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2권
2. 변본사품②
2.3. 온ㆍ처ㆍ계의 3과(科)의 분별
온갖 온(蘊)과 취온(取蘊)과 처(處)와 계(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1) 일체법과 3과의 상호 포섭관계
이제 여기서 그것들의 포섭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모두 포섭하고, 취온은 오로지 일체의 유루법을 포섭하며,
‘처’와 ‘계’는 일체법을 모두 다 포섭하니, 여기서 일체법이란 5온과 무위를 말한다.
개별적인 포섭관계[別攝]는 이상과 같다.
이제 마땅히 전체적인 포섭관계[總攝]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포섭함은
하나의 온과 처와 계에 의하는 것으로
자성만을 포섭하고 그 밖의 것은 포섭하지 않으니
타성(他性)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하나의 온’이란 색온(色蘊)을 말하고, ‘하나의 처’란 의처(意處)를 말하며, ‘하나의 계’란 법계(法界)를 말한다. 즉 이러한 세 가지가 5온과 무위를 전체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다.53) 여기서 ‘전체적[總]’이라 함은 바로 ‘모두[總集]’의 뜻으로, 이와 같이 ‘전체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세 가지 모두를 알게 하기 위함이지 각기 하나에 대해 알게 하고자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부파[有餘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포섭한다’고 함은 다른 존재[他性]를 포섭하는 것을 말하니, 다른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을 포섭한다고 [계경] 곳곳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5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으니, [다른 존재를 포섭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존재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55)
그래서 우리 부파(설일체유부)의 모든 논사들은 ‘자성(自性)만을 포섭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성만을 포섭한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로 궁극적인 설이니, 다른 존재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섭관계로서 다른 어떤 원인에도 근거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포섭이니, 제법은 항상 자성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른 존재[他性]을 포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일체의 법은 다른 존재를 배제[離]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근의 존재는 이(耳) 등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다. 즉 그러한 법은 이러한 법을 떠난 것인데 ‘이것에 포섭된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법은 오로지 자성만을 포섭한다.
이와 같이 안근은 오로지 [그것과 동류의 성질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와 고(苦)ㆍ집제(集諦) 등에만 포섭될 뿐이니, 이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온이나 다른 처, 다른 계 등에는 포섭되지 않으니, 그러한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타의 다른 법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18계의 조건, 안ㆍ이ㆍ비처는 왜 각기 2계가 아닌가?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각각 의지처가 두 곳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계(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는 것인가?56)
두 곳을 합하여 하나로 삼았기 때문에 오로지 18계가 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두 곳을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비록 두 개일지라도 계(界) 자체는 단일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비록 각기 두 곳이 있을지라도 종류 등이 동일하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종류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안근의 두 곳은] 다 같이 눈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경계(즉 대상)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색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인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근과 비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의 ‘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계’ 자체는 이미 하나라고 하였거니와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의 소의처(所依處)는 두 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안(眼) 등에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의 형상을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 계(界) 자체는 비록 하나이지만 두 곳의 소의처가 생겨나게 되었다.
만약 눈(안근)과 귀(이근)가 오직 하나만 있고, 코(비근)에 두 개의 구멍이 없다고 한다면 신체는 단정하지 않고 위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낙타나 고양이, 솔개 등도 [두 곳의 소의처를 갖추었지만] 이렇듯 누추하니, 그것들에게 무슨 단정함과 위엄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온갖 근의 각기 다른 종류가 이와 같이 다르게 배열되어 생겨나게 된 것은 인연에 따른 것으로, 인연에 장애가 있었다면 혹 두 곳으로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송에서]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설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으니, 신체를 장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이러한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는 말은 ‘뛰어나다[增上]’는 뜻을 나타낸다. [세간에서는] 작용이 뛰어난 것을 ‘단정하고 위엄 있다’고 설하고 있다.
만약 안 등의 근에 각기 한 곳이 결여되어 있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작용은 모두 명료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각기 두 곳을 갖추었으면 명료한 작용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세 근에는 각기 두 곳의 소의처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그것은 뛰어난 작용을 위엄 있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신체를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3) 3과의 명의(名義)와 가실론(假實論)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알려지는 대상[所知境, 즉 일체법]을 온ㆍ처ㆍ계라는 세 갈래로 설하시게 된 것인가?
