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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 제5권
3. 애품(愛品)
1
사람이 지관(止觀)을 행하지 않고
탐욕이 많은 것을 깨끗하다고 보면
더욱더 큰 애착을 낳아서
속박은 결국 매우 견고해진다.
“사람이 지관을 행하지 않고”란 무슨 뜻인가?
만일 어떤 사람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것에 집착하면 몸과 마음의 속박이 풀리지 않고, 그 동안에는 선법(善法)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관을 행하지 않고”라고 하신 것은 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이 많은 것을 깨끗하다고 보면”이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은 탐욕에는 집착하지만 속박에는 매이지 않고,
어떤 사람은 속박에는 매이지만 탐욕에는 집착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탐욕에도 집착하고 속박에도 매이며,
어떤 이는 속박에도 매이지 않고 탐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중생이 탐욕에는 집착하지만 속박에는 집착하지 않는가?
여기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탐욕에 집착하였으나 후에 다시는 탐욕을 범하지 않게 되면, 이것이 이른바 탐욕에는 집착하지만 속박에는 매이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거듭 속박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것이 이른바 속박에는 매이지만 탐욕에는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속박에도 매이고 탐욕에도 집착하는 것인가?
어떤 중생이 거듭하여 탐욕에 집착하고 속박에 매이면, 이것이 이른바 속박에도 매이고 탐욕에도 집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탐욕에도 집착하지 않고 속박에도 매이지 않는 것인가?
어떤 중생이 은혜와 애정에 대한 생각이 끊어져서 세속의 얽매임에 집착하지 않고, 또 몰입하거나 자주 가까이하여서 몸에 익히지 않으면, 이것이 이른바 탐욕에도 집착하지 않고 속박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몸의 구석구석을 관찰하여서, 이는 새하얗고 손발톱은 아주 단정하며, 머리털은 감청색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탐욕의 뿌리는 더욱 강해지고 속박은 갈수록 견고해져서 여러 가지 번뇌에 얽매이게 된다.
이제 비유를 들어 말하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면 스스로 이해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저 두 가지의 것에 몸이 묶이는 것과 같다.
하나는 가죽 끈[革索]이고,
또 하나는 용수염 끈[龍鬚索]에 묶이는 것인데,
불 곁에 가까이 가서 불을 쪼이면 가죽끈은 바짝 조여지고 용수염 끈은 늘어진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면 가죽끈은 늘어지고 용수염 끈은 바짝 조여진다.
탐욕을 끊지 못하는 중생도 이와 같아서 두 가지 속박에 묶여 있다.
두 가지 속박이란,
첫째는 애욕의 속박이고,
둘째는 소견(所見)의 속박이다.
혹 어떤 중생이 부정관(不淨觀)을 생각할 때에는 애욕의 속박은 늘어지고 소견의 속박은 조여지며, 안반(安般)을 염(念)하고 생각을 지킬 때에는 소견의 속박은 늘어지고 애욕의 속박은 조여진다.
그러므로 “속박은 결국 매우 견고해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만일 지관(止觀)을 좋아하고
마음을 다해 부정관(不淨觀)을 생각하면
이 욕망은 이내 없어지고
이와 같은 속박은 사라진다.
“만일 지관을 좋아하고”란 무슨 뜻인가?
만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관(不善觀)을 버리는 것을 즐기게 하고, 선관(善觀)을 생각하게 한다고 하자. 또한 항상 도를 닦고 배우는 이를 가까이하여서 생각을 매어 떠나지 않게 하고, 앞에 있으면서 부정관을 닦아 행하게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스스로 터럭과 손발톱과 치아 등 머리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다가도, 뒤에는 다시 그것들이 모두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른여섯 가지 대상[物]은 탐할 것이 없음을 낱낱이 분별하게 된다.
곧 부정관(不淨觀)과 신관(身觀)으로 몸과 뜻을 밝게 알아서 안팎의 뜻과 법에 대해 집착을 버리게 된다.
“이 욕망은 이내 없어지고”란 무슨 뜻인가?
지혜로써 깨달아 증명하며, 애욕을 버리고 부정관을 생각하면, 곧 애착을 버리게 되고 얽매이지 않게 되며 모든 속박을 영원히 버려서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속박은 사라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3
탐욕의 그물로 스스로를 가리며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고
방종하여 감옥에 갇히니
물고기가 그물 속에 드는 것 같고
송아지가 어미젖을 찾는 것처럼
늙음과 죽음이 그를 엿본다.
“탐욕의 그물로 스스로를 가리며”란 무슨 뜻인가?
그물이란, 사람의 눈을 가려서 지혜를 상실하게 하고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번뇌를 벗어나 열반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물이란, 마음을 다하지도 헤아리지도 못하게 하여서 무명(無明)으로 스스로를 가리는 것이다.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고”란 무슨 뜻인가?
