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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 下
영가대사 증도가 남명천선사 계송 하
損法財하야 功自棄하나니,
往返三途이어니 何所恃리오.
省覺은 由來在剎那하니
不必辛勤하야 坐獲利하리라.
법재法財를 없애버리고 공功을 제 스스로 버리나니,
삼도三途에 오락가락하거니 어느 곳을 믿으리오?
깨어 앎은 예로부터 옴에 찰나刹那에 있나니,
구태여 괴롭게 부지런히 아니하여 앉아서 이익을 얻으리라.
滅功德을 更何猜리오.
五爲門戶이오 一爲媒니라.
從前寶所에 無關鑰거늘
自是時人이 不肯來한다.
공덕功德 없게 함을 다시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다섯이 문호門戶가 되고 하나가 중매쟁이 되니라.
예로부터 보소寶所(보배 처소)에 자물쇠 잠금이 없거늘,
이 시절時節 사람이 제 스스로 즐겨 오지 아니한다.
莫不由斯心意識이니
從來共住호되 若寃讎하니라.
如今已與同家業이라.
無限珍財를 更不偷하리라.
이 심의식心意識을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으니,
예로부터 한 데에 있으되 원수寃讎와 같으니라.
이제 이미 더불어 가업家業이 한가지라,
그지없는 보배재산을 다시 훔치지 아니하리라.
是以禪門에 了却心하야,
兀兀騰騰度朝夕이니라.
佛祖를 相看하는 驀路가 同하니
大暑엔 迎凉코 寒向日하나니라.
이런 까닭으로 선문禪門엔 마음을 알아,
올올등등兀兀騰騰하여 아침저녁을 지낼지니라.
불조佛祖를 서로 보는 곧은길이 한가지니,
큰 더위엔 서늘함을 맞고 추위엔 해를 향向하나니라.
* ‘올올兀兀’은 가만히 있는 것이요 ‘등등騰騰’은 일 없는 것이라.
頓入無生知見力이니,
無生知見을 若爲論고.
有時에 望月過深夜하고
幾爲求齋하야 到遠村커니오.
무생지견無生知見에 몰록 들어간 힘이니,
무생지견無生知見을 어찌 논論하리오?
이따금 달을 바라보며 깊은 밤을 지나고,
얼마나 재齋를 구求하여 먼 마을에 이르렀던고?
大丈夫는 威且愛하니,
草偃風行이라 無窒礙하도다.
不止賢愚에 作羽儀라.
險惡途中에 人所賴니라.
대장부大丈夫는 위엄이 있고 또 사랑하나니,
풀 누움이 바람 움직임이라 막음이 없도다.
어질며 어리석음에 우의羽儀가 될 따름 아니라,
험險한 모진 길에 사람이 힘을 입는 바이니라.
* ‘우의羽儀’는 본보기이라.
秉慧劒하야 雪霜寒하니,
寰海何人이 敢正看이리오.
剔起眉毛하야 便歸去하야도
髑髏峯後에 草漫漫하리라.
혜검慧劒을 잡아 눈과 서리가 서늘하니,
환해寰海(하늘 아래)의 어느 사람이 구태여 정正히 보리오?
눈썹 털을 헤쳐서 곧 돌아가도,
촉루봉髑髏峯 뒤에 풀이 가득하리라.
* 촉루봉髑髏峯은 죽은 해골이 산처럼 쌓인 곳이라.
般若鋒兮오 金剛燄이니,
堅猛하야 能燒亂相林하는구나.
一掃에 更無毫髮許하야도
傍人은 猶笑老婆心한다.
반야般若 칼날이요 금강金剛 불꽃이니,
굳고 매워(사나워) 난상亂相의 수풀을 능能히 불사르는구나.
한 번 쓺에 다시 머리터럭 만큼도 없어도,
곁에 사람은 오히려 늙은 할미 마음(노파심)을 웃는다.
非但能摧外道心이니,
戴盆鍱腹이 何窮數이리오.
靈山에 據坐하샤 略搖鞭하신댄
良馬가 追風하야 自迴去하니라.
능能히 외도外道의 마음 꺾을 따름 아니니,
분盆(동이)을 이며 배를 섭鍱함(구리로 두름)이 어찌 수數가 다하리오?
영산靈山에서 좌坐에 거據하시어 잠깐 채찍을 흔드신댄
좋은 말이 바람을 쫓아 스스로 돌아가니라.
* ‘분盆을 머리에 이다’ 함은 불을 담은 그릇을 이는 것이니 불을 섬기는 외도外道요, ‘구리로 배를 싼 것’도 외도外道의 일이라.
早曾落却天魔膽하시니,
邪正이 相交ᄒᆞ나 勢可知니라.
自是汝曹가 憎愛重이언정
非于佛子가 不慈悲니라.
일찍이 천마天魔의 간담을 떨어버리시니,
사邪와 정正이 서로 섞이나 세勢를 가히 알지니라.
스스로 이 너희 무리가 미우며 사랑함이 무거움이언정,
불자佛子가 자비慈悲를 아니함에 붙지 아니하니라.
震法雷하시니,
一擊에 轟然徧九垓하도다.
莫謂從來無影象하라.
含靈이 曾爲眼齊開하니라.
법뇌法雷(법의 우레)를 떨치시니,
한 번 침에 굉연轟然하여 구해九垓(九州, 大千)에 가득하도다.
예로부터 옴에 그림자와 상象이 없다 이르지 말라.
함령含靈이 일찍이 눈을 가지런히 여니라.
* ‘굉연轟然’은 여러 수레의 소리.
擊法鼓하시니,
西天此土에 親規矩이시니라.
癡人이 睡重하야 自無聞이언정
不是觀音이 心未普이시니라.
법고法鼓를 치시니,
서천西天과 차토此土에 친親한 규구規矩(法)이시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잠이 무거워 스스로 듣지 못함이언정,
관음觀音이 마음 넓지 못하심이 아니시니라.
布慈雲兮灑甘露하시니,
人間天上에 絕纖塵하도다.
濛濛一味가 無差別하나
洗出萌芽하야 萬種新이로다.
자운慈雲을 펴시어 감로甘露를 뿌리시니,
인간人閒과 천상天上에 가는 티끌도 끊도다.
몽몽濛濛한(가늘게 내리는 비) 한 맛이 차별差別이 없으나,
움(萌芽, 싹)을 씻어내어 만萬 가지가 새롭도다.
* 몽몽濛濛은 가는 비라.
龍象은 蹴踏에 潤無邊하니,
自在縱橫하야 勿羇絆하도다.
衆生이 未盡證菩提인댄
終不輕離煩惱岸하나니라.
용상龍象(용과 코끼리)은 밟음에 적심(윤택하게 함)이 갓이 없으되,
종횡縱橫에 자재自在하여 얽매이지 아니 하도다.
중생衆生이 다 보리菩提를 증證하지 못할진댄,
마침내 가벼이 번뇌煩惱의 가(언덕)를 여의지 아니 하나니라.
三乘五性이 皆醒悟하니,
舒即參差코 卷即同하도다.
鷰雀鸞凰이 飛各異나
到頭엔 終不離虗空하나니라.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다 깨어서 아나니,
펴면 곧 참차參差하고(가지런하지 아니하고) 거두면 곧 한가지로다.
제비와 새와 난鸞과 봉鳳이 나는 것이 각각 다르나,
다다른 끝엔 마침내 허공虛空을 여의지 아니 하나니라.
雪山肥膩更無雜하니,
時雨時風에 不露根하나니라.
莫謂緜緜無一事하라.
曾傳消息하야 到王孫하니라.
설산雪山에 비니肥膩[一乘法]는 다시 섞인 것 없으니,
시절時節의 비와 시절時節의 바람에 뿌리 드러나지 아니 하나니라.
면면緜緜하여 한 일도 없다 이르지 말라.
일찍이 소식消息을 전傳하여 왕손王孫[釋尊과 達磨]에게 이르니라.
* ‘비니肥膩’는 풀의 이름이니 설산雪山의 한 소가 비니초肥膩草를 먹으면 제호醍醐를 내나니라.
純出醍醐를 我常納이라 하시니,
若非寶器면 貯應難이니라.
舉世何人이 知此味오.
寒山이 撫掌코 笑豐干하니라.
‘순수한 제호醍醐 낸 것을 내 항상 들이노라(納)’ 하시니,
만약 보배의 그릇이 아니면 담음이 어려우니라.
온 세상의 어느 사람이 이 맛을 아는고?
한산寒山이 손뼉치고 풍간豊干을 웃으시니라.
一性이 圓通一切性하니,
是性은 悠悠하야 一即多이니라.
若了一多이면 非一異니
一異無來에 會得麼아.
한 성性이 일체성一切性에 두렷이 사무치니,
이 성性은 유유悠悠하여(넓고 커 갓이 없어) 하나가 곧 여럿이니라.
만약 하나와 여럿임을 알면 하나[一]와 다름[異]이 아니니,
‘하나[一]와 다름[異] 없음’이 옴에, 아는가 모르는가?
一法徧含一切法하니,
一法이 爲主이오 衆爲賓하나니라.
無主無賓에 即賓主이니
芥納須彌가 不礙人하니라.
한 법法이 일체법一切法을 다 머금으니,
한 법法이 주主가 되고 여럿이 손[賓]이 되나니라.
주主 없으며 손[賓] 없는 데에 곧 손과 주主이니,
개자芥子에 수미須彌가 들어감이 사람을 막지 아니하니라.
一月이 普現一切水하니,
非邇非遐이라 體自常하도다.
南北東西에 分影去하나
亭亭天外에 有餘光하니라.
한 달이 일체一切 물에 널리 나투니,
가깝지 아니하며 멀지 아니한 것이라 체體가 스스로 항상 하도다.
남북동서南北東西에 그림자 나누어 가나,
정정亭亭한 하늘 밖에 남은 빛이 있나니라.
* ‘정정亭亭’은 조금 밝은 모양이라.
一切水月을 一月이 攝하니,
月不分形하며 水不孤하도다.
時人이 未透清波路하야
只道寒光이 滿太虗한다.
일체一切의 물엣 달을 한 달이 잡으니(攝),
달이 형상을 나누지 아니하며 물이 외롭지 아니하도다.
시절時節의 사람이 맑은 물결의 길을 사무치지 못하여,
오직 이르되 ‘서늘한 빛이 대허大虛에 가득하다’ 한다.
諸佛法身이 入我性하니,
無我無人이어늘 謾聖凡이로다.
幽徑落花는 紅似火이고
繞門流水는 碧如藍하도다.
제불법신諸佛法身이 내 성性에 드니,
나 없으며 사람 없거늘 속절없이 聖과 凡이로다.
깊은 길에 떨어진 꽃은 붉음이 불같고,
문門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푸르기가 쪽빛 같도다.
我性이 還共如來合하니,
合處는 非他이며 非自己니라.
須彌頂上에 鐵舩이 沈커늘,
穿耳胡僧이 暗彈指한다.
내 성性이 도리어 여래如來와 어우르니(합하니),
어우른(합한) 곳은 남 아니며 내 몸 아니니라.
수미산須彌山 정상 위에 쇠 배가 잠기거늘,
귀 뚫은 되중[胡僧]이 그윽이 탄지彈指하도다(손가락 퉁기도다).
* ‘귀 뚫은 되 중’은 달마達磨를 말함이라.
一地에 具足一切地하니,
行位가 差別이나 只此身이니라.
歷盡僧祇三大劫하니
今年이 還似去年貧하도다.
일지一地에 일체지一切地를 갖추니,
행위行位가 다르나 오직 이 몸이니라.
아승기阿僧祇 세 대겁大劫을 지내어 다하니,
올해가 지난해의 가난과 도리어 같도다.
