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原州)에서 제천(提川)으로 가는 "가리파고개"를 넘어 신림면(神林面)사무소를 지나
(白雲面)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예쁜 용소막 성당이 보인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성당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
성당 주차장에 웬 원주 관광지도가 있나 했더니
용소막 성당이 "원주 팔경"(原州 八景)중 7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려 넣은 것이다.
주차장에서 보는 용소막 성당.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느티나무 다섯구루가 성당 옆을 보호하고 있다.
성당이 있는 용소막(龍召幕)마을은 지세(地勢)가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성당의 자리가 용의 발부분에 해당하고 그 뒷산이 용의 머리형상을 하고있어 "용소막"이라고 한단다.
길 옆 성당 입구에 성당이름을 새긴 큰 바위가 서 있다.
입구에서 보는 성당 전경.
성당을 올라가기 전에 왼쪽으로 넓은 공터가 있다.
"선종완"(宣鐘完)신부님의 생가터란다.
1915년 8월 8일 이곳에서 태어나셨단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
들어가면 곳곳에 자세한 안내판이 있어 돌아 보기가 편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무렵,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다가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한두 집씩 이사 오기 시작했고,
당시 전교회장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던 "최도철 바르나바"가 이주해 오면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도철 바르나바"는 1898년 1월 13일 5-6명의 교우들과 신부(神父)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公所)설립에 힘썼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 해인 1899년에 송학면(松鶴面) "오미리"(五味里)에 살던 백(白)씨 일가와
행주(幸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자들의 증가에 따라 "풍수원성당", "원주성당"(현 주교좌 원동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3번째로 1904년 5월 4일 "용소막 공소"를 "본당"(本堂)으로 설립하였다.
초대 주임신부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V. Poyaud, 表光東)신부가 임명되었다.
2대 주임으로는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 교수이던 "기요"(J. Guillot, 吉)신부가 부임하여
새 양옥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운반해 오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발발(勃發)로 본국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귀국, 애석하게도 1916년 5월에 전사하였다.
1914년 4월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3대 주임신부가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11시 미사예약이 되어 있어 그 사이에 잠깐 주변을 둘러본다.
사제관(司祭館)
먼저 "선종완"(宣鐘完)신부님의 "유물관"(唯物館)을 들어가 본다.
"유물관"(唯物館) 내부 모습.
입구 왼쪽 위에 있는 "신부님의 생애"
글씨가 너무 작아 그자리에서 읽기는 조금 무리다.
글 중에 "메추리 사육"이야기가 흥미롭다.
당시 성경 번역에 필요한 비용을 대주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메추리 사육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메추리알 한 개 값이 170환이었는데 달걀은 10개가 110환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고부가가치 부업이었던 것이다.
신부님은 신학교가 있는 혜화동 뒷산에 메추리 사육장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사육을 하셔서
성경 번역에 필요한 자금은 물론 수녀회를 설립하는 자금도 마련하셨다고 한다.
신부님이 "메추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이란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거친 광야에서 굶고 있을 때
주님의 말씀처럼 메추리떼가 날라와 식량이 되었다는 성경구절을 읽고 메추리에 관심을 가지셨단다.
"선종완"(宣鐘完)신부님
"선종완"(宣鐘完)신부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상.
천주교 성경 번역의 선구자 선종완(宣鍾完 :1915~1976)신부님의 책상은 부채꼴 육각형이다.
사진을 봐도 특이한 형태인데 생전의 신부님이 고안해 특별히 제작한 책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란다.
책상 가운데에는 호롱불이 놓여 있고 좌우로는 각나라의 성경책들이 책상을 가득 놓여 있다.
독일어판 신약 성서, 스페인어 성서, 일본어판 주석 성서, 인도신약성서,
히브리어 성서 등 여러 나라의 성경과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의 사전이 가득하다.
신부님은 성서를 번역하기위해 독학으로 10개국 이상의 언어를 습득하셨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모든 자료를 일일이 그리고 쓰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었지만 필름값과 인화비를 감당하지 못해 직접 그림을 그리셨다고 한다.
오른쪽 위의 예루살렘 성지 지도도 직접 그리신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지만 필름과 인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카메라는 도로 팔고 손으로 그리셨다고 한다.
이스라엘 유학 시절 거의 1년간 매일 박물관을 찾아가 그곳의 유물을 모두 그렸다고 한다.
선 신부님이 이스라엘 유학을 마치고 10년 후에 찾아갔을 때도 박물관 관리인이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열정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전시품목 중에는 "주염나무" 열매와 같은 보기 힘든 열매도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신자들에게 하신 유언 말씀.
남쪽으로는 몇 개의 작은 창문이 있는데 그중 둘만 열어 놓았다.
추운 탓인지 이중으로 만든 창인데 그 안에 꽃을 놓아 한층 아름답다.
동쪽의 쉼터.
용소막 신자들이 세운 기도문.
성전 건립 백주년 미사 강론의 글.
용소막 공소가 생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있다.
야외 미사장.
건너 오른쪽으로 높은 봉우리 뒤에 "감악산"이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성당과 사제관 사이에 있는 "루르드"(Lourdes)의 성모(聖母).
성녀(聖女) "베르나데트"(St. bernadette)가 "마사비엘 동굴"(Massabielle Grotto)에
발현(發現)하신 성모님을 알현(謁見)했다는 그 성모님을 그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당 중앙의 문.
이제 성당안으로 들어간다.
양쪽에 있는 성수대(聖水臺)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아멘.
옛날 작은 성당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아름다운 성당이다.
기도하는 손, 물고기 등을 새긴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소박한 건물에 비해 너무 밝다.
성당이 문을 연 지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04년 새로 교체했다고 한다.
미사는 우리뿐 아니라 세 곳의 성당 신자들이 와서 성대하게 지냈다.
마침 주임신부님이 삼척의 성내동 성당에 계시다 오셔서 우리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미사가 끝나자 모두들 부지런히 식당으로 향한다.
마침 사람들이 많이 없을 때에 몇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원래는 이곳 14처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기로 했는데 변경이 되어 "대안리 공소"로 가서 한단다.
이곳에서 천천히 여러 곳을 둘러 보면 좋으련만 사람의 욕심은 한번에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한다.
다른 성당에서 온 사람들의 버스도 우리보다 먼저 떠난다.
식당에 들어가니 음식이 아주 좋다.
김치에, 나물에, 감자볶음에, 돼지볶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도 넘쳐나게 쌓여져 있다.
모두들 맛이 있다고 싹싹 비운다.
이제 우리도 "대안리 공소" 갈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