애욕으로 스스로를 얽어 매어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마치 타오르는 불을 재로 덮어서 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무지한 사람이 발로 그것을 밟다가 발을 데여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처럼, 애욕에 덮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칼이 높은 곳에 걸려 있을 때, 눈먼 사람이 손으로 그것을 잡다가 다치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애욕의 번뇌를 스스로 덮어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을 보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민한다. 생사를 윤회하면서 5도(道)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방종하여 감옥에 갇히니”란 무슨 뜻인가?
방종한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애욕의 번뇌에 속박되고, 방종하지 않은 사람은 속박을 여읜다.
“물고기가 그물 속에 드는 것 같고”란 무슨 뜻인가?
마치 어부가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을 때, 그물에 든 물고기는 나올 기약이 없는 것처럼,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선법을 버리고 더럽고 불필요한 도를 익힌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설법하셨다.
“마치 물고기가 그물 속에 들어가 나오려고 하여도 그 기약이 없는 것처럼, 중생들도 이와 같다. 애욕의 번뇌에 속박되어서 무위(無爲)열반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그때에 어부들은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모두 놀라면서,
“부처님의 설법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뉘우치며 꾸짖고는 지금까지의 습관을 버리고 다시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그물 속에 드는 것 같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인연이 있는 중생들에게 헛되이 그 이치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병의 근원을 분명히 안 뒤에 약을 주는 것과 같다. 곧, 의사는 병의 경중을 판단한 다음 얼굴빛을 잘 살펴본 뒤에 약을 주는데, 약을 줄 때에도 너무 많거나 너무 적지 않고, 적당한가를 살펴본다. 그것은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실 때도 이와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관찰하시고 그 병의 경중을 아신 뒤에야 설법하신다. 그를 깨우쳐 주시되, 법을 아신 뒤에 설법하시어 깨우쳐 주시는데, 마음으로 덜하는 일이 없고, 반드시 중도(中道)에서 설법하셔서 모든 번뇌를 버리게 하신다.
또한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하셔서 한 게송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한 게송을 말씀하시고, 다섯 구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다섯 구절을 말씀하시며, 한 구절의 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한 구절의 반을 말씀해 주신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저 어부들의 뜻을 관찰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중에는 또 자만하여 방종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송아지가 어미젖을 찾는 것처럼, 늙음과 죽음이 그를 엿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갓난 송아지는 끝내 그 마음이 어미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늙음과 죽음이 따라다니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
만일 근기가 날카로운 중생이라면 잘 살피고 분별하여서 온갖 근심과 고통과 번뇌를 버리고 선의 근본을 더욱 자라게 하겠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은 그렇게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송아지가 어미젖을 찾는 것처럼, 늙음과 죽음이 그를 엿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마음이 방종한 사람들은
마치 저 마루(摩樓)나무와 같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원숭이가 과일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마음이 방종한 사람들”이란 무슨 뜻인가?
찰리(刹利), 장자(長者), 거사(居士),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어리고 젊거나 나이가 들고 늙었거나 간에,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방종한 마음이 더하여 애욕의 뿌리를 더욱 자라게 한다.
그것은 마치 저 마루나무가 처음 나서는 칡과 등줄기에 묶이다가 자라면서 곧 말라죽게 되는 것처럼, 애욕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의 뿌리를 모두 태운다.
그러므로 “마치 저 마루나무와 같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이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은 지옥, 아귀, 축생 따위의 5취(趣)를 떠도니, 마치 저 질그릇을 만드는 물레 바퀴와 같다.
그러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원숭이가 과일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란 무슨 뜻인가?
저 원숭이는 과일을 찾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숲에서 이 숲으로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원숭이가 과일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애욕으로 윤택(潤澤)해지면
상념도 불어나게 된다.
애욕은 깊어서 끝이 없으니
늙음과 죽음도 이 때문에 더한다.
“애욕으로 윤택해지면”이란 무슨 뜻인가?
이 애욕이 흘러 넘치는 것은, 마치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과 같다.
모든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은 본래 5락(樂)의 즐거움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애욕으로 윤택해지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윤택이라고 하는 것은 저 소마(酥麻)나 고유(膏油) 따위의 윤택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윤택은 재흙으로 씻어서 없앨 수 있지만, 이 애욕의 윤택은 오직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지혜의 칼로 끊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욕이 윤택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상념도 불어나게 된다”란 무슨 뜻인가?
아무리 왕성한 불길도 상념보다 더 뜨겁지는 않다.
불에 데인 것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상념의 불에 데인 것은 고칠 수가 없다. 그
러므로 부모를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하는 것 따위의 온갖 죄를 지으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도 고치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상념도 불어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늙음과 죽음도 이 때문에 더한다”란 무슨 뜻인가?
태어날 때에는 몸을 나누는 근심이 있고,
늙어서는 사백네 가지 병의 고통이 있으며,
죽을 때에는 칼날로 에는 듯한 고통[刀風]이 있다.
