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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론 제2권
3. 두타품(頭陀品)
[문] 그때 정계(淨戒)를 지니며 좌선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뛰어나고 착한 공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또 두타(頭陀)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성취하여야 한다. 왜 이 두타의 공덕을 수용하는가?
[답] 좌선인은 그 성(性)이 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며, 욕심을 줄이기 위해, 만족할 줄 알기 위해, 의심이 없기 위해, 애욕을 없애기 위해, 용맹정진을 증장시키기 위해, 스스로 작게 경영하여 밖에서 보시를 받지 않기 위해, 안주하기 위해, 집착을 끊고 계를 잘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모든 정(定)의 온갖 도구이며, 이것은 최초의 성종(聖種)이며, 이것은 수승한 공덕관(功德觀)이다.
[두타의 13법]
무엇을 두타라 하는가?
13법이 있다.
2법은 의상응(衣相應)이니, 곧 분소의(糞掃衣)와 3의(衣)이다.
5법은 걸식상응(乞食相應)이니, 곧 걸식ㆍ차제걸식(次第乞食)ㆍ일좌식(一坐食)ㆍ절량식(節量食)ㆍ시후불식(時後不食)이다.
5법은 좌와상응(坐臥相應)이니 첫째는 무사처좌(無事處坐), 둘째는 수하좌(樹下坐), 셋째는 노지좌(露地坐), 넷째는 총간좌(冢間坐), 다섯째는 우득처(遇得處)이다.
좌(坐)의 하나인 용맹상응(勇猛相應)에 한 종류가 있으니, 즉 상좌불와(常坐不臥)이다.
[문] 무엇이 분소의인가?
[답] 성(性)은 능히 수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이라 한다. 나머지도 또한 그와 같다.
무엇이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거사의 보시를 받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여분의 옷[長衣]을 소유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걸식인가?
타인의 청(請)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차제걸식인가?
소위 건너 뛰어 걸식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일좌식인가?
(식사를 끝내고 일어섰으면) 다시 앉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절량식인가?
탐욕을 끊는 것이다.
무엇이 시후불식인가?
후에 바라는 것을 끊는 것이다.
무엇이 무사처좌인가?
취락에 머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수하좌인가?
집에 머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무엇이 노지좌인가?
갖가지 덮인 곳을 끊는 것이다.
무엇이 총간좌인가?
다른 좋은 곳을 끊는 것이다.
무엇이 우득처좌인가?
좋은 곳을 탐하는 것을 끊는 것이다.
무엇이 상좌불와인가?
침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왜 분소위를 수지하는가?
거사의 옷에는 구걸해야 하는 등등의 과실이 있는 것을 보고, 또 납의(納衣)를 수지하는 공덕을 보았다. 나는 이와 같이 봄으로써 거사의 보시를 끊고 그 까닭에 납의를 수지한다.
무엇이 납의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거사의 옷과 비슷해 수지하여도 허물이 없고, 얻는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잃어도 근심하지 않고, 마음에 탐심이나 염착이 없고, 도적들도 가져가지 않고, 항상 사용하기에 족하고, 경영하는 것이 적다.
선량한 사람들이 배울 바가 이 행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수승한 선과 상응하여 현법(現法)에서 즐겁게 머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게 하고, 정수(正受)를 얻게 한다.
이것이 납의의 공덕으로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것이다.
[문] 납의에는 몇 종류가 있고, 누가 수지하며, 어떤 인연으로 잃게 되는가?
[답] 납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지키는 주인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 사람이 버리는 것이다.
무덤이나 혹은 쓰레기더미에서 혹은 저자에서 혹은 도로에서 주워 자르고, 염색하고, 잇고, 재봉하고, 완성시켜 수지하는 것, 이것을 주인이 없는 것[無主]이라 한다.
자르거나 뚫고 남은 여분, 혹은 소나 쥐가 갉아먹은 것, 혹은 불에 탄 것, 혹은 사람이 버린 시체를 싸는 옷 및 외도의 옷을 세상 사람이 버리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거사의 보시를 끊는다면 이것을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잃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거사의 보시를 받는다면 이것을 납의를 잃는 것이라 한다.
왜 3의를 수지하는가?
여분의 옷이 있으면 모름지기 정시(淨施)하고 수호하고 수착(受著)해야 하는 이런 등등의 과실이 있음을 알고, 3의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여분의 옷을 버리고 따라서 3의만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착한 사람이 행할 바이고, 비축한 것을 떠나 오래토록 노닐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적고, 몸에 지닌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알고, 허공을 나는 새처럼 돌아보며 연연할 것이 없다.