非色非心非行業이니,
戲論言辭가 揔不如하니라.
唯有華山潘處士가
途中에 吟望倒騎驢하니라.
색色 아니며 마음 아니며 행업行業 아니니,
희론戱論과 말씀이 다 같지 아니하니라.
오직 화산華山의 심처사潘處士가,
곧 길 가운데에(오는 도중에) 읊어 바라보고 나귀를 거꾸로 타니라.
* 반처사潘處士는 이름이 반량潘閬이니, 화산華山에 가서 노닐다가 돌아올 때 산을 사랑하여 길에서 나귀를 거꾸로 타고 산을 바라보며 오니라.
彈指에 圓成八萬門이니,
八萬法門이 唯一處이니라.
若迷一處하면 謾馳求하리니,
一處를 若明하야도 無本據이니라.
탄지彈指에 팔만八萬 문門이 두렷이 이루어지니,
팔만八萬 법문法門이 오직 한 곳이니라.
만약 한 곳을 모르면 속절없이 다니며 구求하리니,
한 곳을 만약 밝혀도 의거할 곳이 없느니라.
剎那에 滅却三祇劫하나니,
一念無生이라 一亦非니라.
大地盡同銀色界어니,
有何岐路가 不同歸리오.
찰나刹那에 삼기겁三祇劫을 없게 하나니,
일념一念이 남이 없어 일一도 또한 아니니라.
대지大地가 다 한가지의 은색계銀色界이거니,
어느 갈림길이 한 데에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 있으리오?
一切數句와 非數句가,
性相이 紛拏하야 萬種名이니라.
閉戶只言天未曉하고
不知門外에 日頭生하도다.
일체一切 수구數句[差別, 相]와 수구數句 아님[無差別, 性]이,
성性과 상相이 어지러워 만萬 가지의 이름이니라.
문門 닫고서 오직 이르되 ‘하늘이 새지 아니한다’하고,
문門 밖에 해 돋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與吾靈覺으로 何交涉이리오,
千聖眞機는 不易親이니라.
明州布袋는 多狂怪하샤,
閙中에 常把示行人하시니라.
내 영각靈覺으로 어찌 서로 간섭干涉하리오?
천성千聖의 진기眞機는 친親함이 쉽지 아니하니라.
명주포대明州布袋는 크게 미치고 괴이怪異하시어,
시끄러운 가운데 항상 (마른 고기와 마른 똥을)잡아서,
다니는 사람에게 보이시니라.
*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저잣거리며 마을에 들어가 아니 빌 것이 없이 빌더니, 이따금 마른 고기와 마른 똥을 들어보이며 이르되 “이것이 미륵내원彌勒內院이라” 하더라.
不可毀니,
天兵魔后도 徒威美하도다.
慈光照處에 各歸投하야
清鏡觀來에 自慚恥하니라.
가히 헐지 못하리니,
천병天兵[魔軍]과 마후魔后[魔女]도 속절없이 두렵게 하며 아름다움 보이도다.
자광慈光(자애로운 광명) 비추신 곳에 각각 귀투歸投하야,
맑은 거울을 봄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니라.
* 귀투歸投: 귀투신명歸投身命, 신명身命을 바쳐 돌아감(귀명歸命함).
不可讚이니,
虗空은 未省曾離閒이니라.
善吉巖中에 草不生하니
憍尸는 謾把天花散
가히 기리지(찬탄하지) 못하리니,
허공虛空은 잠깐도 여의어 흩어지며 그침[離閒]을 알지 못함이니라.
선길善吉[수보리]의 바위 가운데에 풀이 나지 아니하니,
교시憍尸[제석천왕]는 속절없이 하늘의 꽃을 잡아 흩뿌리도다.
體若虗空하야 勿涯岸하니,
秘藏微言으로 莫可詮이로다.
十聖三賢의 不知處이여,
有時에 閑掛寺門前하였다.
체體가 허공虛空 같아서 갓 없으니,
비장秘藏의 미묘微妙한 말로 가히 이르지 못하리로다.
십성삼현十聖三賢의 알지 못한 곳이여.
이따금 절의 문門 앞에 한가로이 걸려 있다.
* 십성十聖은 십지성인十地聖人이요 삼현三賢은 십주十住와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回向이라.
不離當處하야 常湛然하니,
非是衆生이며 非是佛이니라.
驀然撞倒須彌山하야사
始信從來無一物인 줄 하리라.
당當한 곳을 여의지 아니하여 항상 맑으니,
이는 중생衆生 아니며 이는 부처 아니니라.
문득 수미산須彌山을 부딪혀서 거꾸러뜨려야사,
예로부터 옴에 한 물건도 없는 줄을 비로소 알리라.
覓即知君의 不可見하노니,
不見은 須從此路歸어다.
病鳥는 只栖蘆葉下커니와,
俊鷹은 才舉에 搏天飛하나니라.
찾으면 곧 그대의 보지 못하는 것을 아노니,
보지 못한 이는 모름지기 이 길을 좇아 돌아갈지어다.
병病든 새는 오직 갈댓잎 아래 깃들었거니와,
날랜 매는 갓 (날개를)듦에 하늘을 날개 치며 나나니라.
取不得이니,
雲生電轉하야 寰區가 黑하도다.
臨濟途中에 空手迴하니,
被人剛喚白拈賊하니라.
취取함을 득得치(얻지) 못하리니,
구름이 일어나며 번개가 옮아 환구寰區(하늘 아래)가 검어지도다.
임제臨濟가 길 가운데 빈손으로 돌아오시니,
사람에게 ‘낮에 도적을 잡는다’라고 굳이 부름을 입느니라.
捨不得이니,
四方上下에 皆充塞하도다.
鶖子는 何知리오 欲棄捐하니,
空惹天花徧衣裓하니라.
버림을 득得치(얻지) 못하리니,
사방四方과 上下에 다 가득하도다.
추자鶖子(사리불)는 어찌 알리오? 버리고자 하니,
속절없이 하늘 꽃이 옷에 가득히 쌓이니라.
不可得中에 只麼得하나니,
無葉無根호되 到處生하나니라.
昨日開簾호니 隨雨過하더니,
今朝에 當路하야 礙人行한다.
가히 얻지 못하는 중中에 오직 그리 얻나니,
잎 없으며 뿌리 없으되 가는 데마다 나나니라.
지난날엔 발(주렴)을 여니 비를 좇아 지나더니,
오늘 아침엔 길에 당當하여 사람의 걸어감을 가리도다.
默時說은 暗中明이니,
明暗忘來엔 若砥平하니라.
不二法門을 終演處이여.
毗耶城內에 似雷聲하도다.
‘잠잠한 때를 설說함’은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니,
밝음과 어두움을 잊어 옴엔 숫돌 평평함과 같으니라.
둘 아닌 법문法門을 마침내 펴신 곳이여.
비야성毗耶城 안에 우레 소리 같도다.
說時默은 絕夤緣하니,
縮却舌頭하야사 始解宣하리라.
四十九年을 無一字하시니,
龍宮海藏은 若爲傳고.
설說할 때가 잠잠함은 인연因緣에 얽힘이 끊어지니,
혀끝을 움츠려야사 비로소 능能히 펴리라.
‘사십구년四十九年을 (설함이)한 자字도 없다’ 하시니,
용궁해장龍宮海藏은 어찌 전傳하였는고?
大施門開하야 無擁塞하니,
不厭流泉하며 不愛山하는구나.
面對塵灰하고 頭似雪하니,
步行騎馬하야 過潼關하도다.
크게 주는 문門 열어 옹색擁塞함이 없으니,
흐르는 물[化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산[證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구나.
낯은 티끌과 재를 띄고 머리는 눈과 같으니,
걸어 다니며[발 디딤] 말을 타고[발 디디지 않음] 동관潼關을 지나도다.
有人이 問我호되 解何宗고 커든,
不惜眉毛하야 略爲通호리라.
東嶺에 雲生하니 西嶺이 白하고,
前山에 花發하니 後山이 紅하도다.
사람이 나더러 묻되, ‘어느 종宗을 아느뇨?’ 하거든,
눈썹 털을 아끼지 아니하여 잠깐 위爲하여 통通하게 하리라.
동東녁 멧부리에 구름이 생겨나니 서西녁 멧부리가 햐얗고,
앞 산에 꽃이 피니 뒷 산이 벌겋도다.
報道摩訶般若力이라 호리라,
古佛今佛의 眞秘密이니라.
謝三은 本是釣魚人이니,
過得溪來에 脚不濕하도다.
아뢰어 이르되, ‘마하반야摩訶般若의 힘이라’ 하리라.
옛 부처와 지금 부처의 진실眞實한 비밀秘密이니라.
사삼謝三(玄沙師備, 현사사비)은 본래本來 이 고기 낚는 사람이니,
내(개천)를 지나옴에 발이 젖지 아니하도다.
* ‘사삼謝三’은 현사화상玄沙和尙이니 사가謝家의 셋째 아들이라.
或是或非를 人不識하나니,
不識伊家는 更是誰오.
換面改頭가 如幻化하니,
兒童은 爭解等閑知리오.
혹或 옳으며 혹或 그름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알지 못하리로다, 이 집은(사람은) 또 이 누군고?
낯 바꾸며 머리 고침이 환화幻化와 같으니,
아이는 어찌 능能히 넌지시(공연히) 알리오?
逆行順行을 天莫測하나니,
更無儀範이 作規箴이로다.
黃輿는 豈可窮邊際리오.
徒把折錐하야 候淺深한다.
거슬러 행行하며 순順하게 행行함을 하늘이 측량測量하지 못하나니,
또 의범儀範(모범)이 법法 됨(정해짐)이 없도다.
황여黃輿(대지)는 어찌 가히 갓을 다하리오?
속절없이 꺾은 송곳을 잡아 옅고 깊음을 재어 살피도다.
* ‘의범儀範’은 의표儀表이고 ‘황여黃輿’는 대지大地라.
吾早曾經多劫修호니,
因修하야사 乃證無生力이니라.
癡人은 求道호되 不修行하나니,
還似蒸沙하야 望充食이로다.
내 일찍이 다겁多劫을 지내어 닦으니,
닦음을 인因하여야 무생력無生力(남이 없는 힘)을 증證하나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도道를 구求하되 행行을 닦지 아니하나니,
모래를 쪄서 밥 삼고자 바라는 것과 도리어 같도다.
不是等閑히 相誑惑이니,
從來眞僞는 豈相干이리오.
虎皮羊質은 知多少오.
要識眞金인댄 火裏看이니라.
넌지시(공연히) 서로 속여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니,
예로부터 옴에 진眞(진실)과 위僞(거짓)가 어찌 서로 간섭干涉하리오?
범의 가죽과 양羊의 몸은 모르리로다, 얼마나 되는고?
진실眞實의 금金을 알고자할진댄 불 속에서 볼지니라.
建法幢하시니,
靈山榜樣이 更無雙하도다.
髽角女兒가 戴席帽하야,
手攜筇杖ᄒᆞ고 過寒江ᄒᆞ도다
법당法幢을 세우시니,
영산靈山의 방양榜樣(모범, 법식)이 다시 쌍雙이 없도다.
좌각髽角(좌계髽髻; 쪽머리)한 계집이 석모席帽를 이어,
손에 대막대 잡고 찬 강을 지나도다.
* ‘영산靈山의 방양榜樣’은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일이라. ‘좌각髽角’은 삼으로 머리 맨 것을 뿔 같이 한 것이니 부인婦人의 흉복凶服이요, ‘석모席帽’는 주옥珠玉으로 꾸민 것이니 부인婦人의 성盛한 길복吉服이라.
立宗旨하시니,
左凹右凸을 誰相委리오.
海門舩子가 過楊州하니,
八臂那吒가 姦似鬼하도다.