그러므로 “늙음과 죽음도 이 때문에 더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중생이 애욕에 묶여 있으니
마치 토끼가 그물에 걸린 것과 같다.
얽매여 속박당하고
수없는 고통을 받는구나.
“중생이 애욕에 묶여 있으니”란 무슨 뜻인가?
애욕이 항상 앞에서 인도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생사를 유전하면서 삼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토끼가 그물에 걸린 것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토끼가 그물에 걸려 동과 서로 뛰어다녀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애욕에 미혹되어 생사를 유전하며 5도(道)를 떠돌고 4류(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얽매여 속박당하고”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은 애욕에 묶여서 생사를 여의지 못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을 받으니, 신(身)ㆍ구(口)ㆍ의(意)의 행이 바르지 못하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수없는 고통을 받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중생들은 애욕의 속박 때문에
3유(有)에 물들게 되니
방편으로써 해탈을 구하라.
오직 방편이어야 벗어나리.
“중생들은 애욕의 속박 때문에”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이 속박되고 얽매여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애욕의 속박 때문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유에 물들게 되니”란 무슨 뜻인가?
3유란,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를 말한다.
그러므로 “3유에 물들게 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방편으로써 해탈을 구하라”란 무슨 뜻인가?
왜 방편을 구하라고 하는가?
탐욕의 속박, 존재의 속박, 무명(無明)의 속박, 소견(所見)의 속박이 있는데, 중생들은 이런 속박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생사를 면할 수 있는가?
마치 두 마리 소가 한 굴레에 매여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뒤에서 매질을 하며 따라가면서, “왜 이 짐을 끌지 못하느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4류(流)의 무거운 짐을 지고 네 개의 굴레에 매여 있는데, 어떻게 생ㆍ노ㆍ병ㆍ사를 면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방편이어야 벗어나리”란 무슨 뜻인가?
방편을 구하라는 것이다. 부모, 형제,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더라도 죽음을 대면하게 되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생ㆍ노ㆍ병ㆍ사가 닥치게 되면, 오직 방편이어야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애욕을 없애지 못해서 생ㆍ노ㆍ병ㆍ사가 항상 뒤를 쫓는다. 만일 애욕을 다 없애면 다시는 생ㆍ노ㆍ병ㆍ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ㆍ노ㆍ병ㆍ사는 오직 방편이어야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만일 저 애욕을 없애 버리면
3유(有)에 다시는 애욕이 없을 것이다.
비구는 이미 애욕을 떠나서
아주 고요하며 열반으로 돌아간다.
“만일 저 애욕을 없애 버리면”이란 무슨 뜻인가?
애욕은 병이 되어 온갖 고통이 모여 있지만, 모든 천인들과 속세의 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본다.
그러므로 “만일 저 애욕을 없애 버리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유에 다시는 애욕이 없을 것이다”란 무슨 뜻인가?
이미 애욕을 버렸고 흥분을 버렸으며,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을 버린 것이다. 3유라는 것은 욕유와 색유와 무색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3유에 다시는 애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구는 이미 애욕을 떠나서”란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은 애욕에 묶이고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비구는 모든 번뇌를 부수었기에 비구라고 하는 것이니, 낡은 옷을 입고 발우를 지닌 사람도 비구라고 한다.
그러므로 “비구는 이미 애욕을 떠나서, 아주 고요하며 열반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마음을 둔 것도 없고 받아들이는 것도 없으며, 집착하는 생각도 전혀 없기 때문에 열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역시 속박의 그림자도 없고 다시 태어날 그림자도 없다.
그러므로 “아주 고요하며 열반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9
애욕 때문에 고통을 겪고
세상 일에 탐하고 집착하여서
근심 걱정이 밤낮으로 자라니
마치 저 넝쿨이 뻗어 나는 것과 같다.
“애욕 때문에 고통을 겪고”란 무슨 뜻인가?
무엇이나 마음이 가는 것을 버리지 못하면 온갖 근심과 해로움이 많고 번뇌로 물들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애욕 때문에 고통을 겪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 일에 탐하고 집착하여서”란 무슨 뜻인가?
세상 일을 버리지도 못하고 여의지도 못하여서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것이다.
5음(陰) 역시 세간에서 받은 것이라 하고, 또 그것을 세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세상 일에 탐하고 집착하여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근심 걱정이 밤낮으로 자라니”란 무슨 뜻인가?
언제나 근심 걱정이 있고 흥분과 번민이 있으며, 병과 고통이 있는 것이다.
이제 비유를 들어 말하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듣고 스스로 이해한다. 즉, 그것은 마치 저 넝쿨이 뻗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저 넝쿨이 뻗어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사람들은 은혜와 애정에 미혹되어
그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근심과 욕망이 많아지니
연못에 물이 졸졸 흘러서 차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은혜와 애정에 미혹되어”란 무슨 뜻인가?