선량한 사람들이 배울 바가 이 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무엇을 3의라 하고, 무엇을 수지하는 것이라 하며, 무엇을 잃는 것이라 하는가?
[답] 소위 승가리ㆍ울다라승ㆍ안다회 이것을 3의라 한다.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여분의 옷을 축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네 번째 옷을 받으면 이것을 “잃는다[失]”고 한다.
왜 걸식을 수지하는가?
만약 타인의 청(請)을 받으면 곧 자신의 업이 방해를 받게 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며, 법답지 못한 비구와는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지 못하게 된다.
이런 과실을 알고, 또 걸식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남의 청을 받는 것을 끊고 걸식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걸식의 공덕인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머묾이 자유스럽고, 반찬을 곁들여 올리기를 바라지 않고, 해태를 말끔히 제거하며, 교만을 완전히 없애고,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않으며, 중생을 요익하며, 항상 4방에 마음이 걸림이 없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청(請)에는 몇 종류가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청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식청(似食請), 둘째는 취청(就請), 셋째는 과청(過請)이다.
이 세 종류의 청을 제외하면 걸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만약 세 종류의 청을 받으면 이것은 걸식을 잃는 것이다.
왜 차제걸식을 수지하는가?
만약 차례대로 간 곳[次第處]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얻었다면 그 집은 거듭 찾아가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을 다시 찾아가면 곧 상식(常食)을 받는 것이다.
만약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역시 멀리 떠나야 한다.
이러한 과실을 보고, 또 차례대로 걸식하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차례를 따르지 않는 걸식은 버리고 차례를 따르는 걸식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차제걸식의 공덕인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를 요익하게 하고, 증오와 질투의 악을 없애며, 유압(遊狎)의 허물을 끊고,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며, 말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인가를 멀리하며, 빠른 걸음을 하지 않고, 간간이 나타나는 달처럼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무엇을 차제걸(次第乞)이라 하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만약 비구가 처음 걸식을 하러 취락에 들어가면 마지막 집으로부터 비로소 차제가 된다.
이것을 차례대로 행하는 걸식이라 한다.
무엇이 잃는 것인가?
옆집을 건너뛰는 것을 잃는 것이라 한다.
왜 일좌식(一坐食)을 수지하는가?
소위 두 좌처에 자주 앉아 자주 음식을 받고 자주 발우를 씻는 이런 짓과 반대되는 것을 일좌식이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과실을 알고, 일좌식의 공덕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두 자리에서 먹는 것을 버리고, 한 자리에서만 먹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수지해야만 한다.
무엇이 일좌식의 공덕인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부정시(不淨施)를 탐하지도 않고, 모든 병의 고뇌도 없고, 기거하는데 방해도 없고,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즐긴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무엇이 일좌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변(邊)이 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변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즉 좌변(坐邊)ㆍ수변(水邊)ㆍ식변(食邊)이다.
무엇이 좌변인가?
먹고 나서도 여전히 앉아있는 것이다. 물을 받아 발우를 씻었다면 다시 먹을 수 없다.
이것을 수변이라 한다.
무엇이 식변인가?
만약 췌식(揣食)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삼켰다면 다시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식변이라 한다.
만약 두 자리를 거쳤다면 곧 일좌식을 잃는데, 물과 약 등은 제외다.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탄식하는 바로서 이것을 식변이라 한다.
왜 절량식(節量食)을 수지하는가?
만약 먹고 마심에 절도가 없으면 몸이 불고 잠이 많아지며, 항상 탐락을 일으켜 먹는 것이며 싫어하는 바가 없게 된다.
이런 과실을 알고 나서 적당히 먹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결코 멋대로 탐내지 않고 음식을 적당히 먹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절량식의 공덕인가?
먹는 양을 조절해 배에 무리가 가지 않고, 많이 먹으면 해이한 마음만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 좋아하지 않으며, 탐욕을 없애고, 병을 소멸하며, 모든 게으름을 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무엇이 절량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만약 음식을 받으면 필요한 양보다 많은지 적은지를 스스로 사유해야만 한다. 그렇게 일정한 기준을 정해 여분의 음식을 취하지 않고, 적절한 양을 헤아리는 것을 잘 알아 절제 없음을 끊는 것, 이것을 절량식이라 한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이것이 곧 잃는 것이다.
왜 시후불식(時後不食)을 수지하는가?
바라는 생각을 끊고, 여분의 음식을 떠난다.
이런 과실을 알고, 시후불식의 공덕을 보아,
“나는 오늘부터 여분의 음식을 끊고 식사시간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시후불식의 공덕인가?
