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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여환삼매경 상권
5. 보살의 뜻과 초발심
[보살의 궁극적인 뜻을 여쭈다]
문수사리는 그 중요한 이치만 들고 여러 말을 하지 아니한 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온데 만일 허락하시면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물으라. 여래는 그대가 가진 의심을 풀어 주어 그대 마음을 기쁘게 하리라.”
문수는 곧 물었다.
“보살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을 깨달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느니라.”
또 물었다.
“무엇을 보살이 모든 법을 깨달은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깨달아 장애가 없는 것이다.
6정(情)을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눈은 본래 깨끗하고 공이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와 같아 다 공이며,
본래 깨끗한 것임을 깨닫되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이 다 공이요,
본래 깨끗한 것임을 깨닫되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또 문수사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5성음(盛陰)을 깨달았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그것은 공이요[空], 생각이 없으며[無想],
원이 없고[無願] 욕심을 떠나 황홀하고 고요하여 소유가 없으며,
담박하여 남[生]도 없고 옴[來]도 없으며 감[往]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아지랑이ㆍ허깨비의 변화ㆍ물 속의 달ㆍ파초ㆍ꿈 속에서 본 것 등과 같아서,
오래 있지 못하고 견고함이 없으며, 허무하여 장소가 없다는 것이니,
만일 이런 이치를 깨달았으면, 그를 보살이라 하느니라.
또 문수사리야,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과 5음(陰)ㆍ6쇠(衰) 등이 다 망상에 의해 생기는 것임을 알며,
그 탐욕이란 다 망상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그 망상도 또한 공이요 허무이며, 형상이 없고 말이 없으며, 또한 교화도 없는 것이며,
그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도 근본이 없는 법에서 오염시킬 수 없고 헷갈리지 않으며, 미혹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중생들의 행을 환히 안다.
즉 ‘이 사람은 욕심이 많다. 이 사람은 분노가 많다. 이 사람은 어리석음이 많다.
그 욕심이 많은 자는 은애(恩愛)가 극진하여,
마치 5곡과 초목이 무성하고 종류가 흩어져 한 곳에 적당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분노가 많은 자는 분한이 치성하여,
마치 들불이 초목과 성곽과 집들을 태워 모두가 해를 입는 것과 같다.
그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깜깜하여 어두워 해가 없는 것 같고,
또 집 안에서 독을 덮어 쓴 것과 같아서 아주 미혹하여 동서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보살 대사는 본행을 환히 알아 그 마음이 총명하고 미련함과 근본 진리에 나아감과 그 근기의 우열에 따라 설법하여 각각 계율에 들게 하여 해탈시키느니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일체 중생을 다 환히 안다.
일체 중생을 어떻게 아는가?
다 거짓 이름일 뿐이라고 안다.
만일 진제(眞諦)로 그 거짓 이름을 관찰하면 그것 역시 처소가 없는 것이다.
그 중생이란 것도 다 일신(一神)일 뿐이니, 중생을 헤아리면 중생이 없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닫고 집착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것을 보살이라 한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불각(不覺)을 깨치며 바라밀[度彼岸]을 알면, 이것을 보살이라 한다.
통달하지 못한 자를 다 통달하게 하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나니,
관찰하는 것을 다 보되 그 본말과 기멸(起滅)의 인연과 근본의 나아감에 대해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음을 다 보며, 앞으로의 무궁(無窮)을 알고 뒤로의 무극(無極)을 알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
그 거짓 이름에 의하고 방속(方俗)의 말을 따라 이 이름이 있는데, 이 온갖 일에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느니라.”
[부처님의 게송]
그리고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칭찬하셨다.
그 눈과 귀가
공이요 자연임을 알아라.
통달하면 상념 없나니
이것을 보살이라 한다.
코와 입이 본래 깨끗해
형상이 없음을 알라.
지혜로운 이 망상하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라 한다.
지혜로운 이는 몸을 잘 알고
그 뜻이 허공과 같아
본래 깨끗함을 분별하나니
그런 보살을 총명하다 한다.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접촉 등 마음에 맞는 것들
그것이 허깨비와 같고
일체 분별이 공함을 알면
또 망상도 구하지 않나니
그를 불러 보살이라 한다.
만일 저 색이 공이요
느낌도 또한 그와 같으며
나고 죽음의 알음알이와
일체가 허깨비와 같음을 알고
마음에 망상을 품지 않으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5음(陰)이 꿈과 같고
하나의 상(相)도 상 없음이라
현명한 이가 망상하지 않으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나지도 않고 일어남도 없으며
말도 없으면 곧 무위(無爲)인데
거짓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그 이름도 형상 따위 없다.
탐욕과 분노를 알고
모든 상념을 분별하면
그 상념은 진제(眞諦)가 없어
구경(究竟)의 장소가 없다.
상념도 어리석어 진실이 아니어서
많은 생각을 짓기 때문이며
삿된 견해에 의해 일어나나니
정직하면 아무 것도 보는 바 없다.
항상 탐욕과 분노를 품지만
모든 법은 다 평등하여
그것은 아무 더러움 없고
법도 의혹과 망령됨이 없다.
이런 상념을 잘 식별하여
보살이 아무 탐욕이 없어
모든 법을 적멸하게 하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이 삼계가 다 공이어서
진실함이 없음을 알아
거기서 제도할 자 없으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욕계는 성취됨이 없건만
뒤바뀜[顚倒]에 의해 일어났다.
이 색계와 무색계
이것도 다 거짓이다.
중생들의 짓는 행을
지혜로운 이는 다 아나니
탐음(貪婬)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다 돌아간다.