이러한 세 갈래의 뜻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ㆍ처ㆍ계의 개별적인 뜻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적취와 생장문(生長門)과 종족
이것이 바로 온ㆍ처ㆍ계의 뜻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적취(積聚,rāśi)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고,
생장(生長)하는 문(āya-dvara)이라는 뜻이 바로 ‘처’의 뜻이며,
종족(gotra)의 뜻이 바로 ‘계’의 뜻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니,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거나, 혹은 미래의 것이거나, 혹은 현재의 것이거나, 혹은 내적인 것이거나, 혹은 외적인 것이거나, 혹은 거친 것이거나, 혹은 미세한 것이거나, 혹은 저열한 것이거나, 혹은 수승한 것이거나, 혹은 멀리 있는 것이거나, 혹은 가까이 있는 것, 이와 같은 일체의 법을 한 무더기[一聚]로 묶어 색온이라 부른다. 나아가 식온에 대해서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적취라는 뜻으로 ‘온’을 해석할 것 같으면 온은 마땅히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적취는 바로 가설적 존재[假]이기 때문이다.57)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적취의 소의(所依)에 대해 ‘뜻’이라는 말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적취가 바로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뜻’이란 실체[實物]인 단어[名]의 차별이지만 적취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취의 뜻[聚義]’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적취의 뜻[聚之義]이라는 말이다. ‘적취의 뜻’이란 적취의 소의를 말하는 것으로,58) 이러한 해석은 경설(經說)에 크나큰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적취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적취의 소의를 떠나 별도로 실재하는 적취 자체를 인식할 수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색 등의 온 이외 실유의 자아를 마땅히 별도로 추구해서는 안되니, 5온의 상속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세간의 적취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온’이 만약 실유라면 [앞서 인용한] 경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교화되어야 할 중생들은 색 등 제법의 3세의 품류(品類)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별이 각기 바로 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은 가이없는 것[無邊]이다’고 하면 바로 두려움을 낳아 ‘내가 어찌 이러한 가이없는 온을 능히 변지(遍知)하여 영원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곧 그들을 책려하기 위해 온이 비록 가이없는 것일지라도 그 특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로 설한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는 다수의 온에 대해 일합상(一合想, 다수의 개별적 존재를 하나의 전체로 간주하려는 생각)을 낳아 즉시 아집을 일으킨다. 즉 그로 하여금 일합상을 제거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온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고 설한 것일 뿐, 색 등의 5온은 다수의 법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 존재이지 실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일한 극미는 3세 등에 포섭되고 혜(慧)에 의해 분석되는 것으로, 그것을 묶어 하나의 적취[一聚, 즉 聚極微]라고 하였다. 따라서 온이 비록 적취라고 할지라도 실유의 뜻은 성립할 수 있으며, 여타의 다른 법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온은 일시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59)
또한 각기 개별적으로 생기하는 법에 대해서도 역시 ‘온’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에 온은 결정코 일시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테면 [심법과] 동시생기[俱生]하는 수(受)를 수온이라 이르고, 상(想)을 상온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설의 경우는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모든 때에 걸쳐 화합 생기하기 때문에 온이 비록 각기 개별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적취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문(門)의 뜻이 바로 ‘처’임을 알게 된 것인가?
어원적 해석[訓詞]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즉 ‘처’란 생장하는 문을 말하는 것으로,60) 심과 심소법이 여기서 생장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처’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능히 그러한 심ㆍ심소법의 작용을 생장시킨다는 뜻으로, 계경에서
“범지(梵志)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으로 삼아서는 오로지 색만을 보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 경문은 다만 문에 여섯 가지(안 등의 6처)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렇지만 심ㆍ심소법은 열두 가지의 문(즉 12처)을 갖는다.
그래서 또 다른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나며,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受)ㆍ상(想)ㆍ사(思)를 함께 낳는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종족의 뜻이 바로 ‘계’임을 알게 된 것인가?
세간에서의 종족의 뜻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산 속에 존재하는 웅황(雄黃)과 자황(雌黃, 유황과 비소의 혼합물)과 적토(赤土)와 안선나(安膳那,anjana, 흑색의 토석) 등 여러 가지 종족들을 다양한 [토양의 세계] 즉 다계(多界)라고 이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의신 혹은 하나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열여덟 가지 종류의 제법의 종족을 18계라고 일렀다.
즉 웅황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體類]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안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동유(同喩)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계(意界)를 6식계(識界)와 비교해 보면 양자는 별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달리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61)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로서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달리 설정할지라도] 아무런 허물이 없다.
4) 3과의 건립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일체법을] 온ㆍ처ㆍ계의 세 갈래로 차별하여 설하신 것인가?
불세존께서 그렇게 설하신 뜻은 지극히 알기 어려울지라도 자세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리석음과 근기 등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온’과 ‘처’와 ‘계’의 세 종류로 설하게 된 것이다.62)
논하여 말하겠다.