종지宗旨를 세우시니,
좌左는 오목하고 우右는 불룩함을 누가 서로 알리오?
해문海門의 선자船子(배)가 양주楊州를 지나니,
여덟 팔인 나타那吒가 간사姦邪함이 귀신같도다.
* ‘나타那吒’는 북방北方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의 셋째 아들이니 머리 셋이요 팔이 여덟이라.
明明佛勑은 曹溪가 是니,
如今何處가 是曹溪오.
日日에 日從東畔出이오,
朝朝에 雞向五更啼한다.
불칙佛勑을 명명明明히 하신 이는 조계曹溪(혜능)가 이 분이니,
이제 어느 곳이 이 조계曹溪오?
날마다 해 동東녁 갓을 좇아 나오고,
아침마다 닭이 오경五更을 향向하여 울도다.
第一迦葉이 首傳燈핫시니,
糞掃爲衣하야 自知足하시다.
只因起舞洩天機하샤,
直至而今에 遭齒錄하시니라.
제일가섭第一迦葉이 처음 등불을 전傳하시니,
똥을 쓴 것으로 옷을 만드시어 스스로 만족을 아시도다.
오직 일어나 춤춰 천기天氣를 누설漏洩함을 인因하시어,
바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입에 기록됨을 만나시니라.
二十八代는 西天記니,
不戀幽巖하시고 共入塵하시다.
杖子一枝가 無節目하닐
慇懃分付夜行人하시니라.
이십팔대二十八代는 서천西天의 기記이니,
깊은 바위는 사랑하지 아니하시고 다 티끌에 들어가시다.
막대기 한 가지가 절목節目 없는 것을,
은근慇懃히 밤에 다니는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시니라(분부하시니라).
入此土하샤 信機緣하시니,
五葉花開가 豈偶然이리오.
無聖廓然을 人不會할새,
九年을 孤坐鼻撩天하시다.
이 땅에 드시어 기연機緣을 아시니,
다섯 잎 꽃 핌이 어찌 우연偶然이라 하리오?
성聖 없어 훤함을 사람이 알지 못할새,
아홉 해를 외로이 앉아 코가 하늘을 찌르시니라.
* 옛 이르되, “‘훤하여 성聖 없다’ 함을 알고자 할진댄, 아홉 해 벽 돌아앉은 곳을 향向하여 잡들여 보라” 하니라.
菩提達磨가 爲初祖이시니,
謾道西來하야 欲付衣한다.
却羨梁王의 眞慷慨하노라.
寒江을 趂過하야 不容歸하니라.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초조初祖가 되시니,
서西에서 와 옷을 맡기고자 속절없이 이르도다.
도리어 양왕梁王의 진실眞實의 강개慷慨를 부러워하노라.
차가운 강을 지나며 뒤쫓아 돌아감을 용납容納치 아니하니라.
六代傳衣를 天下聞하나니,
表法하야 聊將記宗旨하시니라.
當時放下가 勿肴訛커늘,
何事로 人來하야 提不起오.
육대六代에 옷(가사) 전傳하심을 천하天下가 들었나니,
법法을 표表하여 가져서 종지宗旨를 기록하시니라.
그때 놓아버리심이 어기지(잘못되지) 아니하시거늘,
무슨 일로 사람이 와서 잡아 일으키지 못하느뇨?
後人이 得道를 何窮數이리오,
不是唯從嶺外來니라.
須信春陽이 及萬物하야,
高低花木이 一時開호리라.
후後엣 사람이 도道 얻음을 어찌 수數가 다하리오,
오직 고갯마루[嶺] 밖을 좇아서 옴이 아니니라.
봄의 양기陽氣가 만물萬物에 미치어,
높으며 낮은 꽃나무가 한때 피어남을 모름지기 알리라.
眞不立호리니,
白駒도 未似流波急이니라.
當日文王이사 却識珍이어늘,
卞和는 堪笑이라 空垂泣하도다.
진眞을 세우지 아니하리니,
백구白駒도 흐르는 물결의 빠름과 같지 못하니라.
그 날 문왕文王이라야 도리어 보배를 알거늘,
변화卞和는 웃음직하다가 속절없이 울도다.
* ‘백구白駒’는 해의 그림자라. ‘변화卞和’가 형산衡山의 옥玉을 얻어 임금께 바치거늘 초문왕楚文王이 ‘옥玉이 아니라’ 하고 변화卞和의 발을 베니라.]
妄本空하니,
遊子가 思鄉하야 歲已窮하도다.
舉足이 是家이라 歸便得이어니,
何勞流恨하야 向西風고.
망妄이 본래本來 비니(공空하니),
유자遊子(떠도는 아들)가 본 고향을 사랑하야[思] 세월이 이미 다하도다.
발을 듦이 이 집이라 돌아가면 곧 얻으리어니,
어찌 수고로이 한恨을 흘려가며 서西녘 바람을 향向하리오?
有無를 俱遣하면 不空空이니,
若欲存空인댄 還是礙니라.
山人去後에 老猿이 啼하고,
茅屋空來에 白雲이 在하도다.
유有와 무無를 다 (보내)버리면 불공不空도 비니,
만약 공空을 두고져 할진댄 도리어 이 가림(장애)이니라.
산인山人이 간 후後에 늙은 납(원숭이)이 울고,
띳집(초가집)이 비어 옴에 백운白雲이 있도다.
二十空門에 元不著하니,
眞妄이 悠悠하야 病已除하도다.
一徑이 穿雲한대 人不到하나니,
千巖萬壑이 遶吾盧하도다.
이십공문二十空門에 본디 착着(집착)하지 아니하니,
진眞과 망妄이 유유悠悠하여 병病을 이미 덜었도다.
한 길이 구름 뚫는데 사람이 이르지 못하나니,
천 바위와 만 골짜기 내 집을 횟돌도다.
一性은 如來體로 自同하니,
同中에 無路하니 任西東이니라.
井底蝦蟇는 吹鼓角거늘,
門前露柱는 笑燈籠한다.
일성一性은 여래체如來體와 스스로 한가지니,
한가지인 중中에 길이 없으니 서西와 동東을 무던히 여길지니라.
우물 밑의 머고리(개구리)는 고각鼓角(군대 나발)을 불거늘,
문門 앞에 나툰 기둥은 등롱燈籠을 웃는다.
心是根이니,
暗聳斜蟠하야 已露痕하도다.
直下可憐이어늘 人不見하야,
空將枝葉하야 付兒孫한다.
마음이 이 뿌리니,
그윽이 솟아나며[竪] 비스듬히 서리어[橫] 이미 자취를 나투도다.
바로 가히 사랑할 것이어늘 사람이 보지 못하여,
속절없이 지엽枝葉을 가져서 아손兒孫에게 분부分付하도다(맡기도다).
法是塵이니,
一點이나 纔生하면 即喪眞하리라.
勿謂名中에 無實義하라.
紛紛全露本來身이니라.
법法이 이 티끌이니,
한 점點이나 갓(겨우) 나면 곧 진眞을 잃으리라.
명중名中(이름 가운데)에 실實한 뜻 없다 이르지 말라.
어지러이 본래本來의 몸이 온전히 나타나니라.
兩種이 猶如鏡上痕하니,
障覆靈明하는 것이 類心垢하도다.
山河大地가 勿絲毫커니,
誰掛高臺코 辨妍醜리오.
두 가지가 거울 위의 허물과 같으니,
영명靈明(거울의 밝음)을 가리워 덮는 것이 마음에 때와 같도다.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실 터럭도 없거니,
뉘라서 높은 대臺에 걸어놓고 이쁘며 추함을 가리리오?
痕垢를 盡除하면 光始現하나니,
孤明이 獨露하니 大千이 寒하도다.
無塵을 未許傳衣鉢이온,
弄影은 須知不易觀호리라.
허물과 때를 다 덜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나니,
외로운 밝음이 홀로 나투니 대천大千이 서늘하도다.
티끌 없다 한 이를 의발衣鉢 전傳함을 허락지 못할 것이어늘,
그림자놀이 일진댄 쉽게 보지 못함을 모름지기 알리라.
* ‘티끌 없다 한 이’라 함은 혜능惠能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라고 하신 일이요, ‘그림자놀이 일진댄’이라 함은 연야달다演若達多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머리가 없다고 도망간 일이라.
心法을 雙忘하면 性即眞이니,
眞性은 非無이며 亦非有이니라.
少林에 幾度를 暗思量고,
維摩도 未敢輕開口하시니라.
심心과 법法 둘을 잊으면 성性이 곧 진眞이니,
진성眞性은 무無 아니며 또한 유有 아니니라.
소림少林에 몇 번을 그윽이 사량思量하셨느뇨?
유마維摩도 가벼이 입 열지 아니하시니라.
嗟末法에 背眞風하나니,
觸物昏迷혼 것이 若騃童하도다.
空立三車火宅外하니,
何時에 同到四衢中이리오.
슬프다! 말법末法에 진풍眞風(진실한 가풍)을 져버리나니,
물物에 닿음에 혼미昏迷하여 모르는 것이 어린아이 같도다.
삼거三車를 화택火宅 밖에 부질없이 세워두니,
어느 때 네 길 가운데에 한가지로 이르리오?
* 삼거화택三車火宅: ‘화택火宅의 삼거三車’는 곧 불타는 집에서 어린 아들을 구救하기 위爲하여 세 수레를 공교하게 만드시어 작은 지혜智慧로 제도 濟度하기 위하여 權敎로 삼승三乘을 이르심이요, 네 거리의 골고루 준 큰 ‘백우거白牛車’는 곧 이 실교實敎인 대승大乘이라.
惡時世가 近三灾하니,
煩惱衆生이 喚不迴한다.
刀兵飢饉千般苦가,
盡是人心의 造出來니라.
모진 시세時世가 삼재三灾에 가까우니,
번뇌중생煩惱衆生이 불러도 돌아보지 아니하도다.
도병刀兵과 기근飢饉과 천 가지 고苦가,
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지어서 나오니라.
* ‘큰 삼재三灾’는 물과 불과 바람이오, ‘적은 삼재三灾’는 도병刀兵과 기근飢饉과 병病이니, ‘기飢’는 곡식이 없는 것이요 ‘근饉’은 나물이 없는 것이라.
衆生이 薄福하야 難調制니,
險詖奔騰이 若踔猿하도다.
岸樹가 欲崩이며 魚小水어늘,
悲哉不悟昔人言하논저.
중생衆生이 복福이 엷어 길들임이 어려우니,
음험하여 바르지 못하며 돌아다님이 뛰노는 원숭이 같도다.
언덕의 큰 나무가 무너지려 함이며 적은 물의 물고기이거늘,
슬프다! 옛 사람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여.
去聖이 遠兮邪見深하니,
我慢이 纏緜하야 昧眞佛한다.
導師가 悲濟는 幾辛勤고 마는,
愛河에 暫出하야 還沈沒한다.
성聖의 가신지가 멀어 사견邪見이 깊으니,
아만我慢이 얽혀 진불眞佛을(참 부처를) 혼미昏迷)하도다.
도사導師가 자비慈悲로 제도하심은 얼마나 괴로우며 부지런하셨느뇨 마는,
애하愛河(애착의 강)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도로 잠기도다.
魔強法弱하야 多怨害하니,
善惡이 雖殊하나 佛性은 同하니라.
好向此時하야 明自己어다.
百年光影이 轉頭에 空하나니라.
마魔는 강强하고 법法은 약弱하야 원수怨讐로 해害함이 많으니,
선善과 악惡이 비록 다르나 불성佛性은 한가지니라.
이 때를 좋게 향向하야 내 몸을 밝힐지어다.
백년百年의 광영光影이 머리 돌이킴에 비어지나니라.
聞說如來頓教門하옵고,
半笑半瞋하야 情不悅한다.
