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아비담심론 제2권
3. 행품(行品)[1], 마음과 상응하는 행ㆍ상응하지 않는 행
이미 모든 법의 독자적인 모습과 그 머무는 바를 설명하였으니, 이제 법생(法生)을 설명하겠다.
만약 모든 법이 자성에 포섭되는 것을 가지고 자체의 힘으로 생긴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구경[竟]에 이르면 생겨날 능력이 없으니
등려(等侶)를 떠남을 부리기 때문이다.
일체의 중연력(衆緣力)이 있어
모든 법은 생겨날 수 있네.
‘구경에 이르면 생겨날 능력 없으니 등려(等侶)를 떠남을 부리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제행은 자성이 약하고 힘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생겨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문】만약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면 어떻게 생기는가?
【답】
일체의 중연력에 의해
모든 법이 곧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과 배가 서로 힘을 빌려 저 편 기슭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마음과 마음의 법이 굴러 전개되는 힘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경계를 섭수(攝受)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마음과 마음의 법이 짝을 이루어 생기는 과정]
먼저 마음1)과 마음의 법2)이 짝을 이루어 생기는 과정부터 설명하겠다.
만약 마음이 일어날 때는
이 마음은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여러 심법(心法) 등의 적취 및
불상응행이 그것이다
제행(諸行)은 전전하여 서로를 원인으로 해서 생한다. 그 마음의 의지처나 대상[緣]3) 혹은 찰나가 생한다면 그 심법 등의 적취가 일어나는 것이다.
【문】무엇이 심법 등의 적취인가?
【답】
생각[想]과 욕망[欲] 및 촉(觸)과 혜(慧)와
염(念)과 사(思)와 해탈과
기억[憶]과 선정 및 수(受)이니
이러한 것들을 심[법] 등의 적취라고 한다.
‘생각’4)이란 경계에 대해서 그 형상(形像)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욕망’5)이란 어떤 대상[緣]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촉’6)이란 의지처와 대상과 마음이 화합하여 생하는 접촉의 경계이다.
‘혜’7)란 대상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고 밝게 살피는 것을 말한다.
‘염’8)이란 대상에 대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9)’란 공덕과 악, 그리고 이 둘 모두에 속하지 않는 것[無記]을 조작하고 마음을 굴리는 것이다.
‘해탈’10)이란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이 일은 반드시 그렇다고 규정[限量]하는 것을 말한다.
‘기억’11)이란 대상에 대해서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정’12)이란 대상을 받아들여 산란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수’13)란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스럽지 않은 것 및 그 둘 모두에 속하지 않은 상태14)를 경계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법이 일체에 공통되는 것]
일체의 마음이 생겨날 때는
이것이 생겨난다고 함은 성인이 말씀하신 바이다.
마찬가지로 함께 한 대상에서 행하고
또한 항상 상응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법은 일체의 선ㆍ불선ㆍ무기의 마음과 함께 생하며, 큰 바탕15)에서 얻게 되는 까닭에 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 함께 한 대상에서 행한다’란, 모든 마음과 동일한 대상에서 전개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두 가지가 없이 결정된 것임을 말한다.
‘또한 항상 상응한다’란, [마음이] 전전하면서 함께 혹은 마음과 더불어 늘 상응하며 한 가지 일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문】상응(相應)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답】‘같다’16)는 것이 곧 상응의 의미이다.
【문】마음의 법은 많기도 하고 혹은 적기도 한데, 어떻게 같다는 것이 곧 상응을 의미하는가?
【답】일이 같기 때문이다. 만약 한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 상(想)과 두 가지 수(受)가 있다면 이것은 상응의 의미가 아니다.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한 가지 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마음의 법 역시 이와 같다. 때문에 같다는 것이 상응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절(時節)과 의지처[依]와 행상[行]과 대상[(緣]이 같다는 뜻이 곧 상응의 의미이다.
시절이 같다17)고 함은 한 찰나에도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처가 같다18)고 함은 만약 마음이 눈에 의지해서 생했다면 마음의 법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행상이 같다19)고 함은 만약 마음이 청색(靑色)을 행해 생했다면 마음의 법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대상이 같다20)고 함은 만약 마음이 색을 연하여 생했다면 마음의 법도 역시 색과 연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항상 상응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미 마음의 법이 일체에 공통되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마음의 법이 일체에 공통되지 않는 것]
이제 공통되지 않는 측면을 설명하겠다.