교화될 유정 중에는 어리석음과 근기 등에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는 이에 따라 온ㆍ처ㆍ계라는 세 종류의 법문을 설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등’이라고 하는 말은 즐기는 것[樂]이나 단계[位], 허물[過], 병 등을 밝히기 위한 말이고,
‘세 가지’란 그 하나하나에 각기 세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즉 교화될 중생의 어리석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혹 어떤 이는 심소(心所)에 어리석어 그것을 모두 아(我)라고 집착하며,
혹 어떤 이는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어리석으며,
혹 어떤 이는 색과 심(心)에 어리석기도 한 것이다.63)
근기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예리함과 중간과 둔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즐기는 것’이란 승해(勝解,이해)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간략한 글[略文]과 중간의 글[中文]과 자세한 글[廣文]을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단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제자들 중에는 이미 작의(作意)를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에 이른 단계[已過作意], 이미 완전하게 익힌 단계[已熟習行], 처음으로 정법의 사업을 닦는 단계[初修事業] 등 세 단계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허물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유정 중에는 아만을 품어 행하는 자[懷我慢行], 아소에 집착하여 따르는 자[執我所隨], 식(識)의 소의와 소연에 미혹한 자[迷識依緣] 등 허물의 세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에,
병이란 이를테면 교화될 유정들에게는 목숨이나 재물이나 친족을 믿고서 교만 방일함을 낳는 등 세 가지 다른 병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등등의 연유로 말미암아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순서대로 온ㆍ처ㆍ계의 세 가지를 설하시게 된 것이다.
5) 심소법 중 수(受)ㆍ상(想)만을 별도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온갖 심소법 가운데 수(受)와 상(想)만을 따로 설정하여 2온으로 삼으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쟁근(諍根)과 생사(生死)의 원인이고
아울러 순서상의 이유[次第因] 때문에
온갖 심소법 중에서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온이라 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간에서의 투쟁의 근원[諍根]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욕망[欲]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과 견해[見]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앞의 것은 ‘수’에 의해 일어나고, 뒤의 것은 ‘상’에 의해 생겨난다. 즉 미수(味受)의 힘에 의해 온갖 욕망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고, 도상(倒想, 전도된 관념)의 힘에 따라 온갖 견해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의 법은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낙수(樂受)에 탐착하기 때문에, 도상(전도된 관념)에 집착하기 때문에 애(愛)와 견(見)의 행자(行者)는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인과 아울러 뒤에서 설하게 될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수’와 ‘상’을 별도로 설정하여 온으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순서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차후에 마땅히 분별하게 되리라.
그리고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온갖 심소 가운데 오로지 이러한 ‘수’와 ‘상’만이 능히 ‘애’와 ‘견’이라는 두 가지 염오법이 되어 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하나의 식주(識住)의 명칭을 나타내기 때문에,64) 이 두 가지의 소멸에 근거하여 멸정(滅定)을 설정하기 때문에 [별도의 온으로 설정되었다는] 이유를 아울러 나타낸 말로서,65) [‘수’와 ‘상’을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등의 다양한 종류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6) 5온과 무위법
어떠한 까닭에서 처(處)와 계(界)에는 무위가 존재한다고 설하면서도 온(蘊)에는 포섭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에서는 무위를 설하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66)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무위법을 온이라고 설할 경우, 5온 중에 존재한다고 하든지 혹은 여섯 번째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이 모두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뜻이 서로 모순 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무위법)은 바야흐로 색이 아니고, 내지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위법은, 그러한 색 따위처럼 과거 등의 품류의 차별이 있어 그것들을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간추려 ‘무위온(無爲蘊)’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온도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무위법은 전도의 근거[顚倒依]라는 뜻과도, 단멸의 방편[斷方便]이라는 뜻과도 상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도의 근거란 유루온을 나타내고, 단멸의 방편이란 무루온을 나타낸다. 그러나 무위는 이러한 두 가지 뜻 중의 어떠한 뜻도 갖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온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67)
온갖 온을 폐(廢)하고 설정하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7) 5온의 순서
이제 마땅히 그 순서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침[麤]과 염오함[染]과 그릇[器]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논하여 말하겠다.
5온은 거침에 따라, 염오함과 그릇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와 같은 순서로 설정되었다.
먼저 거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색온이니, 대애(對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기 때문에, 5식의 소의(즉 안 등의 5근)가 되기 때문에, 6식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수온이니, 비록 형질(形質)을 갖지 않을지라도 행상(行相)의 작용[즉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不苦不樂)]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상온이니, 남ㆍ여 등의 행상을 취하는 작용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보다 거친 것은 이른바 행온이니, 탐 등이 일어나는 행상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식온은 가장 미세하니,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염오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시작도 없는 생(生)과 사(死) 이래로 남녀가 그들의 소의신에 대해 서로 염애(染愛)하게 되는 것은 현색과 형색 따위로 말미암아서이니, 그래서 처음에 ‘색’을 설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색애(色愛)는 수미(受味)에 탐착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였다.
