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또한 한 사람이 평생 걷는 거리가 10만 5000km 정도 된다고 하니, 신발의 역사는 장구한 세월만큼이나 인간 삶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을 바꾼] 시리즈(현재까지 7권까지 출간) 중 하나인 [세상을 바꾼 50가지 신발]은 근대화 이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또는 세상의 속도를 앞당기려 등장한 50가지의 신발을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세상을 바꾼] 시리즈는 세계최초의 디자인 박물관인 영국 디자인뮤지엄에서 출간한 것으로, 한국에선 홍디자인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원서가 디자인뮤지엄에서 출간된 것에서 짐작 가듯, 책에 등장하는 50켤레의 신발은 출시 당시 파격적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중 뾰족구두나 힐이라 통칭되는 ‘스틸레토’와 미국 프로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나이키 에어 조던1’은 각각 신발에 내포된 젠더적 폭력성과 노골적 상업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신발 하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고 신발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발은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실내용 슬리퍼를 신는 것을 따져보면 신발은 거의 매 순간, 우리가 가장 혹독하게 혹사시키는 신체의 일부인 발을 보호해주는 유일무이한 장치다. 우리의 발이 제대로 걷고 뛰려면 신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인간 삶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거나 앞당기는 상징적 존재가 신발이라는 말은, 허풍만은 아닌 것이다. 이 책에선 운동화와 캐주얼화의 선구자인 최초의 고무 신발 플림솔을 필두로, 페라가모의 플랫폼 슈즈, 스트리트 신발의 조상님 닥터 마틴 슈즈, 몇 년 전부터 다시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플랫 슈즈의 원형인 발레 슈즈, 한국에선 그 인기가 오래전에 떨어진 허시파피, 별명이 마녀 구두인 앞 코가 뾰족한 윙클피커, 겨울의 필수품 어그 부츠, 패션의 무한 변주를 가능케 만드는 컨버스 올스타 농구화, 빈민가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신는 일명 쪼리라 불리는 플립플롭, 싸구려 플라스틱 신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 크록스, 런웨이의 종마로 불리는 톱모델 나오미 캠벨을 쓰러뜨린 비비안웨스트 우드의 30cm 킬힐 막 크락 플랫폼 등등, 우리가 알만한 유명 신발들이 대부분 출연하고 있다. 물론,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열광한 마놀로 블라닉 구두도 소개됐다.
위의 신발들 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건 컨버스 올스타와 여성들의 로망 마놀로 블라닉 구두라 짐작된다. 컨버스 신발은 캔버스와 고무라는 소재에서 오는 가벼움과 활동성을 장점으로 살려 1917년 스포츠화로 제작됐다. 그러다 디자인의 심플함을 바탕으로 한 패션의 무한활용 기능이 젊은이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져, 이제는 컨버스 올스타 시리즈는 누구나 한 켤레 정도쯤은 소장해야 하는 패션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 더욱이 록밴드들이 이 신발을 애용하면서 컨버스 올스타 시리즈는 그런지룩(거칠고 낡은 스타일의 패션)의 마침표로 대접받고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까지 언급되는 마놀로 블라닉 구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은 사족일 것이다. 현대여성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이 명품구두는, 여성의 성공과 아름다움의 총체적 지표이다. 하지만 플립플롭(쪼리)나 크록스와 이 구두의 운명을 비교해보는 일은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독서 태도다. 주로 디자인과 패션에만 키워드를 맞춘 이 책이 ‘고의적으로’ 삭제한 동시대 빈부격차의 역사는, 이 두 신발이 주로 누구의 발에 신겨져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공한 뉴요커는 명품구두를 신고 우아하게 거리를 걷거나 자신의 신발장을 마놀로 블라닉 전시장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선 빵 한 조각을 사려고 맨발에 덜렁 쪼리 하나 신고 발바닥에 땀이 나더라도 생계현장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실만 비교해보더라도, 신발이 세상을 바꿨다는 얘기에 냉소를 보낸 사람도 수긍의 고갯짓을 할 것이다. ‘좋은 신발 신으면 좋은 데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좋은 날, 특별한 날 아껴두었던 신발을 꺼내 신는다. 그 좋은 날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런 마음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세상을 바꾼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도, 신발은 가장 낮은 곳인 발밑에서 결코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냉혹하게 땅을 딛고 있기도 하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마이클 조던의 환상적인 점프 슛을 만들어준 신발은 나이키 회사를 단박에 세계적 브랜드로 만들었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해줬다. 반면 우리가 휴가 때나 간혹 한 번 신는 쪼리는, 누군가에게는 평생 신고 다녀야 하는 유일무이한 한 켤레의 신발로 자갈밭 인생길을 걷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신발이 인간 삶에 공평하게 융합될 때 세상은 진짜 좋은 세상으로 변할 거라고.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아름다운 디자인과 뛰어난 기능으로 우리를 매료시킨 신발을 욕망하기보다, 바꿔야 할 동시대를 기억해내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신데렐라를 꿈꾸며 자신에 발에 꼭 맞는 유리구두를 찾고 있다. 그런데 생존연도가 1년씩 늘어날수록, 호박 마차는 전철로 대체되고 성격은 신데렐라 언니를 닮아간다. 이 사람이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닐까 해서 상대의 손을 잡고 멋들어지게 플로어를 한 바퀴 빙글빙글 돌아와 보니, 허공에 자신의 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자정 12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그제야 기억해 낸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이미 오래 전에 산산조각이 났음을. 그리고 퍼뜩 깨닫는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깨진 유리구두가 아니라, 흩어진 행복 조각들을 붙여주는 강력접착제였다는 사실을….
오늘의 책 선정의 변을 써주신 `파자마마니아`님은 오늘도 책하고 야무지게 노는 법을 연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