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1권
1. 취건도 ④
[문] 현재의 통증을 자신이 대신하지 못하나 과거와 미래의 통증은 또한 즐겁지 않고 또한 괴롭지 않다.
어떻게 내가 괴롭고 내가 즐거움을 알게 되는가?
[답] 거룩한 마하승기는 “저 통증은 자연히 자신이 대신하고 자연히 안다”고 말했다.
[문] 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어떤 물건이 자연으로 회전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어떤 끊어지는 물건이 능히 제가 저절로 끊어지지 않으며, 창이 스스로 찌르지 못하며, 손가락과 머리가 스스로 부딪치지 못함과 같이 이도 역시 그와 같은가?
[답] 담마굴(曇摩崛)존자는 “마음과 상응하는 지혜로 알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문] 만일 그렇다면 자연으로 자연을 아는 한 인연인 상응법(相應法)이겠는가?
[답] 미사색(彌沙塞)존자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지혜로 안다”고 말하였다.
[문] 만일 그렇다면 곧 두 가지 지혜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一部僧名]은 “사람이 물어볼 줄 알고 또한 지혜를 쓸 줄 안다.
설령 지혜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 그 다음에야 아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
[답] 어떤 이는 “제일의(第一義)에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있지 않다. 중생을 안다고 말한 것은 역시 사만(邪慢)으로서 괴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말한다”고 했다.
[문] 아라한으로서 혹은 알지 못하는 그것도 사만이 있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느낌은 뜻이 전환하는 중간이 되나니, 그 중간에 내가 스스로 인식을 내어 그 대상 중에서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만일 의식(意識)의 성질이라면 그것은 뜻의 대상이 아니며, 의식 그것과 의식으로 인식하는 대상 그것은 느낌 성질이 아닐 것이니, 어떻게 알게 되는가?
[답] 어떤 이는 “즐거움을 보거나 괴로움을 본 연후에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어리석은 사람도 지금에 또한 아는데, 다시 그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의한 연후에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만일 저 느낌에 의한 것이 이미 사라지면 어떻게 이는 낙에 의한 느낌이고 이는 괴로움에 의한 느낌이라 말하는 것을 알게 되는가?
마치 저 통증을 몸이 스스로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어떻게 뜻[意]을 껴잡는가?
[답] 어떤 이는 “마음이 이미 생길 적에는 현재의 느낌만 반연한다”고 말했다.
[문] 마음이 생기려고 할 적에 미래는 그것이 반연하지 아니한 미래이니, 그러므로 곧 그 대상인가?
[답] 어떤 이는 “현재의 마음이 차례로 사라져서 그 느낌에 반연한다”고 말했다.
[문] 차제연(次第緣)이 사라지고 또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또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게 되겠는가?
[답] 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지하고 다시 그 밖의 괴로움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지 않다.
그는 뜻을 내는 중간 대상에서 의식의 대상을 내는데, 그가 인식 자리인 제 성품[自性]에 편승하여 인식 모양을 만들어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거든, 하물며 다시 중생들이 느낌에 따라 뜻이 어지러워짐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자연인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가장 제일의(第一義)라고 말하리.
뜻으로 만든 느낌 그 자체가
고락행(苦樂行)을 벌써 내나니.
[문]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모든 받아들임[入]을 내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으로 안에 의지하여 생기고 밖에 의지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안에 의지하여 생긴다”고 말했다.
[문] 평등하게 걸림 없는 그 중에 그에 의하여 안에서 생기고 밖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마치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 것과 같다.
[문] 어찌 이것이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데 이를 안이라 말하고 이를 바깥이라 말한다면, 그와 같은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것은 이미 안에서 생기는 것이고 바깥은 아닌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안에는 미묘한 사실이 있고 밖에는 없다.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안의 제 성품이 성취된 것이요, 바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바깥 성품도 역시 스스로 성취하나니 자신의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안이 친근하고 바깥은 친근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 처소가 없으면 가까움과 먼 것이 없고 이미 돌아간 대상도 둘 다 함께 서로 가깝고 둘 다 함께 서로 의지하여 생기는가?