은혜와 애정은 견고하고 영원하여서 사라지지 않으며,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은혜와 애정으로 말미암아 경계를 넘어 도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고 그렇다고 붙들 수도 없으며 또한 없앨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은혜와 애정에 미혹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근심과 욕망이 많아지니”란 무슨 뜻인가?
이 은혜와 애정으로 말미암아 온갖 고뇌가 더하고 골수에까지 사무치는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이 연못에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또한 연꽃이 연못의 물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이 은혜와 애정의 속박도 이와 같아서 우리들 마음속에 깊고 견고하게 묶여 있지만,
해탈의 물로 그 마음을 씻어내면, 다시는 애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연못에 물이 졸졸 흘러서 차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
현자들이여, 내가 이제 연설하리니
모두가 다 나의 말을 잘 들어라.
애욕의 근본 뿌리를 뽑되
마치 족두리풀[細辛]만을 가려서 뽑듯 하라.
애욕의 뿌리를 뽑은 뒤에는
근심이 없으니 어떤 두려움이 있으랴?
“현자들이여, 내가 이제 연설하리니”란 무슨 뜻인가?
여기서의 나란 부처님으로서 일체를 아는 지혜를 지니셨고, 세 가지 지혜와 6신통을 지녔으며, 온갖 상(相)을 두루 갖추시고 모든 법을 분별하시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현자들이란 대중을 말하는 것이니, 현성의 모든 법을 성취하고 온갖 법을 행하여서 어질고 현명하기가 삼계에 뛰어나고 해야 할 일을 다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현자들이여, 내가 이제 연설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나의 말을 잘 들어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모두란, 찰리, 바라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서 모두 한곳에 모여 법의 근본을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모두 성취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나의 말을 잘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의 근본 뿌리를 뽑되”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기에
“이 5취(趣)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의 생에서나 다음의 생에서나 다 무명의 근본이 된다”고 말하는가?
다 탐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처음에는 어리석은 마음이, 나중에는 애착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욕의 근본 뿌리 뽑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족두리풀만을 가려서 뽑듯 하라”란 무슨 뜻인가?
족두리풀만을 가려서 뽑으라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병을 고치는 데에 있으며,
둘째는 그것을 파는 데에 있다.
잘 생각하여서 좋은 것을 택하게 되면 그것으로 병을 고치고, 또 그것을 팔면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저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애욕의 뿌리는 깊고 단단하기 때문에 지혜로써 행해야 할 것을 분별하면 중생들은 그 교화를 받고 큰 일을 성취한다. 또 애욕의 뿌리를 뽑으면 아라한의 도를 얻는다.
그러므로 “마치 족두리풀만을 가려서 뽑듯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의 뿌리를 뽑은 뒤에는”이란 무슨 뜻인가?
애욕의 뿌리란 바로 무명을 말하는 것이니, 그 가지와 잎은 다른 여러 가지의 번뇌이다.
그러므로 “애욕의 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근심이 없으니 어떤 두려움이 있으랴”란 무슨 뜻인가?
근심이 있어야 두려움이 있으니, 근심이 없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근심이란, 욕계(欲界)에만 있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는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근심은 욕계에만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없는가?
그 두 세계는 근본 성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다.
근심이 생기는 까닭은 부모가 있고 나라와 처자와 하인과 종과 논밭과 집과 재물이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있으면 근심이 있지만 그것들이 아주 없으면 결코 근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욕의 뿌리를 뽑은 뒤에는”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애욕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또한 가솔들이 많게 되니
근심의 먼길을 걸어가면서
언제나 고통을 받고 재앙에 떨어진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세속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먼저 애욕의 뿌리를 베어서
다시는 그 뿌리를 심지 말라.
마치 갈대를 베듯이 하여서
그 마음이 다시는 생기게 하지 말라.
“애욕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란 무슨 뜻인가?
비유하자면 애욕을 끊지 못한 중생이 온갖 번뇌로 가득 차 있고 애욕이 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저 중생들은 갈구하지만 만족할 줄을 모르니 이것은 다 애욕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3유(有)를 구하는 것 역시 애욕의 마음 때문이며, 처자와 재물에 탐착하는 것도 역시 애욕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애욕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또한 가솔들이 많게 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근심의 먼길을 걸어가면서”란 무슨 뜻인가?
이미 지나간 것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들은 5도(道)를 윤회하면서 지옥, 아귀, 축생 따위에 나고 죽는 것을 되풀이하니, 이 4대(大)로 된 몸으로 말미암아 애욕의 번뇌에 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의 먼길을 걸어가면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나 고통을 받고 재앙에 떨어진다”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은 계속해서 태(胎)에 들어가 한량없이 몸을 받는데, 태 안에 있을 때에는 똥오줌에 물들어서 더럽고 냄새가 난다. 계속해서 태 안에 들어가면서도 싫어할 줄도 모르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묘한 방편으로써 도를 닦되, 세속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계속해서’란 쉬지 않고 나며 오고 가기를 끊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서 나서 저기서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난다’는 것은 이 현재의 몸을 받는 것이며, ‘저기서 난다는 것’은 저 다른 세계에 나는 것이다.