여러 근(根)과 참괴(懺愧)와
신(信)과 기특함[猗]과 불방일(不放逸)과
불해(不害)와 정진과 사(捨)는
일체의 선한 마음과 함께 한다.
‘여러 근’이란 불탐(不貪)21)ㆍ불에(不恚)22)의 두 가지 선한 근(根)을 말한다. 생명이나 생활의 자구에 대해서 탐착을 부수는 것을 불탐이라고 하며, 중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나 비중생의 범주에 속하는 것에 대해 성냄과 노여움을 무너뜨리는 것을 부진에(不瞋恚)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허물과 악에 대해 스스로 싫어하는 것을 ‘참(慙)’23)이라 하고, 모든 허물과 악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괴(愧)’24)라고 한다.
3보(寶)와 4제(諦)에 대해 청정한 마음을 지니는 것을 ‘신(信)’25)이라 하고, 몸과 마음이 악(惡)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특한 멈춤’26)이라 하며, 선한 방편을 지어 악에서 벗어나 [더 이상 악을] 짓지 않는 것을 ‘불방일(不放逸)’27)이라 부른다.
다른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 것을 ‘불해(不害)’28)라 하며,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끊으며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을 일으켜 방편으로 부지런히 닦아 쉬지 않는 것을 ‘정진(精進)’29)이라 하고, 마음이 평등한 것을 ‘사(捨)’30)라 부른다. 이 열 가지 선한 법은 모든 선한 마음 가운데 공통된다.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5식(識)과 상응하고 또한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까닭에 선의 큰 바탕[善大地]31)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선의 대지(大地)를 설명하였으니,
[번뇌의 대지]
지금부터 번뇌의 대지32)를 설명하겠다.
사해(邪解)와 부정억(不正憶)
불순지(不順智)와 실념(失念)
불신(不信)과 해태(懈怠)와 난(亂)
무명(無明)과 도(掉)와 방일(放逸)이다.
전도된 이해를 ‘사해탈(邪解脫)‘33)이라 부른다. 경계를 삿되게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억(不正憶)’34)이라 한다. 전도된 결정을 불순지(不順智)35)라 하고, 잘못 기억하고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실념(失念)’36)이라 한다. 3보와 4제(諦)에 부정한 마음을 갖는 것을 ‘불신(不信)’37)이라 한다.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끊지 못하고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을 일으키지 않은 채 부지런히 방편을 닦지 않는 것을 ‘해태(懈怠)’38)라 한다. 경계에 이끌려 흩어진 마음으로 여러 가지 연을 따라다니는 것을 ‘난(亂)’39)이라 한다. 과거 등을 모르는 것을 ‘무명’40)이라 하며, 마음이 조급하게 흔들려 쉬지 못하는 것을 ‘도(掉)’41)라고 한다. 선한 방편을 짓는 일에서 떠나는 것을 ‘방일(放逸)’42)이라 한다.
번뇌의 대지(大地)인 열 가지는
일체의 오염된 마음에 있다.
뉘우침 없고 부끄러움 없음을
불선의 대지라 말한다.
‘번뇌의 대지인 열 가지는 일체의 오염된 마음에 있다’란, 이 사해탈(邪解脫) 등 열 가지 법은 일체의 오염된 마음과 함께 함을 말한다. 즉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와 5식신(識身)과 의식지(意識地)가 그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번뇌의 대지(大地)라고 말한 것이다.
【문】수면[睡]43) 역시 일체의 오염된 마음과 함께 하거늘, 왜 [이것은] 번뇌의 대지라고 하지 않는가?
【답】그것은 삼매[正受]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중생들의 수면은 속히 정(定)을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세우지 않는 것이다.
만약 대지(大地)라면 그것이 번뇌의 대지인지 마땅히 네 구(句)로 구분해서 설명해야 한다. 혹은 대지이면서 번뇌의 대지가 아닌 것이 있다. 이른바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ㆍ욕(欲)이 그것이다. 혹은 번뇌의 대지이면서 대지가 아닌 것이 있다. 이른바 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무명ㆍ들뜸[掉]ㆍ방일이 그것이다. 혹은 대지이면서 번뇌의 대지인 것이 있다. 이른바 기억[憶]ㆍ해탈ㆍ염ㆍ정(定)ㆍ혜(慧)가 그것이다. 혹은 대지도 아니고 번뇌의 대지도 아닌 경우가 있으니, 위에서 말한 일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미 번뇌의 대지를 설명하였으니,
[불선의 대지(不善大地)]
지금부터 불선대지(不善大地)44)를 설명하겠다.