一朝에 歸去하야 見慈親하면,
方知自昔으로 同家業하리라.
여래如來의 돈교문頓敎門을 이르심을 듣고,
반半만 웃고 반半만 성내어 뜻에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루아침에 돌아가 자친慈親을(어머니를) 보면,
예부터 가업家業이 한가지인 것을 비로소 알리라.
여래如來의 돈교문頓敎門을 이르심을 듣고, 반半만 웃고 반半만 성내어 뜻에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루아침에 돌아가 자친慈親(자신의 어머니)을 보면 옛부터 가업家業이 한가지인(같음인) 것을 비로소 알리라.
恨不滅除호되 令瓦碎하나니,
眞空은 無相커늘 謾參辰이니라.
蚍蜉는 可笑이라 不量力하고,
欲鼓微風하야 撼大樁한다.
멸滅하여 덜되 기와 부서지듯이 못함을 한恨하나니,
진공眞空은 얼굴(형상) 없거늘 속절없이 삼진參辰이니라.
비부蚍蜉(왕개미)는 웃음직함이라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조그만 바람을 일으켜 대춘大椿을 뮈우고져(흔들고져, 움직이고져)하도다.
* ‘비부蚍蜉’는 큰 개미라.
* 삼진參辰: 삼성參星과 진성辰星의 합칭인데, 삼성參星[虎星]은 서쪽에 있고 진성辰星[龍星]은 동쪽에 있으며 이 별이 나오면 저 별이 져서 동시同時에 볼 수가 없다. 진성은 상성商星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도道를 추구하는 것과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것은 삼성參星과 진성辰星처럼 병립竝立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 대춘大椿: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큰 나무 이름이니,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하여 3만 2천 년이 인간人間의 1년에 해당한다. 뜻이 바뀌어 사람의 장수長壽를 축하祝賀하는 데에 이르는 말이 되었다.
作在心이라 何大錯하니,
如將金彈하야 逐飛雀하도다.
無明郎主가 恣貪瞋하야,
用盡家財호되 渾不覺한다.
지음[作]이 마음에 있는지라 자못 크게 착錯하니(그르치니),
금탄자金彈子를(탄환을) 가지고서 나는 새를 쫓음과 같도다.
무명랑주無明郞主가 탐진貪瞋(탐심 진심)을 마음대로하여,
가재家財를(집안 재산을) 다 쓰되 문득 알지 못한다.
殃在身이라 難脫離니,
到此하야 徒分愚與智니라.
痛楚酸寒이 百萬般이니,
父子가 雖親하나 不容替니라.
앙화殃禍가 몸에 있을지라 벗어나 여읨이 어려우니,
이에 이르러서 헛되이 우愚(어리석음)와 지智(지혜)를 나누니라.
몹시 아프고 시고 서늘함(어렵고 가난함)이 백만百萬 가지이니,
부자父子가 비록 친親하나 바꾸어 대신하여 받지 아니 하나니라.
不須怨訴更尤人이어다,
自智不明하야 乃昏塞이니라.
菩提煩惱가 舊無根이라.
只在回心一頃刻하니라.
원망하여 헐뜯으며 또 사람(남) 탓함을 모름지기 말지어다.
제 지혜가 밝지 못하여 어두워 막히느니라.
보리菩提와 번뇌煩惱가 옛부터 뿌리가 없어,
오직 마음 돌이킴이 한 경각頃刻(눈 깜박할 사이)에 있나니라.
欲得不招無閒業인댄,
若論無閒컨댄 酷難當이로다.
不唯謗法하니 獨沈此이라.
六賊이 危人하나니 更可防이니라
무간無閒의(사이없는) 업業을 부르지 않음을 얻고자 할진댄,
만약 무간無閒을 논論컨댄 혹독하여 당當하기가 어렵도다.
법法을 비방誹謗한 이가 혼자 이에 빠질 따름이 아니라,
여섯 도적이 사람을 위태롭게 하나니 다시 막을지니라.
莫謗如來正法輪이어다,
匱法因緣은 苦難究이니라.
縱經空劫하야 寄他方하야도,
此界成時에 復來受하나니라.
여래如來의 정법륜正法輪을 비방誹謗치 말지어다.
법法을 허는(없애는) 인연因緣은 괴로워서 궁구窮究하기 어려우니라.
비록 공겁空劫을 지내어 타방他方에 의지하여도,
이 계界가 이뤄진 때에 다시 와서 받느니라.
栴檀林은,
極目蕭蕭하야 一徑이 深ᄒᆞ도다.
遊子는 幾聞香撲鼻오마는,
等閑히 失却本來心이로다.
전단旃檀 수풀은,
눈 닿는 끝까지 소소簫簫하여 한 길이 깊도다.
노니는 아들은 몇 번이나 향香이 코에 부는 것을 맡았느냐마는,
넌지시 본래本來의 마음을 잃어버리도다.
無雜樹하니,
葉葉枝枝가 同雨露이니라.
執熱行人이 喚不歸하나니,
四時에 空把青陰布이로다.
잡스런 나무가 없으니,
잎마다 가지마다 비와 이슬이 한가지니라(같느니라).
더위를 잡아서 가는 사람이 불러도 돌아가지 아니하나니,
사시四時에 속절없이 푸른 그늘을 잡아 펼침이로다.
鬱密森沈한 데에 師子가 住하니,
舉目에 長騰百丈威한다.
遺迹을 不交林外見이어니,
更容何物이 此中歸리오.
울밀鬱密(무성)하고 삼침森沈한(깊은) 데에 사자師子가 주住하니(머무니),
눈 듦에 백장百丈 두려움(위엄)을 길이 일으킨다.
남긴 자최를 수풀 밖으로 서로 보이지 아니하거니,
또 어느 것이 이 가운데 돌아감을 용납容納하리오?
* ‘울밀鬱密’은 잡풀이 무성한 모양이요, ‘삼침森沈’은 깊은 모양이라. 이는 법성法性의 경계이니,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주住한 곳이라.
境靜林閒에 獨自遊하나니,
不住不行하며 亦不倚하도다.
[毛+瑟][毛+瑟]金毛才拂時에,
無限清風이 隨步起하나니라.
경계가 고요한 수풀 사이에 홀로 제 노니나니,
주住치(머물지) 아니하며 행行치(가지) 아니하며 또 기대지 아니하도다.
* [毛+瑟][毛+瑟]한 금金 털이 겨우 떨 시절時節에, 그지없는 청풍淸風이 걸음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走獸飛禽이 皆遠去하나니,
四顧寥寥하야 一境이 空하도다.
豈是從來無侶伴이리오.
爲他毛色이 不相同일새니라.
다니는 짐승과 나는 새가 다 멀리 가나니,
사방四方을 돌아보되 요요寥寥하여 일경一境이(한 경계가) 비도다[空].
어찌 이것이 예로부터 옴에 벗이 없으리오?
저 털과 빛이 같지 아니한 까닭이니라.
師子兒가,
奮振全威하니 也太奇하도다.
入堀藏身해서는 獨得妙하니
從來不許象王知하나니라.
사자새끼가,
온전한 위엄를 일으켜 떨치니 크게 기특奇特하도다.
굴堀에 들어가 몸을 감추어서는 홀로 묘妙를 얻으니,
예로부터 옴에 상왕象王(코끼리 왕)의 앎을 허許락하지 아니 하나니라.
衆隨後하나니,
牙爪를 難藏이라 威已就하도다.
空山에 遊戲엔 有多端하나,
翻身一擲엔 無新舊이니라.
무리가 뒤를 좇나니,
어금니와 손톱 감춤이 어려워 위엄이 이미 이루어지도다.
빈산에 유희遊戱할 땐 끝이 많음이 있으나,
몸 뒤쳐(뒤집어) 한 번 던짐에 새것과 옛것이 없느니라.
三歲에 便能大哮吼하나니,
種性이 無差하야 勢力全하도다.
坐斷東西하야 無過路하니,
巍巍長在碧巖前하나니라.
세 살에 곧 능能히 크게 우나니,
종성種性이 다름이 없어 세력勢力이 온전하도다.
동서東西를 끊어 앉아 지날 길이 없으니,
외외巍巍하여(높고 커서) 푸른 바위 앞에 사뭇 있나니라.
若是野干이 逐法王인댄,
林下山邊에 謾來去이니라.
狐假虎威는 徒自欺니,
纔逢本色하얀 還驚懼하나니라.
만약 이 야간野干이(여우가) 법왕法王을 쫓을진댄,
수풀 아래 산 가장자리에 속절없이 오며 가니라.
여시(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림은 헛되이 제 기롱欺弄함(속임)이니,
겨우 본색本色을 만나서는 도리어 놀라 두려워 하나니라.
百年을 妖怪히 虗開口하나니,
滅智灰身이 若暫閑하도다.
爭似毗藍園樹下에,
纔生四顧絕追攀이리오.
백년百年을 요괴妖怪히 속절없이 입을 여나니,
지智를 멸滅하며 몸을 사름[灰身]이 잠깐의 한가함 같도다.
비람원毗藍園 큰 나무 아래에 갓 나시어 사방四方을 돌아보심에,
쫓아 부여잡음(攀緣) 끊음과 어찌 같으리오?
圓頓教는,
金龍이 出海하니 休籠罩이어다.
霹靂이 纔轟에 雨似傾하나니,
無限人天이 夢中覺하도다.
원돈교圓頓敎는,
금룡金龍이 바다에서 나니(나오니) 농籠을 끼지(덮지) 말지어다.
벽력霹靂이 잠깐 굉轟함에(울림에) 비가 기울인 듯 하나니,
그지없는 인천人天이 꿈이 깨도다.
* ‘비 기울인 듯하다’ 함은, 자비慈悲의 구름을 펴서 감로甘露를 뿌리시는 것이라. ‘인천人天이 꿈 깨다’ 함은 생사生死의 큰 꿈을 영永히 깬 것이라.
勿人情하니,
若著人情하면 道不成하리라.
南陽國老는 區區가 甚하여,
秖蹋毗盧頂上行이라 하니라.
인정人情이 없으니,
만약 인정人情에 붙으면(집착하면) 도道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남양국로南陽國老(남양혜충국사)는 구구區區함이 심甚하여,
‘오직 비로정상毗盧頂上을 밟아 다닌다’ 하니라.
* 당唐 숙종황제肅宗皇帝가 충국사忠國師께 묻자오되 “어느 것이 이 십신조어十身調御이닛고(십신十身을 조복調服하고 제어制御하는 것입니까?)” 사師가 이르시되, “단월檀越이 비로정상毗盧頂上을 밟아 다니시나이다.” 하시니, 이 말이 인정人情에 붙어 이르신 듯 할새, ‘구구區區가 심甚하다’ 이르시니라.
有疑不決이어든 直須爭이어다,
眞是眞非는 離煩惱하니라.
終朝古路에 喚人行커늘,
爭柰迷徒가 戀荒草한다.
의심疑心이 있어 결決하지 못하거든 바로 모름지기 다툴지니라.
진실眞實의 옳음과 진실眞實의 그름은 번뇌煩惱를 여의니라.
아침이 마치도록 옛 길에 사람을 불러서 (이 길을)가라 하거늘,
그렇건마는 모르는 무리는 황초荒草를(거친 풀을) 사랑한다.
不是山僧이 逞人我이라,
爲法忘軀가 正此時니라.
不向邪兵揮智刃하면,
髻珠가 無纇를 有誰知리오.
이 산승山僧이 인아人我를 가장하는[逞, 극진極盡히 하는] 것이 아님이라.
법法을 위爲하여 몸 잊음이 정正히 이 때이니라.
사병邪兵을(삿된 병사를) 향向하여 지인智刃(지혜의 칼날)을 휘두르지 아니하면, 계주髻珠가 허물없음을 누가 알리오?