탐락하는 바를 끊고, 그 몸을 절도 있게 보호하며, 숙식(宿食)을 떠나고, 구하는 바를 없애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 것이 없고, 마음의 욕심에 따르지도 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시후(時後)에는 몇 종류가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며,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시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소위 불절변(不節邊)과 수지변(受持邊)이다.
무엇이 불절변인가?
만약 여분의 음식을 받으면 별청(別請)의 죄를 얻게 되므로 다시 먹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수지변인가?
이미 스물한 덩이의 음식을 먹었다면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시후불식은 곧 여분의 음식을 끊는 것이다.
만약 여분의 음식을 받으면 시후불식을 잃는다.
왜 무사처(無事處)를 수지하는가?
도성은 시끄럽고 복잡해 식이 5진(塵)과 접촉하고 마음이 즐거움에 물들게 된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 머물면 오고 감이 번잡하다.
이런 과실을 알고, 또 무사처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을 그만두고 무사처에서 지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사처의 공덕인가?
시끄럽고 복잡한 도성에서 식이 5진과 접촉하고 마음이 즐거움에 물드는 것을 벗어나고, 시끄러운 곳에서 머물 때의 오고 가는 번잡함을 벗어난다.
열 가지 말[語]의 공덕을 보고, 가장 수승하고 사랑스러우며, 천인이 환희하고, 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고요함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며, 고요한 행복 속에서 소리가 적고, 마음으로부터 선(禪)에 들어 좌정하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무엇이 최후의 무사처이고,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나라의 도성을 떠나 교외에 머물고, 변경지역을 피해 중인의 4주(肘) 500궁(弓) 이내를 선택하는 것, 이것을 최후의 무사처라 한다.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는 것, 이것을 무사처라 한다. 만약 나라 안에 머물면 곧 무사처를 잃는 것이다.
왜 수하좌(樹下坐)를 수지하는가?
지붕이 있는 곳[覆處]을 버리고 축적하거나 수리하거나 욕심으로 받거나 찾아 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과실이 됨을 알고, 나무아래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지붕이 있는 곳을 끊고 나무아래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수하좌의 공덕인가?
사랑할만한 행복에 의지하고, 세속과 교류하지 않으며, 작무(作務)를 벗어난 것을 즐거워하고, 하늘과 함께 머물며, 머무는 자리에 대한 질투를 끊고 애착을 벗어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어떤 나무가 머물 만하고, 어떤 나무를 떠나야 하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능히 잃는 것인가?
[답] 정오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바람이 없을 때 나뭇잎이 떨어지는 곳은 머물만한 곳이다.
다만 썩어서 위태로운 나무ㆍ속이 빈 나무ㆍ귀신이 붙은 나무는 제외한다.
지붕이 있는 모든 곳을 떠나면 이것이 나무아래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지붕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곧 나무아래에서 머무는 법을 잃게 된다.
왜 노지주(露地住)를 수지하는가?
지붕이 있는 곳이나 나무아래나 물건을 저장하는 곳 등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런 것의 과실을 알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즐겁지 않은 곳을 끊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노지주의 공덕인가?
즐겁지 않은 곳에 가지 말고 게으름과 졸음을 끊어라.
들판의 사슴처럼 그리워하는 것 없이 마음대로 다녀라.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지붕이 있는 곳이나 나무아래에 있는 것을 끊는 것이 곧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지붕이 있는 곳에 머물거나 나무아래에 있으면 곧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법을 잃는 것이다.
왜 총간주(塚間住)를 수지하는가?
만약 다른 곳에서 지내면 경행을 적게 하며 방일하고, 악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과실을 알고, 묘지에서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끊고 묘지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총간주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죽을 때를 생각하게 되고, 부정상(不淨相)을 얻고, 비인(非人)의 존경을 얻고, 방일을 일으키지 않고, 욕망에 물듦을 억제하고, 싫어하는 바가 많아지고, 두려워할만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몸이 공적한 것을 관찰하고, 상견(常見)의 생각을 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 총간주의 공덕을 어떻게 수지하며, 어디에 머물러야 하고, 어디를 경행할 수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답] 항상 사람들이 늘 울부짖고 늘 연기와 불이 있는 이와 같은 묘지에 처음으로 머물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먼저 관찰하여 다른 정처(靜處)가 있으면 곧 가서 머물러야 한다.