뉘우침 없고 부끄러움 없음을
불선의 대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른바 모든 허물과 악에 대해 스스로 싫어하지 않는 것을 뉘우침 없다[無慙]45)고 한다. 또 모든 허물과 악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움 없다[無愧]46)고 한다. 이 두 가지 법은 오로지 불선으로, 일체의 불선심과 상응한다. 그런 까닭에 불선의 대지 가운데 두는 것이다.
이미 불선의 대지에 관하여 설명하였으니,
[소번뇌의 대지(小煩惱大地)]
지금부터 소번뇌대지(小煩惱大地)47)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분노[忿]ㆍ원한[恨]ㆍ기만[誑]ㆍ인색[慳]ㆍ질투[嫉]
번뇌[惱]ㆍ아첨[諂]ㆍ부(覆)ㆍ고(高)ㆍ해(害) 등
이와 같은 여러 번뇌를
소대지(小大地)라고 한다.
요익되는 일을 요익되게 하지 않으며, 응당 지어야 할 일을 짓지 않은 채 오히려 짓지 말아야 할 일은 짓는 데 있어서 계속해서 성냄의 상(相)을 일으키는 것을 분노[忿]48)라고 한다.
추구해야 할 것은 추구하지 않으며 응당 지어야 할 것은 짓지 않은 채 오히려 짓지 말아야 할 것은 짓는 일에 있어서 계속 분노의 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한[恨]49)이라고 한다.
상대를 속이기 위하여 공경히 모시는 모습을 기만[誑]이라고 한다.
재물과 법에 대하여 아까워하고 집착하는 것을 인색[慳]50)이라고 한다.
남이 가진 이양ㆍ공경ㆍ명예ㆍ공덕에 대해서 참지 못한 채 마음이 시기하는 것을 질투[嫉]라고 한다.
바라지 않던 일을 만나 바라던 일과 어그러지게 되었을 때 사유해서 마음이 열(熱)을 내는 것을 번뇌[惱]라고 한다.
자기의 본성을 덮어 감추고 왜곡하여 때와 편의에 맞추어 순종하는 것을 아첨[諂]51)이라고 한다.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 허물과 악을 숨기는 것을 부(覆)52)라고 한다.
성씨(姓氏)ㆍ족벌(族閥)ㆍ재산ㆍ부귀(富貴)ㆍ용모와 힘 또는 범행(梵行)ㆍ지계(持戒)ㆍ지혜ㆍ정업(正業) 등을 다른 이와 비교해 마음이 거만해지는 것을 고(高)53)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핍박하고자 하는 것을 해(害)54)라고 한다.
이 열 가지 법을 소번뇌의 대지[小煩惱大地]라 하는데,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끊어야 하는 것이고, 견도의 단계에서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뜻[意]의 경지에 있는 것이지 5식(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마음과 함께 생기는 것도 아니니, 행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가 있다면 곧 둘이 아닌 것이다.
[대지ㆍ선한 대지ㆍ번뇌대지ㆍ불선대지ㆍ소번뇌대지의 차별]
【문】대지ㆍ선한 대지ㆍ번뇌대지ㆍ불선대지ㆍ소번뇌대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대지에는 네 종류가 있다. 즉
선ㆍ불선ㆍ은몰무기(隱沒無記)ㆍ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가 그것이다.
선한 대지에는 오직 선만이 있다.
번뇌의 대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불선 및 은몰무기이다.
불선대지에는 오직 불선이 있다.
소번뇌대지 가운데 기만과 아첨과 고만에는 불선과 은몰무기의 두 종류가 있고, 그 나머지에는 오로지 불선이 있다.
[욕계의 마음]
불선의 심품(心品)가운데
마음의 법은 스물한 가지이니
욕계의 세 가지 견해에서는 하나를 줄이고
두 가지 견해에서는 셋을 제한다.