‘여기서 난다’는 것은 이 사람의 몸이며, ‘저기서 난다’는 것은 저 5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애욕의 뿌리를 베어서, 다시는 그 뿌리를 심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항상 5도에 머물거나 나거나 하기에 거기에는 죄의 경중이 있다. 복이 있으면 가볍고 복이 없으면 무겁다. 그러나 비록 죄의 경중이 있는 도(道)가 있다고 해서 같은 도(道)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위(無爲)의 도(道)에는 죄의 경중이 없고, 나고 죽거나 집착하고 끊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도를 구하지 않고 더러움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갈대나 왕골을 베는 것과 같아서 쉼없이 나는 것이다.
13
애욕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편안하여서 근심이 없다.
애욕을 없애서 속박이 풀리게 되면
이로써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리.
“애욕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란 무슨 뜻인가?
성인은 이미 애욕을 여의었기에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므로 “애욕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이 편안하여서 근심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이미 온갖 애욕을 여의고 영원히 다하여서 남음이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애욕을 여의지 못하면, 마치 저 강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여서 근심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을 다함으로써 그 이름이 사라지고 형체도 없어지며 그 뿌리까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애욕을 없애서 속박이 풀리게 되면, 이로써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리”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행을 짓지도 않으며 또 행을 짓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4
여러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애욕에 의지해 살아가니
애욕이 가는 곳마다 번뇌가 따른다.
시간은 흘러서 머무르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근심이 생기니
지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여러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니, 무엇 때문에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이라고 하였는가?
그들은 모두 애욕의 부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천상에 나면 옥녀(玉女)들이 시중을 들어서 서로 즐기게 되니, 동쪽을 보면 서쪽을 잊어버린다.
또 사람으로 태어나면 집착이 많아져서 처자를 거느리게 되니,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지면 온갖 고뇌를 다 받아서 다시는 애욕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귀와 축생은 비록 애욕의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적어서 말할 것이 없다. 곧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애욕의 마음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여러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에 의지해 살아가니”란 무슨 뜻인가?
중생들은 애욕에 의지해 살아가니, 그 더러움은 애욕과 함께한다.
그러므로 “애욕에 의지해 살아가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이 가는 곳마다 번뇌가 따른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어떤 사람이 강물을 건널 때에 길잡이가 바로 가면 따르는 사람도 바로 가게 되는 것처럼, 애욕도 이와 같아서 3악도(惡道)에 떨어지면 온갖 번뇌도 따라간다.
그러므로 “애욕이 가는 곳마다 번뇌가 따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간은 흘러서 머무르지 않으며”란 무슨 뜻인가?
어느 한때에 사람으로 태어나 한가운데 있는 나라[中國]의 바른 땅에 살면서 온갖 선의 근본을 심는데, 거기에는 산이나 강이나 석벽이 없고 진기하고 이상한 물건이 많이 난다.
그래서 굳건한 믿음을 얻어 부처님과 법과 스님에 대해 그 은혜를 갚을 마음을 가지며, 일체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서 온갖 공덕의 근본을 심는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들도 출현하셔서 다 그 나라에서 산다. 그러나 그 나라 생활도 어느새 지나가니, 거기서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흘러서 머무르지 않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근심이 생기니”란 무슨 뜻인가?
변방이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등의 8무한처(無閑處)에 태어나면, 그 내력을 생각하고는 한가운데 있는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만 근심과 고통으로 인해 가슴을 치고 부르짖으면서 과거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근심이 생기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깨닫는다”란 무슨 뜻인가?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아아, 늙은 괴로움이여.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에,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서 선을 닦으면 복을 얻고, 악을 행하면 지옥에 떨어지며, 애욕을 가까이하면 삼계에 병을 심는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저 사문도 역시,
“5계(戒)를 받들어 지니고 10선행(善行)을 닦아 행하면 천상이나 인간에 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미련하여서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 칼산, 칼나무, 불수레, 솥이나 화로 등의 갖은 고통을 다 받고 있다. 이것은 모든 근(根)에 심어진 애욕의 마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깨닫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5
애욕의 흐름은 쉬지 않고 반연(攀緣)하고
음근(陰根)은 탐욕의 그물에 덮이고
가지와 잎은 기갈(飢渴)을 더하니
애욕의 고통은 더욱 늘어만 간다.
“애욕의 흐름은 쉬지 않고 반연하고”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을 반연한다고 하는가?