[답] 어떤 이는 “안에서 생기고 바깥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바깥도 역시 생기는 것이 제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안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든다”고 말했다.
[문] 바깥도 역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 제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ㆍ닿임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안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나니, 상ㆍ중ㆍ하란 마음과 마음 법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했다.
[문] 바깥에도 또한 상ㆍ중ㆍ하가 있나니, 상ㆍ중ㆍ하란 마음과 마음 법으로부터 생긴다. 다시 파리 소리가 일으키는 귀의 인식[耳識]과 다시 힘껏 치는 북소리와 다른 것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안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문] 차제인연(次第因緣)도 또한 견고하지 못한데 그로 하여금 서로 의지하여 생기게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안이 곧 증가한다”고 말했다.
[문] 바깥도 역시 증가함이니, 평등하게 걸림이 없는 중에는 안이 증가하고 바깥이 증가함이 아니다.
이 내용은 어떠한가? 온갖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각각 증가함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안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조작하고 바깥이 아니니 눈썹을 그리고 눈을 점안하여 빛깔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햇다.
[문] 말한 바대로 갑절이나 그리어 확대하여 보도록 하고 높은 소리로 나에게 말하되, “잘 들어라”고 하라.
[답] 어떤 이는 “안에 의지한 모든 받아들임이니 이 스님의 뜻은 ‘짓는 바가 마음과 더불어 함께 있고 식(識)은 네 요소에 의지하여 저것이 각각 수승한 모든 감관으로 충족함이 있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 성품의 의지가 미묘함이며
멀고 가까움, 취함과 버림이요,
아래에는 견고한 증가함이 없고
스님 뜻에는 식이 뒤에 있다.
[문] 마치 이 마음과 마음 법이 안의 의지[依]와 바깥 연(緣)으로 인연에 들어 생기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으로 안에는 무너짐이 있고 밖에는 그러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이는 현재의 사실이니 마치 저 해 그림자를 보매 눈이 곧 무너짐이 있어도 해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니, 무슨 이유로 눈이 무너짐이 있어도 해의 허물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안의 모든 감관이 속박된 것이요, 바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바깥도 역시 모든 감관이 속박되는 것이 자기 몸 안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안에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문] 바깥에도 역시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 아라한은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없는데, 그로 하여금 무너지지 않게 하려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안에 의하여 모든 받아들임[入]이 생기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가? 어떤 이는 “안에 친근함이 있게 되고 바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문] 여기에 받아들임의 처소가 없어서 받아들이는 곳이 있지 않는데, 어찌 가까움과 먼 것이 있는가?
이미 돌아간 대상은 둘 다 함께 친근하는데 그 둘에 의하여 생기게끔 하려는가?
[답] 어떤 이는 “안에서 이미 생기고 바깥은 그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바깥도 또한 다시 생기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제 성품이 머무는 것이요, 바깥은 그러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 바깥도 역시 제 성품의 머무는 것이 자기 몸에 빛깔ㆍ냄새ㆍ맛과 같은가?
[답] 존자께서는 “만일 스스로 의지한 물건이 마음과 마음 법을 전환시켜 거기에 있어서 머무른다면, 바깥과 안의 모든 받아들임인 저 모든 법이 이리저리 모든 감관의 무너짐을 내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에 모든 감관이 속박되고
조작에 의해 나라고 여김이 있다.
친근과 온갖 조작되는 바와
제 성품이 나로부터 있었네.
[답] 사리불(舍利弗)존자는 “저 여러분의 좋은 눈이 안으로 받아들여도 무너짐이 없다. 그 빛깔이나 광명을 보더라도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눈의 인식이 없나니, 깊이 생각하는 이여,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말하였다.
[답] 어떤 이는 “차제연(次第緣)이 그 생각함이다”라고 말하였다.
[문] 치우쳐 차제연이 없기도 하는가?
[답]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일체 식신(識身)이 현재에 있나니 만일 현재에 있으면 저것이 곧 생긴다.
어떤 이는 “자연인(自然因) 저것은 곧 생각함이다”라고 말했다.
[문] 치우치게 자연인이 없을 때도 있는가?
[답] 없지 않을 때가 없고 항상 평등함이 있지 않다.