修行하리 恐落斷常坑이니,
若落此坑하면 難出離니라.
今朝打鼓는 爲三軍이니,
動著干戈ᄒᆞ면 還不是리라.
수행修行하는 이가 단상斷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두려우니,
만약 이 구덩이에 떨어지면 여의어 벗어남이 어려우니라.
오늘 아침에 북 침은 삼군三軍을 위爲함이니,
간과干戈(창과 방폐)를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아니하니라.
非不非니,
看取靈苗가 未發時하라.
大鵬이 舉翼에 摩霄漢이어니,
肯學寒蟬의 戀死枝리오.
그름이 그름 아니니,
령靈한 움(새싹)이 나지 아니한 때를 보아 취取하라.
대붕大鵬이 낼개를 듦에 하늘을 갈거니,
어찌 찬 매미의 죽은 가지 사랑함을 배우리오?
是不是니,
西家를 置得東家地하도다.
中心樹子가 若屬君이어든,
不用波波尋四至니라.
옳음이 옳음 아니니,
서西녘 집을 동東녘 집 땅에 두도다.
가운데 수자樹子가(나무가, 숲이) 만약 그대에게 속屬하거든,
부지런히 사지四至(是非) 찾음을 말지니라.
*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이룰 때에 사지四至 주변은 수달須達(수달장자)에게 속屬하고 정중正中의 큰 나무 수풀은 태자太子에게 속屬하니 ‘중심수자中心樹子(가운데 나무)’라 하는 말이 이로부터 나니라.
差之毫釐하면 失千里하리니,
非是相交하야 昧己靈하도다.
石火가 一揮에 天外去커늘,
癡人은 猶望月邊星한다.
호리毫釐(털끝)만 어기면 잃음이 천리千里이리니,
비非(그름)와 시是(옳음)가 서로 섞여 기령己靈(자기의 신령함)을 혼미하도다. 돌엣 불이 한 번 휘두름에 하늘 밖에 지나가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 달 가의 별을 바라본다.
是即龍女가 頓成佛이니,
修行을 不待歷三祇니라.
今人은 可嘆이라 多迷妄하야,
日到南方호되 自不知한다.
옳음은 곧 용녀龍女가 문득 부처됨이,
행行 닦음을 삼아승기三阿僧祇가 지남을 기다리지 아니하니라.
이젯 사람은 슬프다, 어둑하여 모르고 거칠어 날마다 남방南方에 이르르되 제 알지 못한다.
非即善星이 生陷墜하니,
因果를 都忘하야 昧正知하도다.
輪王種族은 無高下커늘,
死生은 何事로 不同岐오.
그름[非]은 곧 선성善星 비구가 살아서 (지옥에)꺼지니,
인因과 과果를 다 잊어 정지正知를(바른 지견을) 혼미하도다.
전륜성왕의 친족은 높고 낮음이 없거늘,
죽살이(死生, 생사)는 무슨 일로 갈라져 한가지가 아닌고?
* 선성善星은 부처의 사촌四寸 아우라 한가지로 윤왕輪王의 종족種族이니라.
吾早年來에 積學問하야,
寸陰을 長恨急難留호라.
源源이 恰似寒溪水하니,
不到滄溟하얀 肯便休이리오.
내 일찍 년래年來에(여러 해 전부터) 학문學問 함을 쌓아,
촌음寸陰이 빨라 머무름이 어려움을 길이 한恨 하노라.
원원源源(근원이 깊어 끊임없음)이 마치 찬 냇물에 물과 같으니,
창명滄溟에 이르지 아니하여선 어찌 곧 말리오(쉬리오)?
亦曾討疏尋經論호니,
念世하야 期爲破暗燈호라.
憤悱하야 欲窮沙數義어니,
豈知無說이 是眞乘이리오.
또한 일찍이 소疏를 얻으며 경론經論을 찾으니,
세상을 생각하여 어두움 헐어버릴 등燈이 되길 기약期約하노라.
분하고 원통히 여겨 항하사수의 뜻을 다하고자 함이어니,
어찌 말 없음이 이 진승眞乘인 줄을 알리오?
分別名相하야 不知休호니,
猶如隔雲하야 望天日하도다.
相盡名忘을 直示君호리라.
新羅附子요 金州漆이니라.
명상名相을 분별分別하여 쉴 줄을 아지 못하니,
구름에 격隔하여(막히어) 하늘의 해를 보려함과 같도다.
상相이 다하고 이름 잊음을 그대에게 바로 보이리라.
신라新羅엔 부자附子[극약劇藥]요 금주金州엔 칠漆이니라.
入海算沙는 徒自困이니,
秖爲惺惺이라 轉不堪이니라.
唯有文殊만이 知此數하시어
前三三與後三三이라 하시니라.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헤아림은 한갓(헛되이) 제 피곤함이니,
오직 성성惺惺함이라 더욱 함 직하지 못하니라.
오직 문수文殊만이 이 수數를 아시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 하시니라.
* 무착無着이 청량산淸凉山에 가시어 문수文殊를 친親히 뵈시어 묻자오되, “대중이 얼마나 많나니잇고?”나니, 문수文殊가 대답對答하시되,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 하시니, 이 수數를 밝히면 허물 할 분分이 없느니라.
却被如來苦訶責호니,
馳求外物을 幾時停고.
衣珠가 無價하니 雖然在나,
爭柰昏昏醉未醒한다.
여래如來의 괴로이 꾸짖으심을 도리어 입으니,
외물外物(바깥 물건)에 나아가(치달려) 구求함을 어느 시절時節에 멈추랴? 의주衣珠(옷 속 보배)가 값없으니 비록 있으나 그렇건마는,
아득히 취醉하여 깨어나지 아니한다.
數他珍寶ᄒᆞᆫᄃᆞᆯ 有何益이리오,
自己家財란 却棄捐ᄒᆞ도다
兩手로 擎來ᄒᆞ야
如得用이면 不須辛苦走山川ᄒᆞ리라
남의 진보珍寶(무진보배)를 헤아린들 무슨 이익利益이 있으리오?
제 몸엣 가재家財(재산)일랑 도리어 버리도다.
두 손으로 잡아와 만약 씀을 얻으면[得用],
구태여 괴로이 산천山川에(산과 시내로) 다니지 아니하리라.
從前蹭蹬하야 覺虗行호니,
直到天南及天北하도다.
幾迴綠水青山邊에,
撞著祖師코 還不識하야뇨.
이전부터 층등蹭蹬하여(비틀거려) 속절없이(공연히) 다닌 것을 아노니,
바로 하늘의 남南녘과 또 북北녘에 다다르도다.
몇 번이나 녹수청산綠水靑山 갓에,
조사祖師를 들이받고도 도리어 알지 못하느뇨?
* 층등蹭蹬은 행行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
多年을 枉作風塵客호니,
去日衣衫이 半不存하도다.
咫尺故園에 歸未得하니,
慈親이 空倚日斜門하얏다.
여러 해를 굽혀 풍진객風塵客이 되오니,
가던 날에 의삼衣杉(삼베옷)이(헤져) 절반도 있지 아니하도다.
지척咫尺인 옛 정원에 돌아감을 얻지 못하니,
자친慈親이(어머니가) 해 비스듬히 넘어가는)문門에 속절없이 기대었도다.
種性이 邪하거늘,
更遇邪師하니 病轉加하도다.
開明할 若遇眞知識하면,
縱令枯木이라도 亦生花하리라.
종성種性이 삿되거늘,
또 삿된 스승을 만나니 병病이 더욱 더하도다.
열어서 밝힐 진실眞實의 선지식善知識을 만약 만나면,
비록 마른나무라도 또한 꽃 피게 하리라.
錯知解하니,
知爲障兮오 解爲礙니라.
了悟空花가 本不生하면,
繁然動作에 無憎愛하리라.
앎과 해解가 착錯하니(그릇되니),
앎이 막힘이 되고 해解가 가림이 되나니라.
공화空花가(허공의 꽃이) 본래本來 남[生]이 아닌 줄을 사무쳐 알면,
어지러이 동작動作함에 미워하며 사랑함이 없으리라.
不達如來의 圓頓制하고,
秖將空有하야 競頭爭한다.
葉公이 好畫도 還如此하야,
才見眞龍코 却自驚하니라.
여래如來의 원돈법제圓頓法制를 알지 못하고,
오직 공유空有를 가져서 머리 다투어 싸운다.
섭공葉公의 그림 즐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진실眞實의 용龍을 갓 보고는 도리어 제 놀라나니라.
* 섭공葉公이 용龍 그리기를 즐겨하다가 진용眞龍(진짜 용)을 갓 보고는 도리어 제 두려워하여 달아나니라. ‘진용眞龍(진짜의 용)’은 이 원돈교법圓頓敎法이요 ‘화룡畵龍(그림의 용)’은 이 공유空有의 두 견見이라.
二乘은 精進하나 勿道心하나니,
自證偏空하야 求出離한다.
三途諸子가 日焚燒커늘,
不肯迴心하야 用悲智한다.
이승二乘은 정진精進하나 도심道心을 (發하지)아니하나니,
편공偏空(치우친 공)을 제 증證하여 여의어 벗어남을 구求하도다.
삼도三途의 제자諸子가(모든 아들들) 날로 볶고 달여지거늘,
마음을 돌이켜 비지悲智(자비와 지혜) 씀을 즐기지 아니하도다.
外道는 聦明하나 無智慧하니,
取捨를 居懷커니 肯暫忘이리오.
楊朱가 只恨多歧路하고,
不知脚下가 是家鄉인 줄 하니라.
외도外道는 총명聰明하나 지혜智慧가 없으니,
취사取捨를(가지며 버림을) 마음에 두었거니 어찌 잠깐인들 잊으리오?
양주楊朱가 오직 갈림길 많음을 한恨(한탄)하고,
발아래가 이 가향家鄕(고향집)인 줄을 알지 못하니라.
亦愚癡하니,
起坐가 都如木偶兒하도다.
自有生涯가 傳祖父이어늘,
草鞋를 踏盡호되 不曾知한다.
또한 어리석고 미혹하니,
일어나며 앉음이 다 나무로 만든 아이 같도다.
제 두어있는 생애生涯가 조부祖父에게 전해 얻은[傳得] 것이어늘,
초혜草鞋(짚신)을 밟아 다하되 잠깐도 알지 못한다.
亦小騃하니,
觸目이 無常이어늘 任憎愛한다.
時將沙土하야 學圍城하노니,
嗟爾那知寰宇大리오.
또한 적고 어리석으니,
눈 닿은 데 항상함이 없거늘 미우며 사랑함을 임연任然히(되는대로) 한다. 때때로 모래를 가져서 성城 애워쌈을 배우나니,
슬프다! 네 환우寰宇(천하)가 큰 줄을 어찌 알리오?
* ‘성城을 애워쌈’은 [소아론小兒論]에 이르되, 공자孔子가 길을 가실 때에 아이가 모래로 성城을 만들거늘 공자孔子가 수레를 멈추고 물으시되, “어찌 수레를 피避하지 아니하느냐?” 아이가 대답對答하되, “성城이 수레를 피避함이 옳은가요, 수레가 성城을 피避함이 옳은가요?”하니, 공자孔子가 웃으시고 수레를 돌려서 가시니라.
空拳指上에 生實解하나니,
癡小狂迷함이 類暗夫하도다.
若了此心에 無所得하면,
春風秋月이 自蕭疎하리라.
빈주먹 손가락 위에 실實한 앎을 내나니,
어리며 적으며 미치고 미혹한 것이 어두운 사람과 같도다.
만약 이 마음에 득得한(얻은) 바 없음을 알면,
봄의 바람과 가을의 달이 제 소소簫疎하리라.