반연하는 것이란, 지옥, 아귀, 축생, 사람 및 천인이 애욕을 반연하여서 미래에 5음(陰)으로 된 이 몸을 가지고 모든 애욕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 경계를 반연하여서 대상[法]이 생기는 근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연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마치 저 강물이 세차게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애욕의 흐름도 이와 같아서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 법을 흘려 낸다.
그러므로 ‘애욕의 흐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쉬지 않는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곡식의 종자가 땅에 떨어지면 곧 변해서 때에 따라 물을 주게 되면 싹이 자라는 것처럼 애욕의 곡식 종자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 두루 차 있다가 기운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온갖 불선근(不善根)을 더하는데, 삼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4생(生)을 유전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음근(陰根)’이란 5성음(盛陰)으로 된 이 몸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깊고 견고하여서 움직이기 어렵다.
그래서 음근을 어리석음의 가시처럼 아프고 덧없으며 괴롭고 공(空)하며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이니,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음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이란 무엇인가?
탐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위로는 허공의 끝에까지 이르고, 밑으로는 시방(十方)의 경계에 두루하여서 지옥, 아귀, 축생들이 모두 탐욕을 반연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물에 덮이고”란 무슨 뜻인가?
마치 세상 사람들이 그물을 쳐서 새를 잡고 덫을 놓아 사슴을 잡으며 깊은 함정을 파서 호랑이를 잡을 때에, 그 새나 짐승들이 화를 당하면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탐욕의 그물에 덮여 선악을 보지 못하고, 마음은 항상 묘한 빛깔과 소리ㆍ맛ㆍ냄새ㆍ촉감ㆍ법을 즐기면서 탐욕에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애욕의 그물에 걸리게 되면, 반드시 바른 도를 무너뜨리게 되고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탐욕의 그물에 덮이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칡과 등 줄기가 나무 끝까지 감아 올라가게 되면 결국 나무는 말라 버리게 되듯이 애욕도 역시 이와 같다. 사람의 몸에 두루 차서 머리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이 뒷간에 빠져서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그 목숨을 구해 주려고, 혹 그 몸에 조금이라도 깨끗한 곳이 있는지 그 몸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손을 댈 만한 곳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몸이 애욕으로 가득 차면 고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지와 잎은 기갈을 더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갈’이란 무슨 뜻인가?
세상 사람들의 기갈은 물이나 미음[漿]으로 그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혹 풀뿌리나 과일을 먹거나 호흡하여 숨을 들이쉬거나 혹은 약초와 신주(神呪)로도 그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애욕에 의한 기갈은 사해의 물을 다 마시더라도 그 애욕의 한 자락의 땅도 적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애욕의 기갈은 구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의 고통’이란 무슨 뜻인가?
애욕을 완전히 없애지 못해서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욕의 고통은 더욱 늘어만 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6
나무를 치되, 그 뿌리를 베지 않으면
비록 잘라도 다시 나는 것처럼
애욕을 끊되, 그 뿌리를 베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고통이 생긴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에 어떤 정원사가 관청의 정원을 돌보며 지키고 있었다. 마침 그 정원에는 독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고 있었다. 많은 남녀들이 정원에 들어와서 놀다가 이 나무 밑에서 쉬게 되면, 머리가 찢어지게 아프거나 허리와 등이 아프거나 혹은 그 밑에서 곧 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정원사는 그것이 독 나무임을 알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자, 자루가 한 길[丈]이 넘는 긴 도끼를 가지고 가서 멀리서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러나 열흘이 못 되어서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도 그 가지와 잎은 둥글고 우거져서 여러 나무들 중에서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생들 중에서 이 재난을 당해 보지 않아서 피해야 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그늘에서 쉬었다. 그러나 나무 그림자가 미처 옮겨 가기도 전에 또다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정원사는 다음날 다시 도끼를 가지고 가서 그것을 베어 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다시 날 뿐만 아니라 몇 갑절이나 더 아름다웠다. 이와 같이 여러 번을 베었으나 그 나무는 여전히 처음과 같이 나고 또 났다.
그래서 정원사의 종족과 친척과 처자와 종들도 그 나무 그늘을 탐하여 즐기다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는 혈혈단신이 되어 밤낮으로 걱정하고 슬피 울면서 길을 가다가 마침 어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가 받은 갖가지 고통과 고달픈 신세를 하소연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 정원사에게 말하였다.
“그 갖가지 고통과 번민은 당신이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대개 흐르는 물을 막으려면 먼저 둑을 높이 쌓아야 하고, 나무를 치려면 그 뿌리까지 베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당신이 한 일은 다만 종자를 심은 것뿐인데, 어떻게 나무를 베어 냈다고 말할 수 있겠소? 당신은 지금이라도 빨리 그 나무의 뿌리를 파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미혹되어서 자기마저 죽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만일 내가 다시 가서 그 뿌리를 파내다가는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관청에서 정원사를 새로 세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종족은 모두 죽어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 뒤를 이을 자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달아나 중이 되어 도를 배우리라.’