만약 비구가 묘지에 머문다면 방이나 편안한 침상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앉아도 안 되고,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머물러도 안 되며,
누웠을 때 열이 없어야 하고,
물고기를 먹지 않고, 유제품을 마시지도 않고, 마쇄(麻粹)를 먹지 않으며, 찬과 고기를 건드리지 않고,
집에 머물지도 않으며, 발우를 안치해서도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이미 떠났다면 좌구 및 다른 옷가지를 집어 들고 묘지로 찾아가 그 주처에서 물건을 멀리 던져두듯이 머물다가 날이 밝으면 모든 옷가지를 정리하여 승가람으로 돌아오며, 다른 곳에는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묘지에 머무는 것이라 한다.
만약 다른 곳에 머무르면 곧 잃는 것이라 한다.
왜 우득처주(遇得處住)를 수지하는가?
사람이 탐하는 바를 좋아하지 않고, 남을 비키게 하여 괴롭히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런 과실을 알고, 주어진 곳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주처에 대한 탐욕을 끊고 주어진 주처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우득처주의 공덕인가?
만족할 줄 아는 곳을 찾는 것이고, 적정(寂靜)을 탐하는 것이며, 많은 애락을 끊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자비에 머물러 한결같이 거두고 단속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머물 곳에 대한 탐욕을 끊는 것을 주어지는 대로 따르는 것[依遇]이라 한다.
만약 자기가 좋아하는 곳[樂處]으로 찾아가면 곧 잃는 것이라 한다.
왜 상좌불와(常坐不臥)를 수지하는가?
머무는 곳에서의 졸음과 게으름 같은 이런 과실을 알고, 늘 좌선하는 공덕을 보아,
“나는 오늘부터 혼몽하게 누워서 자는 것을 끊고 늘 좌선하며 눕지 않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상좌의 공덕인가?
게으름을 일으키는 곳을 끊고, 몸을 위하는 시샘을 제거하며, 오염된 것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벗어나고, 잠의 구속이 적어지며, 항상 적정이 풍부하고, 수승한 선(禪)의 수행을 감내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수지하는 것은) 드러누워 자는 것을 끊는 것을 말한다.
만약 누워 잔다면 잃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분소의를 떠나는 것인가?
거사가 보시하는 추마(芻麻)ㆍ고패(古貝)ㆍ교사야(憍奢耶)ㆍ흠바라(欽婆羅) 등의 옷을 방편으로 받았다면, 납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3의를 떠나는 것인가?
여분의 옷을 축적한 지 10일이 지나거나 월망의(月望衣)가 있거나 공덕의(功德衣)가 있거나,
또 장의가 있더라도 와구ㆍ부구(敷具)ㆍ부창의(覆瘡衣)ㆍ수건ㆍ우욕의(雨浴衣)를 기우기 위한 것이라면,
수지(受持)하지 않고 정시(淨施)하지 않았더라도 만약 방편으로 그랬다면 3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걸식의 방편인가?
만약 승차식(僧次食)ㆍ상주식(常住食)ㆍ행주식(行籌食)ㆍ15일식ㆍ포살식(布薩食)ㆍ중식(衆食)ㆍ사식(寺食)을 방편으로 받았다면 걸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과실을 본다면 또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무엇이 차제걸식의 방편인가?
코끼리나 말 등이 문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보거나 수치스러워해야 할 비천한 곳을 보거나 이와 같은 등등의 여러 곳을 만약 본다면 마땅히 피해야 한다.
또 전다라를 보거나 발우를 뒤집어야 하는 학가(學家)이거나 화상(和上)이나 아사리(阿闍梨)를 따라 걸식하거나 여행 중인 비구일 경우,
이와 같은 등등의 여러 경우에는 방편으로 지나쳤더라도 차제걸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일좌식의 방편인가?
만약 정해진 식사 시간에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뱀 등을 보거나, 비가 오거나, 화상이나 아사리나 객비구가 찾아왔기에 방편으로 일어났다가 그 뒤에 다시 식사를 했다면 일좌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절량식이나 시후불식에는 방편이 없다.
무엇이 무사처(無事處) 방편인가?
혹 수계나 참회를 위해, 법을 묻거나 포살(布薩)이나 자자(自恣)를 위해, 자신의 병이나 타인의 병을 돌보기 위해, 경의 의심스러운 곳을 묻기 위해, 이와 같은 인연으로 방편으로 마을에 머물렀다면 무사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수하좌(樹下坐)의 방편인가?
만약 비를 만났다면 그때는 마땅히 지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 뒤 다시 돌아와도 수하좌를 수지하는 법을 잃는 것이 아니다.
노지주ㆍ총간주ㆍ우득처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방편으로 다른 주처에 머물 수 있다.
상좌불와에는 방편이 없다.