‘불선의 심품 가운데 마음의 법은 스물한 가지’라고 했는데, 불선이란 이른바 욕계에서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을 제외한 번뇌와 상응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전성(轉成)하기 때문에 불선(不善)이라 한다.
불선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탐욕ㆍ노여움ㆍ오만심ㆍ의심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와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무명]55)및 상응하는 무명56)이 그것이다.
탐욕ㆍ노여움ㆍ오만심ㆍ의심의 마음에는 스물한 가지 법이 함께 일어나니, 열 가지 대지 및 게으름 등의 열 가지 법으로, 곧 해태ㆍ무명ㆍ불신ㆍ방일ㆍ들뜸ㆍ혼침ㆍ거친 생각ㆍ미세한 생각ㆍ뉘우침 없는 마음과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말한다
‘욕계의 세 가지 견해에서 하나를 줄이고’는, 욕계의 사견ㆍ견취ㆍ계취의 마음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마음에 혜를 제외한 스무 가지 법이 함께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두 가지 견해에서는 셋을 제한다’는, 욕계의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에는 지혜ㆍ뉘우침 없는 마음ㆍ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제외한 열여덟 가지 법이 함께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뉘우침 없는 마음과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제외하는 것은 [이 둘이] 오로지 불선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혜가 없는 것은 보게 하는 견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
욕계의 선(善)은 스물 두 가지이며
공통되지 않은 것은 스무 가지이네.
무기(無記)는 열두 가지를 말하나
후회와 수면은 함께 곧 불어나게 된다.
‘욕계의 선(善)’이란 이른바 욕계에서의 맑은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사랑할 만한 과보를 전성(轉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얻는 것[生得]과 들어서[聞] 얻는 것 및 생각해서[思] 얻는 것이 그것이다. 그 마음에는 스물두 가지 법이 함께 일어나니, 열 가지 대지(大地)와 열 가지 선한 대지 및 거친 생각[覺]과 미세한 생각[觀]이 그것이다.
‘공통되지 않은 것은 스무 가지’라고 했는데, 공통되지 않은[不共] 것이란 그 마음에 유일한 무명번뇌를 말한 것이다. 여기에 스무 가지 마음의 법이 함께 일어나니, 이 한 번뇌만은 제외한 것이다.
‘무기는 열두 가지를 말하나’라고 한 것은, 욕계의 불은몰무기심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과보로 생긴 것[報生]ㆍ위의(威4儀)ㆍ공교(工巧)ㆍ변화심(變化心)이 그것으로, 이 네 가지 무기의 마음에는 열두 가지 심법이 함께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곧, 열 가지 대지와 거친 사유 및 미세한 사유를 말한 것이다.
후회와 수면은 함께 곧 불어난다고 했는데, 마음이 좇아 변하는 것을 후회57)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가 [모두 해당한다]. 심품(心品) 중에는 후회를 더하는데,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후회에는 선ㆍ불선 및 불은몰무기의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머지는 그렇지 않으니, 자력으로 [생기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비바사(毘婆沙)의 논사는 말하기를,
“후회[심]에 무기(無記)가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민첩하고 예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수면은 몸과 마음이 혼미하고 몽매해지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경계와 대략 연하는 것을 ‘잠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 다섯 품(品)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므로 곧 그 심품(心品)에 수면을 더하는 것이다.
만약 후회와 수면이 함께 생긴다면, 세 품58) 가운데 두 가지를 더 불어나게 하는 것이다.
【문】이것은 욕계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색계의 경우는 또 어떻게 되는가?
[색계ㆍ무색계의 마음]
【답】
초선(初禪)에서 불선(不善)을 벗어나니
나머지 경우는 욕유(欲有)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선(禪)의 중간에서 거친 사유[覺]가 제거되고
위의 경지[上]에서는 세밀한 사유[觀] 역시 그러하다.
초선에서는 불선[심]이 없어지는데, 여기에서는 네 품[品]의 마음이 있다. 즉
선한 [마음]ㆍ독자적인 [마음]ㆍ은몰무기의 [마음]ㆍ불은몰무기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 모든 마음의 품계에서는 뉘우침 없는 마음과 부끄러움 없는 마음은 제외되며, 나머지는 욕계의 경우와 같이 설명된다.