곧 그는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이르러 여러 도인들을 찾아 뵙고 사문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생에 심어 놓은 복의 뿌리가 성숙하여 마침내 계율의 행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를 돌아보시고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나무를 치되, 그 뿌리를 베지 않으면
비록 잘라도 다시 나는 것처럼
애욕을 끊되, 그 뿌리를 베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고통이 생긴다.
그 비구는 이 게송을 듣자 지금까지의 자기의 과거 내력을 생각하고는 마음이 열려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4대(大)로 된 이 몸의 더러움과 근심에 대해 생각하였다. 또한 아무리 가서 베어도 끊임없이 살아나는 독 나무에 대해서도 생각하였다.
‘지금 4대로 된 이 몸도 저것과 다를 것이 없다. 애욕의 뿌리는 깊고 단단하여서 그 뿌리를 베지 않으면 가지는 끊임없이 자랄 것이다. 당연히 생ㆍ노ㆍ병ㆍ사를 되풀이하여 저기서 죽어 여기에 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에 날 것이다. 이와 같이 유전하여서 쉼이 없을 것이다.
또 저 독 나무는 그 뿌리를 스스로 베이고 또 여러 사람을 해치는 것처럼, 이 애욕의 번뇌도 이와 같아서 스스로 그 목숨을 해치고 또 밖으로는 지혜의 성품을 해친다.’
그 비구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이 5음으로 된 몸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 하나도 탐할 것이 없음을 관찰하였다. 그는 곧 그 자리에서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과(果)를 차례로 얻었으며 6신통이 트였다. 그는 대중 앞에서 스스로 감격하여 다음과 같이 세 번 외쳤다.
“아아, 정말로 훌륭하도다. 큰 도(道)는 미천한 자일지라도 저버리지 않으니, 나는 지금 거룩한 은혜를 입고 모든 번뇌를 벗어나게 되었구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세 번 돈 다음 제자리로 돌아가서 18신변(神變)을 나타내고는 무여(無餘)열반에 들어 열반을 취하였다.
17
마치 스스로 화살을 만들어서
도리어 그 몸을 해치는 것처럼
마음의 화살도 이와 같아서
애욕의 화살은 중생을 해친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마갈국(摩竭國)의 감려원(甘黎園) 가운데 있는 성(城) 북쪽의 석실굴(石室窟)에 계셨다.
그때에 많은 사냥꾼들이 산 속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물을 넓게 쳐서 사슴을 수없이 잡고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갔다.
그때에 사슴 한 마리가 덫에 빠져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사냥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달려갔으나 도리어 그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져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었다.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상처가 심해서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 사람들과 친척들은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맞았다. 그들은 갖가지 고약을 구해다가 상처에 붙였다. 열흘이 지나자 그들은 상처가 나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사냥이 두렵고 싫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전생에 제도받을 수 있는 많은 선의 근본을 심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문이 되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백천의 중생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다가 그들을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악의 뿌리를 뽑고 공덕을 닦아서 생사를 아주 여의고 언제나 복된 곳에 있게 하시려고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셨다. 부처님께서는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마치 스스로 화살을 만들어서
도리어 그 몸을 해치는 것처럼
마음의 화살도 이와 같아서
애욕의 화살은 중생을 해친다.
그런데 사냥꾼들은 비록 사문이 되었으나, 이러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길,
‘오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냥꾼이었음을 확실히 증명하셨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며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였다.
이어 고요한 곳에서 지관(止觀)을 행하고 마음을 한곳에 매어서 산란하지 않게 하였다.
그들은 선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3법의(法衣)를 입었으며,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위없는 범행(梵行)을 닦았다. 그래서 스스로 도를 깨달아 그 즐거움을 누렸다. 그들은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을 완성하여 할일을 이미 마쳤기 때문에 다시는 생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알게 되었다.
그때에 그 비구들은 아라한의 과(果)를 얻고 6신통이 트여서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읊으신 것이다.
18
이러한 것을 잘 깨쳐서 알라.
애욕과 괴로움은 유(有)에서 생긴다.
애욕이 없으면 생각도 없으니
비구여, 오로지 득도(得度)에 전념하라.
“이러한 것을 잘 깨쳐서 알라”란 무슨 뜻인가?
애욕이란 모든 병의 으뜸이니, 마치 저 성(城)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땅을 의지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왜 애욕을 모든 병의 으뜸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은 다 애욕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릇 지옥에 있으면서 온갖 고뇌를 받는 것도 다 애욕의 병 때문이며, 살생하는 것도 다 애욕 때문이다. 또한 도둑질과 음행과 거짓말 등의 10불선행(不善行)도 다 애욕의 마음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이런 온갖 악한 행을 지어 10악(惡)을 행한 뒤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열세 가지의 불에 그 몸이 타고 굽힌다.