[문] 치우치게 평등하지 않음이 있는가?
[답] 평등함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는 “대의(大義)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만일 대의가 없으면 어찌 식(識)이 나지 않겠는가?
[답] 나지 않는다.
[문] 만일 채찍이나 막대로 구타하여도 그가 식을 일으키지 않는가?
[답] 대상의 힘 때문에 저 식이 곧 일어난다. 혹 일어나지 않을 적이 있나니, 무상삼매(無想三昧)나 멸진삼매(滅盡三昧)나 그 밖의 선정에 든 따위는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마음을 일으킨 자를 앞서 이미 말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에 기억한 바를 식(識)이 곧 그를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말과 생각이 그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문] 뜻과 생각함이 차별이 없는가?
[답] 어떤 이는 “마음과 마음 법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생각함이다”라고 말했다.
[문] 모든 상응하는 법이 그 생각함이어서 모든 식(識)을 내나 식은 생각함이 아니니, 이 내용은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생각함에서 중생의 인연이 생기고 식의 성질이 모든 속박을 일으킨다 함이 그것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차제에서 저 인연이 있게 되고
대의(大義)로 인해 비춰 밝힌다.
희망이 중생을 만들기도 했으며
상응함과 모든 슬기를 만들었네.
[문] 그것을 내어 사유(思惟)함 있는 것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차제연으로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이 내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문] 그는 사유를 내지 않는다.
만일 낸다면 차별이 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내지 않는다면 말한 바가 그 사유가 아니다.
저 눈의 인식이 생기게 됨이 아니니, 이는 곧 상위(相違)이다. 5사(事)도 또한 다시 그와 같은가?
[답] 어떤 이는 “저 사유에서 마음 법과 심상응행(心相應行)이 생기는데, 저 사유가 생기는 것은 심상응행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저 마음을 내어 마음이 일어나는 법이 저 사유다”라고 말했다.
[문] 다시 다음으로 생기는 것이란 자연으로 만들어진 법이니, 마치 불꽃과 광명이 앞뒤가 서로 인해 생기는 것과 같다. 어떻게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는가?
[답] 어떤 이는 “불꽃이 있으면 곧 광명이 있게 되고, 광명이 없으면 불꽃이 없나니, 그 중에서 불꽃이 광명으로 인해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만일 둘이 함께 일어난다면 어떻게 불꽃에서 광명이 있고 광명이 없으면 불꽃이 없음을 알게 되는가?
[답] 불꽃에서 생긴 모습은 타는 것이고, 광명이 아니다.
[문] 어떻게 불꽃이 광명을 내고 타는 것은 광명이 아님을 알게 됩니까?
[답] 불꽃이 얽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 불꽃에 얽힌 바는 무엇인가?
[답] 어떤 이는 “만일 불꽃이 있을 적에는 광명이 때를 따라 상응하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불꽃이 없어지면 광명도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둘 다 함께 없어진다고 할 때, 불꽃이 없어지면 광명은 없어지거나 광명은 없어져도 불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어떤 이는 “불꽃이 치성하면 광명이 있다는 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합해 모여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크면 광명도 크고 불꽃이 짧으면 광명도 짧다”고 말했는데 이것 역시 앞에서 이미 말했다.
어떤 이는 “불꽃이 깨끗하지 못할 적에는 광명도 곧 깨끗하지 못하고 불꽃이 깨끗하면 광명이 또한 깨끗하다고 하는 그것 역시 나의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광명을 보는 것은 불꽃이 그 근본이 되나니, 그로 말미암아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광명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된다면 기름 심지가 광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답] 광명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광명 때문에 불꽃을 찾게 되는 것이요, 불꽃 때문에 기름 심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불꽃 때문에 그 광명이 있는것이 아니고 상응하여 광명이 있는 것이니, 불꽃과 광명이 가장 미묘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둘이 함께 생기면 미묘하다 말하니, 미묘하지 않다 말하는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본래 불꽃이 일어나서 광명이 생긴 것이니, 그로 말미암아 불꽃이 광명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고 말했다.
[문] 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나니 불꽃에 광명이 없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답] 그것 역시 비유가 되지 않나니, 저 불꽃이라고 느끼어 번갈아 서로 반연할 때에는 광명이 없다.
