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4장
예루살렘 멸망 당시 백성들이 당한 기근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찬송 269장)
2023-7-4, 화
맥락과 의미
4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당시에 성도들이 당한 고난이 자세하게 그려집니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성이 함락될 때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함락의 이유가 백성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1.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림(1-10절)
2.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22절)
1.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림(1-10절)
1-2절: 1,2장과 마찬가지로 4장도 “슬프다”(에카: 어떻게) 하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의 예전과 지금의 처지를 대비하면서, 현재 예루살렘이 당한 비참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성전의 장식과 기물에 사용되던 금과 순금, 각종 돌들이 아름다움을 잃고 길바닥에 굴러다닙니다.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시온의 아들들은 금으로 이루어진 성전 기물에 버금가는 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예배 공동체로서 성전을 이루는 귀중한 보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백성들은 진흙 항아리처럼 하찮게 취급되고 함부로 여김을 당합니다.
3-10절: 들개들도 어미가 새끼들에게 젖을 주어 먹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에게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당시에 광야의 타조가 새끼를 낳으면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만치 잔인합니다.
갓난 아기가 오랫동안 젖을 먹지 못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릴 정도로 입이 수분기가 없이 말라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빵을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아무도 주지 않습니다.
앞서 2장 12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어미가 극심한 기근으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울부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은 젖과 빵을 일부러 주지 않은 게 아니라, 기근 때문에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한 셈입니다.
예전에 예루살렘은 주님께 복을 받아 소산이 넘쳤고, 진수성찬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집도 없이 외롭게 거리에 나앉아 구걸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붉은 옷을 입었는데 지금은 거름더미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붉은 옷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화려한 옷입니다(삼하 1:24; 사 63:1). 예루살렘이 겪은 몰락이 실로 극적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소돔에 비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거워서 멸망시키셨습니다(창 18:20).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가 당시 소돔보다 더 심하였기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존귀한 자들”(나지르: 성별된 자들)은 나실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성별한 나실인들은 자신의 몸을 잘 간수하여 깨끗하고 윤택한 피부를 자랑했습니다. 겉모습만 봐도 “저 사람은 나실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이 숯처럼 검고 피골이 상접하여 볼품없는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나실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극심한 기근은 나실인의 영광과 아름다움까지도 다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차라리 칼에 죽은 자들이 남겨진 자들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남겨진 자들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오랜 시간에 걸쳐 고통당하며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미 파괴되어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능들 또한 먹을 것이 공급되지 않음으로 서서히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예루살렘에 닥친 대기근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이 소개됩니다. 평소 자식을 잘 돌보고 사랑으로 대했던 어머니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어차피 굶어죽을 아이들이니(참고- 4절) 우리라도 살자’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예루살렘 백성들 스스로의 덕성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가 폭로됩니다.
2.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22절)
11-12절: 예루살렘에 닥친 극심한 기근은 여호와의 분노와 진노의 결과입니다. 성전과 도시에 큰 화재가 있어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과 원수, 특히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입성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이 버림받아 멸망된 것이 이방인들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친히 보내셔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왕하 19:35). 그런데 지금은 친히 성과 성전을 바벨론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13-16절: 예루살렘 멸망의 주된 원인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에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거짓된 평안을 전하며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우상 숭배에 앞장서면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겼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나 바룩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며 순종하는 의인들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눈이 멀어서 길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시드기야 왕의 눈이 뽑힌 것처럼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죽인 의인들의 피로 더럽혀져서 부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15절에 “저리 가라” 하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서 사람들로부터 극단적인 따돌림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유다 지방에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도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 또한 그들을 배척하여 살 곳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한 선지자와 제사장, 장로들을 흩으시고 자신의 눈 밖에 두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들을 높이지도 않고 대접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17-20절: 어리석게도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권력에게서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실제로 시드기야 왕은 애굽과의 화친을 통해 바벨론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렘 37:5).
하지만 그것은 “헛된”(헤벨) 시도로 돌아갔습니다. 믿었던 애굽은 예루살렘 멸망의 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는 동맹군을 기다리며 오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눈이 상할 지경이었다고 과장스럽게 표현합니다.
“헛되다”(헤벨)는 우상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렘 10:15). 예루살렘 백성들은 세상의 강대국을 우상처럼 헛되이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밖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성 안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습니다. 아마 당시 많은 주민들이 스파이로 포섭되어서 성 안의 동향을 상세하게 바벨론 군대로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주민들이 외출을 자제하였습니다.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외칩니다. “이제 곧 끝이다. 남은 날이 얼마 없다. 종말이 이르렀다!” 최후 공격 이전에도 이미 예루살렘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입니다.
바벨론 군대는 성 안의 모든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성 밖으로 도망하는 백성들도 끝까지 뒤쫓아 갑니다. 이미 도망자들을 예상하고 다른 병력이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처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멸망시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은 왕이 바벨론의 함정에 빠져서 붙잡힙니다. 아마 성 밖으로 도주하다가 사로잡힌 시드기야 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렘 52:8). 전에 백성들은 그 왕의 “그늘”(쩰)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 길을 찾겠다고 기대했습니다. 이제 그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콧김”(루아흐-아프)은 예전에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홍해를 넘치게 하셔서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신 능력을 나타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출 15:8).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날개 “그늘”(쩰) 아래 피하여 보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시 36:7).
하지만 어리석게도 백성들은 시드기야 왕을 “우리 콧김”이라고 높이며, 그의 “그늘” 아래 보호받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왕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하다가 잡히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자임이 밝혀졌습니다.
21-22절: 마지막 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원수 에돔에 대한 심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입장에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루살렘 남쪽 사막 지역에 사는 유목 민족 에돔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유독 기뻐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먼 친척뻘 되는 민족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과 원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 전후로 많은 악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군사적 공백 상태에 있던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핍박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방에 대한 심판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실 것이다”는 소망의 선언을 합니다. 또한 에돔을 향해 심판의 선언을 하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오랜 눈물의 탄식과 간구 끝에 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확신 가운데 시온의 회복과 에돔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마음 가운데 위로와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0,13)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 권력이나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의지하지 맙시다. 그것들은 우상 숭배처럼 헛된 일이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 그분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콧김으로 물리치실 수 있는 능력 많으신 분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날개 그늘로 품으시며 죄를 덮어주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며,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함으로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어려움 가운데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들어주지 않으시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읍시다. 계속해서 기도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주시길 간구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10절, “자비로운 부녀들”
이 어머니들은 본래 “자비로운”(라하마니: 긍휼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자기가 살기 위해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잔인함을 보입니다(참고- 3절). 사람의 성품은 이토록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근심하게 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긍휼히 여기시는”(라함) 분입니다(애 3:32). 이 하나님의 긍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연약한 성품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성품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참고> 20절, “그늘”
한때 백성들은 그 왕의 “그늘”(쩰) 아래에서 이방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갈 길을 찾겠다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람의 그늘을 의지하기보다는 주의 날개 “그늘”(쩰) 아래 피하여 보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시 36:7).
시편에서 “주의 날개 그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시 17:8; 36:7; 57:1; 63:7). 이 표현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음, 모든 위협 가운데 안전하게 보호하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편의 맥락에서 이 표현은 주로 죄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비록 죄인입니다. 하지만 주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할 때 주님께서 내 죄를 덮어 주시고 모든 악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 왕의 도움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