* ‘소소簫疎’는 조촐한(맑은) 것이라.
執指爲月하야 枉施功하나니,
不唯失月이라 還迷指니라.
忽然見月코 指還忘하면,
森羅萬象이 寒光裏리라.
손가락을 집착하여 달을 삼아 속절없이 공부功夫 드리나니,
달을 잃을 따름이 아니라 도리어 손가락도 모르나니라.
문득 달을 보고 손가락을 도로 잊으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찬 광명光明의 속이리라.
根境法中에 虗揑怪하니,
影事交羅하야 昧正修하도다.
可笑이라 幻師가 逢幻物하야,
自看코 疑怖를 不知休하나니라.
근根과 경境의 법중法中에서 속절없이 (눈을)비비어 괴이怪異하니,
그림자의 일이 섞여 벌려져 정正한 닦음을 혼미하도다.
웃을만하다! 환사幻師가 환물幻物을 만나,
스스로 보고 의심疑心하여 두려워함 쉴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 ‘근根과 경境’은 내육근內六根(안의 육근)과 외육진外六塵(밖의 육진)이니, 육신六識은 서로를 좇나니라.
不見一法이 即如來니,
春至커늘 群花가 冒雨開하도다.
是色是心을 人不會할새,
撞鐘擊鼓하야 上高臺호라.
한 법法도 보지 못함이 곧 여래如來이니,
봄이 이르거늘 모든 꽃이 비를(무릅쓰고) 맞아 피었도다.
이 색色과 이 마음을 사람이 알지 못할새,
종鐘을 치며 북을 쳐서 높은 대臺에 오르노라.
方得名爲觀自在니,
能觀이 如月하나 未忘明하도다.
欲知法法이 元覉絆인댄,
大地山河가 是眼睛이니라.
바야흐로 이름을 얻되 ‘관자재觀自在’이니,
능관能觀이(觀하는 자가) 달 같으나 밝음을 잊지 못하도다.
법법法法이 얽힌 데 없는 줄을 알고자 할진댄,
대지大地와 산하山河가 이 눈자위니라.
了即業障이 本來空이니,
法法이 無根커늘 妄分別한다.
心生이 即是法生時니,
心若無生하면 法自滅하리라.
알면 곧 업장業障이 본래本來 비니[空이니],
법법法法이 뿌리가 없거늘 망령되이 분별分別한다.
마음 남이 곧 이 법法 나는 때이니,
마음이 만약 나지 아니하면 법法이 제(스스로) 멸滅하리라.
*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
『所謂心性常無念故 名爲不變 以「不達一法界故 心不相應忽然念起」 名爲無明』: 이른바 심성心性은, 항상 무념無念인 까닭으로 이름하여 ‘불변不變’이라 하고, 「일법계一法界를 통달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心不相應]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한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未了인댄 還須償宿債하나니,
金鏘馬麥을 更何疑리오.
誰言祖佛이 無逃處오,
日捨全身호되 尚未知하시나니라.
알지 못할진댄 도리어 모름지기 옛 빚을 갚나니,
쇠 장鏘과 말의 밀을 또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조사祖師와 부처가 도망逃亡할 곳이 없다고 누가 이르느뇨?
날로 온 몸을 버리시되 오히려 알지 못하시나니라.
* ‘금장金鏘과 마맥馬麥’은 <인과경因果經>에 이르시되, 세존世尊이 인시因時에 치아를 찌르는 억센 밥으로 사람을 대접해드리니, 이 인연因緣으로 성도成道하신 후後에 이 두 난難(어려움)을 보시니라. ‘장鏘’은 창槍 같은 것이라.
飢逢王膳하야도 不能餐하나니,
高下心生하야 自離閒이니라.
呼來與食하야도 尚如斯커늘,
嗟哉라 餓死人何限이리오.
주린 사람이 임금의 차반(반찬)을 만나도 능能히 먹지 못하나니,
높고 낮은 마음이 나서 제(스스로) 사이가 벌어지니라.
불러서 오라하여 밥을 주어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슬프다! 굶주려 죽는 사람은 어찌 한정하리오?
病遇醫王한들 爭得瘥이리오,
頓除藥病하여도 未忘筌이니라.
何如塗毒一聲鼓에,
臥聽行聞이 盡悄然이리오
병病드니 의왕醫王을 만난들 어찌 좋아짐을 얻으리오?
약藥과 병病을 몰록 덜어도 전筌(통발)을 잊지는 못하니라.
독毒을 바른 한 소리의 북에,
누워서 들으며 다니며 들으니 다 극極에 달達한 초연悄然함과 어찌 같으리오?
* 병病 밖에 약藥 없으며 약藥 밖에 병病 없으니:
『文殊, 一日, 令善財採藥次云, “不是藥者, 採將來.” 善財云, “山中無不是藥者.” 文殊云, “是藥者, 採將來.” 善財, 於地上, 拾得一莖草, 度與文殊. 文殊接得, 示衆云, “此藥, 亦能殺人, 亦能活人.”』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하루는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약초를 캐어오라 하시며 이르시되, “약 아닌 풀이 있으면 캐오너라”고 하시니, 선재가 이르되, “산에
는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문수가 이르시되, “그럼 약 풀을 캐오너라.” 하시니, 선재가 땅에서 한 줄기 풀을 주워 문수께 바쳤다. 문수가 받아들고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되, “이 약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느니라.” 하였다. - 『화엄경행원품소초華嚴經行願品疏鈔』권3.
在欲行禪은 知見力이니,
居塵하니 終日自無塵하도다.
安心을 不必論華野이어다.
踏著眉毛하면 是處眞이리라.
욕欲에 있어 선禪을 행行함은 지견知見의 힘이니,
티끌에 있으나 날이 맟도록 제 티끌 없도다.
마음 편안함을 구태여 화華와(서울과) 야野를(시골을) 논論하지 말지어다.
눈썹 털을 밟으면 이곳이 진眞이리라.
火裏에 生蓮은 終不壞하나니,
花似須彌하고 葉似空하도다.
普散清香三界內하나니,
不憂容易落西風이어다.
불 속에 난 연蓮은 마침내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꽃이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잎이 허공虛空과 같도다.
맑은 향香을 삼계三界 안에 널리 흩나니,
서풍西風에 쉽게 떨어짐을 시름하지 말지어다.
勇施犯重코 悟無生하니,
善惡은 從來勿差互하니라.
五陰雲開하야 月滿天하니,
不須更問還家路이어다.
용시비구勇施比丘가 중죄重罪를 범犯하고 무생無生을 깨달으니,
선善과 악惡은 예로부터 옴에 서로 어기지 아니하니라.
오음五陰의 구름이 열려 달이 하늘에 가득하니,
구태여 집에 돌아갈 길을 다시 묻지 말지어다.
早時에 成佛하야 于今在하니,
相好端嚴이 百萬般이로다.
金口宣揚을 如不會어든,
七斤衫下에 試尋看하라.
일찍 부처 되어 지금에 있나니,
상호相好가 단엄端嚴하심이 백만百萬 가지로다.
금구金口로 펴심을 만약 알지 못하였거든,
칠근삼七斤杉(누비옷) 아래에 시험삼아 찾아보라.
師子吼에,
三十三人이 盡驚走한다.
畫瓶을 打破코 却歸來하니,
青山流水가 還依舊하도다.
사자師子의 울음에,
서른 세 사람[卅三祖師]이 다 놀라 달아난다.
그린 병病을 쳐서 때리고 돌아오니,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이 도리어 예와 같도다(依舊).
* ‘화병畵甁’은 <출요경出耀經>에 이르시되, 사내가 그림으로 장식한 병甁에 똥을 가득히 담아 마개를 굳게 닫아 계집에게 주고 이르되, “내 몸을 본 듯이 가지라.” 하였는데, 계집이 받아 상완賞翫하더니(귀중히 아끼고 즐기더니), 사내가 쳐서 깨뜨려 보여주고 이르되, “너는 내 몸을 보라.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니라.” 하니라.
無畏說은,
直與迷徒로 去釘楔이니라.
溪邊野老는 勿攢眉어다.
夏有炎暉코 冬有雪하니라.
두려움 없는 설함은,
바로 미혹한 무리로 더불어서 못과 쐐기를 뽑느니라.
냇가의 야로野老는 눈썹을 비비지 말지어다.
여름엔 더운 해 그림자가 있고 겨울엔 눈이 있나니라.
深嗟懵憧頑皮靼하노니,
故國이 非遙이어늘 不肯過한다.
還似浮萍의 根蔕斷하야
悠悠生死에 信風波한다.
몽동懵憧하며 완피달頑皮靼함을 깊이 슬퍼하노니,
옛 나라가 멀지 아니하거늘 즐겨 가지 아니하도다.
도리어 뜬 부평초의 뿌리 꼭지가 끊어짐과 같아서,
유유悠悠한 생사生死에서 바람과 물결을 좇도다.
* ‘몽동懵憧’은 슬기롭지 아니한 것이요, ‘완피달頑皮靼’은 쇠고기의 가장 두꺼운 가죽이니 이는 소승小乘이 근성根性이 둔鈍하여 대법大法을 듣고도 알지 못함을 비유하심이라.
只知犯重이 障菩提인 줄 하나니,
罪性이 如波하야 結氷起하니라.
癡人은 渴死하되 不低頭하나니,
豈識凝冰이 全是水리오.
오직 중죄重罪를 범犯함이 보리菩提 막음인 줄을 아나니,
죄성罪性은 물결이 얼음 얼어 일어남과 같으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목말라 죽되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나니,
어찌 엉긴 얼음이 온전히 이 물인 줄을 알리오?
不見如來開祕訣하나니,
祕訣은 何人이 敢舉揚이리오.
穿耳胡僧이 應大笑하되,
明明雪上에 更加霜이라 하리라.
여래如來가 비결祕訣 열어주심을 보지 못하나니,
비결祕訣은 어느 사람이 구태여 들어 펴리오?
귀 뚫은 되중[胡僧, 달마達磨]이 마땅히 크게 웃되,
‘밝고 밝은 눈 위에 또 서리를 더함이라’ 하리라.
有二比丘가 犯婬殺하고,
恥列金田上士名하니라.
惶怖하야 不知心所自하고
欲依淨戒하야 救餘生하니라.
두 비구比丘가 음淫과 살殺을 범犯하고,
금전金田에 상사上士의 이름에 벌려있음을 부끄러워하니라.
두려워하여 마음이 비롯된 곳을 알지 못하여,
조촐한 계戒를 의지하여 여생餘生을 구救하고자 하니라.
* ‘금전金田’은 승가람僧伽籃을 모아 이름이니, 수달장자須達長者가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정원을 사서 정사精舍를 짓되 그 땅에 금金을 가득하게 깔아 재 쌓아서 주고 사실새[買] 저[彼, 그곳]를 금전金田이라 하나니라.
波離가 螢光으로 增罪結호되,
較量輕重하야 柝毫釐하니라.
可憐[憨+鳥][憨+鳥]이 心雖急하나,
脚下魚行커늘 柰不知한다.
파리波離(우바리존자)가 반딧불의 광명光明으로 죄罪를 더 맺게 하되,
가벼우며 무거움을 자세히 살펴 헤아려서 호리毫釐(털끝)를 분석分析하니라. 어엿브다(가엽도다)! 감감[憨+鳥][憨+鳥]이 마음이 비록 빠르나,
발아래에 고기 다니거늘 알지 못하도다.