그 광명은 그 불꽃이 회전한 것이 아닌 것처럼, 희망하는 감각이 또한 서로 생기지 않을 때에는 곧 교만한 뜻이 있다.
제각기 무너지는 모양이며
희망과 상응하는 행(行)이다.
청정한 이치를 통달한 그것과
합해 모임은 앞에서 말함과 같다.
[문] 마치 6식신(識身)이 반드시 과거의 자연인(自然因)에 의지함과 같다. 뜻이 어긋나지 않고 달리 반연하지 않으매 또한 그릇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한사람이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지만 6식신은 둘이 함께 일어난다.
[답] 어떤 이는 “하나의 차제연(次第緣)에 하나의 식(識)이 머무른다”고 말했다.
[문] 하나의 식과 상응함에 낱낱이 식이 서로 의지함인가?
[답] 어떤 이는 “하나는 저 생각함이니, 하나의 식이 곧 상응하여 머무른다”고 말했다.
[문] 만일 하나의 식이 상응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식인가?
[답] 어떤 이는 “하나의 감관이 하나의 식에 의해 상응하여 머무른다는 것은 하나의 식이 상응하매 낱낱 식이 머무름이다”라고 말했다.
일체 중생들이 반드시 받을 과보를 제가 지어서 받게 되는 것처럼, 거기에는 미래와 현재에 지은 바가 있다.
[문] 무슨 까닭으로 한 사람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아 다섯 갈래[五有]는 전환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한 갈래[趣]의 결사(結使)가 치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 갈래에서 온갖 과보를 받는다”고 말했다.
존자께서는 “식(識)과 함께 상응한 연후에 낱낱 식을 일으키나니, 일으켜서 지은 과보 행위가 모두 식 종자에 응한다. 이러하므로 그것을 아나니, 만일 중생이 없으면 일찍이 있지 않은데 생겨 있는 것이 곧 열반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문] 무슨 까닭으로 중생이 줄어짐이 없는가?
[답] 어떤 이는 “그대가 그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에 대해서 줄어듦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계산할 수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생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그 줄어듦을 알지 못한다.
비유컨대 큰 바닷물이 한량없으므로 천 개의 병을 가지고 가서 퍼내더라도 또한 줄어듦이 없는 것처럼, 그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했다.
[문] 큰 바다에는 강물과 그 밖의 샘물이 모두 거기에 가 모이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본래 없는데 지금은 있는가?
[답] 딴 세계의 중생들이 이쪽에 온 것이다. 존자께서는 “저 세계에 중생은 줄어듦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문] 그 내용이 어떠한가?
[답] 중생이 딴 세계에 노닐면서 성현의 도를 가지고 세계를 벗어나서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문] 그 뜻이나 성품은 어떠하며 어떠한 희망이 있는가?
[답] 마땅히 이렇게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니 이 3취(聚) 중생은 줄어듦만 있고 더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겠는가? 그러한 중생은 줄어듦이 없다. 만일 세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한량없이 지은 바 중생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같다.
존자께서는 “어디에나 줄어듦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문] 그 사실이 어떠한가?
[답]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반드시 세(世)가 있는 것이 틀림없고 사취(邪聚)가 있는 것은 사라진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그 내용은 옳지 못하니 지금에 있고 여기는 없어짐과 같다.
이와 같은 3세(世)에서 1세 안에 미래는 줄어듦만 있고 더함이 없으며, 1세 안에 과거는 더함만 있고 줄어듦이 없다.
[문] 무슨 까닭으로 미래 세상은 줄어듦이 없고 과거는 가득 참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그대가 그러한 수효를 계산하는가? 과거와 미래에 그러한 수효가 있는가?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알고 만일 계산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 줄어듦이 있는 것을 아는가?”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는 이미 없어지고 미래는 생기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처소가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한량이 없다”고 말했다.
세존께서는 “두 법을 비추어 밝혀야 한다. 왜냐 하면 세(世)는 처소가 없고 사실과 상응하는 인연으로 생기나니, 이미 생김과 곧 무너짐이 그 사실이다중생이 늘아나고 줄어드는 것에 대해 성인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느 누구도 계산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래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고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억제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범지(梵志)를 억제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인데 중생들은 형상을 버리지 못하고 사물을 숭상한다.
