강한 북한식 사투리의, 어물거리는 말투로 물으니 꼭 중국말을 하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나? 벌목하는 일을 한다. 한 달 수입이 얼마냐? 200위안(30만 원)이다. 그것으로 생활이 되나?
아내가 식당에서 일하는데 월급 90위안(13만 5천원)인데 먹고 사는 데는 일없다.(넉넉하다) 집은 어떤가? 정부에서 배정해 준 집에서 산다. 북한 사정을 아는가? 묻지도 마라.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어떻게 아나? 북한에서 식량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는데 이곳에 사는 친척들은 곡식을 보내면 국경에서 다 빼앗기니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서 싸 보낸다. 그러면 국경에서 걸리지 않고 가지고 갈 수 있다. 그리더니 이 친구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개 한 마리를 이만 원만 내면 모두 손질해 양념까지 해서 먹게 해 주겠다. 이만 원이면 모든 일행이 포식을 하겠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 아깝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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