그 선한 품계는 스물두 가지이며, 사랑과 오만과 의심과 함께 생기는 것은 열아홉 가지이다.
다섯 가지 편견[五見]59) 및 독자적인 [마음]과 함께 생기는 것은 열여덟 가지이며,
불은몰무기의 [마음]은 열둘이다.
뉘우침 없는 마음과 부끄러움 없는 마음은 오로지 불선이기에 [여기서는 제외된다.]
그 색계ㆍ무색계에서는 후회와 수면이 없다.
선(禪) 중간에서 거친 사유[覺]가 제거되며, 나머지는 초선의 경우와 같이 설명된다.
‘상위의 경지에서는 세밀한 사유[觀] 역시 그러하다’란, 제2선ㆍ제3선ㆍ제4선 및 무색계에서는 세밀한 사유[觀]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미 마음과 마음의 법이 수반하는 힘으로 생함을 설명하였으니,
[색, 극미의 네 가지 근]
지금부터 색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극미가 네 가지 근(根)에서는
열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신근(身根)에서는 아홉이고 나머지는 여덟이니
이른바 유향지(有香地)이다.
‘극미가 네 가지 근에 있어서는 열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네 가지 근에는 열 가지의 극미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4대와 색ㆍ냄새ㆍ맛ㆍ촉과 안근과 신근으로, 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
‘신근(身根)에서는 아홉’이라고 한 것은, 그 밖에 신근에는 아홉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신근(身根)의 종류만이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나머지 여덟’이라고 한 것은, 근(根)을 떠난 색ㆍ냄새ㆍ맛ㆍ촉감의 극미는 여덟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문】이 모든 극미는 어떤 계를 말하는 것인가?
【답】이른바 이것은 유향지(有香地)60)를 말한 것이다.
욕계 중의 극미는 냄새와 합쳐진다. 냄새와 맛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냄새가 있으면 곧 맛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색계의 극미는 단식(摶食)61) 성격의 것이 아닌 까닭에 냄새와 맛을 벗어난 것이다.
색계의 네 가지 근의 극미는 여덟 종류가 있고, 나머지 신근(身根)의 극미는 일곱 종류가 있으며 그 밖에 극미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문】만약 안근(眼根)의 극미가 열 종류라면 어찌하여 눈은 곧 색이면서 다른 종류는 되지 못하는가?
이와 같다면 법성(法性)이 뒤섞이고 어지러워져서 아비담(阿毘曇)과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아비담에서는 말하기를,
“안근은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入)ㆍ하나의 음(陰)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답】두 종류의 극미62)가 있으니, 일의 극미[事極微]와 취극미(聚極微)이다.
일의 극미란 말하자면 안근의 극미가 곧 안근 [자신]의 [극]미라는 것이다. 다른 극미도 모두 자신의 일을 설한다.
사의 극미에 입각한 까닭에 아비담에서 말하기를,
“안근은 하나의 계ㆍ하나의 입ㆍ하나의 음에 속한다”라고 한 것이다.
취의 극미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는 [이러한] 취극미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자상(自相)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법의 모습이 뒤섞이고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마치 마음과 상응하는 법은 그 모습이 각기 달라도 뒤섞여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는 것처럼, 그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네 종류의 원(遠)의 뜻은 이 품의 마지막에서 설명하겠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
【문】앞에서 말하기를, 만약에 어떤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마음의 법이 함께 생기고 아울러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不相應行]도 생긴다고 했다.
이 가운데서 이미 마음의 법에 관해서는 말했다.
그렇다면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이란 어떤 것인가?
[유위법, 모든 행이 전전하면서 서로 생함]
【답】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멸한다.
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상(相)이 있어서
전전하며 다시 서로 이룬다.
‘일체의 유위법은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멸한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유위법에는 네 가지 상이 있다는 것이다. 즉 태어나서 머물고 변하고 멸하는[生住異滅]63) [모습]이 그것이다.
세상[世]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까닭에 생(生)이며,
이미 일어나 스스로의 일을 세우게 되는 까닭에 주(住)이며,
이미 머물러 기세가 쇠해지게 되는 까닭에 이(異)이며,
이미 달라져 기세가 허물어지게 되는 까닭에 멸(滅)이다.
이러한 모습을 심불상응행이라고 말한다.