만일 적정삼매(寂靜三昧)에 들면 한량없고 가없는 복이 되나 그는 다 깨끗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저 삼매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 어떤 이는 “한량없고 가없는 복이 그 반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지금에 다 깨끗하지 않은가?
[답] 그것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문] 만일 스스로 안다면 그것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만일 깨끗함이 한량없으면 그것은 삿된 슬기가 아닌가?
[답] 어떤 이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여김은 마음을 그 내용이라 풀이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깨끗한 것을 깨끗하다 말한다면, 마음을 “항상함이 아니요 항상함이 없다”고 풀이함이니, 마음을 그 내용이라 풀이함을 해설한 것이다.
[답] 어떤 이는 “일체 고요함이란 그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니, 저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 지금에 제2선(禪)에 들면 그 때에는 눈으로 누런 것을 다 볼 것이니, 그러면 한동안 제 모양[自相]이 무너지는가?
[답] 어떤 이는 “깨끗함이 저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누가 그런 삼매가 없는가?
[답] 생각함에 빈틈이 없을 때에 그러한 삼매가 있다.
[문] 일체 삼매도 또한 빈틈이 없는데, 일체 삼매를 적정삼매로 보려고 하는가?
[답] 일체 제 모양으로 서로 느낌이 아니요, 일체 한량없는 모양을 만듦도 아니다.만일 제 모양으로 한량없는 모양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행인의 삼매[行人三昧]라고 한다.
존자께서는 “깨끗함이 그 인연이니 그가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불타는 섶으로 인연하여 연기가 일어남과 같다. 모든 인연은 각기 서로 의지하여 깨끗함이 생기나니, 그와 같이 모든 상응함과 모든 인연이 일어나게 된다. 마땅히 이러한 관찰을 해야 할 것이다. 저 삼매를 불순하다 말해야 하고 순하다 말해야 하는데 위의 5사(事)와 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존자께서는 “마땅히 불순함이 아니고 차츰차츰 순함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하셨다.
먹는 것을 사람이라고 관찰해야 한다지만 그러나 먹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문] 저 어리석게 관찰하는 이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 어떤 이는 “먹는 것이 그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저것은 어리석은 관찰이 아니고 생각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 밖의 생각으로 먹는다면 다시 딴 인연이 있을 것이니, 고요한 것으로 고요한 인연이 없다고 하겠는가?
[답] 어떤 이는 “사람이 그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먹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닌가?
[답]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 만일 스스로 안다면 나라는 것이 그 인연인가?
다시 저 어리석게 관찰하는 이는 이곳에서 먹고 그를 바라고 찾아 구하나니, 저 어리석게 관찰함을 마땅히 “순함이다”라고 말해야 되는지, 마땅히 불순하다고 말해야 되는지, 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답] 존자께서는 “마땅히 ‘맛에 순응하여 애착하는 것이 그 상대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골쇄(骨鎖)에 의하여 약간의 생각을 일으켰다면 내 몸도 골쇄로 된 것이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문] 저 생각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답] 어떤 이는 “골쇄가 곧 그 반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몸은 골쇄가 아니다.
[답] 그것 역시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그 반연이니 그는 골쇄로서 피부와 살이 얽힌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저 생각은 몸이 아니다. 만일 골쇄라는 생각으로 관찰한다면 자신에 반연함이거늘, 푸른 것으로 하여금 누런 빛깔에 반연하게 하겠는가?
다시 그 내용인 생각은 저 자신에 반연했는가?
분별과 희망인 저 모양을 마땅히 순함이라 말하고 마땅히 불순함이라고 말함은 위에서 두 사실[二事]을 설명한 것과 같다.
[답] 존자께서는 “마땅히 순함이라고 말함은 그 상대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4 게품을 마친다.
느낌과 두 마음과
불꽃ㆍ그림자ㆍ광명ㆍ줄어듦이며
일찍이 없었던 취(聚)들과
푸름ㆍ먹음ㆍ골쇄 따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