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2>
1. 주도(州都) 세비야(Sevilla)
세비야(Sevilla)는 안달루시아의 주도로 내륙(內陸)에 있는 오랜 역사의 도시로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가에 세워진 항구도시인데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며 AD 8세기, 이슬람의 지배 시기에 수도로 정해진 세비야는 훗날 신세계 탐험의 중심인물들이었던 콜럼버스(Columbus), 마젤란(Magellan) 등 탐험가들이 첫 항해를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던 역사적 도시이다.
세비야는 BC 4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 히스팔리스(Híspălis)로, 또 세빌(Seville)이라고도 불렸는데,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Rossini)가 작곡한 너무나 유명한 코미디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의 세빌리아(Seviglia)도 세비야를 일컫는 말이다.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고 난 이후 엄청난 금은보화가 세비야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왔고 이로 인해 식민 지배를 받던 스페인은 오히려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리는 강대국으로 변모하여 번영을 구가하게 되는데 모든 것이 스페인 통일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이사벨 여왕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비야의 인구는 200만 정도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 이어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1>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Giralda) 탑
세비야 대성당 / 성당 앞에서 / 히랄다탑 바람개비 여인 1,2
세비야 대성당은 12세기 무슬림(Muslim) 사원이었던 건물을 가톨릭(Catholic) 성당으로 개조했는데 1403년에 시작하여 1506년에야 완성했다니 100년 이상이나 걸려 완공된 성당(聖堂)이다.
그러나 17~8세기 들어와 르네상스(Renaissance), 바로크(Baroque) 건축의 양식이 가미되어 증축되면서 원래의 이슬람 건축 양식과 어우러지다 보니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세비야성당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성당의 종탑인 히랄다(Giralda) 탑이다. 히랄다 탑은 원래 이슬람사원에서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dhan)을 외치던 첨탑 미나레트(Minaret) 였는데 성당의 종탑으로 개조하면서 정상에 여인이 바람개비를 붙잡고 있는 풍향계를 설치했다.
미나레트 정상의 돔(Dome)을 떼어내고 종루(鐘樓)를 설치하여 28개의 종과 가톨릭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 동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하는데 1568년에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어로 히랄다(Giralda)는 풍향계라는 뜻인데 이 히랄다 탑이 세비야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세비야 대성당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Vatican)의 성 바오로(Saint Paul) 성당, 영국 런던(London)의 세인트 폴(Saint Paul)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크기라고 하는데 크기뿐만 아니라 그 아기자기한 건축미는 보는 사람이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 콜럼버스의 관
콜럼버스의 관 1,2 / 산타페 협약 동상(그라나다)
세비야성당 박물관에 들어서면 화려한 가지가지 장식품들과 성물(聖物)들로 눈이 어지러운데 그 가운데 특히 사람들 이목(耳目)을 끄는 것이 왕관을 쓴 네 사람이 콜럼버스의 관을 어깨에 메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콜럼버스의 관(棺)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어 조금 덧붙여 본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배 세 척과 선원들, 그리고 식량을 지원받은 이탈리아의 항해가(航海家) 콜럼버스(Columbus)는 금과 진주, 그리고 향료가 무진장이라는 인도(India)를 향해 대항해를 시작하는데 그가 탔던 배가 바로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다.
당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이 처음으로 제기되고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이 나오자 모두 반신반의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지구는 평평하고, 땅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멀리 나가면 폭포처럼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서 근해에서만 고기를 잡거나 항해를 하고 먼바다는 두려워서 나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커다란 지각판(地殼板)을 네 마리의 거북이 받치고 있는데 이따금 거북이들이 꿈틀거리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허무맹랑한 설(說)까지... ㅎㅎ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당시 모험가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사막을 지나고 산맥을 넘어 무작정 갔더니 인도라는 나라가 나타났는데 밀림 속에 황금으로 된 도시가 있고 코가 긴 코끼리라는 짐승이 있고, 사막 근처 바위 밑에 샘물이 있어 목이 말라 마시려고 했더니 냄새가 나서 마실 수 없었다. 낙타도 못 마셨는데 불을 붙이니 불이 붙었다(원유). 이런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코를 손처럼 사용하는 동물이라구? 샘물에 불이 붙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을... ㅎㅎ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니까 동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 바다(대서양)로 배로 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을 찾아가 나에게 배를 대어 달라. 나는 서쪽 바다로 인도를 가겠다. 인도는 황금도시도 있고 진주와 향료가 무진장이라고 하니 한 번만 다녀오면 그 몇 배로 갚아 주겠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모두 콜럼버스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했다고 한다.
◐ 이사벨 여왕의 현명한 결단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스페인 여왕 이사벨(Isabel)을 찾아가서 배를 대어 달라고 요청하는데 이사벨 여왕은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까지 처분하여 콜럼버스에게 배를 세척 대어주고 계약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이며, 이른바 벤처 투자였던 셈이다.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산타페 협약은 무슬림(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Granada)가 함락된 몇 개월 후인 1492년 4월에 체결하는데 협약의 내용은
①콜럼버스에게 스페인 여왕이 작위(爵位)를 부여하고,
②앞으로 발견되는 지역의 대 제독과 식민지 총독으로 인정하며,
③이러한 작위(爵位)는 그의 자손들에게 영구히 상속되고,
④그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귀금속의 10분의 1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이 산타페 협약 체결 모습의 동상이 그라나다(Granada) 대 성당 앞 광장인 ‘이사벨 라 까톨리카 광장(Plaza Isabel la Catorica)’ 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다.
◐ 콜럼버스 항해의 성공
항해를 떠나 70일 만에 미대륙 앞 바하마(Bahama) 제도의 작은 섬에 첫발을 디딘 콜럼버스 일행은 그곳이 인도인 줄 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라 불렀는데 영어로 하면 인디언(Indian)이다. 콜럼버스가 첫발을 디딘 곳은 바하마제도의 쿠바 북쪽에 있는 작은 섬 구아나아니(Guanahani) 섬이었는데 이름을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 앞의 바하마제도를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 부르고, 미국 원주민을 인도사람들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 중남미 원주민을 같은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로 부른다.
그리고 동양의 진짜 인도(印度/India)는 ‘동인도(東印度)’라고... ㅎ
콜럼버스는 첫 항해는 성공하고 돌아오자 엄청난 환영을 받는데 그 후의 항해에서 금과 향신료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콜럼버스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콜럼버스는 그 후로도 세 차례 더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왔지만 세 번째 항해에서 총독 지위는 물론이고 그동안 신세계에서 얻었던 모든 재산을 잃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가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며칠 후 자신을 가장 믿고 지지해 주었던 이사벨 여왕이 죽었고, 콜럼버스도 2년 뒤 바야돌리드에서 숨을 거뒀는데 스페인에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그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결국 자신이 발견한 쿠바에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