이와 같은 수미에 탐착하게 된 것은 생각[想]이 전도되었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였다.
이러한 전도된 생각은 번뇌의 힘에 의한 것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번뇌의 힘은 능히 후유(後有)를 낳는 식(識)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을 설하였다.
그릇 등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색’은 그릇과 같으니, ‘수’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수’는 음식과 유사하니, 유정의 소의신을 이익되게 하기도 하고 손상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은 조미료와 같으니,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평등하게 취하여 ‘수’가 낳아지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행’은 요리사와 같으니, 사(思)와 탐(貪) 등의 업과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아 좋아할 만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이숙과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은 먹는 자에 비유되니, 유정의 근본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이고 뛰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식’을 상수(上首)로 하여 ‘수’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이치에 따라 [계경에서는] 수ㆍ상 등의 수복행(隨福行)에 대해 ‘식’을 다만 수복행자(隨福行者)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치에 따라 ‘행(行)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있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다시 아난타(阿難陀)에게 말하기를,
“식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태(母胎)에도 들지 못하니, 마음이 더러우므로 유정이 더러운 것이며, 마음이 청정하므로 유정이 청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와 같은 계경에서는 수ㆍ상등의 동시 생기하는 법 가운데 다만 ‘식’을 위주로 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욕계 중에서는 색이 가장 수승하니, 온갖 근(根)과 경(境)의 색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색계에서는 ‘수’가 수승하니, 생사 중에서 온갖 수승하고 미묘한 ‘수’가 모두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68)
세 가지 무색계 중에서는 ‘상’이 가장 수승하니, 그러한 경지에서는 상(相)을 취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기 때문이다.69)
제일유(第一有, 즉 有頂處인 비상비비상처) 중에서는 ‘행’이 가장 수승하니, 그곳에서의 사(思)는 가장 큰 과보(8만 겁의 수명)를 능히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즉 색ㆍ수ㆍ상ㆍ사)은 바로 식주(識住)로서 거기에 ‘식’이 머무니, 이는 세간에서의 밭(앞의 4온)과 종자(식온)의 순서와 유사하다.70)
그래서 제온(諸蘊)의 순서를 이와 같이 설정하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5온에는 증가하고 감소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심소 중에서 수ㆍ상만을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심소 중에서 그 상이 거칠고, 염오함를 낳으며, 음식과 유사하고 조미료와 같으며, 2계(색ㆍ무색계) 중에서 강력하다. 그래서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본송에 따라 [5온의 순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바야흐로 유전문(流轉門)에 근거하여 순서상의 이유를 설할 경우에도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로 설할 수 있다.
이제 마땅히 환멸문(還滅門)에 근거하여 다시 한 가지 이유를 설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긴요한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지식념(止息念)이다.71)
곧 부정관은 소조색(所造色, 즉 몸)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고,
지식념은 대종(즉 숨)을 기억[念]하는 것으로, [환멸에 이르는] 긴요한 문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먼저 ‘색’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찰력에 의해 색의 특성을 분석하여 찰나찰나에 걸쳐 극미가 전전(展轉) 차별된다고 관찰할 때 몸이 가뿐[輕安]해지기 때문에 마음은 바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는 소의신과 결합하여 그것을 결정코 손상시키거나 이익되게 하지만 자아를 손상시킨다거나 이익되게 한다는 것은 이치상 필시 성립하지 않으니, 이러한 관찰과 이해에 의해 아상(我想)은 바로 멸하고 법상(法想)이 바로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에 의해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통달하면 번뇌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으니,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게 된 것이다.
번뇌가 이미 종식하였다면 마음은 조화되고 부드럽게 되어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되니, 그래서 다음으로 ‘식’을 설하게 된 것이다.
[환멸문에 따라 5온을] 차례대로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 반대로도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겠지만 번잡한 글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바야흐로 여기서 그만 두기로 한다.
아비달마장현종론 제3권
이와 같이 제온(諸蘊)의 순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8) 6근ㆍ6경ㆍ6식의 순서
이제 계(界)와 처(處) 중에서 먼저 6근(根)의 순서에 대해 분별하여 설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에 따라 6경(境)과 6식(識)의 순서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안(眼) 등의 근은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다섯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현재하는 것이고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所造色)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것은 작용이 멀거나 신속하고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處]에 따른 순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근 가운데 안 등 앞의 5근은 오로지 현재의 경계만을 취한다. 그래서 먼저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의근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으니, 3세와 무위 중 혹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즉 현재)만을 취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ㆍ세 가지ㆍ네 가지를 취하기도 한다.1) 그래서 뒤에 설한 것이다.