그 열세 가지란 무엇인가?
먼저 두 개의 화산(火山)이 앞으로 다가와 배로 들어가서 등을 뚫고 지나가고, 또 두 개의 화산이 뒤에서 쫓아와 등에서 들어가 배로 나오며, 또 두 개의 화산이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 오른쪽 옆구리로 나가고, 또 두 개의 화산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왼쪽 옆구리로 나간다. 또 두 개의 화산이 밑에서 들어가 위로 나가고, 또 두 개의 화산이 위에서 들어가 밑으로 나간다.
그렇다면 열세 번째의 화산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이 만든 간절한 애욕을 말하는 것이다. 열두 개의 화산은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든 간절한 애욕의 화산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과 같다. 지옥의 옥졸들이 여러 죄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느냐?”
죄인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너무나 굶주리고 피곤하여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옥졸들은 뜨거운 철환(鐵丸)을 억지로 그들에게 먹이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그 죄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느냐?”
“저희들은 너무나 목이 말라서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옥졸들이 그 죄인을 비스듬히 눕혀 놓고 끓는 구리 쇳물을 그 입에 쏟아 부으니, 입과 목구멍을 태우면서 모두 밑으로 내려갔다. 결국 말하자면, 지옥에서는 이러한 만 가지 고통과 고뇌를 받는 것이다. 또 축생의 몸을 받아도 그 고통은 한량이 없다.
축생으로 받는 고통은 어떤 것인가?
그것도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축생계에 나면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축생계에 떨어지면 어둠 속에서 나고, 어둠 속에서 자라며, 어둠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들인가?
이른바 땅 속에 엎드려 사는 벌레들이니, 이것은 다 전생에 애욕을 탐해서 즐겼기 때문이다. 신(身)ㆍ구(口)ㆍ의(意)로 악을 행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땅 속에 엎드려 사는 벌레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둠 속에 나서 어둠 속에서 자라다가 어둠 속에서 죽는 것들이니,
비구들이여, 축생들이 받는 고통은 매우 심해서 참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중생들은 4대(大)에 의해 나고 4대에 의해 자라다가 4대에 의해 죽는다.
이것은 어떤 것들인가?
이른바 부스럼에 사는 벌레들이니, 이것은 다 전생에 좋은 맛을 탐하고 거기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신(身)ㆍ구(口)ㆍ의(意)로 악을 행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부스럼 벌레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4대에 의해 나고 4대에 의해 살다가 4대에 의해 목숨을 마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축생들이 받는 고통은 매우 심해서 참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중생은 축생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의 대소변의 냄새를 맡고는 곧 그리로 달려가면서,
‘이것을 먹고 이것을 마시자’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것들인가?
이른바 닭, 돼지, 개, 나귀, 여우, 까마귀, 새들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아귀들은 매우 괴롭다.
어떻게 아귀들은 괴로운가? 어떤 아귀는 수염이나 머리카락이나 몸의 터럭을 먹고, 어떤 아귀는 손발톱, 이빨, 몸의 때, 엷은 막(膜), 두꺼운 껍질을 먹으며, 나아가서는 가죽, 힘줄, 뼈, 심장, 비장, 신장, 간장, 쓸개, 대장, 소장, 위, 똥, 뇌수, 눈물, 땀, 콧물, 침, 고름, 피, 기름덩이, 가래, 오줌 따위를 먹는다. 이런 것들이 다 아귀의 음식이다. 그들이 이런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은 다 전생에 좋은 맛을 탐하고 거기에 집착하여서 탐욕과 인색함으로 혼자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 남에게 음식을 주더라도 저주하고 꾸짖으면서,
“너희들이 내 음식을 먹는 것은 피나 고름이나 대소변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면,
그는 다음 생에 아귀가 되어서 저런 더러운 것들을 먹을 것이다.
또 어떤 아귀는 전생에 사람으로 있을 때에 혼자 먹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처음부터 한 톨의 쌀도 남에게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보시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방해하여 못하게 하였다.
그는 후에 아귀가 되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음식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이런 아귀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3악취(惡趣)의 고통은 한량이 없는 것이니, 그것은 다 전생에 애욕의 마음이 견고하여 이러한 갖가지 고통의 종자를 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애욕은 온갖 병의 으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애욕과 괴로움은 유(有)에서 생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욕이 없으면 생각도 없으니”란 무슨 뜻인가?
애욕을 여의고 버려서 남음이 없고 토해서 버리게 되면, 타오르는 번뇌와 온갖 근심의 근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욕이 없으면 생각도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구여, 오로지 득도(得度)에 전념하라”란 무슨 뜻인가?
비구가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서 조금도 어지럽지 않으면 경계를 떠나 경계를 여의게 되고,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르러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되며, 맑고 시원하여서 타오르는 번뇌가 없고, 일체의 연모하는 마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구여, 오로지 득도(得度)에 전념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