* ‘파리波離’는 계율 가짐이 제일인 우바리존자優波離尊者이라. 두 비구比丘가 산중山中에 암자菴子를 짓고 수행修行하되 청정한 계戒를 굳게 지니더니, 한 비구比丘가 나가 다니거늘 한 비구比丘가 암자에서 선정禪定을 하다가 한 여인이 오거늘 청정한 계戒를 범犯하고서 안의 마음에 기쁘지 아니하여 한 곳에 있던 비구比丘가 돌아오거늘 계戒를 범犯한 일을 이르되 그 비구比丘가 노怒하여 쫓다가 그 여인이 깊은 수렁에 빠져 죽으니, 한 비구比丘는 무심無心으로 음행을 범犯하고 한 비구比丘는 무심無心으로 살생을 범犯하여 둘이 우바리존자優波離尊者께 가서 참회懺悔를 하여 뵈옵거늘, 존자尊者가 소승小乘으로 죄罪를 맺으시는되 두 비구比丘가 의심疑心을 결정하지 못하여 유마거사維摩居士께 가서 참회懺悔하고 저들의 하였던 일을 사뢰었는데, 유마維摩가 꾸짖어 이르시되, “우바리優波離가 근기根機를 잘 보지 못하였도다. 이 두 비구比丘가 대승大乘을 오래 닦으니 어찌 바다를 소의 발자국에 들어가게 하리오?” 하실새 이르시되, “우바리가 반딧불의 광명光明으로 죄罪를 더 맺는다” 하시니라. 대사大士가 이르시되, “죄성罪性이 안에 있지 아니하며 밖에 있지 아니하며 중간中閒에 있지 아니하여, 전제前際에 가지 아니하며 후제後際에 오지 아니하며 중제中際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삼제三際에 구求하여도 조금도 얻지 못하리라.” 하시거늘 두 비구比丘가 홀연忽然히 대오大悟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니라. ‘감감(憨+鳥)(憨+鳥)’은 고기를 잡아 먹는 새라.
維摩大士가 頓除疑하시니,
三處無心을 略輕據하시다.
番人이 捉得麒麟兒하야,
放入祇園하니 無覓處하도다.
유마거사維摩大士가 몰록 의심疑心을 덜어내시니,
세 곳에 마음 없음을 잠깐 가벼이 의거하시다.
번인番人[智]이 기린아麒麟兒[理]를 잡아 얻어서,
기원祇園에 놓아 들이니 얻을(찾을) 곳이 없도다.
* ‘기원祇園’은 기타태자祇陀太子가 받들어 바친 정원[園]일새 이로 인因하여 이름하니라.
猶如赫日이 消霜雪하니,
雪霜이 消盡커늘 見青春이로다.
誰向靈雲의 開眼處하야,
認得桃花舊主人하리오.
빛난 해가 서리와 눈을 녹임과 같으니,
눈과 서리가 다 녹거늘 푸른 봄을 보도다.
뉘(누가) 영운靈雲의 눈을 연 곳을 향向하여,
도화桃花(복사꽃)의 옛 주인主人을 알리오?
* 영운화상靈雲和尙이 도화桃花를 보시고 도道를 깨달아 송頌으로 읊으시되, ‘서른 해를 지나옴에 칼 찾는 객客이더니, 몇 번이나 잎 지며 또 가지 돋았던가? 한 번 도화桃花를 본 후後로부터 바로 지금에 이르렀으되, 다시 의심疑心치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不思議어늘 謾度量하나니,
善惡이 無從하야 性本常하니라.
香嚴童子는 虗開口하도다.
舉足에 何曾識道場이리오.
사의思議 못할것이어늘 속절없이 탁량度量하나니(헤아리나니),
선善과 악惡이 좇아 온 바 없어 성性이 본래本來로 떳떳[常]하니라.
향엄동자香嚴童子는 속절없이 입을 열도다.
발을 듦에 어찌 도량道場임을 알리오?
解脫力은 若高風하니,
無影無形호되 觸處通하니라.
萬里浮雲이 消散盡커늘,
一輪明月이 在寒空하도다.
해탈解脫의 힘은 높은 바람과 같으니,
그림자 없으며 형상 없으되 닿은 곳에 통通하니라.
만리萬里에 뜬 구름이 스러져 흩어 없거늘,
일륜一輪(한 바퀴) 밝은 달이 찬 허공虛空에 있도다.
妙用이 恒沙라 也無極하니,
昔有深緣하야 得暫逢하도다.
翻想未淘眞化日한댄,
幾迴流浪호되 若飄蓬하야니오.
묘용妙用이 항사恒沙라 극極(다함)이 없으니,
옛의 깊은 연緣이 있어 잠깐 마주봄을 얻도다.
(선지식의)진실한 교화에도 씻어내지 못한[未淘] 날을 돌이켜 헤아려보건댄,
몇 번을 흘러 다니되[流浪] 쑥이 불려 날아다님과 같았는고?
四事로 供養을 敢辭勞호리오,
譬如餧驢하며 及餧馬호리라.
槽頭에 拾得하야 鉢中에 盛하니,
四海何人이 敢酬價이리오.
네 가지 일로 공양供養함을 어찌 수고롭다 사양하리오?
비유컨댄 나귀를 먹이며 또 말을 먹임과 같이 하리라.
구유(모이 주는 그릇)에서 주워 바리(발우)에 담으니,
사해四海에 어느 사람이 빚을 갚으리오?
* ‘네 가지 일’은 옷과 음식飮食과 잠자리와 의약醫藥이라.
* ‘나귀 먹이며 말 먹임과 같이 하다’ 함은, 각별各別히 갚음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옛날에 양식을 탁발하던 스님이 속인의 집에 가시거늘 속인이 묻되, “무엇을 구求하는가?” 스님이 이르되, “가리지 아니함이 옳으니라.” 하거늘, 속인이 즉시에 말 구유(모이그릇)에 있는 풀을 바리에 담아 주니, 이를 인용하여 이르심이라.
萬兩黃金도 亦消得이니,
此心荷戴는 卒難論이로다.
直饒施寶가 如沙數하야도,
未及曹溪一點恩하니라.
만냥萬兩의 황금黃金도 또한 스러지리니,
이 마음을 메어서 임(짊어져 받듦)은 마침내 논論함이 어렵도다.
비록 보배를 포시布施함이 모래의 수數와 같아도,
조계曹溪의 한 점點 은혜恩惠에 미치지 못하니라.
粉骨碎身하야도 未足酬이니,
謾說乾坤과 及雨露이로다.
古今에 誰是報恩人고,
若有絲頭하면 即辜負하리라.
골骨을 부수며 몸을 부수어도 족足히 갚지 못하리니,
하늘과 땅과 비와 이슬을 속절없이 이르도다.
예와 이제에 뉘(누가) 이 은恩을(은혜를) 갚은 사람인고?
만약 실 끝만큼이라도 있으면 곧 저버리리라(기대를 저버리리라).
* ‘비와 이슬의 은恩’은 색신色身을 길러낼[牧] 따름이어니와, ‘일구一句의 은恩’은 법신法身을 길러냄이라.
一句에 了然超百億이니,
若論一句인댄 我無能호라.
如斯舉唱하야 明宗旨인댄,
笑殺西來碧眼僧하리라.
한 구句에 요연了然히 백억百億을 건너뛰니,
일구一句를 논論할진댄 내 능能치 못하노라.
이같이 들어 일러 종지宗旨를 밝힐진댄,
서西에서 온 눈 푸른 중을 웃기리라.
法中王은 只者가 是니,
十體三身이 不相似하니라.
自有靈光이 照古今이어니,
何必胷前에 題卍字이리오.
법중왕法中王은 이것이 이[是]니,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라.
제게 있는 영광靈光이 고금古今(예와 지금)에 비취거니,
어찌 구태여 가슴 앞에 만자卍字를 쓰리오?
* ‘십체十體’는 십신十身이니 십체十體를 이르면 ‘삼신三身’이 섭攝하여 드니라. ‘서로 같지 못하다’ 함은,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이 법중왕法中王과 서로 같지 못한 것이니, ‘십체十體와 삼신三身’은 이 오늘날 새로 이룬 부처요 ‘법중왕法中王’은 이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인 까닭이라.
最高勝하니 若爲宣이리오.
靈山小室이 盡虗傅이로다.
無言童子라야 能宣說하리니,
來來하야 棄你의 草鞋錢하라.
가장 높아 승勝(수승)하니 어찌 펴리오?
영산靈山(석가)과 소실小室(달마)이 다 속절없이 전傳하도다.
말씀 없는 동자童子라야 능能히 펴 이르리니,
오며 와서 네 초혜草鞋(짚신)의 전錢(값)을 버리라.
* 전錢은 돈이니 초혜草鞋를 사는 값이라.
恒沙如來가 同共證하시니,
更無別法이 可傳持로다.
海天에 明月初生處이여,
巖樹啼猿의 正歇時로다.
항사恒沙의 여래如來가 한가지로 다 증證(증득)하시니,
또 각별各別한 법法이 가히 전지傳持함(전하여 가짐) 없도다.
바다의 하늘에 밝은 달이 처음 난 곳이여.
바위의 나무에 우는 납이(원숭이가) 정正히 헐歇할(쉴) 때로다.
我今에 解此如意珠하니,
瑩徹光明이 無背面하도다.
如今에 拋在衆人前하니,
擬議思量인댄 還不見하리라.
내 이제 이 여의주如意珠를 아니,
사무친 광명光明이 앞뒤가 없도다.
이제 모든 사람의 앞에 던져져 있나니,
여겨서 의론議論하며 사량思量할진댄 도리어 보지 못하리라.
* 覓即知君不可見.
信受之者에 皆相應호리라.
笑入千峯하야 不轉頭하도다.
飯後山茶三兩盞에
塵沙佛祖가 盡悠悠하도다.
신信하여(믿어서) 받아들일 사람에게 다 서로 응應하리라.
웃고 천봉千峯에 들어서 머리 돌이키지 아니하도다.
밥 먹은 후後의 산 차[茶] 두서너 잔盞에,
진사塵沙(티끌 모래) 같은 불조佛祖가 다 유유悠悠하도다.
了了見ᄋᆞᆯ 更何言이리오.
萬物이 惟新하니 又一年이로다.
去去未歸하는 何處客고,
竹房이 深鎖斷雲邊하도다.
말갓말갓이(환하게) 봄을 다시 어찌 이르리오?
만물萬物이 오직 새로우니 또 한 해로다.
가며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느 곳의 객客인고?
죽방竹房이 그친 구름 갓에 깊이 걸려(잠겨져) 있도다.
無一物하야 空寥寥하니,
豈是曾經劫火燒이리오.
越王은 任有傾吳策이로다.
范蠡孤舟를 不易招이니라.
한 것[一物]도 없어 비어서 요요寥寥하니,
어찌 이 겁화劫火의 불사름을 일찍이 지내리오?
월왕越王은 오吳나라 기울일 모책謀策 두심을 무던히 여길지로다.
범려范蠡의 외로운 배를 쉽게 부르지는 못하니라.
亦無人하니,
唯有虗空이 是舊隣이로다.
幻滅幻生이 皆不有이어니,
更從何處하야 覓疎親이리오.
또한 사람 없으니,
오직 허공虛空이 이 옛 이웃이로다.
곡도(幻, 환)가 멸滅하며 곡도(환)가 나는 것이 다 있음이 아니어니,
다시 어느 곳을 좇아 소친疎親을 얻으리오?
亦無佛하니,
昔人이 空下驪龍窟하도다.
相好를 徒言百劫修이로다.
紅鑪焰裏엔 難停物이니라.
또한 부처 없으니,
옛 사람이 여룡驪龍[無明] 굴窟[生死]에 속절없이 내려오도다.
상호相好를 백겁百劫을 닦아 헛되이 이르도다.
벌건 화로[無生]의 불꽃 속엔 물物의 머무름이 어려우니라.
* ‘여룡驪龍’은 검은 말 용龍이라.
大千沙界가 海中漚이니,
起滅이 無從콘 誰是主오.