또 일설에는 관비(灌鼻)할 때에는 방편을 쓸 수 있으므로 상좌불와를 수지하는 법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 13두타로 다시 8법을 이루니, 아비담에서 설하는 8두타와 같다. 이 시후불식은 절량식ㆍ일좌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수지하는 바가 한 종류를 이룬다. 이 무사처좌는 수하좌ㆍ노지좌ㆍ총간주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무사처에서 방사를 짓고, 작무를 즐겨하고, 축적하는 것이 많고, 그 주처를 애착하는 것은 마음으로 즐길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나무아래나 무덤이나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청정하게 머문다.
따라서 여덟 가지가 된다.
8두타는 다시 3법을 이룬다.
첫째는 무사처, 둘째는 분소의, 셋째는 행걸식이다.
만약 이 세 가지가 청정하다면 두타는 원만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난타에게,
“네가 무사처를 성취하고, 분소의를 받고, 시후식을 하지 않으며 목숨을 유지하는 데 뜻을 둘 뿐 욕심내는 바를 보지 않는 것을 언제쯤이나 보게 될까”라고 말씀하셨다.
[두타분]
[문] 누가 두타분(頭陀分)의 이름을 지었는가?
두타에는 몇 종류의 법이 있는가?
무엇이 두타행을 닦는 세 종류의 수행자인가?
몇 가지 두타에 정해진 기간이 있는가?
두타라고 설할 올바른 두타가 있는가?
[답] 13두타가 있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이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이다.
이것을 두타분이라 한다.
이것을 선(善)이나 불선(不善)이나 무기(無記)라고 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선량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은 악욕(惡欲)과 동일한 까닭에, 악욕을 없애지 않고 함께 비법(非法)을 일으켜 이익을 탐한다. 이런 까닭에 선하지 못한 두타이다.
몇 가지 종류의 법이 있는가?
소위 2두타법이 있으니, 탐하지 않고[不貪], 어리석지 않은 것[不癡]이다.
부처님께서 “만약 분소의를 입는 비구가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의지해 고요함을 즐기며 의심이 없고, 해탈을 의지한다면 이것을 소위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나머지 모든 두타 또한 이와 같이 탐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는 것이다.
이 탐하지 않음으로써 이 13처에서 능히 탐욕을 제거하고, 이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13처에서 능히 무명을 제거한다.
또 이 탐하지 않음으로써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이와 비슷한 것에 의심이 없어 욕심에 물든 속임수를 제거하며, 이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이와 비슷한 몸을 야위게 하는 속임수를 제거한다.
이것이 2두타법이고, 이것은 탐하지 않는 것,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두타행을 닦는 세 종류의 수행자인가?
소위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수행자는 두타행을 닦지만 노여움이 많은 수행자는 닦을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수행자는 두타를 수행할 수 있다.
곧 탐욕스러운 사람이 사랑[愛]에 대해 불방일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일하지 않는다면 곧 탐욕을 조복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의심이 없이 두타에 의해 불방일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일하지 않는다면 곧 능히 어리석음을 조복할 수 있다.
왜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은 두타를 수행할 수 있는데,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고통을 받고 다시 그 악을 이루는가?
이는 담병(痰病)을 앓는 자가 열탕을 복용하면 그 병이 점점 더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수행해서는 안 된다.
또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무사처에 머물고 나무아래에서 지내야 한다.
왜 무사처에 머물러야 하는가?
세간의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두타에 정해진 기간이 있는가?
세 가지 두타는 8개월을 시한으로 하나니, 소위 수하주ㆍ노지주ㆍ총간주이다.
안거하는 시기에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지내도록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
[문] 무엇이 두타라고 설하는 올바른 두타인가?
[답] 또한 두타라고 설하는 두타가 있고, 두타라고 설하지 않는 두타가 있고, 두타가 있다고 설하지만 두타가 아닌 것이 있고, 두타가 아니고 두타라고 설하지도 않는 것이 있다.
두타라고 설하는 두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한 것을 말한다.
두타라고 설하지 않는 두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두타가 있다고 설하지만 두타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인 및 범부가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한 것을 말한다.
두타가 아니고 두타라고 설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인 및 범부가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하지 않은 것이다.
[문] 두타는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는가?
[답] 소욕(少欲)을 상으로 삼고, 지족을 맛으로 삼고, 의심 없음을 일어남으로 삼는다.
또 집착할 대상이 없음을 상으로 삼고, 과실이 없음을 맛으로 삼고, 물러서지 않음을 일어남으로 삼는다.
무엇이 초ㆍ중ㆍ후인가?
소위 받음[受]이 초이며, 수행이 중이며, 환희가 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