모든 거짓 이름으로 된 사람
그 사람마저 얻을 수 없다.
현명한 이는 이것을 알고
망령되게 중생을 생각 않는다.
일체의 모든 법이
뒤바뀐 줄을 알고
또 반복하는 것인 줄 알면
이 또한 상념 없는 것이다.
방편으로 모든 법 따르되
일체 장애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함이 없음에 이르면
그것을 해탈이라 한다.
몸의 살을 보시하면서
의지함을 익히지 않고
진실함 그대로 깨달으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계율이 항상 청정하면서도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부처님 계율의 그 뜻을 따르면
일어남도 소유도 없다.
내가 본래 닦은 업으로서
몸과 입과 또 뜻의 생각
이것을 일러 계율이라 하지만
그것은 말미암는 곳이 없다.
중생을 두루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지만
그 중생도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이 황홀한 것인 줄 알면
거짓을 인해 이름이 있다.
그 행하는 정진으로
모든 괴로움 멸하고
삼계가 공임을 알면
최상의 도를 능히 이루리라.
뛰어나게 선정을 닦으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무름 없고 얻음도 없나니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깨닫는다.
번뇌와 또 나쁜 견해를
지혜의 칼로 베고 또 끊고는
저 모든 법계를 볼 때
끊지도 않고 허물 것도 없다.
모든 법을 깨닫고
때를 따라 중생을 교화함
보살이 이와 같이 알면
그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
[처음 발심한 보살]
이에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예. 대성이시여, 처음 발심한[初發意]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야, 가령 보살이 삼계를 두루 생각하면 그것을 초발의(初發意)라 한다.
그 낸 마음은 평등하기 땅과 같다.
그 보살은 일으키는 것도 없고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아는 것은 갑작스러움도 없고 사나움도 없으며,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곳도 없고 있지도 않으며,
안온하여 흔들 수 없으며,
고락을 참고 세상의 8법(法)을 초월하며,
파괴한 것도 없고 다 다함이 없는 것이다.
뜻을 낼 만하여 뜻을 내고는 다 일체의 공훈을 수용하고서도 나는 이름과 덕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을 처음 낸 보살의 뜻을 이룬 것이라 하느니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대성께서 말씀하신 뜻을 들은 대로 하자면, 그 어떤 보살이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면 곧 처음으로 뜻을 낸 것일 것입니다.”
그때 선주의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음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일으킴이 곧 처음으로 발심하여 보살을 이루는 것이라면 일체 어리석은 범부들이 다 처음 발심함이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런 무리들은 다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3독(毒)을 버리지 않습니다.”
문수사리가 선주의 천자에게 말하였다.
“우매한 범부들은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른바 부처님 세존과 연각과 성문과 모든 퇴전하지 않는 보살들만이 이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일으킬 뿐, 범부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주의 천자가 문수에게 대답하였다.
“지금 그 말은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 대중들은 마음에 의심의 그물을 품고 있었는데, 당신이 말하는 이 이치를 들음으로 인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아득하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가 선주의 천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유하면 나는 새가 허공을 날아갈 때 과연 그 허공에 장애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지나갈 때 허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수는 말하였다.
“이와 같이 천자여, 도는 일어남이 없는데 미워하는 바가 있으면 발의(發意)하지 않을 것이요,
미워하는 바가 없어야 비로소 발의할 것이며,
만일 집착하는 바가 없어서 미워함을 품지 않고 의지함이 없으면, 그것을 발의라 한 것입니다.
이른바 발의란 없는 상념을 일으키는 것이니,
나는 바[所生]가 없으면 이것을 발의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자연이 없음을 발의라 하고,
글귀의 자취가 없음을 발의라 하며,
가고 오는 자취가 없는 것을 발의라 하고,
몸이 비었다는 지혜와 자취와 생각하는 바 없음을 발의라 하며,
받는 자취가 없고 이르는 자취가 없음을 발의라 하고,
무너지는 자취가 없고 얻는 자취가 없음을 발의라 하며,
문자의 자취가 없고 사모하는 자취가 없음을 발의라 하고,
나아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쌍도 아니요 외짝도 아니면 이것을 발의라 하며,
구하여 보호함을 구하지도 않고 귀의함도 없으면 이것을 발의라 합니다.
그러므로 천자여, 보살의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을 억념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상상하지도 않으며,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듣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일으키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여, 모든 보살은 이 인연으로써 이 법을 인(因)하기 때문에,
이 평등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본제(本際)와 선권방편(善權方便)으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고,
눈의 의지할 바를 내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색(色)의 집착할 바도 내고 다시 수ㆍ상ㆍ행ㆍ식도 나타내지만,
색의 보응(報應)과 모든 견해와 무명(無明)과 유애(有愛)는 내지 않고, 12연기(緣起)의 법을 일으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삼계에 의지하고 의지하는 나와 몸을 탐하여 62견(見)을 헤아리며,
또한 5개(蓋)의 근심과 4도(倒)와 8사(邪)와 10악(惡)의 업을 발현하여 근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요약해 말하면 일체의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음과,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음과, 온갖 생각과 말과, 일체 장소와, 받아들임과, 의지함과, 사상과, 모든 억념과, 그리워함과, 장애 등 말할 수 있는 것을 열반[泥洹]의 생각을 내는 것이라 합니다.
보살 대사는 다 이것을 발현하기 때문에 천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그 모든 법에 의지함이 있고 미워하거나 사랑함이 없으면 이것을 발의라 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이 초발의(初發意)의 법어를 말할 때, 이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반복하여 진동하였고 만 2천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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