雪峯이 曾與衆人看하시니,
萬里無雲커늘 日卓午이로다.
대천사계大千沙界가 바닷 가운데 거품이니,
일어나며 멸滅함이 좇은 데 없거늘 뉘(누가) 이 주主인고?
설봉雪峯이 일찍이 모든 사람으로 보게 하시니,
만리萬里에 구름 없거늘 해가 낮[正午, 정오]이로다.
一切賢聖이 如電拂하니,
亦無形狀하며 亦無名하도다.
天空白月人歸後에,
幾握吹毛하야 斷不平커뇨.
일체一切의 성현聖賢이 번게 떨침과 같으니,
또한 형상形狀 없으며 또 이름 없도다.
하늘 비고 흰 달에 사람 돌아간 후後에,
얼마나 취모吹毛를 잡아 불평不平(평등치 못함)을 끊었느뇨?
* ‘취모吹毛[鏌鎁]’는 칼의 이름이니, 칼날에 터럭을 불어도 끊어질새 취모吹毛이라.
假使鐵輪을 頂上旋하여도,
任運隨緣하야 無所作하도다.
火蕩風搖하야 萬物이 空하나,
未見青天이 解摧落이로다.
비록 철륜鐵輪을 정수리 위에 둘려도,
임운任運하여(움직임에 맡겨) 연緣을 좇아 짓는 바 없도다.
불붙으며 바람 흔들어 만물萬物이 비나(공空하나),
푸른 하늘이 능能히 꺾여 떨어짐을 보지 못할 것이로다.
定慧圓明하야 終不失하나니,
能敵塵勞하야 體自常하도다.
今古에 更無增減處하니,
昔人이 聊把하야 喻金剛하시니라.
정定과 혜慧가 두렷이 밝아 마침내 잃지 아니하나니,
진로塵勞를 능能히 이겨 체體가 제 떳떳하도다.
이제와 옛에 또 더하며 덜한 곳이 없으니,
옛 사람이 잡아서 금강金剛에 견주시니라(비유하시니라).
日可冷이어니와,
眞金은 豈解重爲鑛이리오.
魔工이 煽韛를 不能施하야,
萬古에 徒勞心耿耿하니라.
해는 가히 차게 할지어니와,
진금眞金은 어찌 능能히 다시 광鑛(광석)이 되리오?
마공魔工이(마군魔軍의 솜씨가) 풀무를 능能히 펴지 못하여,
만고萬古에 한갓 수고로이 마음이 말갛말갛하니라(말고 환하니라).
* 광鑛은 금金과 돌이 섞인 것이라.
月可熱이어니와,
此體는 如空하야 非斷滅이니라.
人閒妄見은 有虧盈이언정,
天外孤光은 無閒歇하니라.
달은 가히 덥게 할지어니와,
이 체體는 허공虛空 같아서 끊어 멸滅함이 아니니라.
인간人閒의 망견妄見은 이지러지며 참이 있을 뿐이언정,
하늘 밖의 외로운 광명光明은 헐歇할(쉴, 그칠) 사이가 없느니라.
衆魔가 不能壞眞說이니,
眞說진 長如栢在庭하니라.
幾見雪霜의 凋萬木고마는,
盤空聳檻ᄒᆞ야 更青青하도다.
중마衆魔(마군의 무리)가 가히 진설眞說(진실한 설법)을 헐지 못하나니,
진설眞說은 길이 ‘잣이 뜰에 있음’과 같으니라.
얼마나 눈과 서리의 만목萬木 떨어지게 함을 보았는가마는,
허공虛空에 서리며 헌함軒檻(마루)에 솟아나 다시 푸릇푸릇하도다.
象駕가 崢嶸하야 漫進途하나니,
眞體는 如空하야 無所礙하니라.
雲盡扶桑하야 日已生이어늘,
작화爝火가 부정不停하야 欲何待오.
상象(코끼리)의 수레가 일어나(높아) 가득히 길에 나아가나니,
진체眞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막힌 바 없느니라.
구름이 부상扶桑(해 돋는 동쪽의 땅)에서 다하여 해가 이미 돋아나거늘,
횃불이 머물지(그치지) 아니하여 무엇을 기다리느뇨?
誰見螗蜋의 能拒轍이리오,
須臾에 粉碎하나 意猶獰하도다.
嗟尒니 不及蟬依木하야,
飲露嘶風過一生하는구나.
뉘(누가) 사마귀[螗蜋, 魔外]의 능能히 수레 거스름을 보리오?
수유須臾(잠깐사이)에 부수어지나 뜻이 오히려 모질도다(사납도다).
슬프다! 너, 매미[蟬, 二乘] 나무에 붙어서(의지하여),
이슬 마시며 바람에 울어 일생一生을 지냄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大象은 不遊於兔徑하나니,
彈偏拆小가 豈徒然이리오.
無中有路에 如能入하면,
金鎖玄關을 盡棄捐하리라.
큰 상象(코끼리)은 토끼의 길에 노닐지 아니하나니,
편偏[치우침, 漸敎]을 그르다 하며 소승小乘을 꺾음이 어찌 속절없으리오?
없는 중中의 있는 길[無中有路]에 만약 능能히 들어가면,
쇠로 걸어 잠근 현관玄關(현묘한 관문)을 다 버리리라.
大悟는 不拘於小節이니,
相取心修하면 達者가 치嗤하리라.
舉止에 若無西子態면,
効顰取醜라 更堪悲하니라.
크게 깨달은 이는 소절小節(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나니,
상相을 취取하여 마음 닦으면 안(통달한) 사람이 웃으리라.
다니며 가만히 있음에 만약 서자西子(西施, 미인)의 태도 없으면,
‘찡그림을 본받아 추함을 취取함’이라 다시 슬퍼할만 하니라.
* ‘찡그림을 배우다’ 함은 <장자莊子>에 이르되, 서시西施가 마음에 병病이 있어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마을의 추한 여인이 그것을 보고서 아름답다 여겨 집으로 돌아가 또한 본받아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마을의 부유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서 문門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하며 가난한 사람만이 그것을 보고서 처자식을 함께 데리고 나가느니라. 만약 크게 깨닫지 못하여서 거칠게 막힘없는 무애행無礙行을 짓는다면, 어찌 추한 여인이 미인의 ‘얼굴 찡그림’만 배울 따름이리오? 더욱 슬퍼할만 하니라. 이는 큰 깨달음을 칭찬하고 미혹한 이를 경계警戒한 말이라.
莫將管見하야 謗蒼蒼이어다,
漏管이 雖窮하나 天豈小이리오.
心智가 開明하야 妄見이 空하면,
始知法界가 無邊表하리라.
대나무 구멍으로 봄을 가져서 창창蒼蒼(하늘)을 비방誹謗하지 말지어다.
뚫린 댓구멍은 비록 경계의 다함이 있으나 하늘이 어찌 그리 적으리오?
심지心智가 열려서 밝아 망견妄見이(망령된 견해가) 비면[空],
법계法界가 갓의 밖이 없는 줄을 비로소 알리라.
未了인댄 吾今에 爲君決호리라 하시니,
此意明明하나 不易傳이니라.
誰肯歸來古巖下오,
任他滄海變桑田하리라.
‘알지 못할진댄 내가 이제 그대를 위爲하여 결決하리라’ 하시니,
이 뜻이 명명明明하나(밝고 밝으나) 전傳함이 쉽지 아니하니라.
뉘(누가) 즐겨 옛 바위 아래에 돌아오리오?
저 창해滄海가 뽕나무밭이 됨을 무던히 여기리라.
《後序》
夫法은 不可見聞覺知로되 而見聞覺知가 亦不外於法이니, 迷之則凡이오 了之則聖故로 古之得道者가 非即非離하며 不縛不脫하야 應機顯用에 言或不能免호되 而其自在則雖終日言이나 而未甞言이니,
법法은 견문각지見聞覺知(보고 듣고 앎)가 아니로되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또한 법法 밖이 아니니, 모르면(미혹하면) 범凡이요 알면 성聖일새 옛에 도道를 득得한 사람이 즉即하지 아니하며 여의지[離] 아니하며 얽매이지 아니하며 벗어나지 아니하여, 기機를 응應하여 현顯히(드러내어) 씀에 이름을[言] 시혹 능能히 면免하지 못하되 그 자재自在함은 비록 날이 맟도록 이르나[言] 잠깐도(조금도) 이르는 것[言]이 아니니,
昔에 永嘉之見六祖에 振錫而立하시니 目擊而道存矣어늘, 小駐一宿하샤 因爲之證道歌하시니, 道本無證커늘 證之以歌하시니, 雖不免於有言이나 而卒無所累者也이시니라.
지난날에 영가永嘉가 육조六祖를 뵈옴에 막대를 흔들고 서서 눈 닿음(마주대함)에 도道가 있거늘, 조금 머물러 하룻밤 주무심을 인因하여 도道를 증證한 노래를 지으시니, 도道는 본래本來 증證이 없거늘 증證하고 노래하시니, 비록 말씀 있음을 면免하지는 못하시나 마침내 허물없으시니라.
則後世에 由其歌而悟入者가 不知其幾何也이며 又從而爲之註釋者가 亦不知其幾何也오. 然이나 眞得永嘉之趣者가 蓋難其人矣니라.
그러면 후세後世에 그 노래를 말미암아 깨달아 든 사람이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되며, 또 좇아서 주註하여 새긴 사람이 또한 알지 못하리로다 얼마나 되느뇨? 그러나 진실眞實로 영가永嘉의 뜻을 득得한(깨달은) 이는, 대개 그러한 사람 있기가 어려우니라.
泉公禪師가 穎出其類허사 千頃領徒之暇에 於其歌句句之閒에 分爲之頌하시니, 大抵한디 隨色而言空하시며 即定而言慧하시며 不見一相而充滿法界하며 不離一塵而圓具佛性하니, 其詞가 灑落하며 其旨宏遠하야 昭昭然發 永嘉之心於數百年曠絕之後하시니.
천공선사泉公禪師가 그 무리에 빼어나게 특출하시어 천경千頃의 도중徒衆(믿는 대중)을 거느리신 여가餘暇에 그 노래 구구句句(구절마다)의 사이에 나누어 송頌을 지으시니, 대저大抵한데(대체로 보아) 색色을 좇아 공空을 이르시며 정定을 즉即하여 혜慧를 이르시며 한 상相도 보지 못하되 법계法界에 가득하며 한 티끌도 여의지 아니하되 불성佛性이 원만圓滿히 갖추시니, 그 말씀이 쇄락洒落하며 그 뜻이 넓게 크고 멀어서 맑고 환하게 영가永嘉의 마음이 수백년數百年 멀리 끊어진 후後에 펼쳐지시니,
予가 竊幸叩師之緒餘하야 而因以開明故로 覽師之頌하옵고 慕其清風하야 而不能自已하야 命之鏤板하야 用廣其傳하노니, 庶使㝵者로 通하며 冥者로 明하야 而一超에 頓以悟케함이 乃師之賜也이니라.
내가 그으기(남몰래) 다행으로 여겨 사師의 실마리를 두드려서 인因하여 열어 밝힐새, 사師의 송頌을 뵈옵고 청풍淸風을 사모思慕하여 능能히 내 그만두지 못하여 명命하여 판板에 새겨서 써 그 전함을 넓히노니, 바라는 것은 막힌 사람으로 하여금 통通하게 하며 어두운 사람으로 하여금 밝혀서 한 번 건너뜀에 몰록 깨닫게 함이 사師의 주심(賜, 분부分付하심)이니라.
熙寧 九年 七月 十日 括蒼 祝況 後序
희령 구년 칠월 십일 괄창 축황 후서
영가대사 남명천선사 계송
永嘉大師 南明泉禪師 繼頌
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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