【문】만약 일체의 유위법에 네 가지 상이 있다면 마땅히 그 상에도 다시 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답】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상이 있다. 즉 이 상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있으니, 생생(生生)ㆍ주주(住住)ㆍ이이(異異)ㆍ멸멸(滅滅)이 그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이 상의 변화는] 무궁한 것인가?
【답】전전하며 다시 상을 이루는 것이다. 상(相)과 수상(隨相)이 전전해서 상이 생겨난다면 무궁한 것은 아니다. 앞의 생(生)은 생생(生生)을 낳고, 다시 생생은 앞의 생을 낳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住)와 주주(住住)도 각각 서로 머물며, 이(異)와 이이(異異)가 각각 서로 달라지며, 멸(滅)과 멸멸(滅滅)이 각각 서로 멸하는 것이다.
【문】상(相)과 수상(隨相)이 전전하여 서로 이루는데, 앞의 상은 몇 가지 법을 이루는가?
【답】
마땅히 알아야 하니, 앞의 네 가지 상(相)은
상으로서 각각 여덟 가지 법을 이룬다.
수상 역시 상에 대한 상으로서
유일한 상을 이룸을 알아야 한다.
앞의 네 가지 상은 하나하나에 여덟 가지 법을 이루며, 앞의 생은 자기를 제외하고 여덟 가지 법을 낳으니,64) 세 가지 상과 네 가지 수상 및 그 법이다.
주(住)는 자기를 제외한 여덟 가지 법을 머물게 하고, 이(異)는 자기를 제외한 여덟 가지 법을 달라지게 하고, 멸(滅)은 자기를 제외한 여덟 가지 법을 멸하게 한다.
[각각] 세 가지 상과 네 가지 수상과 내지 그 자체의 법이다. 자성은 그 스스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은 스스로를 멸할 수 없다. 손가락 끝이 스스로를 만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수상은 몇 가지 법을 이루는가?
【답】마땅히 알아야 하니, 수상은 상에 대한 상으로써 유일한 상을 이룬다.
이 네 가지의 수상은 각각 한 법을 이루는데,65)
수생(隨生)은 앞의 생을 낳고
수주(隨住)는 앞의 주를 일으키고
수이(隨異)는 앞의 이를 다르게 하고
수멸(隨滅)은 앞의 멸을 멸하게 한다.
이미 모든 행이 전전하면서 서로 생함을 설명하였다.
[제행이 일시에 생긴다 하더라도 혼란이 생기지 않음]
소위 일시에 생긴다 하더라도 혼란이 생기지 않음을 이제 설명하겠다.
다른 본성과 상(相)은 멀다[遠]고 말한다.
처소와 시간 또한 그러하니
계율과 종(種)과 대지와
모든 인식과 본성의 분별을 이룬다.
‘다른 본성과 상(相)은 멀다[遠]고 말한다./처소와 시간 또한 그러하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멀다는 것에는 네 종류가 있다. 즉 본성이 달라서 멀다는 것[異性遠]과 모습이 멀다는 것[相遠]과 처소가 멀다는 것[處所遠]과 시간이 멀리 떨어졌다는 것[時遠]이 그것이다.
【문】어떤 것이 원법(遠法)인가?
【답】계율과 종자와 대지와 모든 인식과 본성의 분별이 그것이다. 즉 본성이 달라서 멀다고 하는 것은 가령 하나의 몸 가운데서도 선(善)한 계율과 악한 계율이 작위없이 상속하여 생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비록 한 몸 가운데서 일시에 일어나서 다 같이 무작(無作)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질이 각기 다른 까닭에 [이것을] 멀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은 멀다’고 하는 것은, 4대종(大種)이 전전하며 서로 길러내고 함께 한곳에 머물고 합쳐져서 하나의 몸[體]을 이루지만 그 모습이 각기 다른 까닭에 멀다고 하는 것이다.
‘처소 또한 멀다’고 하는 것은 인도[天竺]와 중국[振旦]은 그 땅이 비록 동시에 생겨나 합쳐져서 한 바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처한 곳이 다른 까닭에 멀다고 하는 것이다.
‘때[時]가 멀다’고 하는 것은 눈에서 안식이 생할 때에도 이 경우 나중에 생긴 것과 먼저 생긴 것의 시간이 먼 까닭에 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제행이 일시에 생기더라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