즉 경계대상이 결정적인 것이면 작용에 뒤섞임이 없어 그 특성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서 [앞의 5근을]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계대상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작용에 뒤섞임이 있어 그 특성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서 [의근을] 뒤에 설하게 된 것이다.
[본송에서] 말한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이다’에서, [제1구의] ‘앞의’라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5근 가운데 앞의 4근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이다. 그래서 먼저 설한 것이다.
그러나 신근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으니, 대종과 소조색 두 가지 모두를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뒤에 설한 것이니, 혹 어떤 경우 신근은 오로지 대종만을 취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신근은 오로지 소조색 만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어떤 경우 신근은 두 가지 모두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신식(身識)은 매우 다양하여 다섯 가지의 촉(觸)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4대종과 미끄러움 등 [일곱 가지 소조촉]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신식은 매우 다양하여 열한 가지의 촉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도 하였다.
‘그 밖의 것’이란 앞의 4근(안ㆍ이ㆍ비ㆍ설근)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상응하는 바대로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거나 신속하거나 분명하거나 하니, 그렇기 때문에 앞에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안근과 이근은 멀리 있는 경계를 취하기 때문에 [비ㆍ설의] 2근보다 먼저 설한 것이고,
2근(안근과 이근) 중에서도 안근의 작용이 더욱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으로,
멀리 있는 숲에 바람이 몰아치면 그것이 요동하는 것은 바로 볼 수 있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의 작용이 보다 신속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종이나 북을 치는 것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그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근과 설근의 작용은 다 같이 멀리 있는 경계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비근을 먼저 설한 것은 그 작용이 신속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향기롭고도 맛있는 온갖 음식을 마주할 때 비근이 먼저 향을 맡고 그 후에 설근이 맛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바야흐로 대상이 결정적인 것과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거나 신속하거나 분명함에 근거하여 근의 순서를 분별하였다.
혹은 신체 가운데 그것이 근거하는 처소의 상하차별에 따라 근의 순서를 설하기도 한다.
전하는 설[傳說]에 따르면, 신체 중에서 안근은 가장 위쪽에 위치하며, 또한 얼굴에 드러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설하였다.
이근과 비근과 설근이 근거하는 곳은 점차 그 아래로 내려가며, 신근은 대개 그 아래에 위치한다.
그러나 의근의 경우 일정한 처소가 없으며, 5근에 의지(依止)하여 생겨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였다.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비근의 극미는 콧마루[鼻頞]에 머무니 어찌 안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설한 바와 같이 세 가지 근이 횡(橫)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화만(花鬘)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위치하는 곳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치상으로도 실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주(經主, 세친을 말함)의 뜻은 근이 근거하는 처소에 대해 일시 이와 같이 가설하려는 것이었으니, 경주가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그 밖의 다른 해석과도 통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송문(頌文)을 달리 지어보면 다음과 같다.
앞의 5근은 작용이 먼저 일어나는 것으로
5근의 작용 중 앞의 두 가지는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나머지 세 작용 중 앞의 두 가지는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이다.2)
6근 가운데 안 등 앞의 5근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해 먼저 작용을 일으키며, 의근은 그 후에 비로소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안 등의 5근을] 먼저 설한 것이다. 본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색 등의 5경을 5식이 먼저 받아들이며, 의식은 그 후에 알게 된다. 즉 자신의 식에 소의(所依)가 되고, 아울러 자신의 경계를 취하는 것, 이 모두가 바로 안근 등의 작용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5근 중에서도 앞의 2근(안ㆍ이근)은 그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며, 대상과 [직접적으로]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2근 중에서 안근의 작용은 이근보다 더욱 멀리까지 미치니, 사례를 인용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3) 그래서 이근보다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비(鼻) 등의 3근의 작용 중 앞의 두 가지가 보다 분명하기 때문에 비근을 먼저 설하게 된 것이며, 설근을 다음에, 신근을 마지막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비근은 향에 대해 능히 그 미세함까지도 취할 수 있지만 설근은 달거나 쓴 것에 대해 이와 같지 않으며,
또한 설근은 맛에 대해 능히 그 미세함까지도 취할 수 있지만 신근은 차고 따뜻함에 대해 이와 같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의 해석은 앞서 논설한 것과 다르지 않다.
|